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점 · 강민 — 균열·낙인 단계

가라앉은 동맹의 첫 조각

第1部 · 話 17 · 검령성 · published

海東曆: 201년 6월 8일 · 시점: 강민

용진도(龍鎭渡)의 강은 낮에도 검었다. 산물과 바닷물이 부딪히는 하구라서만은 아니었다. 강바닥에 오래된 쇠가 누워 있었고, 거기서 천천히 새어 나온 검은 녹과 코테르(機核)의 푸른 잔열이 물을 흐리게 만들었다. 어부들은 그 물빛을 ‘쇠비늘’이라 불렀다. 햇빛이 조금만 기울어도 수면 아래서 거대한 비늘이 뒤집히듯 번쩍였고, 밤이면 강 한가운데가 짐승 등처럼 미세하게 들썩였다.

“외지 사람들은 풍랑이라 그래.” 늙은 어부가 말했다. “우린 알지. 저 밑에 배가 한 척 자고 있다는 걸.”

강민(剛民)은 이틀째 그 자리를 보고 있었다. 열흘 전만 해도 그는 검령성 잿더미와 협곡 바람만 등에 지고 달려온 사람이었다. 도공거리의 불과 용진도의 선상 싸움을 지나는 동안 숨 고를 틈 없이 앞으로만 밀려왔다. 왜 살아남았는지 묻는 대신 오늘 누굴 지켜야 하는지만 생각했다. 그런데 강바닥은 사람을 멈춰 세웠다. 물은 대답하지 않았고, 오래된 죄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제가 너무 빨리 왔나 봐요.” 강민이 중얼거렸다.

“무슨 소리냐?”

“아니에요. 그냥…… 여기 오니까 처음으로 발이 멈추네요.”

“저 아래지.” 늙은 어부가 장대를 거꾸로 세워 강 한가운데 소용돌이를 가리켰다.

이름은 구덕이었다. 오른쪽 귀는 젊을 때 수압에 터져 반쯤 먹먹했고, 왼손 새끼손가락은 그물에 끌려가 잃었다. 그는 그 상처를 내세우지 않았다. 손가락 셋으로 장대를 쥐고 물살 방향을 짚었다.

“물이 저기서만 거꾸로 돈다. 비 안 온 날에도, 봄가뭄에도. 우리 할아버지는 저 밑을 철고래 무덤이라 불렀지. 철고래가 숨 쉬면 그날은 그물이 찢어지고, 철고래가 꿈꾸면 강물에 푸른 기름이 뜬다고.”

“고래가 아니라 선체예요.” 단비호(段飛虎)가 눈을 빛냈다. “그것도 보통 배가 아니고 연구선에 가까울 거예요. 밑창 기관실이 두 겹이고 균형추가 좌우로 넓게 퍼진 형식이요. 물이 거꾸로 도는 건 선체 안에 아직 빈 공간이 남아서예요. 숨 쉬는 게 아니라 압력이 들락날락하는 거죠.”

구덕이 비호를 빤히 보다가 피식 웃었다. “열세 살짜리가 물귀신보다 말을 어렵게 하는구나.”

“칭찬이죠?”

“욕이다.”

비호는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지만 손은 멈추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내준 낡은 무쇠 솥이 앞에 뒤집혀 있었다. 잔칫날 생선 삶던 큰 솥이었다. 숯과 소금물 얼룩이 겹겹이 눌어붙었고 귀퉁이는 깨져 얇은 철판으로 덧대 있었다. 비호는 벌어진 틈을 황동판으로 메우고, 뱃전에서 뜯어낸 참나무 판재를 둥글게 휘어 바닥 테두리를 만들었다. 꼭대기엔 유서란(柳瑞蘭)의 약탕관에서 떼어 낸 작은 유리창을 박았고, 옆에는 장무겸(張武謙)이 순찰 장비에서 떼어 준 압력계를 달았다.

“이걸 타고 내려간다고?” 무겸이 물었다.

“타는 게 아니라 매달리는 거예요. 종 안에 공기를 가두고 내려보내면, 형은 그 안에서 숨 쉬고 바깥으로 손만 내밀어 선체를 확인하면 돼요. 오래는 못 있어도 겉을 훑고 물증 하나쯤 가져오는 건 돼요.”

“솥이다.”

“잠수 종이에요.”

“내 눈엔 솥이다.”

“무겸 형 눈엔 창도 그냥 긴 막대기겠죠.”

어부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짧았지만 필요한 웃음이었다. 이틀 동안 마을 전체가 긴장 속에서 움직였다.

