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비사의 손길
海東曆: 201년 5월 16일 · 스팀갱(蒸汽坑) 변두리 폐품장 · 시점: 단비호(段飛虎)
녹슨 톱니 하나가 단비호의 손톱 밑을 파고들었다.
비호는 소리를 삼켰다. 손끝에 피가 맺혔지만 입술만 한 번 비틀고 다시 작은 나사를 조였다. 울면 손이 흔들린다. 손이 흔들리면 도면이 틀어진다. 도면이 틀어지면 형 가슴속 푸른 기관이 다음번엔 멈추지 않을지도 모른다. 열세 살 견습생 앞에 놓인 황동판 한 장이 세상보다 무거웠다.
스팀갱의 밤은 석탄 가루와 폐유, 젖은 쇠, 지친 사람들의 숨 냄새가 엉겨 있었다. 폐품장 너머로 무너진 제7갱 입구가 벌어져 있었고, 광부들이 쌓은 작은 돌무더기들이 어둠 속에 낮게 솟아 있었다. 돌마다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감독관들의 장부보다 그 거친 돌들이 더 정확한 기록 같았다.
비호는 그 돌무더기를 볼 때마다 갈색 정비 노트를 더 세게 쥐었다. 며칠 전까지는 부품 소리만 들었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 사람도 부품처럼 망가진다는 걸 보았다. 닳아 없어지는 게 아니라, 닳아 없어지도록 내버려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냉각통이 아니야.” 비호가 혼잣말을 했다. “형 하나 살리는 거면서, 망가지기 전에 붙잡는 첫 번째 방법이야.”
그가 앉은 곳은 고물상 영감이 내준 찌그러진 작업 천막이었다. 기둥은 구부러진 레일 네 조각, 지붕은 그을린 방열판 여섯 장이 전부였다. 비가 오면 틈마다 검은 물이 샜고 바람이 불면 지붕 전체가 떨었다. 그래도 비호에게는 궁궐보다 나았다. 여기엔 버려진 부품이 있었고, 부품은 제대로 들여다보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작업대 위에는 세 가지가 펼쳐져 있었다. 설무진(雪武陳)이 남긴 낡은 정비 수첩, 유서란(柳瑞蘭)이 정리해 준 의공 대조표, 그리고 비호가 이틀 밤을 줄여 직접 두드려 만든 황동 대조표. 서란의 반듯한 글씨로 강민의 맥박, 청염기관(靑炎機關) 주변 열 반응, 떨림 변화가 적혀 있었다.
“단전 기준 떨림, 어제보다 빠름. 가슴 바깥 반응 불안정. 팔꿈치 쪽 남은 열, 늦게 빠짐.”
연필 끝을 깨물었다. 강민은 지금 숙사의 낡은 침상에서 자고 있었다. 숨 쉴 때마다 가슴 안쪽에서 낮은 쇳소리가 났고, 오른팔의 푸른 핏줄 무늬가 꺼졌다 켜졌다 했다. 형은 그 소리를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등을 돌리고 잤다. 그래도 비호는 들었다.
“형 웃는 소리보다 형 가슴 기계 소리가 더 잘 들려.” 비호가 중얼거렸다. “그게 싫어.”
정비사가 된다는 건 그런 일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기계처럼 봐야 하는 일. 하지만 기계처럼 보지 않으면 그 사람을 살릴 수 없었다.
수첩을 넘기자 사부의 글씨가 한 줄 보였다.
‘열을 막으려 들지 말 것. 열은 막히면 이를 세운다. 길을 내주고, 돌아오게 하라.’
“길을 내주고, 돌아오게 하라.” 비호가 따라 읽었다. “사부님은 진짜 말을 어렵게 하셔.”
살아 계실 때도 그랬다. 부품 고치는 법을 물으면 그게 왜 망가졌는지부터 말했고, 망가진 이유를 물으면 사람이 뭘 잘못 들었는지부터 물었다. 그땐 빙빙 돌린다고 투덜댔다. 지금 보니 사부가 남긴 말은 대부분 부품이 아니라 사람 얘기였다.
강민의 청염은 막을 수 없었다. 막으면 더 사나워졌다. 서란은 약으로 열을 달래고, 장무겸(張武謙)은 형이 넘어질 때 어깨를 받쳤다. 열이 빠져나갈 길을 만들고 폭주 직전의 압력을 돌려세우는 일은 비호 몫이었다. 아무도 열세 살에게 그 일을 맡기지 않았다. 비호가 스스로 공구함 맨 밑바닥에 넣어 두었다.
