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도(皇都)의 두 얼굴
海東曆: 201년 6월 18일 · 시점: 강민
열흘 남짓 산길을 넘는 동안, 강민은 제국이 얼굴 하나만 가진 나라가 아니라는 걸 처음 알았다.
검령성 산바람은 거칠어도 사람 숨을 숨기지 않았고, 스팀갱의 검은 폐는 더러워도 분노가 그대로 보였고, 도공거리 불길은 위험해도 누가 뭘 벼리는지 알 수 있었다. 황도로 가는 길은 달랐다. 길은 점점 넓어지고 돌은 점점 반듯해졌다. 길가 초소마다 같은 높이의 압력계와 같은 폭의 황동 깃대가 서 있었다. 산비탈을 타고 내려온 수로는 모두 해룡성(海龍城)으로 흘렀고, 오가는 수레마다 황실의 청람 인장이 박혀 있었다.
“다 너무 반듯해요.” 강민이 중얼거렸다. “그래서 숨이 막혀요.”
일행은 용진도에서 건진 물증을 품에 넣고 새벽마다 짐을 꾸렸다. 해가 기울면 이름 없는 산장이나 닫힌 역참에서 몸을 눕혔다. 장무겸은 숙소에 들어가기 전 창문 수와 뒷문 위치부터 보았고, 단비호는 잠들어서도 공구함 손잡이에 손가락을 걸었다. 유서란은 하루 세 번 강민의 맥을 짚었다.
“또 빨라.” 서란이 손을 떼며 말했다.
“걸어서 그래.”
“어제도 그 말 했어. 그제도.”
검령성을 떠난 뒤 줄곧 가라앉던 청염기관(靑炎機關)의 박동이 해룡성에 가까워질수록 다시 거칠어지고 있었다.
“하루에 40킬로미터를 걸었어. 피곤해서 그런 거야.” 강민이 둘러댔다.
“짐수레 밑에 숨어서 반나절 웅크린 날도 있었지.” 무겸이 거들었다.
“그건 피로 맥이 아니야.” 서란이 고개를 저었다. “피곤하면 맥이 처져. 이건 누가 끌어당기는 맥이야.”
사흘째부터는 정말 피로가 아니었다. 멀리 평야 끝에 해룡성 외곽 감시탑이 보이자, 가슴속에서 쇠로 된 작은 새가 날개를 퍼덕이는 것 같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걸음에도 숨에도 맞지 않았다. 지평선 너머 보이지 않는 거대한 기계가 보낸 박자를 몸이 억지로 받아 적는 것 같았다.
“형, 멈춰 봐요.”
비호가 길가에 털썩 앉아 공구함을 열었다. 낡은 압력계 바늘을 떼어 작은 황동판 위에 얹고, 강민 손목에 실처럼 얇은 감응선을 감았다.
“지금 형 숨 쉬는 박자랑 가슴 박자가 달라요. 몸이 일부러 안 맞추는 게 아니라 바깥에서 뭔가 잡아당기는 거예요.”
“황도 쪽에서?” 무겸이 물었다.
비호가 대답 대신 황동판에 눈금을 그었다. 바늘이 북서쪽으로 미세하게 떨렸다. 그 끝에 해룡성이 있었다.
그날 오후, 낮은 구릉 위에서 마침내 황도를 보았다.
해룡성은 검령성처럼 산허리에 기댄 성이 아니었다. 평야 위에 누운 거대한 기계 용 같았다. 청람색 기와가 파도처럼 겹겹이 이어졌고 성벽은 세 겹이었다. 가장 바깥은 회색 석재와 철골로 쌓은 방어벽, 그 안쪽엔 증기 수로와 검문소가 톱니처럼 맞물려 있었다. 더 안쪽 귀족가와 상단 거리는 낮부터 푸른 기공등을 켜 두었고, 그 위로 황궁 처마가 층층이 떠올랐다.
한가운데 하늘을 찌르는 탑 하나가 서 있었다.
“청염 광탑(靑炎光塔)이다.” 무겸이 낮게 말했다.
탑은 불꽃이 아닌데 타고 있었다. 꼭대기에서 뿜어지는 청람빛이 연기처럼 흩어지지 않고 수만 개의 가는 선으로 갈라져 도성 전체의 배관과 기공등, 감응부와 방어 진법으로 흘러갔다. 성문이 열리고 닫히는 박자, 수로 물문이 들썩이는 간격, 감시탑 증기종이 낮게 우는 떨림까지 모두 같은 데서 나왔다.