“그물 더 필요하면 말해요. 작년 거 남았어요.” 한 아낙이 낡은 그물 뭉치를 안고 왔다.

“밧줄 사이에 덧대 주세요. 쓸리면 끊어져요.” 비호가 손짓했다.

“쇠고리는 이거면 되나?” 노인 하나가 녹슨 고리 꾸러미를 내밀었다.

“굵은 걸로 세 개만요. 나머지는 예비로.”

젊은 어부들은 강가에 굵은 말뚝 세 개를 박아 인양 틀을 세웠다. 무겸이 밧줄을 직접 당겨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버팀목 각도가 너무 서 있다. 당길 때 앞으로 꺾인다. 반 뼘만 눕혀라.”

“반 뼘이요?”

“그래. 사람 하나 목숨이 그 반 뼘에 달렸다.”

서란은 바닷바람이 덜 닿는 빈 창고에 화로를 피워 잠수병에 대비한 약을 달였다. 말린 도라지와 검은 해초, 냄새 지독한 민물조개 껍데기가 끓으며 창고 전체에 매캐한 향을 퍼뜨렸다.

“민아, 이리 와 봐.”

서란이 작은 은침으로 그의 손목 안쪽을 짚었다. 침 끝이 미세하게 떨릴 때마다 그녀의 눈이 좁아졌다.

“아래로 내려가면 수압이 가슴을 누를 거야. 네 청염기관이 그걸 바깥 공격으로 착각할 수 있어. 그러면 스스로 열을 올려 버틸 테고, 그 순간 종 안 공기가 빨리 상해. 절대 내공 억지로 끌어올리지 마. 차라리 숨을 줄여. 몸 말고 물이랑 같은 박자로 움직여.”

“물이랑 같은 박자?”

“네 심장이 기계라면, 기계도 주변 박자를 읽을 줄 알아야 해. 무조건 세게 도는 기관은 오래 못 버텨. 오늘 필요한 건 힘이 아니라 아끼는 거야.”

말투는 잔소리 같았지만 손끝이 조금 차가웠다. 그녀는 무서워하고 있었다. 그걸 감추려고 약재 이름과 맥 수치를 더 빨리 꺼내고 있을 뿐이었다. 강민은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누나라고 불러 온 사람이 자기 때문에 손끝을 떨 때, 그걸 정면으로 보는 건 검을 맞대는 것보다 어려웠다.

“다녀올게.”

“무사히 다녀와. 그게 명령이야.”

“의공사 명령은 거역하면 안 되지.”

서란은 웃지 않았다. 손바닥만 한 붉은 약낭을 그의 옷깃 안쪽에 단단히 묶어 주었다.

“공기 모자라면 이거 깨물어. 폐가 버티는 시간을 조금 늘려 줄 거야. 하지만 믿지는 마. 약은 시간만 벌어 줘. 돌아오는 건 네가 해야 해.”

무겸이 밧줄 끝을 들고 다가왔다.

“한 가지만 묻자. 아래서 뭘 보면 제일 겁나냐.”

강민이 잠깐 생각했다. “사람이요. 죽은 사람.”

“그럼 볼 각오를 하고 내려가라. 저 배가 그냥 가라앉았을 리 없다. 배가 가라앉을 땐 사람도 같이 가라앉는다.”

“형은 그런 거 많이 봤어요?”

“검령성에서 너도 봤다.” 무겸이 밧줄 매듭을 당겨 확인했다. “보는 건 피할 수 없다. 대신 보고 나서 뭘 할지는 고를 수 있다.”

“뭘 해야 하는데요?”

“올라와서 우리한테 말해라. 혼자 품고 있지 말고.”

강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호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그리고 다섯 번이요.”

“알았다니까.”

“열두 번째.”

말이 끝나자 하늘이 낮게 울었다. 먹구름 사이로 햇살이 사라지고 강 위에 찬 바람이 깔렸다. 어부들이 인양 틀에 붙었다. 비호가 압력계를 마지막으로 두드렸고, 무겸이 강민 허리에 굵은 안전줄을 묶었다. 줄은 세 겹이었다. 종을 붙들 줄, 강민 몸을 붙들 줄, 그리고 비호가 고집해서 덧붙인 줄.

“이 세 번째는 뭐야?”

“형이 멋대로 굴 때 끌어올릴 줄이요.”