그날 저녁 무겸이 천막에 고개를 들이밀었었다.
“막내야, 기갑호 다리는 언제 되냐.”
“관절축 넷 중 하나가 문제예요. 새 거 구해야 해요.”
“돈은.”
“없죠.”
“그럼 어떻게 할 거냐.”
“일해서 벌어야죠. 고물상 영감님이 내일 가게 일 시켜 주신대요.”
무겸이 한참 비호를 보다가 품에서 동전 몇 닢을 꺼내 작업대에 올려놓았다. “경비 일 하고 받은 거다. 밥 사 먹어라. 부품 말고.”
“무겸 형도 밥 먹어야죠.”
“나는 하역장에서 얻어먹는다. 너는 여기서 아무것도 안 먹고 있잖냐.”
비호는 동전을 집지도 밀어내지도 못했다. 무겸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갔다.
작업대 한쪽에는 기갑호(機甲號) 다리에서 떼어 낸 관절축 네 개가 놓여 있었다. 검령성 탈출 때 무리했고, 제7갱 구조 때 또 한 번 과부하를 받았다. 한쪽 다리가 절면 탄 사람 무릎까지 흔들렸고, 배기구가 막히면 좁은 선실에 열기가 차 숨쉬기 어려웠다.
“너무 뜨거운 심장, 아직 좁은 통로, 무조건 앞으로만 가려는 성질.” 비호가 축을 하나씩 들어 보았다. “둘 다 형 닮아서 말을 안 들어.”
작은 망치 땅콩으로 관절축을 톡 두드렸다. 맑은 소리가 나야 했다. 세 번째 축에서 둔한 소리가 났다. 안에 금이 갔다는 뜻이었다. 혀를 차며 따로 빼 두었다. 새 부품이 필요했고, 문제는 돈이었다.
스팀갱에서 돈은 이상한 냄새가 났다. 광부들은 하루 종일 폐를 내주고 동전 몇 닢을 받았고, 감독관들은 숙소비와 장비 사용료라는 이름으로 그마저 다시 가져갔다. 고물상 영감은 그 사이에서 부러진 장비를 사들여 고쳐 팔았다.
처음엔 그 영감이 싫었다. 남의 불행 뒤에 남은 쇠로 돈 버는 사람 같았다. 사흘 같이 일해 보니 영감은 숫자 대신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었다. 부러진 곡괭이를 들고 오면 누구 것이었는지부터 물었고, 죽은 광부 가족이 찾아오면 쓸 만한 나사못 한 줌을 몰래 더 얹어 주었다.
그날 낮, 비호는 영감 가게에서 임시 수리공으로 일했다. 가게는 버려진 증기차 차체를 반으로 잘라 만든 좁은 공간이었다. 천장에 부러진 램프와 압력계가 매달렸고 바닥은 기름때로 미끄러웠다. 영감은 한쪽 눈에 확대경을 끼고 비호의 손을 지켜보았다.
“그 스패너는 안 맞아요.” 비호가 먼저 말했다.
“손도 안 댔는데 어떻게 아냐?”
“소리가 틀렸잖아요. 이 나사산은 제국 표준이 아니라 중원식이에요. 겉은 해동제국 물건인데 속나사가 반대 방향으로 물려 있어요. 억지로 돌리면 머리부터 나가요.”
영감이 잠시 말없이 있다가 스패너를 바꿔 건넸다. 비호는 고개도 들지 않고 받았다. 부서진 압력계를 열어 안쪽 얇은 스프링을 펴고, 휜 바늘을 불꽃에 살짝 달군 뒤 다시 맞췄다. 바늘이 영점 위에 딱 멈추자 영감 눈꺼풀이 움찔했다.
“네 나이에 이 소리 듣는 놈은 처음 본다.”
“칭찬이에요, 욕이에요?”
“둘 다다.”
영감이 허리춤에서 검은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물고기뼈 같은 것, 짧은 창날 같은 것. 그중 가장 무거운 걸 던졌다. 받는 순간 손목이 툭 꺾였다. 보기보다 훨씬 무거웠다.
“뒤 창고다. 팔 물건은 앞에 있고, 못 파는 물건은 뒤에 있다. 네 눈엔 뒤가 더 쓸모 있을 게다.”
