이름의 발견
海東曆: 201년 5월 6일 · 시점: 강민
폐갱(廢坑) 안의 공기는 검은색이었다.
강민은 이틀을 꼬박 걸은 뒤에야 그걸 알았다. 이곳 어둠은 그냥 빛이 없는 곳이 아니었다. 오래 묵은 석탄 가루, 젖은 흙, 녹슨 궤도에서 떨어진 쇳가루, 이곳에서 기침하다 쓰러진 광부들의 땀 냄새가 한데 섞인 공기였다. 숨을 쉴 때마다 목 뒤에 검은 가루가 들러붙었고 혀끝이 썼다.
5월 4일 새벽에 협곡을 빠져나온 뒤로 누구도 멈추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무너진 도장, 스승의 주검, 콧등을 찢고 지나간 이하겸의 흑조갑, 가슴속에서 따로 뛰는 청염기관(靑炎機關). 모든 게 발목을 잡았지만 살아남은 사람은 걸어야 했다. 설무진(雪武陳)이 마지막에 쥐여 준 청동 열쇠가 속주머니에서 걸음마다 갈비뼈를 두드렸다.
첫날 밤은 산비탈의 무너진 수로 밑에서 잤다. 눈을 감은 시간은 30분도 안 됐다. 장무겸(張武謙)은 창대를 무릎에 걸친 채 입구를 지켰고, 단비호(段飛虎)는 나무뿌리 사이에서 주운 황동 조각으로 즉석 경보기 세 개를 만들었다.
“그거 울리면 뭐가 와?” 강민이 물었다.
“사람이 오면 딸랑. 짐승이 오면 딸랑딸랑. 흑영이 오면…….”
“오면?”
“아무 소리도 안 나요. 걔들은 발소리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소리 안 나면 더 무서워해야 돼요.”
“그럼 그걸 왜 만들어?”
“만들어 놓으면 제가 좀 덜 무서우니까요.”
무겸이 입구에서 낮게 웃음 같은 숨을 뱉었다. “그것도 쓸모다. 둬라.” 유서란(柳瑞蘭)은 강민의 흉갑 끈을 풀고 청염기관의 열을 살폈다.
그녀의 손끝이 닿을 때마다 강민은 이를 악물었다. 아파서만은 아니었다. 스승이 목숨을 태워 남긴 기관이 남의 손 아래에서 진찰받는다는 게 견딜 수 없이 낯설었다.
“누나, 괜찮아.”
말이 늘 그렇듯 몸보다 먼저 거짓말을 했다.
서란은 대답 대신 청동 진맥기 바늘을 손목에 댔다. 바늘이 두 번 떨리더니 보통 맥보다 훨씬 촘촘하게 흔들렸다. 서란이 고개를 숙여 표정을 감췄지만, 강민은 그 찌푸린 눈썹을 보았다.
“방금 표정 봤어.”
“무슨 표정.”
“안 좋을 때 하는 표정. 이틀 만에 누나 얼굴 읽는 법은 배웠어.”
“그런 건 도장에선 몰라도 되는 거였는데.”
“이제는 알아야지. 도망자한테는 눈빛 하나가 길이고 숨소리 하나가 경보잖아.”
서란이 진맥기를 거두며 짧게 숨을 내쉬었다. “맥이 두 개야. 네 거 하나, 그거 하나. 아직 서로 안 맞아.”
둘째 날 낮에는 가늘고 차가운 비가 내렸다. 산등성이 재를 씻어 내린 검은 빗물이 바위를 타고 흘러 바닥에 실개천을 만들었다. 일행은 그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 오래전 버려진 광산 입구를 찾았다. 반쯤 무너진 나무 간판에서 글자는 거의 지워졌는데 가운데 한 글자만 또렷했다.
坑.
“구덩이, 갱.” 비호가 읽었다.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란 뜻이요.”
강민은 그 글자를 보는 순간 가슴이 낮게 울렸다. 손바닥으로 흉갑을 눌렀다. 기계 심장이 자기 심장보다 조금 늦게, 혹은 조금 먼저 뛰었다. 두 박동이 아직 하나로 맞지 않은 채 서로를 쫓고 있었다.