“형.” 비호가 장난기 없이 낮게 불렀다. “안에서 이상한 거 봐도 욕심내지 말고 바로 신호 줘요. 세 번 당기면 정지, 네 번이면 올려 달라는 거. 다섯 번은—”

“위험.”

“알고 있네요.”

“어제부터 열 번 넘게 말했잖아.”

“그럼 열한 번째로 말할게요. 다섯 번이면 무조건 올라와요. 물증보다 형이 먼저예요.”

강민이 비호 머리를 가볍게 눌렀다. 비호는 귀찮다는 듯 손을 쳐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검령성을 떠난 뒤 비호의 웃음은 얇아졌다. 얇아진 만큼 오래 버티려는 웃음이었다. 잠수 종이 강 위로 밀려 나갔다. 뒤집힌 솥 안쪽에 강민이 몸을 낮추고 들어갔다. 위쪽 유리창으로 보이는 하늘은 손바닥만 했고, 어부들 그림자가 지날 때마다 그마저 어두워졌다. 비호가 바깥에서 마지막 고리를 잠갔다.

“내려!”

무겸의 외침과 함께 밧줄이 삐걱였다. 종이 강물에 닿는 순간 차가운 물이 테두리를 때렸다. 첫 흔들림은 배에 오른 듯 가벼웠다. 물이 종을 완전히 삼키자 세상이 한꺼번에 닫혔다. 소리는 둔해지고 빛은 푸르게 바뀌었고 공기는 갑자기 귀해졌다. 종 아랫부분으로 물이 일정 높이까지 차올랐다 멈췄다. 그 선 아래는 강물, 위는 갇힌 공기였다.

수면에서 멀어질수록 강은 조용해졌다. 물고기 한 마리 없었다. 수초는 쇳가루를 뒤집어쓴 머리칼처럼 바닥에 눌려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가끔 푸른 알갱이가 눈처럼 떠올랐다. 코테르 잔분이었다. 아주 오래된 것인데도 완전히 죽지 않은 빛이었다.

강민의 가슴이 그 빛에 반응했다.

쿵.

첫 박동은 평소와 같았다.

쿵.

두 번째에 한기가 따라왔다.

쿵.

세 번째에 숨이 조금 짧아졌다. 서란의 경고가 떠올랐다. 억지로 누르지 않았다. 누르는 것도 힘을 쓰는 일이었다. 검령성 새벽 보일러를 떠올렸다. 압력이 오르면 밸브를 닫는 게 아니라 아주 조금 틈을 열어 숨을 빼던 순간을.

“기다려.” 강민이 종 안에서 혼자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쇠벽에 부딪혀 둔하게 돌아왔다. “지금은 타오를 때가 아니야.”

박동이 조금 느려졌다.

“그래. 그렇게.”

강민은 놀랐다. 청염기관은 늘 자기를 밀어붙이는 힘이었다. 더 빨리, 더 뜨겁게, 더 깊은 데서 뭔가를 끌어올리려 했다. 지금은 달랐다. 기관이 주변 압력을 읽고 있었다. 물의 무게와 종 안 공기, 자기 숨과 맥을 한데 재듯 스스로 박자를 낮추고 있었다. 기계 심장이 처음으로 주인을 지키는 법을 배우는 것 같았다.

바닥이 보였다.

처음엔 검은 둔덕 같았다. 종이 더 내려가자 선이 드러났다. 산이 아니라 선체였다. 뻘에 반쯤 잠긴 거대한 배의 옆구리가 강바닥을 가로질러 누워 있었다. 철판은 갈라지고 갑판 나무는 대부분 썩어 없어졌지만 뼈대는 버티고 있었다. 뱃머리는 물살에 깎여 알아볼 수 없었고, 선미 쪽에 찢어진 굴뚝 두 개가 비스듬히 솟았다. 굴뚝 안쪽에서 미약한 푸른빛이 새어 나왔다.

강민이 밧줄을 세 번 당겼다. 정지.

종이 선체 옆에 매달린 채 느리게 흔들렸다. 강민은 몸을 낮추고 차가운 물에 팔을 넣었다. 손끝이 뻘을 헤치자 쇳가루와 진흙이 검은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선체 표면을 더듬었다. 미끄러웠고 날카로운 균열이 곳곳에 있었다. 균열 사이에 손가락을 넣자 이상한 감촉이 닿았다.

칼자국이었다.

여러 방향에서 찍힌 상처였다. 안에서 밖으로 뚫린 자국, 밖에서 안으로 파고든 자국, 열에 녹았다가 다시 굳은 가장자리. 폭풍에 뒤집힌 배가 아니었다. 누군가 이 배에 올라탔고, 누군가 안에서 버텼다. 마지막엔 배 전체를 가라앉힐 만큼 큰 폭발이 있었다.