“이렇게 쉽게 맡겨도 돼요?”
“쉽게 맡기는 거 아니다. 사흘 봤다. 고물 만지는 손은 두 종류다. 죽은 걸 뜯어 먹는 손, 죽은 걸 다시 일으키는 손. 넌 아직 어느 쪽인지 모른다. 그래서 주는 거다. 어느 쪽이 될지 창고가 먼저 알겠지.”
비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손바닥 위 열쇠가 차가웠다. 사부가 생전에 던져 주던 망치 손잡이와 닮은 차가움이었다.
뒤 창고 문을 열자 오래 묵은 먼지와 쇠 녹 냄새가 밀려 나왔다. 망가진 보일러, 반쯤 녹은 코테르(機核) 수납함, 증기 운반대, 부러진 자동 인형 팔, 출처 모를 황동 배관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대부분 쓸 수 없는 물건이었다.
“쓸 수 없는 물건 같은 건 없어.” 비호가 소매를 걷었다. “사람이 먼저 포기했을 뿐이지.”
몸집이 작다는 건 이럴 때 좋았다. 어른은 못 들어가는 틈으로 고양이처럼 파고들었다. 무릎과 팔꿈치에 먼지가 묻었고 이마에 거미줄이 걸렸다.
맨 안쪽, 무너진 방열판 뒤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보였다. 청염과는 달랐다. 차갑고 얇고, 아껴 쓰는 빛이었다.
방열판을 밀어내자 삐걱 소리와 함께 틈이 열렸다. 사람 머리만 한 둥근 장치가 누워 있었다. 겉은 녹투성이였지만 안쪽 구조는 놀랍도록 정밀했다. 도관 두 겹이 서로를 감싸며 나선으로 돌았고, 그 사이에 손톱보다 작은 방열판들이 비늘처럼 촘촘히 박혀 있었다. 지금 해동제국 냉각통에서는 볼 수 없는 구조였다.
“이중 나선 도관…….”
누구한테 배운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보는 순간 알았다. 한쪽 도관이 뜨거운 압력을 받고, 다른 쪽이 식은 압력을 되돌린다. 두 흐름은 닿지 않으면서 서로를 식힌다.
“막는 게 아니라 길을 내주고 돌아오게 하는 거야.” 비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사부님 문장이 쇠로 서 있네.”
품에 안으려다 무게에 주저앉았다. 이를 악물고 다시 살폈다. 표면 한쪽에 거의 지워진 각인이 있었다. ‘海東式 冷卻循環器 試作 二號’. 그 옆에 손톱으로 긁은 듯한 두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氷輪.
비호는 그 글자를 읽지 못했다. 한자는 대충 배웠지만 이 두 글자는 낯설었다. 그런데 눈을 뗄 수 없었다. 형 가슴의 열을 식힐 수 있는 무언가가 그 두 글자 안에 숨어 있는 것 같았다.
“영감님!”
밖에서 기침 소리가 났다. “창고 무너진다. 조용히 찾아라.”
“이거 얼마예요?”
“뭔데?”
“아마 제 인생에서 제일 비싼 폐품이요.”
영감이 등불을 들고 들어왔다. 이중 나선 도관을 보자 표정이 굳었다. 손가락으로 녹을 긁어 각인을 확인하고 한참 말없이 서 있었다.
“그건 팔 물건이 아니다.”
비호의 어깨가 내려앉았다. “안 파신다고요?”
“아니. 팔 수 없을 만큼 오래전에 값을 잃은 물건이란 뜻이다. 내 스승의 스승 때부터 굴러다녔다더군. 만드는 법도 고치는 법도 끊겼다. 다들 장식품이라고 하지.”
“장식품 아니에요.”
“그래. 네 눈은 그렇게 말하는군.”
영감이 비호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그을음 묻은 코, 며칠 못 자 붉어진 눈, 손톱 밑의 피와 기름.
“가져가라.”
“돈 없어요.”
“안다.”
“그럼 왜요?”
“물건은 쓰일 곳에서 쓰여야 물건이다. 죽은 물건을 산 물건 곁에 보내는 것도 고물상 일이지.”
고맙다는 말이 목에서 막혔다. 비호는 장치 앞에 두 손을 모았다. 절은 아니었다. 장인끼리 하는 인사에 가까웠다. 영감은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도관을 등에 지고 천막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호는 숙사에 먼저 들렀다. 강민이 침상에 걸터앉아 물을 마시고 있었다.
