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호 1식의 포효
海東曆: 201년 6월 24일 · 시점: 단비호
새벽 4시 40분.
황도 해룡성(海龍城)의 바깥 성벽은 밤이 끝나기 직전에 가장 조용했다. 낮에는 황금빛 기와와 연기 없는 궁정 보일러, 수십 개의 현수교와 증기 승강탑이 사람 눈을 속였지만, 새벽 외곽은 달랐다. 성벽 아래 배수로에서 식은 증기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물 냄새와 쇠 냄새, 오래 안 닦은 구리의 시큼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단비호(段飛虎)는 그 냄새를 맡자마자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궁궐 비단 냄새보다 이게 훨씬 믿음이 가요.” 비호가 속삭였다. “기계는 고장 난 데를 냄새로 알려 주잖아요. 사람은 웃으면서 속을 숨기는데, 녹은 못 숨겨요.”
“그 말, 누나 들으면 서운해한다.” 강민이 뒤에서 낮게 받았다.
“누나는 웃을 때 진짜 웃잖아요. 예외예요.”
비호는 낡은 정비 장갑 끝을 다시 당겨 꼈다. 손보다 두 마디나 큰 장갑이었다. 검령성을 떠난 뒤 새로 살 돈이 없어서 도공거리에서 주운 군용 장갑을 잘라 쓰고 있었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어제 터진 물집이 굳어 있었다. 아픈 줄도 몰랐다. 오늘은 손가락보다 눈이 일해야 하는 날이었다.
백도윤(白度倫) 황자가 보낸 황동 기계 새는 그날 밤 창턱에 내려앉았고, 그 가슴 안쪽에 해룡성 외곽 폐기지 약도가 접혀 있었다. 평범한 약도가 아니었다. 군용 지도도 궁중 배관 도면도 아니었다. 오래전 누군가 기계가 다니는 길과 사람이 다니는 길을 따로 그려 겹쳐 놓은 것이었다. 사람 길은 끊겼지만 기계 길은 아직 살아 있었다.
그 길을 찾아낸 게 비호였다.
“여기서부턴 발소리 조심해요.”
비호가 작은 황동 막대를 배수로 벽에 대고 귀를 기울였다. 막대 끝 떨림이 손목뼈를 타고 올라왔다. 위쪽으로 순찰용 증기마차 한 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바퀴 넷, 보조 피스톤 여덟, 왼쪽 뒤축 압력 불량.” 비호가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지나갔어요.”
장무겸은 창을 짧게 고쳐 쥐고 뒤를 살폈다. 유서란은 보따리처럼 묶은 의공 가방을 안았고, 강민은 말없이 비호를 따랐다.
형 얼굴은 아직 젊었지만 검령성을 떠난 뒤 눈빛이 많이 달라졌다. 웃을 때도 조금 늦었고, 누가 이름을 부르면 대답하기 전에 가슴 안쪽부터 누르는 버릇이 생겼다.
“형, 또 가슴 눌렀어.” 비호가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냥 버릇이야.”
“버릇 생긴 지 열흘밖에 안 됐어. 그건 버릇이 아니라 증상이야.”
“누나 말투 따라 하지 마.”
“누나 말이 맞으니까 따라 하는 거야.”
형 몸속에서 뭔가가 점점 정밀해지고 있었다. 정밀해지는 건 좋다. 하지만 너무 정밀한 기계는 모래 한 알에도 멈춘다. 비호가 무서워하는 건 그거였다.
“비호야, 길 확실해?”
비호는 대답 대신 배수로 벽의 어두운 이음매를 가리켰다. 손톱만 한 틈이었다. 그냥 보면 돌벽 금 같은데 안쪽에 아주 작은 황동 톱니가 숨어 있었다. 바늘 드라이버를 꽂아 톱니를 세 번 밀고, 두 번 되돌리고, 마지막에 아래로 눌렀다.
돌벽이 숨을 삼키듯 움찔했다. 벽 전체가 30센티미터쯤 안으로 밀려 들어가며 사람 하나가 몸을 비틀어 지나갈 만한 검은 틈이 열렸다.
“사람 길은 끊겼는데 정비사 길은 남아 있었어요.”
“사흘 동안 이거 붙들고 있던 거야?” 서란이 물었다.