그 박자가 강민의 가슴을 붙잡아 흔들었다.
강민이 한 걸음 물러섰다. 발밑이 내려앉는 것처럼 균형이 흔들렸다. 광탑에서 뻗은 청람빛 선들이 전부 자기 가슴으로 꽂히는 것 같았다. 숨을 들이마시자 갈비뼈 안쪽이 차갑게 조였다. 청염은 뜨거운 불인데 지금 박동은 얼음에 가까웠다. 심장이 타는 게 아니라 정교한 쇠틀에 끼워지는 기분이었다.
“강민아.”
서란이 팔을 붙잡았다. 이미 작은 약병 세 개를 꺼내 들고 있었다.
“황실 의공원에서 쓰던 완충 탕약이야. 마셔.”
쓰고 떫었다. 혀에 닿자마자 차가운 쇳가루 냄새가 올라왔다. 강민이 얼굴을 찡그렸다.
“이걸 하루 세 번?”
“너는 말대꾸할 때 박동이 더 빨라져.”
“누나, 그건 탕약이 맛없어서 그렇잖아.”
서란은 웃지 않았다. 왼쪽 가슴에 손바닥을 대고 한참 말없이 기다렸다. 탕약이 퍼지자 박동이 조금 낮아졌다. 완전히 가라앉지는 않았다. 해룡성은 멀리 있는데도 이미 강민을 알고 있는 것처럼 끈질기게 불렀다.
“광탑에 가까워질수록 더 심해질 거야. 네 몸이 도성 떨림에 붙잡히지 않게 내가 조절할게. 무리하면 바로 말해.”
“누나.”
“응.”
“저 도시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아. 그게 제일 싫어.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아서.”
검령성에서 사부 설무진이 숨기려 했던 것, 용진도 강바닥에서 건진 잃어버린 동맹의 잔해, 백룡문(白龍紋) 인장 조각. 그 조각들이 갑자기 하나의 선으로 이어졌다. 그 끝이 해룡성 안쪽 어딘가에 묶여 있었다.
“네 거야.” 서란이 그의 손을 꽉 쥐었다. “누가 부르든 네 몸은 네 거야. 내가 그걸 확인하는 사람이고.”
정면으로 들어가는 건 불가능했다. 성문마다 군졸과 자동병이 함께 서 있었고, 통행패가 있어도 세 번 검문을 받아야 했다.
“옛 군문 사람한테 북문 순찰조 근무표를 구했다.” 무겸이 종이를 펼쳤다. “하지만 그 길은 너무 밝다.”
“하수로는 어때요?” 비호가 물었다. “냄새는 참을 수 있어요.”
“광탑 하부 감응부에 걸릴 수 있어.” 서란이 고개를 저었다. “강민이 가슴이 거기 닿으면 바로 울려.”
“그럼 어디로 가.”
“남수문으로 들어가.”
서란이 해룡성 남쪽 수로를 가리켰다. 약재 수송선이 드나드는 작은 물문이 표시되어 있었다.
“황실 의공원에 들어가는 약재는 오래 검문 안 해. 말린 약초, 압축 증기병, 수술용 냉각유, 기공 침통. 시간 끌면 쉽게 상하거든. 나는 그 길을 잘 알아.”
“누나가 황실 의공원에 있었다는 말, 전에도 들었는데.” 강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나왔는지 물어봐도 돼?”
서란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바람이 지도를 넘기려 하자 손끝으로 가장자리를 눌렀다. 사람 살리려고 날카로워진 손, 상처보다 맥을 먼저 읽는 손이었다. 그런데 어떤 기억 앞에서는 조금 떨리는 손이었다.
“살리려고 들어갔는데, 어느 순간부터 누가 살 가치가 있는지 고르는 곳이 돼 있었어.”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강민도 더 묻지 않았다. 말로 꺼내는 순간 다시 피가 나는 상처가 있다.
해 질 무렵, 일행은 약재 상단 수송선에 숨었다. 말린 천궁과 감초 포대, 냉각병 든 나무 상자, 의공 침구 밀봉함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강민은 가장 안쪽 상자 사이에 앉았다. 약재 냄새와 젖은 나무 냄새가 섞였고, 배 바닥을 스치는 수로의 떨림이 가슴을 다시 건드렸다. 비호는 옆에서 작은 대조표를 꺼내 광탑에 가까워질 때마다 바늘이 얼마나 흔들리는지 적었다.