“형, 이거 봐요.”
“뭔데 그렇게 무거운 걸 지고 와.”
“형 가슴 식힐 거요. 아마도.”
강민이 도관을 들여다보았다. 손을 가까이 대자 녹 밑에서 아주 희미하게 차가운 기운이 올라왔다. 그의 가슴속 박동이 반 박자쯤 느려졌다.
“이상하다. 가까이 대니까 좀 편해.”
“그렇죠? 그렇죠!” 비호가 펄쩍 뛰었다. “제 눈이 맞았어요. 영감님은 장식품이래요.”
“너 잠은 언제 자?”
“이거 그리고 나서요.”
“그 말 어제도 했어.”
“어제는 진짜 그리려고 했고, 오늘은 진짜진짜예요.”
강민이 웃으며 비호 머리를 헝클었다. 그 손이 생각보다 뜨거웠다. 비호는 웃는 얼굴 그대로 형 손목 온도를 머릿속에 적었다.
그날 밤 비호는 잠을 잊었다. 이중 나선 도관을 작업대 한가운데 놓고 구조를 베껴 그렸다. 바깥 원, 안쪽 나선, 역류 방지판, 압력 분산 홈, 방열 비늘, 이음새의 미세한 경사까지. 연필심이 닳으면 칼로 깎았고, 손이 저리면 찬물에 담갔다가 다시 잡았다. 새벽 1시가 지나자 선들이 겹쳐 보였고, 2시쯤엔 귀에서 삐걱 소리가 났다.
서란이 천막 입구에 선 것도 몰랐다. 그녀가 들어와 작업대 가장자리에 약탕 그릇을 내려놓았다.
“먹어.”
비호가 겨우 고개를 들었다. “누나, 형은요?”
“잠들었어. 무겸 오라버니가 지키고 있어.”
“박동은요?”
“아까보다 조금 내려갔어. 네가 만든 임시 배기관 덕에 방 안 열이 빠졌거든.”
“조금이면 안 되는데.”
“조금씩 쌓이면 하루를 벌어. 하루가 쌓이면 일주일을 벌고.”
서란이 그의 손을 잡았다. 손끝은 차갑고 손바닥은 뜨거웠으며 손톱 밑은 피로 검었다. 그녀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비호야, 네 손도 네 몸이야.”
“알아요.”
“아니, 몰라. 장인들은 이상하게 자기 손을 도구로만 봐. 근데 손이 없으면 도구도 못 잡아.”
언제부턴가 비호는 자기 손을 손으로 여기지 않았다. 형의 열을 재고, 나사를 조이고, 압력을 계산하는 작은 공구 두 개 정도로 여겼다. 서란의 손이 손등을 덮자 그제야 통증이 밀려왔다. 손끝 상처가 욱신거렸고 손목이 뻣뻣했다.
서란이 붕대로 손가락을 감았다. “형 살리겠다는 마음은 좋아. 근데 네가 쓰러지면 강민이가 제일 먼저 무너져.”
“형은 제가 고쳐야 해요.”
“혼자서?”
비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비호야. 사람은 혼자 고치는 물건이 아니야. 의공사가 살피고, 정비사가 길을 내고, 무겸 오라버니가 시간을 벌고, 강민이는 그 사이에서 버티는 거야. 네가 혼자 다 하려고 하면 우린 네 옆에서 뭘 해야 할지 모르게 돼.”
비호가 눈을 내리깔았다. 도면 위에 선이 너무 많았다. 형의 열, 기갑호 다리, 일행 여비, 흑영의 추격, 스팀갱 사람들 눈물. 다 자기 손으로 붙잡으려 할수록 손가락 사이로 더 새어 나갔다.
“그럼 누나는 뭘 할 건데요?”
“네 도면에 사람 맥을 얹을 거야.”
서란이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강민의 맥진 기록이었다. 시간대별 변화와 약재 반응, 호흡 간격, 통증이 올라오는 자리까지 촘촘했다. 그녀가 그걸 도면 옆에 붙였다.
“네 냉각통이 너무 세면 강민이 몸이 놀라. 너무 약하면 청염이 비웃고 지나가. 그러니까 중간을 찾아야 해.”
“중간이라…….”
“살리는 손은 늘 중간을 찾아.”