“잠금 태엽에 기름 먹이느라고요. 처음엔 완전히 죽은 줄 알았어요. 녹 긁고, 굳은 기름 데워서 닦고, 낡은 스프링 손톱으로 한 칸씩 살렸더니 반응이 왔어요. 죽은 게 아니었어요. 오래 기다린 거였어요.”
벽 뒤 통로는 해룡성 빛과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천장이 낮았고 바닥엔 물이 고여 있었다. 벽에 200년 전 배관이 그대로 묻혀 있었다. 굵은 주관은 검은 철, 보조관은 푸른빛 도는 합금. 제국 표준이 아니었다. 검령성 도장 지하에서 형이 발견했던 옛 배관과 같은 계통이었다. 비호는 그 얘기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말하는 순간 모든 게 너무 빨리 현실이 될 것 같았다.
통로는 600미터쯤 이어졌다. 중간에 천장이 무너진 곳이 있었다.
“내가 받친다. 빨리 지나가라.” 무겸이 어깨로 철골을 받쳤다.
“형, 어깨 아직—”
“말하는 동안 무게가 늘어난다, 강민아.”
“숨 어때?” 서란이 강민 옆에 붙어 걸었다.
“괜찮아.”
“손 줘 봐.”
“걸으면서?”
“걸으면서도 맥은 뛰어.”
강민은 괜찮다고 고개를 저었지만, 비호는 형 손끝이 가끔 푸르게 식었다가 돌아오는 걸 보았다. 청염은 불인데 이상하게 늘 차가움으로 먼저 왔다. 그게 더 무서웠다. 뜨거운 건 눈에 보이지만, 차가운 건 뼈 안에서 시작된다.
통로 끝에 버려진 승강기가 있었다. 문에 백호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호랑이라기엔 얼굴선이 너무 기계 같았고, 기계라기엔 눈매가 이상하게 살아 있었다. 무겸이 창끝으로 문양을 건드리려 하자 비호가 급히 손을 뻗었다.
“만지지 마요.”
“함정이냐?”
“아뇨. 예의요.”
“기계한테도 예의를 차리냐?”
“기계 만든 사람한테요.”
“그 사람 얼굴도 모르잖냐.”
“몰라도 알아요. 이 문 경첩 기름칠한 손이 아직 남아 있으니까.”
비호가 무릎을 꿇었다. 문양 아래 작은 정비구가 있었다. 공구함에서 땅콩을 꺼내 두 번 두드렸다. 통, 통. 빈 소리였다. 세 번째는 두드리지 않고 망치 손잡이 끝 갈고리로 걸쇠를 살짝 당겼다. 승강기 안에서 오래 굶은 짐승이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났다. 압력이 살아나는 소리였다.
철문이 열렸다.
승강기는 내려가지 않고 옆으로 움직였다. 바닥 밑 궤도가 굴러가며 그들을 성벽 바깥 낮은 구릉 속으로 밀어 넣었다. 비호가 벽에 손을 대고 떨림을 읽었다.
“궤도 낡았는데 아직 정확해요. 누가 마지막까지 돌봤어요. 언젠가 다시 열릴 거라고 믿고.”
승강기가 멈춘 곳은 구릉 속을 파낸 거대한 격납고였다. 천장까지 25미터는 되어 보였다. 일부는 무너졌지만 주요 골조는 버티고 있었다. 바닥에 먼지가 두껍게 쌓였고, 벽에는 사람 키보다 큰 스패너, 수레바퀴만 한 압력계, 팔뚝 굵기 관절핀, 포대처럼 말아 둔 동력 호스가 걸려 있었다.
비호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세상엔 성전이 두 종류 있어요.” 그가 속삭였다. “사람들이 신한테 절하려고 짓는 거랑, 정비사들이 망가진 걸 다시 움직이게 하려고 짓는 거. 여긴 두 번째예요.”
그 한가운데 백호 1식(白虎一式)이 있었다.
처음엔 산처럼 보였다. 검은 방수포와 먼지, 굳은 기름과 떨어진 쇳가루가 뒤섞여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비호의 눈이 곧 윤곽을 잡았다. 접힌 앞다리. 뒤로 낮게 웅크린 엉덩이 장갑. 호랑이 어깨뼈처럼 솟은 양쪽 보조 증기통. 머리라기보다 장갑을 두른 감응부에 가까운 앞면.