손목에 묶은 짧은 갈고리를 걸어 찢어진 틈을 벌렸다. 안쪽에서 작은 공기방울 몇 개가 올라왔다. 200년 동안 갇혀 있던 마지막 숨 같았다. 유리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다.

시간이 멈춰 있었다. 책상 하나가 비스듬히 천장에 기대 있었다. 엎어진 찻잔은 깨지지 않았지만 안에 차 대신 검은 진흙이 가득했다. 벽에는 연구복 같은 천 조각들이 실처럼 삭아 걸려 있었다. 한쪽 벽에 사람 키만 한 황동판이 붙어 있었는데 글자 대부분이 녹에 먹혔다. 가운데 한 줄만 남아 있었다. 물때가 여러 번 덮고 지나갔는데도 깊게 새긴 글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인류 강제 진화 계획]

강민은 숨을 멈췄다.

가슴속 기관이 차갑게 움츠러들었다. 강제. 진화. 계획. 세 단어가 물속에서도 또렷했다. 누군가 사람을 더 강하게 만들겠다며 사람을 설계하려 했다. 살리려던 게 아니었다. 전부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이해한 만큼만으로도 충분히 무거웠다.

황동판 아래쪽을 더듬었다. 손끝에 둥근 돌기가 걸렸다. 진흙을 닦아 내자 인장 두 개가 나란히 드러났다. 하나는 해동 황실의 백룡문(白龍紋)이었다. 폐갱에서 열었던 청동 함 속 인장과 같은 줄기였다. 다른 하나는 흑철 톱니문, 기계중원의 문양이었다. 두 문양이 맞물려 하나의 원을 이루고 있었다.

적의 문장과 제국의 문장이 한 배의 심장부, 같은 쇠 위에 찍혀 있었다.

“이게 왜 같이 있어.” 강민이 이를 악물었다. “왜 같이 있냐고.”

기계중원은 적이라고 배웠다. 검령성을 불태운 흑영 뒤에 그들이 있었고, 사부 설무진(雪武陳)을 죽음으로 몬 칼날도 그쪽에서 왔다. 그런데 이 배는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다. 해동과 중원은 처음부터 원수가 아니었다. 언젠가 누군가는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 손으로 사람 몸에 들어갈 금지된 설계를 그렸다.

“강호에서 가장 무서운 건 적의 칼이 아니라 아군 이름으로 들어오는 칼이다.” 무겸이 언젠가 했던 말이 입에서 저절로 새어 나왔다.

황동판 밑에 작은 문서함이 있었다. 녹이 슬어 고리가 굳어 있었다. 본국검은 뽑지 않았다. 물속에서 검을 무리하게 쓰면 종이 흔들리고, 작은 충격에도 선체가 무너질 수 있었다. 대신 손끝에 아주 얇은 청염을 모았다. 불꽃이라기보다 푸른 실이었다. 고리 틈에 밀어 넣고 숨을 천천히 내쉬자 녹이 얼어붙듯 부서졌다. 고리가 열렸다.

안에 원통 하나가 있었다. 도자기와 황동을 섞어 만든 보존통이었다. 겉엔 방수 기름이 굳어 있었고 뚜껑에 다시 백룡문과 톱니문이 찍혀 있었다. 강민이 그걸 품에 넣는 순간, 선체 안쪽에서 낮은 떨림이 울렸다.

우우웅.

압력계 바늘이 흔들렸다. 배 안쪽, 더 깊은 곳에서 푸른빛이 맥박처럼 한 번 번졌다 사라졌다. 선체 중앙부였다. 기관실이나 연구실이 있었을 자리.

신호줄을 잡았다가 놓았다.

“물증보다 형이 먼저예요.” 비호 목소리를 흉내 내듯 중얼거렸다. “알아, 비호야. 근데 물증은 벌써 챙겼어.” 그런데도 한 걸음만 더 가야 할 것 같았다. 가슴속 기관이 느리게 뛰며 그쪽으로 그를 이끌었다.

밧줄을 두 번 당겼다. 조금 이동.

위에서 종이 아주 천천히 옆으로 밀렸다. 어부들 손이 물살을 읽고 있었다. 종이 선체 옆구리를 따라 움직이자 연구실 잔해가 드러났다. 둥근 유리관들이 깨진 채 흩어져 있었고, 녹슨 침상 같은 구조물이 벽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위에 가죽끈이 삭아 끊긴 자국만 남아 있었다. 강민은 오래 보지 않았다. 거기 뭐가 묶여 있었는지 상상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중앙 격벽 앞에서 이상한 점이 보였다.