“이 정도면 지도 만들 수 있겠어요.”
“무슨 지도?”
“형 심장이 싫어하는 곳 지도요. 황도 안에서 형이 안 터지고 걸을 수 있는 길.”
강민이 피식 웃었다. 농담만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서란은 약으로, 비호는 눈금으로, 무겸은 길로. 모두가 각자 방식으로 그의 몸을 붙잡고 있었다.
“고마워, 비호야.”
“갑자기 왜 그래요. 무섭게.”
“내가 무너지면 너희 손까지 같이 부러질 것 같아서.”
“그럼 무너지지 마요. 간단하잖아요.”
남수문에 닿은 건 저녁 8시 40분 무렵이었다. 물문 위로 푸른 기공등이 줄지어 걸렸고, 자동병 두 기가 수면을 향해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배가 검문대에 닿자 쇠갈고리가 난간을 붙잡았다. 군졸 하나가 명부를 펼쳤고 다른 하나는 긴 감응침으로 약재 포대를 찔렀다. 침 끝이 강민이 숨은 상자에서 30센티미터도 안 되는 곳을 지나갔다. 청염기관이 그 쇠의 냉기를 느끼고 움찔했다. 강민은 숨을 멈췄다.
“황실 의공원 납품, 남부 약재창 삼십이 번.”
선주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군졸이 명부를 넘기다 서란이 내민 낡은 의공원 표찰을 보았다. 오래됐지만 진짜였다. 청람 유리판 안의 이름과 인장이 희미하게 살아 있었다. 군졸이 표찰을 감응등에 비추는 순간, 검문대 뒤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의공복을 입은 중년 사내였다. 한쪽 눈가에 오래된 화상 자국이 있었고 허리에 황실 의공원 침통을 차고 있었다. 그가 표찰을 보고, 곧장 서란의 얼굴을 보았다.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알아본 것이다.
그 짧은 침묵이 배 전체를 얼렸다. 무겸의 손이 상자 밑에 숨긴 창대로 움직였다. 비호가 입술을 깨물었다. 서란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도망자의 얼굴도 죄인의 얼굴도 아니었다. 오래전 떠난 곳에 다시 와서, 더는 돌아갈 수 없는 문 앞에 선 얼굴이었다.
중년 의공사가 명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약재 상하기 전에 지나가라.”
“의공사님, 이 표찰은—” 군졸이 미심쩍게 그를 보았다.
“진짜다. 내가 안다.”
그는 다시는 서란을 보지 않았다. 명부 한 귀퉁이에 통과 인장을 찍었다. 둔한 소리가 물문 아래 울렸다. 쇠갈고리가 풀리고 배가 천천히 황도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강민이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서란은 말없이 표찰을 품에 넣었다. 손가락이 아주 조금 떨리고 있었다.
“아는 분이야?” 강민이 속삭였다.
“같이 밤새운 적이 있는 사람.” 서란이 짧게 답했다. “오늘 일로 저 사람이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해룡성 안쪽 수로는 바깥보다 조용했다. 소음이 없는 게 아니라, 너무 많은 소음이 질서 있게 눌려 하나의 낮은 울림이 되어 있었다. 벽 안에서 증기 배관이 숨 쉬었고 수로 양쪽 창고마다 기공등이 일정한 간격으로 깜빡였다. 광탑 빛이 물 위에 비치자 수면 전체가 파랗게 갈라졌다.
“짐승 목구멍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아요.” 강민이 중얼거렸다. “이 도시는 먹이 삼킬 때도 예법을 지킬 것 같아요.”
그들이 숨어든 곳은 약재창 뒤편 낡은 객방이었다. 겉은 상단 임시 숙소였고, 안쪽 벽에 비상시 수로로 빠지는 좁은 문이 있었다. 무겸은 들어서자마자 문틀을 두드리고 창살을 살피고 지붕 사다리를 확인했다. 비호는 바닥에 엎드려 마루 밑 배관 굵기를 쟀다. 서란은 강민에게 두 번째 탕약을 먹였다.
“이 도시, 사람 사는 데 맞아요?” 비호가 중얼거렸다. “배관이 너무 반듯해요. 오히려 무서워요.”