“다리 펴면 높이가 14미터는 되겠어요.” 비호가 숨 가쁘게 말했다. “다리마다 충격 흡수 실린더 세 겹이랑 회전 발톱, 지면 감응판이 들어 있어요. 사람 겁주려고 크게 만든 게 아니라 무너진 땅을 진짜로 건너려고 만든 몸이에요.”
비호가 한 걸음 나아갔다. 먼지 위에 작은 발자국이 찍혔다. 열세 살 소년의 발자국이 200년 잠든 강철 짐승을 향해 곧게 이어졌다.
“이게…….” 서란이 낮게 숨을 내쉬었다.
“잃어버린 동맹의 물건이군.” 무겸의 목소리에 경계가 섞였다. 그는 병기보다 병기를 숨긴 사람들을 의심하는 눈으로 격납고를 살폈다.
강민은 말없이 백호 1식 앞에 멈춰 섰다. 왼쪽 가슴이 한 번 작게 뛰었다. 비호는 그걸 귀가 아니라 공기의 얇은 떨림으로 느꼈다. 백호 1식 몸속 어딘가에서도 같은 박동이 아주 낮게 돌아왔다. 잠든 기계가 잠든 척하며 대답한 것이다.
격납고 위에서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황동 기계 새가 천장 틈으로 내려와 비호 어깨에 앉았다. 가슴판이 열리며 작은 음성관이 드러났다. 백도윤의 목소리가 잡음 사이로 흘러나왔다.
“들었나. 이 기지는 공식 장부에 없다. 궁정 병기고도, 군부 폐창고도 아니다. 내게 이 좌표를 남긴 사람도 이름을 쓰지 않았다. 다만 한 줄을 남겼다. ‘백호는 명령이 아니라 호흡으로 깨어난다.’ 나는 그 뜻을 모른다. 당신들이 알 것이다.”
음성이 끊겼다.
“호흡으로 깨어난다.” 서란이 되뇌며 강민을 보았다. “네 얘기 같은데.”
“황자가 우릴 너무 잘 안다.” 무겸이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게 마음에 안 든다.”
“그래도 여기까지 길 알려 준 건 그 사람이에요.” 비호가 새를 쓰다듬었다.
“길을 알려 주는 자가 늘 같은 편은 아니다.”
강민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비호는 백호 1식 옆 정비 사다리를 올랐다. 녹슬었지만 그의 몸무게는 버텼다. 위쪽 장갑판에 작은 기록판이 달려 있었다. 먼지를 닦아 내자 200년 전 마지막 정비사의 글씨가 드러났다. 마지막 줄로 갈수록 손이 떨린 듯했고, 몇 군데는 기름인지 피인지 모를 갈색 얼룩에 번져 있었다.
「관절유 보충 완료. 우측 후지 실린더 압력 82퍼센트. 노심 냉각수 일부 증발. 조종자석 감응부 미봉인. 언젠가 올 조종자를 위해 관절유를 채워 둔다.」
비호는 그 앞에서 오래 멈췄다.
“언젠가 올 조종자.” 그가 소리 내 읽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 위해서 끝까지 기름을 채워 놨어요. 도망칠 수도 있었을 텐데. 이름도 안 남겼어요. 상태랑 한 일만 남겼어요.”
“그게 서운해?” 아래서 서란이 물었다.
“아뇨. 좋아요. 진짜 좋은 정비사는 자기보다 기계가 내일 움직일 수 있는지를 먼저 남기거든요.”
비호가 짧은 철필을 꺼내 마지막 문장 아래 아주 작게 적었다.
「단비호, 확인. 관절유 아직 살아 있음.」
글씨 쓰는 손이 조금 떨렸다. 얼굴도 모르는 선배가 200년 전 어둠 속에서 내민 손을 이제야 잡은 것 같았다.
“비호야, 열 수 있어?” 강민이 아래서 불렀다.
비호가 기록판을 한 번 더 쓰다듬었다.
“열 수 있어요. 근데 그냥 여는 게 아니에요. 깨우는 거예요.”
깨우는 일은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노심은 완전히 식어 있었다. 코테르(機核) 반응석은 깨지지 않았지만 표면에 회색 막이 덮였다. 냉각수는 절반 가까이 말랐고, 배기 통로엔 오래전 벌레와 먼지가 굳은 덩어리가 박혀 있었다.
“누나, 냉각수에 의공용 증류수 좀 섞어야 해요.”