비호는 노트 가장자리에 적었다. ‘살리는 손은 중간을 찾는다.’ 글씨가 삐뚤었다. 졸려서인지 마음 때문인지 몰랐다.
천막 밖에서 쇠가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스팀갱의 밤엔 늘 소리가 많았다. 먼 갱도 배기음, 숙소 기침 소리, 감독관 증기 마차 바퀴 소리. 방금 소리는 달랐다. 너무 가볍고 너무 일부러였다. 누군가 발끝으로 빈 통을 밀어 위치를 재는 소리였다.
서란이 손바닥으로 등불을 가렸다. 비호는 작업대 밑에서 작은 연막탄 세 개를 움켜쥐었다. 낮에 화약 찌꺼기와 젖은 석탄 가루를 섞어 만든 미완성품이었다.
“그거 터져?” 서란이 숨죽여 물었다.
“모르겠어요. 반반이요.”
“반이면 많네.”
밖에서 낮은 휘파람이 세 번 울렸다. 반대쪽 폐품더미 뒤에서 쇠붙이가 긁혔다.
“흑영(黑影)이에요.” 비호가 이를 악물었다.
검령성의 밤 이후 그들의 그림자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큰 줄기는 끊겼어도 잔가지는 남았다. 도망친 자, 돈 받고 추적을 이어 가는 자, 명령을 잃고도 습관처럼 칼을 움직이는 자.
서란이 세검을 뽑았다. 의공사의 검은 길지 않았다. 사람을 죽이기보다 살을 벌려 독을 빼고, 혈을 끊지 않게 찌르는 검이었다. 좁은 곳에서는 그 짧음이 오히려 날카로웠다.
“비호야, 뒤로.”
“싫어요.”
“지금은 말 들을 때야.”
“저 도면 가져가면 형 죽어요.”
서란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가 단단해졌다.
“그럼 도면도 살리고 너도 살린다.”
천막이 찢어졌다.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낮게 파고들었다. 손목에 톱니 단검이 붙어 있었다.
첫 합. 서란은 적의 손목을 직접 막지 않고 천막 기둥을 찔렀다. 기둥에 걸린 방열판이 떨어지며 적의 시야를 반쯤 가렸다.
둘째 합. 적이 몸을 낮춰 들어오자 서란이 발끝으로 작업대 다리를 차 비틀었다. 작업대가 밀리며 도면이 날아갈 듯 흔들렸다.
비호가 몸을 던져 도면을 눌렀다. 동시에 연막탄 하나를 적의 발밑으로 굴렸다.
퍽.
터지지 않았다. 젖은 석탄 가루만 사방으로 튀었다.
“망했다.”
그 순간 석탄 가루가 적의 증기 단검 배기구로 빨려 들어갔다. 톱니가 끼긱거리며 멈췄다.
“안 망했다!”
셋째 합. 서란의 세검이 적의 팔꿈치 안쪽을 스쳤다. 깊게 베지 않고 의체와 신경을 잇는 얇은 감응선만 끊었다. 적의 오른팔이 축 늘어졌다.
넷째 합. 사내가 왼손으로 비수를 꺼내려 하자 비호가 작은 표창을 던졌다. 표창은 사람이 아니라 천장에 매달린 낡은 압력계를 맞혔다. 압력계가 떨어져 사내의 왼손을 짓눌렀고 비수가 바닥으로 튕겨 나갔다.
서란이 사내 목덜미 옆 혈을 눌러 기절시켰다.
“안 죽여요?”
“여기서 시체 나오면 내일 감독관들이 광부들을 잡아가. 이 동네선 칼보다 뒤처리가 더 무서워.”
적은 하나가 아니었다. 천막 뒤로 둘이 더 들이쳤다. 하나는 창고 쪽, 하나는 작업대 위 도면 쪽이었다.
“누나, 오른쪽!”
비호가 작업대 위 기름병을 걷어찼다. 병이 바닥을 미끄러져 창고로 달리던 사내 발밑에서 깨졌다. 폐유가 번지며 사내가 균형을 잃었다. 서란은 그를 쫓지 않고 도면으로 달려드는 자에게 몸을 틀었다. 적의 칼이 서란의 어깨를 스쳤다. 붉은 선이 그어졌다.
비호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차갑게 끊겼다.