“황도는 반듯한 걸 좋아한다.” 무겸이 답했다. “반듯하지 않은 사람도 반듯하게 세워 놓으려 하지.”
그 말뜻은 다음 날 저잣거리에서 분명해졌다.
새벽이 오기 전, 잠을 못 이룬 강민은 객방 지붕으로 올라갔다. 이곳 어둠은 위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성벽과 처마, 배관과 기공등 사이에서 만들어져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 있었다. 지붕 아래 골목으로 야간 순찰 자동병이 12분마다 지나갔다. 발목 관절의 쇳소리가 어제 비호가 그린 대조표의 붉은 선과 거의 같은 간격이었다.
“잠 안 자는 도시가 아니라 자는 척하는 법을 배운 도시네.” 그가 혼잣말을 했다.
광탑 빛은 밤이 깊을수록 선명했다. 청람빛 줄기가 보이지 않는 혈관처럼 구역마다 뻗었다. 어떤 선은 황궁으로, 어떤 선은 병영으로, 어떤 선은 의공원 뒤 낮은 굴뚝으로 이어졌다. 의공원 지붕 위에서 빛줄기 하나가 유난히 차갑게 떨렸다. 살리는 곳이 사람을 고르는 곳이 되었다는 서란의 말이 떠올랐다. 그건 그녀의 과거만이 아니라 이 도시 전체의 지금이었다.
아래에서 작은 기침 소리가 났다. 잠든 줄 알았던 비호가 사다리 끝에 앉아 있었다. 손에 갈색 정비 노트와 짧은 연필이 들려 있었다.
“형, 이 도시 이상해요. 다 똑같은 방향으로 움직여요. 노점상도, 군졸도, 물지게꾼도. 누가 북 치는 것도 아닌데 박자가 있어요. 형 가슴이 여기랑 맞물리는 게 무서운 건, 형만 이상해서가 아니에요. 여기가 먼저 이상한 거예요.”
강민이 한동안 말없이 있다가 비호 머리를 가볍게 헝클었다.
“그 말 누나한테도 해 줘. 내가 하면 괜히 걱정한다고 잔소리해.”
비호는 입을 삐죽이면서도 노트에 한 줄을 더 적었다.
「황도는 거대한 심장. 형은 그 심장이 잃어버린 박자일 가능성.」
강민은 그 문장을 훔쳐보고 웃으려 했지만 웃지 못했다. 너무 정확한 말은 농담이 되지 않았다.
“형도 그거 봤어요?” 비호가 노트를 덮었다. “방금 광탑 빛줄기 하나가 의공원 쪽으로 갈 때 한 번 끊겼다 이어졌어요.”
“봤어. 거기만 차가웠어.”
“누나가 있던 데죠.”
“응. 누나한텐 내일 말하자. 오늘은 그냥 자게 두고.”
해룡성의 낮은 아름다웠다. 청람 기와 아래 비단 천막이 늘어섰고, 향신료 상자에 붉고 노란 가루가 산처럼 쌓였다. 황동 찻주전자는 작은 보일러를 달고 스스로 김을 뿜었고, 자동 인형 악사는 손가락 관절을 딱딱 맞추며 느린 곡을 연주했다. 상단 주인들은 코테르(機核) 감응 저울에 물건을 올려 무게와 기운의 순도를 한꺼번에 쟀다.
“검령성 장은 살려고 서는 데였는데.” 강민이 말했다. “여기 장은 꾸미려고 서는 데 같아요.”
그 꾸밈은 오래가지 않았다.
시장 한복판에서 종이 울렸다. 사람들 움직임이 동시에 멈췄다. 자동 인형 악사의 손가락도 허공에서 굳었다. 골목 끝에서 검은 갑옷 군졸 여섯이 걸어왔다. 어깨에 반백파(反白派)의 톱니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뒤로 소형 구속 자동병 두 기가 쇠사슬을 끌고 따라왔다. 그들이 한 비단 가게 앞에 멈췄다. 마흔쯤 된 가게 주인은 이미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백씨 계열 상단과 거래한 죄.”
군졸장이 방(榜)을 꺼내 가게 기둥에 못질했다. 못이 박힐 때마다 시장 사람들 어깨가 움찔했다. 주인의 아내가 무릎을 꿇었다.
“나리, 그 거래는 삼 년 전 일이에요. 그때는 금지가 아니었어요.”
“지금은 금지다.”