“그건 강민이한테 써야 할지도 모르는 물이야.”
“형이 이걸 타야 하면, 이것도 환자예요.”
서란이 작게 한숨을 쉬고 깨끗한 물주머니 하나를 건넸다.
무겸은 배기구를 열었다. 창끝을 지렛대처럼 걸고 온몸으로 눌렀다. 녹슨 볼트가 찢어지는 소리가 격납고를 울렸다.
“무겸 형, 그렇게 하면 나사산 죽어요!”
“산 놈이 먼저다.”
“나사산도 산 거라고요!”
무겸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지만 다음 볼트부터는 힘을 조금 줄였다. 비호는 그 작은 변화가 마음에 들었다. 투박해도 듣지 않는 사람은 아니었다.
강민이 조종자석에 올랐다. 하나가 앉기엔 넓고 둘이 들어가기엔 좁은 자리였다. 등받이 뒤에 척추 감응판이 있었고, 팔걸이에 양손 기맥을 받는 황동 고리가 놓여 있었다. 발밑엔 페달이 여섯 개나 있었는데, 비호는 그게 전부 조작용이 아니라는 걸 곧 알아챘다. 일부는 조종자 호흡에 맞춰 저항을 바꾸는 장치였다.
“형, 손 넣기 전에 내 말 들어.” 비호가 조종석 옆에 매달린 채 빠르게 말했다. “얘는 형 힘을 받아서 움직이지만 형 힘을 대신해 주진 않아. 형이 밀면 밀고, 형이 흔들리면 얘도 흔들려. 그러니까 멋있게 하려고 하지 마. 처음엔 그냥 앉아. 숨만 맞춰. 발은 오른쪽 두 개만 써. 왼쪽은 아직 죽어 있어. 잘못 밟으면 다리 하나가 반대로 접힐 수도 있어.”
“다리 하나가 반대로 접히면 어떻게 되는데?”
“형이 백호가 아니라 술 취한 두꺼비가 돼.”
서란이 아래서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이 격납고 긴장을 조금 풀었다. 강민도 웃었다. 웃음이 끝나자 눈빛이 다시 가라앉았다. 그가 양손을 황동 고리 안에 넣었다. 고리 안쪽 감응침들이 살갗에 닿았다. 피는 나지 않았지만 손등에 푸른 핏줄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비호는 노심 앞에 섰다. 손바닥만 한 점화 손잡이가 있었다. 200년 동안 아무도 안 돌린 손잡이였다. 기름 한 방울을 떨어뜨리고 귀를 댔다. 안쪽 스프링은 부러지지 않았다. 너무 오래 굳었을 뿐이었다. 숨을 들이마시고 반 바퀴 돌렸다. 꼼짝 안 했다. 조금 더 힘을 주자 손잡이가 끼익 울었다. 손바닥에 통증이 올라왔다.
“비호야, 무리하지 마.” 서란이 불렀다.
“무리 아니에요.” 비호가 이를 악물었다. “첫인사예요.”
끝까지 돌렸다. 탁. 아주 작은 소리. 점화침이 반응석을 가볍게 두드렸다. 처음엔 아무 일도 없었다.
2초 뒤, 어둠 속에서 파란 점 하나가 켜졌다.
파란 점이 천천히 원이 되고, 원이 맥박처럼 부풀었다 줄었다. 강민이 조종석에서 숨을 들이쉬었다. 그 숨에 맞춰 백호 1식 몸속 수십 개 관절이 동시에 낮게 울렸다.
쿵.
격납고 바닥 먼지가 원 모양으로 밀려났다.
“움직였어!” 비호가 소리쳤다. “누나, 봤어요? 움직였어요!”
“봤어. 근데 강민이 얼굴부터 봐.” 서란이 조종석을 올려다보았다.
강민 이마에 땀이 맺혔다. 비호가 노심 색을 보았다. 너무 깊은 파랑이었다. 안정된 노심이면 푸른빛 속에 흰 점이 섞여야 하는데, 지금은 형의 청염이 그대로 밀려 들어가고 있었다.
“형, 세게 넣지 마! 얘 굶었다고 한 번에 먹이면 토해!”
“알겠어.”
강민이 숨을 낮췄다. 푸른빛이 조금 옅어졌다. 그제야 왼쪽 앞다리가 펴졌다. 실린더가 200년 만에 기름을 밀어냈고 관절핀들이 서로를 기억하듯 맞물렸다. 쇠가 비명을 질렀다.