격실 하나가 비어 있었다. 정확히는 비게 만들어져 있었다. 주변 쇠는 200년 물때를 두껍게 뒤집어썼는데, 그 격실 가장자리만 얇고 매끈했다. 칼이나 도끼로 뜯은 자국이 아니었다. 일정한 깊이와 압력으로 조심스럽게 도려낸 단면이었다. 손끝으로 훑자 물때가 거의 없었다. 쇠 냄새도 오래된 녹 냄새가 아니었다. 길어야 몇 해 전.

누군가 여기에 먼저 내려왔다. 그리고 배의 핵심만 가져갔다.

등골이 차가워졌다. 200년 동안 아무도 닿지 못했다던 강바닥이었다. 어부들도 저곳엔 그물을 던지지 않았다. 그런데 누군가는 이 어둠과 수압을 뚫고 내려와 봉인 격실을 열었다. 무인의 짓이 아니었다. 무인은 부순다. 쫓기는 자는 찢는다. 이 단면은 너무 깨끗했다. 기록을 다루는 손, 칼보다 작은 도구로 필요한 부분만 빼내는 손이었다.

격실 안엔 아무것도 없었다. 바닥에 붙은 작은 쇳조각 하나뿐이었다. 손톱보다 조금 컸고, 표면에 푸른 기름이 얇게 말라 있었다. 물속에서도 지워지지 않은 냄새가 있었다. 서란이 쓰는 약유와 달랐다. 더 차갑고 건조했고, 책장 사이에 오래 숨은 먹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 순간 종이 크게 기울었다. 어깨가 철벽에 부딪혔다. 위에서 당기던 힘이 사라지고 옆으로 끌리는 힘이 생겼다. 소용돌이가 방향을 바꾼 것이다. 종 바닥 테두리가 찢어진 철판에 걸렸다. 쇠 긁히는 소리가 물속에서 둔하게 울렸다. 압력계 바늘이 빠르게 올라갔다.

강민은 신호줄을 다섯 번 당겼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위에서 곧장 밧줄이 당겨졌다. 그런데 종이 올라가지 않았다. 걸린 테두리가 빠지지 않았다. 당길수록 더 기울었다. 공기층이 흔들리며 물이 무릎 위로 차올랐다.

본국검으로 철판을 자를까. 그 생각이 스치자마자 청염기관이 반응했다. 푸른 열이 올라오려 했다.

“오늘 필요한 건 힘이 아니라 아끼는 거야.” 서란의 말을 소리 내 되뇌었다. “아끼는 거야, 강민아.”

검을 뽑지 않았다.

손을 물속에 넣어 걸린 곳을 찾았다. 철판 모서리가 종의 나무 테두리를 물고 있었다. 손가락이 베였다. 피가 물속으로 퍼지다 푸른빛에 밀려 사라졌다. 이를 악물고 손목을 더 깊이 밀어 넣었다. 작은 틈이 닿았다. 기운을 아주 가늘게 모았다. 청염이 폭발이 아니라 쐐기가 되었다. 푸른 불꽃 한 줄기가 틈 속으로 들어가 나무를 태우지 않고 얼음처럼 오그라들게 했다. 나무가 순간 줄어들며 물린 곳에 여유가 생겼다.

“지금.”

물속에 갇힌 말은 아무에게도 닿지 않았다. 그런데 위에서 누군가 그의 박자를 읽은 듯 밧줄을 당겼다. 무겸이었다. 종이 거칠게 흔들리며 철판에서 빠져나왔다. 소용돌이가 다시 아래로 빨아당겼다. 강민은 한 손으로 품속 보존통과 쇳조각을 누르고, 다른 손으로 신호줄을 네 번 당겼다. 올려.

올라가는 길은 내려가는 길보다 길었다.

공기가 빠르게 탁해졌다. 귀가 먹먹해지고 눈앞에 검은 점이 떠올랐다. 약낭을 깨물까 했지만 턱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들이쉬는 대신 내쉬는 시간을 길게 만들었다. 청염기관이 다시 박자를 낮췄다. 쿵, 쿵, 쿵. 살아 있으려고 조금 덜 살아 있는 박자.

이 몸이 그냥 병기가 아니구나. 강민은 처음으로 그렇게 느꼈다. 스스로를 살리려고 애쓰는 장치였다.