“여기서 쉬어야 한다.”
무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거칠었다. 어깨 붕대 사이로 피가 다시 배어 나오고 있었다. 스승을 묻지도 못하고 도망쳐 온 사람이 제 상처를 돌볼 틈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강민은 그게 오히려 미안했다.
“형, 어깨 피 나요.”
“안다.”
“알면 좀 쉬세요.”
“그러니까 쉬자고 하는 거다. 내 어깨 말고 네 가슴 때문에.”
“갱도면 추격대가 들어오기 어렵겠죠.” 비호가 어둠 속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길도 좁고 궤도도 많고, 폭약 쓰면 저쪽도 같이 무너지니까요.”
열세 살 소년의 눈은 지쳐 있었지만 손가락은 이미 입구의 녹슨 궤도와 늘어진 쇠사슬, 깨진 압력계를 훑고 있었다. 세상이 그에게 슬퍼할 틈을 주지 않자, 비호는 슬픔을 공구처럼 접어 허리춤에 차 버린 것 같았다.
서란이 강민을 보았다. “안에 들어가면 공기가 나빠. 네 청염기관이 바깥 독기랑 어떻게 반응할지 아직 몰라.”
“밖에 있으면 추격대가 먼저 반응하겠지.”
서란은 더 말하지 않았다. 은침 하나를 꺼내 목 뒤 혈자리에 얕게 꽂자, 따끔한 통증과 함께 몸의 열이 조금 내려갔다. 그녀가 약낭에서 손톱만 한 둥근 황동 조각을 꺼냈다. 얇은 판 안쪽에 아주 작은 톱니와 붉은 선이 새겨져 있었다.
“이건 뭐야?”
“경보편. 아직 완성품은 아니야. 네 청염 진동이 폭주 직전까지 오르면 30초 전에 떨릴 거야. 정확하다고는 장담 못 해.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아.”
“30초면 충분해.”
“충분하지 않아. 하지만 네가 충분하게 만들겠지.”
서란이 흉갑 안쪽 가죽끈에 경보편을 단단히 묶었다. 차가운 쇠 하나가 더 뜨거운 쇠를 감시하게 된 셈이었다. 우스웠지만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누나가 만든 거야?”
“밤에 너 자는 척할 때.”
“자는 척한 거 알았어?”
“숨소리가 너무 고르면 자는 척이야. 진짜 자는 사람은 코를 골거든.”
그들은 갱도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 200미터는 넓었다. 예전에 궤도차가 오가던 주 통로였고, 천장에는 휘어진 철제 보강대가 일정하게 박혀 있었다. 안으로 갈수록 통로가 낮아졌다. 무겸이 창을 비스듬히 눕혀야 지나가는 곳도 있었고, 비호가 엎드려 기며 떨어진 톱니를 치워야 하는 곳도 있었다. 천장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철판을 두드렸다. 똑, 똑. 소리가 사방에서 되돌아와 여러 사람이 손톱으로 관을 두드리는 것처럼 들렸다.
“이 소리 진짜 싫어요.” 비호가 중얼거렸다.
“왜.”
“누가 따라오는 것 같잖아요.”
“진짜 따라오면 소리가 안 날 거다.” 무겸이 답했다. “흑영은 발소리를 안 낸다.”
“그 말이 더 무서운 거 알아요, 무겸 형?”
한참을 들어간 뒤 비호가 멈췄다.
“형, 여기요.”
작은 손전등 불빛이 왼쪽 벽을 비췄다. 오래된 피난 표시가 있었다. 아래를 가리키는 화살표와 붉은 글씨 ‘막장 7구역’. 비호가 불빛을 더 내리자 그 옆에 누군가 나중에 새긴 작은 글자가 드러났다.
숨는 자는 두 번 숨고, 쫓는 자는 한 번 무너진다.