“부러지는 소리 아니에요.” 비호가 안도하며 외쳤다. “몸 푸는 소리예요!”
오른쪽 앞다리. 왼쪽 뒷다리. 오른쪽 뒷다리.
백호 1식이 천천히 일어섰다.
“이게 서 있는 걸 내 눈으로 보다니.” 무겸이 창을 내린 채 올려다보았다.
“형, 지금 어때?” 비호가 조종석에 대고 외쳤다.
“무거워. 근데…… 같이 숨 쉬는 거 같아.”
격납고 그림자가 움직였다. 14미터 강철 짐승이 네 다리로 바닥을 딛는 순간, 무너진 천장 틈으로 들어오던 새벽빛이 장갑판 위를 미끄러졌다. 녹과 먼지 밑에서 흰빛에 가까운 쇠가 드러났다. 무섭고, 아름다웠다. 비호에게 아름다움은 곧 맞물림이었다. 필요 없는 게 하나도 없는 구조, 힘이 흐르는 길이 숨김없이 보이는 몸. 백호 1식이 그랬다.
“걸어 볼게.” 강민의 목소리가 조종석에서 울렸다.
“아니, 형, 아직—”
첫걸음은 엉망이었다. 왼쪽 앞발이 예상보다 70센티미터 더 나갔고 오른쪽 뒷발 충격 흡수가 늦었다. 거대한 몸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무겸이 본능적으로 창을 들었지만 14미터짜리를 창으로 받칠 순 없었다.
강민이 숨을 끊었다. 백호 1식도 숨을 멈춘 듯 정지했다. 강민이 다시 천천히 내쉬자 오른쪽 뒷다리가 땅을 찾아 눌렀다. 기체가 균형을 되찾았다.
비호가 기록판에 급히 적었다. 「좌전지 보폭 과다. 우후지 반응 0.4초 지연. 조종자 호흡 끊김 시 전신 정지.」 손이 떨려 글씨가 삐뚤어졌다. 놀라는 건 나중에 해도 된다. 기록은 지금 해야 한다.
“숨 끊으면 얘도 멈춰요!” 비호가 외쳤다. “좋은 거기도 하고 무서운 거기도 해요!”
그들은 격납고 바깥으로 나갔다. 폐기지는 구릉 뒤 숲과 이어져 있었다. 원형 주행로와 부서진 표적벽, 깊게 파인 도랑이 남아 있었다. 새벽안개가 낮게 깔렸고 해룡성 외곽 감시탑 불빛은 멀었다.
비호는 백호 1식 발등 위 정비 난간에 매달렸다. 서란은 30미터 떨어진 안전선 뒤에서 진동판으로 강민의 맥을 살폈고, 무겸은 주행로 끝에서 만일에 대비했다.
“좋아. 형, 지금 박자 유지해. 하나, 둘, 셋, 쉬고. 하나, 둘, 셋, 쉬고.”
비호가 박자를 불렀다. 두 번째 걸음이 조금 나았고, 세 번째 걸음에서 강민은 호흡을 다리 움직임에 맞추기 시작했다. 기계가 사람을 끌고 가는 게 아니라 사람이 기계와 함께 걷고 있었다. 네 다리가 번갈아 땅을 밀었고 어깨 장갑 밑 실린더들이 차례로 수축했다. 강철 발톱이 젖은 흙을 파고들 때마다 지면 감응판이 낮게 울렸다.
“거대한 악기 위에 탄 것 같아요!”
“떨어지지나 마!” 서란이 소리쳤다.
그때 조종석 옆 은빛 고리가 빛났다.
“이건 뭐야?” 강민이 물었다.
비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고리 둘레에 작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광휘은신(光輝隱身). 검령성에서 처음 봤던 그 투명한 떨림과 같은 계통이었다. 다만 이건 손으로 켜는 장치가 아니었다. 조종자 기맥과 노심 힘이 일정하게 맞물리면 기체 표면 광휘판이 스스로 빛을 접는 구조였다.
“형, 아직 누르지 마.”
“누른 거 아니야.”
비호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안 눌렀는데 반응했다면 장치가 형을 읽은 것이다. 형의 청염과 백호 1식의 광휘판이 서로를 찾아낸 것이다.