수면 가까이 희미한 빛이 번졌다. 마지막 순간 그는 저 아래를 다시 보았다.

연구선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사람도 물살도 아니었다. 빈 격실 가장 깊은 곳, 도려낸 단면 사이에 남은 얇은 쇠판 하나가 늦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표면에 새겨진 글자 하나가 수면 빛을 받아 잠깐 떠올랐다.

天.

하늘 천. 그 아래 글자들은 물때와 깎아 낸 자국에 먹혀 보이지 않았다.

더 보려는 순간 종이 수면을 뚫고 올라왔다. 세상이 갑자기 소리로 가득 찼다. 어부들 고함, 밧줄 풀리는 소리, 울음인지 욕인지 모를 비호의 목소리, 이름을 부르는 서란의 목소리. 차가운 공기가 폐를 찢듯 들어왔다. 강민은 종 밖으로 끌려 나오자마자 갑판에 엎드려 물을 토했다.

“숨 쉬어, 민아. 천천히. 내 박자 봐.”

서란이 등을 받치고 있었다. 손바닥에서 따뜻한 기운이 흘러들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가슴 안쪽 기관이 느리게 정상 박자로 돌아왔다. 비호는 압력계를 붙든 채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다섯 번 당겼잖아요.”

“올라왔잖아.”

“그런 말장난 할 힘 있으면 괜찮다는 거죠?”

“조금은.”

“조금이면 누나한테 혼나요.”

“이미 혼나고 있는 거 같은데.”

“둘 다 조용히 해.” 서란의 눈매가 매서웠다. “지금 농담할 때 아니야.”

“밧줄 당긴 거 형이에요?” 강민이 숨을 고르며 무겸을 보았다. “제가 지금이라고 했을 때.”

“네 소리는 안 들렸다.” 무겸이 젖은 손바닥을 털었다. “줄이 한 번 느슨해지더군. 네가 뭔가 풀었다는 뜻이라고 봤다.”

“그걸 줄로 알아요?”

“창도 줄도 손에 쥐면 말을 한다. 너만 쇠랑 얘기하는 줄 알았냐.”

강민이 품에서 보존통과 작은 쇳조각을 꺼냈다.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그게 뭐냐, 젊은이.” 구덕이 젖은 손을 옷에 닦고 한 발 물러섰다.

“저 배에서 나온 거예요. 아마 저 배가 왜 가라앉았는지 적혀 있을 거예요.”

“나는 글을 못 읽어. 그래도 그게 고철이 아니라는 건 알겠다. 냄새가 달라.”

마을 창고로 옮긴 뒤 비호가 뚜껑을 열었다. 억지로 비틀지 않았다. 이음새를 먼저 말리고, 열에 닿으면 부풀어 오르는 방수 기름을 약한 화로 앞에서 천천히 녹였다. 그다음 가는 바늘 세 개를 동시에 꽂아 잠금 혀를 밀었다.

딸깍.

안에 젖지 않은 종이가 있었다. 정확히는 종이처럼 얇은 금속박이었다. 글자는 먹이 아니라 쇠에 직접 눌러 새긴 것이었다. 비호가 감탄을 삼키며 두 손으로 받쳤다. 서란은 약한 훈증을 피워 갑작스러운 공기 변화로 금속박이 갈라지는 걸 막았다. 무겸은 문가에 서서 창밖을 살폈다.

첫 줄은 강민이 물속에서 본 것과 같았다.

[인류 강제 진화 계획]

그 아래 더 작은 글자가 이어졌다.

[해동 백씨 연구단 · 기계중원 태사부 공동 감응 실험선]

창고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공동.” 무겸이 그 두 글자만 되뇌었다.

“이건 의공 기록 양식이 아니야.” 서란이 떨리는 숨을 골랐다. “치료 일지가 아니라 실험 운항 기록이야.”

“운항?”

“움직이는 연구실이었다는 거예요.” 비호가 금속박을 조심스럽게 넘겼다. “한곳에 두면 들킬 수 있으니까 강이랑 바다 따라 옮겨 다닌 거죠. 여기 보세요. 실험체라는 말은 없는데, 감응 대상이라는 말이 계속 나와요. 사람을 사람이라고 안 불렀어요.”

강민은 물속 연구실 벽의 끊어진 가죽끈을 떠올렸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금속박 마지막 부분은 많이 상해 있었다. 항해 목적지 일부만 남았는데, 한 글자만 또렷했다.