어린 점원 하나가 비단 꾸러미를 안은 채 울음을 삼켰다. 군졸이 사내 손목에 쇠고리를 채웠다. 구속 자동병 배 속 톱니가 돌아가며 사슬을 감아 들였다. 사내는 저항하지 않았다. 저항하면 가게가 아니라 가족이 함께 사라진다는 걸 아는 얼굴이었다.
강민이 한 걸음 나서려는 순간 무겸이 팔을 잡았다.
“지금은 아니다.”
“저 사람 죄 없잖아요.”
“황도에선 죄가 먼저 있고 사람이 나중에 붙는다.”
강민이 이를 악물었다. 청염기관이 다시 빨라졌다. 군졸장 허리춤 감응부가 강민 쪽을 향해 반짝였다. 서란이 즉시 손목을 잡고 맥을 눌렀다. 비호가 옆에서 일부러 약재 꾸러미를 떨어뜨렸다.
“아이고, 죄송해요! 다 쏟았네!”
말린 약초가 바닥에 흩어지며 시선이 잠깐 흩어졌다. 그 틈에 강민이 숨을 가라앉혔다. 청염이 핏줄 끝에서 돌아섰다.
끌려가던 상인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강민과 마주쳤다. 원망을 볼 줄 알았다. 힘이 있으면서 참는 자를 향한 원망. 상인의 눈에는 그런 게 없었다. 조용한 부탁에 가까웠다. 보아 달라는, 잊지 말아 달라는.
사내가 입술만 움직였다.
“기억하시오.”
소리는 군중의 침묵에 묻혔지만 강민은 들었다. 혹은 들었다고 믿었다. 쇠사슬 소리가 멀어지자 방이 붙은 가게 앞엔 아무도 다가가지 않았다. 방에는 죄목과, 그 아래 압류할 물품과 연좌 대상이 표처럼 정리되어 있었다. 이름, 재산, 관계, 처분. 사람의 삶이 칸으로 나뉘어 있었다.
“용진도 강바닥 기록이랑 똑같아요.” 강민이 낮게 말했다. “감응 대상. 여기선 그걸 제국 글씨체로 쓸 뿐이에요.”
그날 정오, 일행은 저잣거리 안쪽 2층 찻집에 숨었다. 창가에 앉으면 시장과 외성 병영으로 이어지는 길이 보였다. 무겸은 찻잔에 입도 대지 않고 낮게 말했다.
“옛 군문 사람을 만났다. 태사령 쪽 병력이 요즘 도성 밖 병영으로 조용히 옮겨지고 있다더군. 공식 명령은 치안 강화인데, 보급량이 치안 규모가 아니다. 전투식량, 냉각유, 자동병 관절 부품. 셋 다 늘었다.”
“전쟁 준비예요?” 비호가 물었다.
“누구랑 싸울지 말 안 하는 전쟁 준비지.”
서란이 창밖을 보았다. 군졸들이 지나가자 시장 사람들이 알아서 길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아무도 명령하지 않았는데 물처럼 갈라졌다. 그녀가 찻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의공원도 그랬어.”
강민이 그녀를 보았다.
“처음엔 환자들이 이름으로 들어왔어. 어느 집 누구, 어느 문파 누구, 무슨 상처 입은 누구. 그런데 어느 때부터 명부가 바뀌었어. 회복 가능성, 기공 적합도, 노동 복귀율, 군용 전환성. 이름이 뒤로 밀리고 숫자가 앞에 왔지. 나는 그걸 보고도 한동안 버텼어. 안에 남아야 한 명이라도 더 살릴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그럼 왜 나왔어?”
서란이 희미하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오래된 문을 손끝으로 닫는 표정이었다.
“살리는 손으로 분류표에 도장 찍으라는 명령을 받은 날.”
강민은 더 묻지 못했다. 황도의 두 얼굴이 분명해졌다. 청람 기와와 광탑 빛, 질서와 번영의 얼굴. 명부와 쇠사슬, 방과 분류표의 얼굴. 다른 얼굴이 아니라 같은 얼굴의 앞뒤였다. 해룡성은 사람을 살릴 힘을 가졌고, 동시에 사람을 가장 정확하게 버리는 방법도 가지고 있었다.
비호가 탁자 위에 작은 지도를 펼쳤다. 강민의 박동 변화가 점과 선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광탑 가까운 중앙 구역은 붉은 먹으로 칠해졌고 남수문과 약재창 주변은 옅었다.