“광부들 은신처였군.” 무겸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막장 7구역 끝은 바위벽처럼 보였지만, 비호가 녹슨 돌쩌귀를 찾아내자 얇은 철문이 삐걱 열렸다. 안쪽에 좁은 공동이 있었다. 바닥은 마른 흙이었고 천장으로 오래된 환기관이 지나갔다. 구석에는 부서진 굴착기 한 대와 녹슨 궤도차 두 대가 버려져 있었다.
벽 한쪽에 피로 그은 듯한 짧은 선 열여섯 개와 문장 하나가 있었다.
오늘도 올라가지 못했다.
강민은 그 문장을 오래 보았다.
“무슨 생각 해?” 서란이 물었다.
“갱도는 사람을 아래로 보내려고 판 건데, 사람은 그 안에서 위로 올라가려고 버텼구나 싶어서. 우리도 그렇잖아. 도장은 무너졌고 사부님은 떠나셨고 나는 땅속으로 숨었는데…… 그래도 숨을 쉬려면 언젠가 다시 올라가야 하잖아.”
“그래. 그러니까 일단 오늘은 쉬자. 올라가는 건 내일 생각하고.”
무겸은 입구를 등지고 앉았다. 서란은 공동 한가운데 천을 깔고 의공 도구를 펼쳤다. 비호는 굴착기로 달려가 뚜껑부터 열었다. 강민은 셋을 보다가 속주머니에서 청동 열쇠를 꺼냈다.
“형, 그 열쇠 계속 만지작거리는 거 알아요?” 비호가 굴착기 안에서 소리만 냈다.
“내가?”
“걸을 때도요. 주머니에 손 넣고 계속 굴려요. 딸깍딸깍 소리 다 들려요.”
“……몰랐어.”
“사부님도 생각할 때 손가락으로 탁자 두드리셨잖아요. 똑같아요.”
강민은 대답 대신 열쇠를 손바닥에 올렸다.
작은 열쇠였지만 이틀 동안 산 하나보다 무거웠다. 손잡이에는 닳은 무늬가 있었다. 처음엔 파도인 줄 알았다. 다시 보니 머리를 낮게 숙인 흰 짐승의 옆얼굴이었다. 손끝으로 그 눈 부분을 지나자 청염기관이 아주 작게 웅웅거렸다.
서란이 고개를 들었다. “또 울렸어?”
강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호가 굴착기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그 열쇠, 함이랑 맞을 것 같죠?”
강민은 대답하지 못했다. 청동 함은 비호의 등짐 깊은 곳에 있었다. 검령성이 불탄 그 밤 이후로 아무도 함을 열지 않았다. 열 틈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열면 정말 뭔가 끝나 버릴 것 같아서.” 강민이 털어놓았다. “사부님 살아 계실 때 닫혀 있던 걸 열면, 나는 이제 사부님 뒤에 숨은 제자가 아니게 될 것 같아.”
“그래도 사부님이 너한테 열쇠를 주셨잖아.” 서란이 말했다. “열라고 주신 거야. 숨기라고 주신 게 아니라.”
비호가 조심스럽게 등짐을 풀었다. 흙 묻은 천을 세 겹 걷어 내자 청동 함이 나왔다. 표면은 녹슬었는데 자물쇠 부분만 이상하게 매끈했다. 누가 오랫동안 그곳만 닦아 온 것처럼. 자물쇠 둘레에는 기계중원 양식과 해동 문양이 뒤섞인 얇은 선이 새겨져 있었다.
“이거 보통 자물쇠가 아니에요.” 비호가 숨을 죽였다. “열쇠 모양만 맞아서는 안 열려요. 안쪽 톱니가 손의 떨림까지 읽어요. 사부님이 형한테 직접 쥐여 주신 이유가 있었네요.”
“내가 열어야 한다는 거냐.”
“아마요. 아니면 함이 형을 열겠죠.”
농담 같은 말이었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강민은 함 앞에 무릎을 꿇었다. 바닥의 찬 기운이 무릎으로 올라왔다. 한 손으로 함을 누르고 다른 손으로 열쇠를 넣었다. 끝이 어딘가에서 막혔다. 힘을 주려다 멈췄다.