天.

“하늘 천.” 비호가 중얼거렸다. “뒤가 잘렸어요. 천으로 시작하는 항구인지, 시설인지, 봉인처인지 모르겠어요.”

“그 한 글자로는 부족하다.” 무겸이 말했다. “하지만 누가 이 배 핵심을 먼저 가져갔다면, 그자는 나머지 글자도 알고 있을 거다.”

“가장 깊은 격실이 비어 있었어요.” 강민이 쇳조각을 꺼냈다. “200년 전 흔적이 아니었어요. 단면이 깨끗했고 물때도 거의 없었어요.”

비호가 조각을 받자마자 표정이 바뀌었다. 장난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확대경으로 단면을 살피고 손톱 끝으로 가장자리를 긁었다. 아주 얇은 쇳가루가 떨어졌다.

“이거, 검이 아니에요.”

“확실하냐?”

“검이면 단면이 한 번에 죽어요. 힘 들어간 방향이 있고 찢긴 자국이 생겨요. 이건 아주 작은 날로 여러 번 돌려 깎았어요. 문서나 봉인판을 안 다치게 빼내는 방식이에요. 장인도 할 수는 있는데, 물속에서 이렇게까지 깔끔하게 하려면 장인보다는 기록 다루는 사람 쪽이에요. 학자요. 손이 아주 차분한 학자.”

창고 안 사람들의 시선이 서로를 스쳤다. 아무도 먼저 이름을 꺼내지 않았다. 그래도 이름은 이미 그들 사이에 와 있었다. 기계중원 밀사들과 닿아 있고, 황실 기록과 학술 장치를 다룰 줄 알며, 정보가 사람보다 먼저 움직인다는 걸 너무 잘 아는 자.

“조하륜(趙河輪).” 무겸이 마침내 입 밖에 냈다.

서란이 쇳조각에 남은 푸른 얼룩을 침 끝으로 긁어 냄새를 맡았다.

“약유가 아니야. 먹에 가까워. 그런데 의공원에서 쓰는 안정제 성분이 조금 섞였어. 물속에서 흔적이 오래 남게 일부러 섞은 것 같아.”

“흔적을 감추려던 게 아니라 남겼다고요?”

“남기려던 게 아니라, 감추는 법을 너무 믿은 사람의 실수겠지. 물은 대부분을 지우지만 전부는 못 지워.”

무겸이 창고 문턱에 기대 있다가 천천히 들어왔다. 젖은 창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이 배는 습격당했다. 안에 있던 자들이 다 깨끗한 피해자였다고도, 다 죄인이었다고도 못 한다. 연구자는 기록을 남겼고, 누구는 봉인하려 했고, 누구는 끝까지 실험을 붙들었겠지.”

시선이 금속박 위에서 멈췄다.

“그럼 이 배에서 죽은 이들은 죄인인가, 피해자인가.”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어부 중 한 여인이 조용히 손을 모았다. 며칠 전 밀수선에 끌려갈 뻔했던 젊은 어부의 어머니였다. 글은 못 읽어도, 사람을 쉽게 둘로 나눌 수 없다는 무겸의 말은 알아들었다. 창고 밖에서 강물이 말뚝을 때렸다. 퉁. 퉁. 오래된 배가 아직 어디선가 벽을 두드리는 소리 같았다.

강민은 금속박을 내려다보았다. 사부가 죽은 뒤 줄곧 적을 찾았다. 적을 찾으면 벨 수 있고, 베면 조금은 가벼워질 줄 알았다. 그런데 강바닥에서 올라온 건 적의 이름만이 아니었다. 아군의 인장도 함께 올라왔다. 백씨. 아직 제 입으로 삼키지도 못한 가문의 문장이 인류 강제 진화 계획이라는 글자와 나란히 있었다. 가슴을 손바닥으로 누르자 청염기관이 조용히 뛰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낮은 온도로만.

“강민아.” 서란이 그의 얼굴을 살폈다. “지금 무슨 생각 해?”

“백씨라는 글자. 내 가슴에 든 이게 이 계획에서 나온 거면…….”

“그럼?”

“그럼 나도 감응 대상이었던 거잖아. 사람이 아니라.”

“아니.” 서란이 단호하게 잘랐다. “기록에 뭐라고 적혔든 넌 지금 여기서 숨 쉬고, 대답하고, 아까 물속에서 검을 안 뽑기로 고른 사람이야. 감응 대상은 그런 걸 못 골라.”

“모르겠어.”

모두가 그를 보았다.