두 번째 연막탄을 쥐고, 이번엔 터뜨리지 않았다. 땅콩으로 금속 외피를 쳐서 찌그러뜨린 뒤 적의 발목 관절 사이로 밀어 넣었다. 적은 자동 보조 의족을 쓰고 있었다. 무릎이 아니라 발목, 힘줄이 아니라 압력판. 한눈에 구조가 읽혔다. 망치로 한 번 더 쳤다.
끼이익.
의족 발목이 잠겼다. 사내 몸이 앞으로 쏠렸다. 서란의 세검이 칼등을 눌러 떨어뜨렸고, 비호가 쇠집게로 칼을 멀리 밀어냈다.
“누나, 왼쪽 비워요!”
“알았어, 너는 아래!”
서란이 피할 자리를 만들면 비호가 기계를 막았고, 비호가 시야를 흐리면 서란이 혈을 찔렀다. 연습한 적 없는 합이었다. 강민을 지키겠다는 마음이 같은 쪽을 가리키자, 좁은 천막 안 모든 물건이 두 사람 사이의 신호가 되었다.
마지막 사내가 뒤에서 비호를 노렸다. 비호는 몰랐다. 그림자가 목덜미 위로 덮였다.
그때 천막 밖에서 무겸의 창대가 날아들어 사내의 배기장치를 후려쳤다. 무겸은 들어오지도 않고 입구를 막은 채 낮게 말했다.
“막내야, 뒤도 보면서 살아라.”
“무겸 형, 늦었잖아요!”
“살아 있으면 늦은 게 아니다.”
무겸이 쓰러진 자객 셋을 빠르게 묶었다. 그의 팔에도 붕대가 감겨 있었고, 검령성 상처는 아직 다 아물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무렇지 않게 창끝으로 바깥 어둠을 살폈다.
“더 있어요?”
“지금은 없다.”
서란이 그제야 어깨 피를 확인했다. 깊지 않았다. 비호가 하얗게 질려 달려왔다.
“누나, 피!”
“스쳤어.”
“스쳤는데 왜 빨개요!”
“피니까 빨갛지.”
“그런 농담은 제가 하는 거예요.”
서란이 낮게 웃었다. 아픈 티를 안 내려 했지만 입술 끝이 조금 떨렸다. 비호가 자기 손가락 붕대를 풀어 그녀 어깨에 감으려 했다. 붕대는 이미 기름과 먼지로 더러웠다. 서란은 말리려다 소년의 손이 심하게 떠는 걸 보고 그냥 두었다.
“비호야.”
“가만히 있어요.”
“네가 다치면 형보다 내가 먼저 울어.”
비호의 손이 멈췄다. 고개를 숙인 채 툴툴댔다.
“누나는 의공사잖아요. 의공사는 울면 안 되잖아요.”
“누나는 울어도 돼.”
그 말이 이상하게 가슴에 박혔다. 비호는 대답 대신 매듭을 더 단단히 묶었다. 그 문장은 나중에 황동 대조표 귀퉁이에 몰래 적어 두기로 했다. 형의 박동 수치 옆에. 살리는 사람들이 숫자로만 남으면 안 되니까.
천막은 엉망이었다. 방열판이 떨어지고 기름병이 깨지고 도면 한쪽엔 석탄 가루가 눌어붙었다. 그래도 이중 나선 도관은 무사했다. 그걸 확인하고 나서야 비호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무겸이 자객들을 끌고 나가 광부들 빈 창고에 묶어 두는 사이, 서란은 천막을 정리했다. 비호는 말없이 도면을 털었다. 여백에 검댕이 묻어 있었다. 지우려다 멈췄다.
“이것도 남겨 둘래요.”
“왜?” 서란이 물었다.
“이 도면은 깨끗한 종이에서 안 나왔잖아요. 폐품장 먼지, 누나 피, 제가 망친 연막탄, 무겸 형 창대. 그런 거 위에서 겨우 나왔어요. 그게 맞는 것 같아요.”
비호가 붉은 연필로 도면 오른쪽 아래 빈칸에 천천히 적었다.
‘2세대 냉각통 1차형. 목적: 청염 역류 늦추기. 원칙: 막지 말고 돌려보낼 것.’
잠시 망설이다 낮에 본 낯선 두 글자도 그 아래 옮겨 적었다.
‘다음 목표 — 빙륜(氷輪). 뜻은 나중에 알아낼 것.’
“빙륜이 뭐야?” 서란이 어깨 너머로 보았다.