“맞는 문은 힘으로 여는 게 아니다. 네 숨을 문 쪽으로 맞추는 거다.” 강민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사부님이 늘 그러셨어요.”
눈을 감고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흙냄새, 석탄 가루, 서란의 약초 냄새, 무겸의 창에 밴 기름, 비호 손가락의 황동 냄새가 한꺼번에 들어왔다. 열쇠의 냉기가 손끝에서 단전까지 내려갔다. 힘을 밀어 넣지 않고 오히려 낮췄다. 청염기관의 박동과 손목 맥박을 천천히 맞췄다. 하나, 둘, 셋.
딸깍.
아주 작은 소리였다. 그런데 갱도를 흔드는 어떤 굉음보다 크게 들렸다. 뚜껑이 조금 들리며 오래 갇혀 있던 공기가 빠져나왔다. 쇠와 종이, 마른 피 같은 냄새가 퍼졌다. 서란이 입술을 다물었고, 무겸은 창을 고쳐 쥐었다. 비호는 손전등을 함 안으로 비추려다 손을 내렸다.
“형이 먼저 봐요.”
강민이 뚜껑을 열었다.
맨 위에는 낡은 도복 한 벌이 접혀 있었다. 검령성 제자복과 비슷했지만 소매 끝에 흰 실로 작은 구름무늬가 수놓여 있었다. 열 살 남짓한 아이가 입을 만한 크기였다. 들어 올리자 천이 바스러질 것 같았는데, 왼쪽 가슴 부분만 단단하게 덧대어져 있었다. 그 둥근 덧댐 안쪽에서 푸른빛이 한 번 스쳤다가 사라졌다.
“방금 빛났어.” 비호가 속삭였다.
“나도 봤다.”
그 아래에 부러진 단검이 있었다. 검신이 절반쯤 사라졌고 손잡이에는 타다 남은 흰 끈이 감겨 있었다.
“전장용은 아니다.” 무겸이 낮게 말했다. “의식에 쓰는 칼에 가깝군.”
“그런데 부러진 면이 이상해요.” 비호가 고개를 기울였다. “잘린 게 아니라 안에서 압력이 터지면서 부러졌어요. 형 청염이 부품을 비틀 때랑 비슷해요.”
“형 거랑 비슷하다고?” 서란이 비호를 보았다.
“네. 칼날 안쪽 금속이 바깥으로 벌어져 있어요. 누가 이 칼에 너무 센 기운을 넣었거나, 이 칼이 뭔가를 막다가 버티지 못한 거예요.”
“막다가.” 무겸이 그 말을 되뇌었다. “누군가를 지키다 부러진 칼일 수도 있겠군.”
강민은 단검을 오래 보지 못하고 내려놓았다. 그 작은 쇳조각에서도 자기와 닮은 부서짐이 느껴졌다.
다음은 빛바랜 그림 한 장이었다. 두꺼운 종이 가장자리가 검게 타 있었다. 손끝이 떨리는 걸 감출 수 없었다.
그림 속에는 젊은 설무진이 있었다. 지금보다 훨씬 곧고 매서운 눈, 주름 없는 눈가, 뒤로 단정히 묶은 검은 머리. 그래도 표정은 강민이 알던 스승과 같았다. 무언가를 지키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 옆에 낯선 부부가 서 있었다. 키 큰 남자와, 아이를 품에 안은 여자. 그런데 두 사람의 얼굴만 불에 그을려 지워져 있었다. 정확히 얼굴만.
“지운 건가.” 강민의 목소리가 자기 귀에도 낯설었다.
서란이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아니면 지켜낸 걸 수도 있어. 얼굴이 남아 있으면 누군가 찾아낼 테니까.”
위로였는데 위로보다 더 아팠다. 지워진 것과 지켜진 것이 똑같은 모양으로 남아 있었다. 강민은 그림 속 아이를 보았다. 얼굴은 흐렸지만 작은 주먹 하나가 포대기 밖으로 나와 꽉 쥐어져 있었다. 무언가를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그 아기…….” 비호가 말을 꺼냈다가 삼켰다.