“저 배 안 사람들이 죄인인지 피해자인지 지금 저는 몰라요. 하지만 누가 그들 죽음까지 뒤져서 필요한 것만 빼 갔다면, 그자는 산 사람도 그렇게 대할 거예요. 필요한 부분만 도려내고 나머지는 강바닥에 버리겠죠.”

그가 쇳조각을 비호에게 돌려주었다.

“그 이름을 찾아야 해요. 그리고 그자가 가져간 게 뭔지 알아내야 해요.”

“찾을게요.” 비호가 조각을 노트 사이에 끼웠다. “이 깎은 자국, 다른 데서 또 보면 바로 알아볼 수 있어요.”

“나는 이 먹 냄새를 기억해 둘게.” 서란이 약지로 금속박을 눌러 고정했다.

“나는 길을 본다.” 무겸이 창고 문을 닫았다. “이런 걸 가져간 자는 반드시 어디론가 옮겨야 한다. 옮기는 길엔 흔적이 남는다.”

“그럼 저는요?” 강민이 물었다.

“너는 살아 있어라.” 무겸이 짧게 답했다. “그게 제일 어렵다.” 밖에선 밤이 내려오고 있었다. 용진도의 등불이 하나씩 켜졌다. 축제 불빛과는 달리 조용한 등불이었다.

그날 밤 일행은 화롯가에 둘러앉아 물증을 정리했다. 비호는 압력계에 남은 바늘 자국을 노트에 옮겼고, 서란은 물속에서 강민의 맥이 얼마나 느려졌는지 따로 적었다. 무겸은 어부들에게 들은 옛 소문을 지도 가장자리에 표시했다. 강민은 금속박 말리는 일을 맡았다. 젖지 않은 금속박인데도 물속 냉기가 이상하게 오래 남아 있었다.

“누나, 아래서 이상한 걸 느꼈어.” 강민이 금속박을 뒤집으며 말했다. “가슴이 혼자서 박자를 낮췄어. 내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나도 맥으로 봤어. 물속에서 네 맥이 평소의 절반이었어.”

“위험한 거야?”

“모르겠어. 근데 처음으로 그 기관이 너를 살리는 쪽으로 움직인 거 같아.” 서란이 붓을 내려놓았다. “좋은 징조인지는 더 봐야 해.”

화롯불이 약해질 무렵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목적지가 적힌 마지막 장 표면에 물방울 하나가 맺혔다. 방금 닦은 장이었다. 물방울은 바깥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쇠 안쪽에서 밀려 나오듯 솟았다. 강민이 손을 뻗자 서란이 손목을 잡았다.

“기다려.”

물방울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흐릿하던 ‘天’ 자 아래, 물때에 가려져 있던 아주 가는 획 하나가 드러났다. 글자라기엔 너무 작고, 표식이라기엔 너무 정교했다. 비호가 확대경을 들이댔다.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건 길 표시예요.”

“어디로 가는?” 무겸이 물었다.

비호는 대답 대신 금속박 가장자리에서 손톱보다 작은 톱니 하나를 찾아냈다. 200년 동안 죽은 듯 붙어 있던 톱니가 화롯불 열을 받자 천천히 한 칸 움직였다.

딸깍.

“움직였어요.” 비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불 때문이냐?” 무겸이 물었다.

“열 받으면 풀리게 만든 거예요. 물속에선 절대 안 움직이고, 누가 건져서 말릴 때만.”

“그럼 이걸 만든 사람은 언젠가 누가 건져 올릴 거라고 생각했다는 거네.” 서란이 낮게 말했다.

딸깍.

금속박 빈칸 아래 숨겨진 바늘이 돌아섰다. 강 상류가 아니었다. 동해도 아니었다. 제국의 심장부, 수많은 성문과 감찰탑이 겹겹이 둘러싼 곳.

“황도(皇都)…….” 비호가 속삭였다.

강민이 고개를 들었다. 창고의 작은 창 너머로 아주 희미한 황동빛 하나가 밤하늘을 가르며 스쳐 갔다. 새인지 기계인지 불빛 젖은 물방울인지 알 수 없었다. 지나간 뒤 창틀 위에 작은 물자국 하나가 남았다.

하필이면 백룡문(白龍紋) 절반 모양이었다.

강민은 젖은 창틀을 보며 숨을 삼켰다.

강바닥에서 건져 올린 건 과거의 조각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조각은 이미 누군가의 손에서 막 돌아가기 시작한 태엽이었다.

— 話 17 終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