“몰라요. 그냥…… 형 가슴이랑 이 차가운 도관 사이에 다리가 하나 더 필요할 것 같아서요. 그 이름 같아요.”
새벽 4시쯤, 비호는 완성한 1차 도면을 들고 숙사로 돌아갔다. 골목은 아직 어두웠다. 굴뚝에서 떨어진 검은 재가 눈처럼 흩날렸다. 고물상 영감이 가게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말없이 이중 나선 도관을 비호 등짐 위에 단단히 묶어 주었다. 거칠지만 정확한 손길이었다.
“무거울 거다.”
“알아요.”
“도망자는 가벼워야 산다.”
“정비사는 필요한 걸 들고 가야 살려요.”
영감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말은 잘한다.”
“사부님한테 배웠어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숨이 막혔다. 설무진이라는 이름이 목에 작은 톱니처럼 걸렸다. 영감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주머니에서 낡은 금속 패 하나를 꺼내 도관 끈 사이에 끼웠다.
“이 도관 만든 장인들이 쓰던 표식이다. 도공거리(刀工街) 쪽 물건이야. 거기 가면 이걸 알아보는 노인 하나쯤은 아직 남아 있을지 모르지.”
“도공거리요?”
“쇠는 불을 만나야 다시 말을 한다. 네 형 검도 그렇고 네 도관도 그렇다. 여기 스팀갱은 쇠를 묻는 곳이지, 다시 태어나게 하는 곳이 아니다.”
작고 납작한 패였다. 한쪽에 불꽃 닮은 망치 문양, 다른 쪽에 거의 지워진 글씨 ‘刀工街’. 비호는 그 이름을 노트에 적었다. 철로 전환기가 바뀔 때처럼 짧고 분명한 딸깍 소리가 머릿속에서 났다.
숙사로 돌아오자 강민은 아직 자고 있었다. 무겸은 문가에 앉아 졸았고, 서란은 붕대 감은 어깨로 약탕을 끓였다. 비호는 발끝으로 들어가 형 침상 곁에 도면을 펼쳤다.
형 얼굴은 며칠 사이 조금 말라 있었다. 콧등 흉터가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보였고, 숨을 내쉴 때마다 가슴 안쪽에서 낮은 마찰음이 났다.
손목에 손끝을 얹었다. 박동은 여전히 빨랐다. 그래도 이제 조금 덜 무서웠다.
“무서운 건 그대로야.” 비호가 형에게 들리지 않게 속삭였다. “근데 옆에 도면이 생겼고, 누나 맥진표가 생겼고, 무겸 형 창이랑 영감님 열쇠랑 사부님 수첩이 생겼어. 혼자 들기엔 너무 무거운데, 손이 여러 개면 들릴지도 몰라.”
도면 귀퉁이에 마지막으로 작은 글씨를 적었다.
‘형이 백 살까지 쓸 것.’
적고 나서 피식 웃었다. 백 살은 너무 터무니없는 숫자였다. 그래도 목표가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는 도면 옆에 엎드려 눈을 붙였다. 손엔 연필이 쥐여 있었다.
아침 햇빛이 스팀갱 매연을 뚫고 회색으로 들어왔다. 강민이 먼저 눈을 떴다. 한동안 천장을 보다가 침상 옆에 엎드린 비호와 펼쳐진 도면을 발견했다.
복잡한 나선과 압력선, 서란의 맥진 기호, 검댕, 피 묻은 엄지 자국이 뒤엉켜 있었다. 그 끝에 작은 글씨 하나가 붙어 있었다.
형이 백 살까지 쓸 것.
“이 녀석이 진짜…….”
강민은 웃으려 했지만 웃음이 목에 걸렸다. 조심스럽게 비호 손에서 연필을 빼내고 소년 어깨에 낡은 겉옷을 덮어 주었다.
“형, 깼어?” 비호가 눈도 못 뜨고 웅얼거렸다.
“더 자.”
“도면 봤어요?”
“봤어. 백 살은 좀 많다.”
“그럼 아흔아홉으로 고칠게요.”
그 순간 등짐 옆 금속 패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도공거리의 불꽃 망치 문양이었다.
강민이 그걸 집어 드는 순간, 침상 아래 기대 둔 휘어진 본국검(本國劍)이 가늘게 울었다.
소리는 한 번뿐이었다.
그 한 번이, 도공거리 쪽에서 울려오는 망치질처럼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