“말해도 돼.”
“아니에요. 형이 먼저 알아야 할 것 같아요.”
함 맨 아래에는 두루마리가 있었다. 흰 비단에 가까운 천이 누렇게 바래 있었고, 황동 축에 감긴 봉인끈에 끊어진 흰 인장이 매달려 있었다. 인장 한가운데 어떤 글자의 획 일부가 남아 있었다. 그 획을 보는 순간 숨이 막혔다. 청염기관이 조금 늦게 뛰었다. 아니, 조금 먼저였다. 구분할 수 없었다.
“민아.” 서란이 낮게 불렀다.
늘 그렇게 부르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두루마리를 펼치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봉인끈을 풀자 두루마리가 천천히 펼쳐졌다. 첫 줄은 칼로 긁혀 지워져 있었다. 이름, 부모, 태어난 곳으로 보이는 칸들이 일부러 훼손되어 있었다. 핏줄을 증명할 만한 것은 거의 다 사라졌다.
그런데 가운데 한 줄만은 남아 있었다. 다른 줄보다 오히려 더 진했다. 누군가 그 줄만은 끝까지 지키려 한 것처럼.
두 글자였다.
강민은 그 두 글자를 눈으로만 읽었다. 평생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낯설지 않았다. 그게 더 무서웠다. 몸 안쪽 어딘가에 오래 잠겨 있던 톱니가 그 글자를 보는 순간 제자리를 찾아 맞물리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청염기관이 터질 듯 울렸다.
쿵.
공동의 공기가 한 번 접혔다 펴졌다. 시야가 푸르게 번졌다. 두루마리를 놓치지 않으려 손가락에 힘을 주었지만 손끝이 말을 듣지 않았다. 흉갑 안쪽 경보편이 아주 작게 떨렸다. 폭주 직전은 아니었다. 경고라기보다는 놀란 떨림이었다. 기계가 이름을 들은 것이다.
쿵.
두 번째 박동이 갱도 벽을 타고 퍼졌다. 구석의 궤도차가 덜컹거리며 2센티미터쯤 움직였다. 녹슨 굴착기 팔이 삐걱거렸다. 천장에 매달린 고장 난 광등 하나가 푸르게 깜빡였다.
“형…… 지금 형이 건드린 거 아니죠?” 비호의 손전등 불빛이 흔들렸다.
강민은 대답하지 못했다. 입술 사이로 다른 숨이 흘러나왔다. 누가 자기 폐를 빌려 숨 쉬는 것 같았다. 두루마리 위 두 글자가 살아 있는 것처럼 떨렸다. 획 하나하나가 먹이 아니라 아주 가는 쇠줄로 그어진 것처럼 보였고, 가슴속 기관과 같은 박자로 두드렸다.
쿵.
세 번째 박동에 무릎이 꺾였다. 콧등 흉터가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워졌다. 청염이 오른팔 혈관을 타고 손등까지 올라왔다. 푸른 불꽃은 밖으로 터지지 않고 살갗 밑에서 가는 실처럼 엉켰다. 이름이 핏속을 지나가고 있었다.
이게 나인가.
아니면 내가 죽은 뒤에 남을 죄의 이름인가.
“왜 말 안 해 주셨어요.” 강민이 바닥을 짚은 채 중얼거렸다. “왜 저를 강민이라고 부르셨어요. 왜 이걸 입으로 안 하시고 쇠 함이랑 탄 그림이랑 찢긴 호적으로만 남기셨어요.”
“강민아.”
“사부님이 무서워하신 게 뭐였을까요. 적이요? 황실이요? 기계중원이요? 아니면 이 이름 듣는 순간 무너질 저였을까요?”
그는 두 글자를 혀끝으로 밀어 올리려 했다. 작은 소리 하나만 내면 될 것 같았다. 첫 음절이 입 안에서 피어오르는 순간, 청염기관이 더 거칠게 울었다. 갱도 깊은 곳에서 오래 죽어 있던 보일러 배관들이 웅웅거리기 시작했다. 광산 전체가 그 소리를 기다린 것처럼.