“형이 오래 버틸 수 있는 길은 이쪽이에요. 시장 서편, 약재창 뒤, 낡은 수로. 근데 황궁 쪽으로 갈수록 바늘이 미쳐요. 길이 아니라 덫 같아요. 형 몸이 저 탑을 알아보는 건지, 저 탑이 형 몸을 알아보는 건지 모르겠어요.”
강민은 대답 대신 창밖 광탑을 보았다. 낮의 탑은 밤보다 더 차가워 보였다. 햇빛 속에서도 제 빛을 잃지 않고 도성의 심장처럼 뛰었다. 가슴이 다시 끌려가려는 순간 사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는 힘은 재앙이다.” 강민이 그 말을 소리 내 되뇌었다. “근데 사부님, 저는 지금 제 힘이 아니라 제 핏줄도 못 다스리고 있어요.”
해가 지고 일행은 약재창 뒤 객방으로 돌아왔다. 비호는 문틈에 작은 경보 나사를 박았고, 무겸은 창가에 앉아 창대를 무릎에 올렸다. 서란은 탕약 냄새를 지우려고 향을 피웠다. 강민은 낮에 본 상인의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기억하시오, 그러더라고요.” 그가 말했다. “부탁인 줄 알았는데 명령 같아요.”
“기억하는 게 때로는 칼 드는 것보다 무거워.” 서란이 향을 내려놓았다. “그래도 넌 할 거잖아.”
밤 11시 12분, 창턱에서 작은 쇳소리가 났다.
무겸의 창끝이 먼저 움직였다. 강민은 본국검 손잡이를 잡았고 비호는 손안에 폭약나사를 숨겼다. 서란이 등잔을 낮췄다. 창밖에 손바닥만 한 황동 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깃털은 얇은 황동판을 겹친 것이었고 눈에는 푸른 코테르 감응석이 박혀 있었다. 새가 목을 한 번 꺾어 방 안을 훑더니 가슴의 작은 문을 열었다.
접힌 서신 한 장이 떨어졌다.
무겸은 바로 줍지 않았다. 창밖 지붕과 골목부터 살폈다. 추적자는 보이지 않았다. 비호가 감응침을 가져가자 새 부리가 딱 닫혔다.
“건드리지 말래요.”
서란이 서신 가장자리 인장을 확인했다. “황실 인장이야.”
“가짜일 수도 있잖아요.”
“가짜면 너무 정교해. 그리고 이 인장 방식은…… 의공원 상층부가 아니라 황족 직계가 쓰던 거야.”
강민이 서신을 펼쳤다. 얇은 종이 안쪽에 미세한 황동실이 박혀 있어 불빛을 받자 글자가 한 줄씩 떠올랐다. 첫머리에 이름이 있었다.
백도윤(白度倫).
“황자예요.” 서란이 숨을 삼켰다.
제국의 피를 이은 자. 그런데 이 밤 황자는 군졸도 사자도 아니고 작은 기계 새 한 마리만 보냈다.
「검령성에서 살아남은 이에게.」
첫 문장에 강민의 손가락이 굳었다. 황자는 그들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피해 왔는지 알고 있었다.
「당신이 찾는 것은 이미 황도의 여러 장부에서 지워졌다. 그러나 장부에서 지웠다고 태어난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해동력 183년 4월 18일, 황실 호적원에는 하루 동안만 존재한 영아의 기록이 있었다. 성은 백씨였고, 이름란은 비어 있었다. 다음 날 새벽, 그 기록은 말소되었다. 말소 사유는 병사(病死)로 적혔으나, 검시 기록은 없다. 시신 인계 기록도 없다. 대신 같은 날 남문 수로를 통해 의공원 보육실 물품 하나가 반출되었다. 물품명은 빈 침상. 담당자는 기록에서 도려내졌다.」
글자가 거기서 잠시 끊겼다. 아무도 숨을 크게 쉬지 않았다. 강민이 종이를 더 가까이 들었다. 황동실이 다시 빛을 받아 다음 문장을 띄웠다.
「그 영아의 생일과 당신의 생일이 같다면, 당신은 우연을 의심해야 한다. 당신이 품은 불꽃이 광탑과 공명한다면, 당신은 더 이상 스스로를 우연이라 부를 수 없다. 그러나 아직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마라. 황도에는 이름을 듣는 벽이 있다.」
“4월 18일.” 비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형 생일이잖아요.”