안개 속에서 백호 1식 윤곽이 흔들렸다. 발끝, 어깨, 머리 감응부 순서로 흐려졌다. 흰 장갑판이 새벽빛을 밀어내듯 투명해지더니 거대한 몸이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완전히 안 보이는 건 아니었다. 움직일 때마다 공기가 일그러졌고 물방울이 표면을 따라 잠깐 반짝였다. 그래도 멀리서 보면 빈 공간이었다. 강민이 숨을 놓치는 순간 다시 모습이 드러났다.
“능동형이야.” 비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형이 숨을 맞추면 스스로 숨어. 억지로 감추는 게 아니라 빛이 형 박자를 따라 비켜 가.”
“좋은 거야?”
“좋은데…… 너무 좋아서 문제야.”
비호가 기록판에 적었다. 「광휘은신 능동 반응. 조종자 청염 박자와 직접 연동. 지속 18초. 재현 가능. 임계 미확인.」 마지막 네 글자를 쓰며 입술을 깨물었다.
“임계를 모르는 기계는 항상 위험해요. 어디까지 버티는지 모르면 언제 부서지는지도 모르니까.”
바로 그때 숲 가장자리에서 쇠 긁히는 소리가 났다.
무겸이 먼저 움직였다. 창끝이 안개를 갈랐다. 서란은 뒤로 물러나며 의공 가방 잠금쇠를 풀었다. 비호는 발등 난간에 몸을 낮췄다.
안개 너머에서 그림자 둘이 나타났다. 사람 키보다 조금 큰 자동병이었다. 검령성 흑영의 기계 인형과는 구조가 달랐다. 몸통이 더 좁고 팔다리는 정찰에 맞게 가늘었다. 머리엔 눈 대신 렌즈 네 개, 등엔 송신용 소형 증기통. 오른쪽 어깨에 반백파(反白派)의 작은 낙인이 박혀 있었다.
“정찰대예요.” 비호가 속삭였다. “누가 벌써 이 근처를 살피고 있었어요.”
첫 번째 자동병 렌즈가 붉게 켜졌다.
“미등록 기체 반응. 백색 장갑. 청염 잔류. 기록 개시.”
기계음이 끝나기 전에 무겸의 창이 날았다. 창끝이 목 관절을 노렸지만 자동병이 목을 뒤로 접어 피했다. 사람과 다른 관절 각도였다. 두 번째 자동병은 등 뒤 송신관을 펼쳤다.
싸움보다 먼저 끊어야 할 건 저 송신관이었다.
“형! 오른쪽 놈 등! 신호 올려!”
백호 1식이 움직였다. 강민은 아직 조작이 서툴렀다. 오른쪽 앞발이 내려찍혔지만 보폭이 컸다. 땅이 터지고 흙덩이가 솟았지만 자동병은 옆으로 빠졌다. 거대한 힘이 오히려 빈틈을 만들었다. 첫 번째 자동병이 왼쪽 앞다리 안쪽으로 파고들어 얇은 절단날을 펼쳤다. 관절 호스를 노린 것이다.
비호는 생각보다 먼저 손이 움직였다. 공구함에서 폭약나사 하나를 꺼내 이빨로 안전핀을 뽑았다. 도공거리에서 몰래 만든 물건이었다. 사람 다치게 하려는 게 아니라 녹슨 경첩을 안에서 터뜨려 빼내려고 만든 도구였다. 지금 앞엔 경첩보다 나쁜 게 있었다.
“무릎 밑으로 숙여!”
강민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앞다리가 살짝 낮아졌다. 비호는 난간에서 몸을 던지듯 팔을 뻗어 폭약나사를 자동병 어깨 관절 틈으로 던졌다. 나사가 박히는 순간 몸을 말아 난간 안쪽으로 굴렀다.
펑!
크진 않았지만 정확했다. 어깨 관절이 안쪽에서 벌어졌고 절단날 품은 팔이 힘없이 떨어졌다. 무겸이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이번엔 목이 아니라 가슴 구동축이었다. 창끝이 철판을 뚫었고 몸통 안에서 흰 증기가 터졌다. 자동병이 두 걸음 비틀거리다 쓰러졌다.
두 번째 자동병은 벌써 송신을 시작했다. 등 뒤 증기통이 높은 소리를 냈다.
“형, 숨어!”