서란의 손이 그의 입을 막았다. 부드럽지만 단호한 손이었다.
“지금은 아니야.”
서란은 그 이름을 묻지 않았다. 두루마리를 보았으면서도 소리 내 읽지 않았다.
“네 몸이 먼저 반응하고 있어. 마음이 따라가기 전에 몸이 먼저 그 이름을 받아들이면, 네가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니라 이름이 너를 끌고 갈 거야.”
강민이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는…… 봤어? 그 글자.”
“봤어.”
“왜 안 읽어?”
“그건 네 이름이니까. 네가 먼저 부르기 전에 내가 부르면 안 돼.” 서란이 그의 이마에 맺힌 땀을 손바닥으로 닦았다. “사부님도 그래서 안 부르신 거야. 아마.”
“형.” 비호가 작게 끼어들었다. “저는 못 봤어요. 진짜로. 손전등 껐었어요.”
“알아, 비호야.”
“그러니까 형이 언젠가 말해 줘요. 그때 들을게요.”
“발소리다.” 무겸이 입구 쪽에서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모두 숨을 멈췄다.
처음엔 물방울 소리와 구분되지 않았다. 곧 규칙이 드러났다. 쇠굽이 궤도를 밟는 소리. 사람 발보다 조금 무겁고 자동 목인보다 조금 조심스러운 박자. 협곡에서 떨쳐 낸 줄 알았던 추격대가 냄새를 맡고 내려오고 있었다.
비호가 재빨리 손전등을 껐다. 무겸은 창끝을 입구 쪽으로 낮게 겨눴고, 서란은 강민의 손목을 잡아 맥을 짚었다. 강민은 두루마리를 말아 쥐었다. 손바닥 땀에 비단이 미끄러졌다. 다시 보고 싶지 않으면서도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독이라 해도 스승이 남긴 마지막 진실이었다.
“함 닫아요.” 비호가 속삭였다. “지금 공명 때문에 주변 기계가 다 깨어나고 있어요. 저놈들이 감응 장치 갖고 있으면 여기 위치 정확히 잡아요.”
강민은 두루마리와 그림, 단검, 도복을 다시 넣으려다 손을 멈췄다. 도복 소매 안쪽 깊은 곳에 작은 주머니가 꿰매져 있었다. 일부러 숨긴 것이었다.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그래도 그는 주머니를 찢었다.
손가락 한 마디만 한 흰 금속편이 나왔다. 얇고 가벼웠다. 한쪽 면에 설무진의 필체로 짧은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이름은 칼보다 늦게 뽑아라.
“사부님 글씨야.” 강민의 목이 막혔다.
설명도 사과도 아니었다. 명령에 가까웠다. 그 짧은 문장이 어떤 긴 유언보다 스승다웠다. 설무진은 끝까지 이름을 칼처럼 보았다. 먼저 뽑으면 제 손을 베는 칼. 감당할 수 있을 때 뽑아야 하는 칼. 한 번 뽑으면 다시 칼집에 넣을 수 없는 칼.
금속편을 꽉 쥐자 얇은 모서리가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피가 났는지는 몰랐다. 청염의 열이 이미 손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형, 빨리요.” 비호의 속삭임이 갈라졌다.
강민이 함을 닫았다. 딸깍. 이번에도 작은 소리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언가 끝나는 소리가 아니라, 모든 것을 뒤로 미루는 소리였다.
마음속으로 그 두 글자를 다시 보았다.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대신 스승이 붙여 준 이름을 손으로 움켜쥐듯 속으로 되뇌었다.
‘나는 강민이다.’
거창한 다짐이 아니었다. 젖은 흙바닥에서 떨리는 손으로 겨우 붙든 이름 하나였다. 혼날 때도, 칭찬받을 때도, 밥 먹으라고 부를 때도, 검을 다시 들라고 할 때도 스승이 부르던 평범한 이름. 지금은 그 이름으로 버텨야 했다.
발소리가 공동 입구 20미터 앞에서 멈췄다. 기계중원 말투가 섞인 해동어가 들렸다.