강민의 시야가 좁아졌다. 백씨. 이름란은 비어 있었다. 말소. 병사. 시신 없음. 빈 침상. 담당자 도려냄. 문장들이 따로따로 날아와 안쪽을 찍었다.
“저는 이름을 잃은 적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강민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강민으로 살았고, 사부님 제자로 컸고, 누나는 강민아, 비호는 민이 형, 무겸 형은 강민이라고 불렀잖아요. 그런데 황도 장부 속엔 저보다 먼저 있다가 하루 만에 지워진 빈 이름란이 있었대요.”
그 빈칸이 자기보다 먼저 자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형.”
비호 목소리가 아주 멀게 들렸다. 청염기관이 광탑 박자와 맞물려 빠르게 뛰었다. 서란이 손목을 잡았지만 이번엔 탕약으로 가라앉힐 박동이 아니었다. 분노도 공포도 아니었다. 누군가 그의 삶 첫 장을 찢어 갔고, 그 찢긴 자리가 피 대신 푸른 불을 흘리고 있었다.
어떤 이름 하나가 혀끝까지 올라왔다. 폐갱의 두루마리에서 본 그 두 글자. 강민은 그걸 굴리지 않았다. 입술을 다물었다.
“숨 세, 강민아. 나랑 같이.” 서란이 낮게 말했다. “하나. 둘.”
“셋.”
무겸이 서신 마지막 부분을 가리켰다. 짧은 문장이 있었다.
「답을 원하면, 이 새에게 한 글자만 돌려보내라. 묻겠다는 뜻이면 빈 종이를, 거절하겠다는 뜻이면 불을. 새는 사흘 동안 기다릴 것이다. 그 뒤에는 다시 오지 않는다.」
기계 새는 창턱 위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눈에 박힌 감응석이 광탑과 같은 박자로 깜빡였다.
“사흘 기다린다고요? 그럼 이건 그냥 서신이 아니라 약속 장치예요.” 비호가 중얼거렸다. “정해진 시간에만 움직이는 태엽이 들어 있을 거예요.”
“함정일 수도 있다.” 무겸이 말했다.
“그래도 단서예요.” 서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 “황실 호적원 기록은 아무나 못 봐. 황자 아니면 이렇게 확인할 수도 없고.”
강민은 서신을 내려다보았다. 문장은 조심스러웠다. 조심스러운 문장일수록 더 큰 위험을 품고 있었다.
“진짜면 저는 황도에서 지워진 아이예요. 가짜면 누가 저를 딱 맞는 모양의 거짓말로 끌어들이는 거고요.” 강민이 말했다. “어느 쪽이든 저는 벌써 해룡성 한복판에 와 있네요.”
그때 기계 새가 갑자기 부리를 열었다. 모두가 동시에 몸을 굳혔다. 새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가슴 안쪽에서 작은 황동판 하나가 앞으로 밀려 나왔다. 서신을 꺼낼 땐 보이지 않던 두 번째 판이었다. 바늘로 긁은 듯한 가는 글자가 떠올랐다.
「열람자 주의: 이 기록을 찾는 자가 청염 반응을 보이면 즉시 보고할 것.」
강민 손등 위로 푸른 핏줄 무늬가 한순간 선명하게 떠올랐다. 등잔불이 푸르게 흔들렸다. 기계 새가 그 빛을 보자 머리를 기울였다. 확인했다는 듯이.
새의 발목에 감긴 세 번째 태엽이 조용히 풀리며 작은 종이 조각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응답 기한: 내일 04시 00분.」
“사흘이라며.” 비호가 종이를 집어 들었다. “세 시간도 안 남았어요.”
“누군가 거짓말을 했다.” 무겸이 창을 쥐었다. “황자든, 중간에서 새를 건드린 자든, 아니면 이 도시 자체든.”
강민이 본국검을 천천히 움켜쥐었다. 밖에서 광탑이 도성 전체를 향해 낮은 박자를 울렸다. 창턱의 기계 새는 여전히 강민을 보고 있었다. 답을 기다리는 눈이 아니었다. 이미 답을 알고 온 눈이었다.
강민이 빈 종이를 집어 들었다. 글씨를 쓰기 전에 새의 부리가 먼저 탁 벌어졌다.
그 안에서, 설무진의 낡은 백룡문 인장과 똑같은 문양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