백호 1식이 다시 광휘은신에 들어갔다. 거대한 몸이 안개 속으로 지워지자 렌즈 네 개가 동시에 흔들렸다. 목표를 잃은 것이다. 이번엔 강민이 크게 움직이지 않았다. 한 걸음만 옮겼다. 아주 느리고 낮은 한 걸음. 아까 비호가 불러 준 박자를 기억한 움직임이었다. 오른쪽 앞발이 자동병 바로 옆에 내려앉았다. 자동병이 뒤늦게 렌즈를 돌렸다.
무겸의 창이 송신관을 끊었다. 그래도 자동병은 죽지 않았다. 몸통 밑에서 보조 다리 둘이 튀어나와 무겸의 다리를 노렸다.
“오라버니, 뒤로!”
서란이 손을 펼쳤다. 황금빛 기공이 실처럼 뻗어 무겸의 발목을 감아 뒤로 끌었다. 절단날이 허공을 갈랐다. 비호는 두 번째 폭약나사를 찾았지만 손이 비었다. 하나뿐이었다.
“형, 밟지 마!” 비호가 저도 모르게 외쳤다.
백호 1식 발이 자동병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밟으면 끝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밑에 송신관 잔해와 노심 파편이 흩어져 있었다. 잘못 밟으면 파편이 발바닥 감응판에 박힌다. 첫 기동에서 발을 잃으면 끝이었다. 강민이 발을 멈췄다. 거대한 발톱이 자동병 머리 위 10센티미터에서 떨렸다.
그 멈춤이 빈틈을 만들었다. 자동병 왼쪽 렌즈가 비호를 향했다. 작은 침 발사구가 열렸다. 비호는 그걸 보면서도 몸이 굳었다. 너무 가까웠다.
강민이 조종석에서 손을 뗐다.
백호 1식이 휘청였다. 대신 강민이 직접 뛰어내렸다. 14미터 높이 조종석에서 장갑판을 밟고 미끄러지듯 내려와 자동병과 비호 사이에 떨어졌다. 본국검이 푸른 잔광을 끌며 뽑혔다. 침 발사구에서 검은 침 세 개가 튀어나왔다. 강민의 검이 그걸 쳐냈다. 침이 허공에서 녹아내리듯 휘어 바닥에 박혔다.
“비호야, 뒤로.”
낮은 목소리였다. 비호는 움직이지 못했다. 형 손등에서 푸른 핏줄이 뛰는 게 보였다. 조종석에 있을 때보다 더 선명했다.
기체는 강했다. 그런데 결정하는 건 기체가 아니었다. 누군가를 가리려고 발을 멈추고, 조종석을 버리고, 제 몸으로 침 앞에 서는 것. 그건 어떤 장치도 대신 못 했다. 비호 머릿속에 그 장면이 깊게 박혔다.
무겸이 뒤에서 다시 창을 던졌다. 서란의 기공이 자동병 다리를 묶었다. 강민의 검이 아래서 위로 올라갔다. 푸른 선이 몸통을 갈랐다. 잘린 면에서 뜨거운 기름과 검은 증기가 뿜어졌고, 자동병은 마지막 송신음을 토하려다 가슴이 둘로 벌어졌다. 안개가 다시 조용해졌다.
비호는 한참 뒤에야 숨을 내쉬었다.
“형…… 형이 뛰어내렸어.” 목소리가 떨렸다. “14미터를.”
“장갑판 밟고 내려왔어. 그냥 뛴 거 아니야.”
“그게 그거야!”
“다친 사람?” 서란이 달려왔다.
무겸이 고개를 저었다. 비호도 저었다. 강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검을 내린 채 서 있었다. 이마에서 흐른 땀이 턱끝에 맺혀 떨어졌다. 여름 새벽인데 숨에서 흰 김이 났다.
“형.”
강민이 그제야 돌아보았다.
“괜찮아.”
그 말이 가장 안 괜찮은 말처럼 들렸다.
서란이 곧장 손목을 잡았다. 표정이 굳었다.
“맥이 빨라.”
“저 둘이 신호 보냈을지도 몰라. 여기 오래 있으면 위험해.”
“네 몸이 먼저야.”