“공명은 여기서 끊겼다. 안쪽에 있다.”
무겸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찌르기 직전의 자세였다. 서란은 강민의 흉갑에 손을 얹었다. 경보편은 조용했지만 청염기관은 여전히 무겁게 뛰었다. 비호는 굴착기 옆에서 작은 가압나사 세 개를 꺼냈다. 손은 떨렸지만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강민은 본국검(本國劍) 손잡이를 쥐었다. 검신 안쪽 작은 실린더가 낮게 돌았다. 검자루 틈으로 푸른 불꽃이 새어 나오려 했다. 그는 힘으로 누르지 않았다. 이름을 누르듯 불도 눌렀다. 터뜨리지 않고 감쌌다. 하나, 둘, 셋.
입구 쪽 어둠에서 작은 쇠구슬 하나가 굴러 들어왔다.
“엎드려!”
서란이 강민의 목덜미를 눌렀고 비호가 굴착기 뒤로 몸을 던졌다. 구슬이 터졌다. 소리는 크지 않았다. 대신 흰 연기가 뱀처럼 퍼졌다.
“석회 독연이야. 들이마시면 폐 안에서 굳어!” 서란이 약낭을 찢어 젖은 천을 꺼냈다. “입 막아!”
독연 속으로 추격자 둘이 들어왔다. 완전한 자동 목인이 아니었다. 사람 몸에 기계 관절을 덧댄 자들이었다. 눈가에 검은 렌즈가 박혀 있었고 턱 밑에 작은 배기관이 붙어 있었다. 하나는 갈고리 칼을 낮게 들었고, 다른 하나는 길쭉한 감응침을 들었다. 침 끝이 푸르게 떨렸다.
“저 침, 내 가슴을 찾고 있어.” 강민이 천 너머로 말했다.
무겸의 창이 먼저 뻗었다. 좁은 입구에서 긴 창은 약점이 아니라 벽이 되었다. 첫 추격자의 갈고리 칼이 창대에 걸렸다.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갱도를 찢었다. 다친 어깨가 다시 벌어져 피가 팔을 타고 흘렀지만, 그의 발은 땅에 박힌 말뚝처럼 꿈쩍하지 않았다.
“비호!”
“갑니다!”
가압나사 세 개가 궤도 틈으로 굴러가 추격자 발목 아래서 동시에 터졌다. 살을 찢는 폭발이 아니라 관절 축을 어긋나게 하는 짧고 날카로운 충격이었다. 갈고리 칼을 든 자의 무릎이 반대로 꺾였다. 그는 비명 대신 턱 밑 배기관으로 쉭쉭 증기만 뿜었다. 그 소리가 사람의 신음보다 더 소름 끼쳤다.
감응침을 든 자가 창을 피해 옆으로 파고들었다. 강민이 검을 뽑았다. 푸른 선 하나가 어둠을 갈랐다. 침 끝이 그의 가슴을 향했고, 청염기관이 다시 뛰었다.
다 태워 버리고 싶었다. 스승을 죽인 자들과 닮은 기계 관절, 이름을 쫓는 침, 자기 몸을 물건처럼 찾아내는 저 차가운 움직임을 전부 녹여 버리고 싶었다.
이름은 칼보다 늦게 뽑아라.
“그럼 불도 늦게 뽑아야지.” 그가 이를 악물었다.
강민은 청염을 검 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검 안쪽 실린더에 묶었다. 본국검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한 걸음 비켜서며 손목을 틀자 감응침이 흉갑을 스치고 지나갔다. 2센티미터 차이였다. 동시에 검등으로 적의 팔꿈치 관절을 쳤다. 불꽃이 밖으로 터지는 대신 검등 안에서 짧게 울렸다. 관절 축이 안쪽에서 부서지는 소리가 났고, 적의 팔이 힘없이 떨어졌다.
그는 베지 않았다.
자비여서가 아니었다. 지금 베기 시작하면 멈출 자신이 없었다. 그의 분노는 아직 칼이 아니라 폭주에 가까웠다. 무엇을 할 수 있는지보다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먼저 배워야 했다.
서란이 뒤에서 은침 두 개를 던졌다. 침이 독연을 가르고 추격자의 목 뒤 기계 기맥에 박혔다. 몸이 경련했다. 무겸이 창대로 가슴을 밀어 입구 밖으로 내던졌다.
쓰러진 자들의 쇳소리 너머로 더 많은 발소리가 다가왔다.
“많아.” 무겸이 짧게 말했다.
비호가 굴착기 아래를 뒤지다 외쳤다. “여기 수직 환기갱 있어요! 사다리는 썩었는데 궤도차 연결 쇠사슬 걸면 내려갈 수 있어요. 아래 공기가 움직여요. 막힌 길 아니에요!”
“얼마나 깊어?”
“몰라요. 적어도 30미터는 넘어요. 떨어지면 끝이에요.”
“쫓기다 여기서 끝나는 것보단 낫지.”
“오라버니, 지금 바로 내려가요?” 서란이 물었다.
“저놈들 한 번 더 밀어내고 간다. 내려가서 사슬 세 번 당기면 따라와라. 안 당기면 기다리지 말고 다른 길 찾아라.”
“그런 말 하지 마요.” 강민이 그를 보았다. “형이 안 당기면 제가 내려가서 찾을 거예요.”
무겸이 대답 대신 창끝을 들어 입구를 겨눴다. 강민은 청동 함을 등짐에 넣었다. 두루마리가 등에 닿지도 않는데 그 두 글자가 등뼈를 누르는 것 같았다. 서란은 독연이 더 번지기 전에 젖은 천을 모두에게 다시 나눠 주었다. 비호는 쇠사슬 한쪽을 굴착기 축에 감고 다른 쪽을 환기갱으로 던졌다. 한참 뒤에야 딸그랑 소리가 올라왔다.
“깊네.” 비호가 침을 삼켰다.
“누가 먼저 가?” 강민이 사슬을 잡았다.
“제가요. 제일 가벼우니까요.” 비호가 손을 들었다.
“아니. 넌 마지막이다.” 무겸이 잘랐다. “위에서 축에 나사 박고 내려와야 하니까. 아래는 내가 먼저 본다.”
“무겸 형 어깨로 사슬 타면 상처 다 터져요.”
“터지는 건 꿰매면 된다. 아래 뭐가 있는지 모르는 게 더 위험하다.”
아래에서 바람이 올라왔다. 차갑지 않았다. 뜨겁고 눅눅했다. 석탄, 기름, 사람의 땀, 먼 곳에서 거대한 보일러가 쉬지 않고 돌 때 나는 쇠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이 냄새…….” 강민이 중얼거렸다. “버려진 광산 냄새가 아니에요. 아래에 뭔가 살아 있어요. 굴뚝이든, 사람이든.”
그때 환기갱 깊은 곳에서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올라왔다.
탕. 탕탕. 탕.
“광부 신호예요.” 비호의 눈이 커졌다. “옛날 방식인데…… 누가 아래서 치고 있어요.”
“뭐라고 하는 거냐.” 무겸이 입구를 보며 물었다.
비호가 숨을 죽이고 들었다. 신호가 되풀이되었다. 탕. 탕탕. 탕. 잠깐의 침묵. 그리고 더 낮은 곳에서 사람 목소리가 쇠관을 타고 올라왔다. 녹슨 관을 지나며 일그러져서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알 수 없었다.
“위에서 온 애들.”
모두 얼어붙었다.
“살고 싶으면, 숨을 들이마시지 마.”
그 순간 흉갑 안쪽 경보편이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폭주까지 30초. 추격대의 발소리는 위에서 가까워지고, 정체 모를 목소리는 아래에서 그들을 부르고 있었다.
“누나, 경보편이…….”
“알아. 숨 세. 지금부터 내가 세는 대로만 쉬어.”
강민은 청동 함의 끈을 한 번 더 조였다. 함 속에서, 아직 부르지 못한 이름이 등 뒤에서 조용히 뛰었다.
그리고 아래쪽 어둠이 먼저 숨을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