강민은 반박하지 못했다. 비호는 쓰러진 자동병 쪽으로 갔다. 기계의 죽음은 믿지 않았다. 사람은 숨이 끊기면 죽지만, 기계는 마지막 스프링 하나가 풀릴 때까지 거짓으로 멈춰 있을 수 있다. 두 번째 자동병 가슴을 열어 송신관을 확인했다. 확실히 끊겨 있었다. 안쪽 기록 코일도 망가져 있었다.
안도하려는 순간 아주 작은 소리가 났다.
딸깍.
머리 쪽 렌즈 넷 중 하나가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 렌즈 안에서 쌀알만 한 붉은 점이 한 번 깜빡였다. 송신관이 아니었다. 렌즈 자체가 마지막 기록을 품고 있었다. 손을 뻗었지만 늦었다. 붉은 점이 꺼지며 렌즈 속 아주 작은 태엽이 스스로 부서졌다.
“보내고 터졌어요.” 비호가 이를 악물었다.
“비호야?” 무겸이 물었다.
비호는 렌즈 조각을 집어 들었다. 아직 따뜻했다. 안쪽에 반백파 낙인과 다른, 훨씬 세밀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누군가의 개인 표식이었다.
“이거 싫어요.” 비호가 중얼거렸다. “기계가 싫은 게 아니라, 기계를 이렇게 쓰는 사람 손이 느껴져서요. 기계는 거짓말 안 해요. 거짓말은 늘 사람이 해요.”
그들은 시운전을 멈췄다. 백호 1식이 다시 격납고로 들어갔다. 돌아가는 걸음은 처음보다 안정적이었다. 강민이 다시 조종석에 올랐고 비호가 옆에서 계속 박자를 불렀다.
“하나, 둘, 셋, 쉬고.”
강민은 그 박자에 숨을 맞췄다. 그래도 비호는 형 호흡이 처음보다 거칠어진 걸 들었다. 노심도 마찬가지였다. 깊은 곳에서 얇은 종소리 같은 떨림이 섞여 있었다. 과열 조짐이었다.
격납고 문을 닫자 비호는 가장 먼저 발바닥 감응판을 닦았다. 진흙과 쇳조각이 잔뜩 박혀 있었다. 작은 칼로 하나하나 긁어냈다. 다음엔 무릎 관절 유격을 보고 우측 후지 실린더 압력을 다시 쟀다.
“82퍼센트.” 그가 작게 말했다. “200년 전이랑 똑같아요.”
“반가운 거 아니야?” 서란이 물었다.
“반갑기도 한데 슬퍼요. 200년 동안 수치가 안 변했다는 건, 200년 동안 아무도 이 다리를 제대로 못 썼다는 거니까요.”
강민은 격납고 바닥에 앉아 있었다. 서란이 손목에 냉각 침을 놓았다. 침 끝이 닿자 푸른 핏줄 무늬가 잠깐 더 밝아졌다. 비호는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봤다. 정비사는 외면하면 안 된다. 사람이든 기계든 고장 날 것 같은 데를 먼저 봐야 한다.
“형.”
“응.”
“오늘은 더 타면 안 돼.”
강민이 비호를 보았다. 비호는 일부러 눈을 피하지 않았다.
“백호 1식 때문이 아니야. 형 때문이야. 얘는 고치면 돼. 근데 형은…….”
말이 막혔다. 강민이 잠깐 말없이 있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 대답에 비호는 이상하게 화가 났다.
“형은 맨날 알겠다고 해. 아프냐고 하면 괜찮다고 하고, 쉬라고 하면 알겠다고 하고. 근데 제일 위험할 땐 맨날 제일 앞에 서잖아. 아까도 조종석 버리고 뛰어내렸잖아.”
“네가 거기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더 화나는 거야!”
비호가 공구를 꽉 쥐었다. 아무리 좋은 기계를 만들어도 그게 형을 더 빨리 위험한 데로 데려가면 무슨 소용일까. 그래서 더 좋은 기계를 만들어야 했다. 형이 앞에 안 서도 되는 기계. 형이 쓰러지기 전에 멈춰 세우는 기계. 형이 괜찮다고 거짓말할 때, 그 거짓말을 안 믿는 기계.
“미안해, 비호야.”
“사과하지 마. 사과하면 다음에 또 할 거잖아.”
비호는 기록판 앞으로 갔다. 200년 전 정비사의 마지막 줄 아래, 아까 쓴 자기 이름 밑에 새 줄을 더했다.
「첫 기동 성공. 광휘은신 능동형 반응. 정찰 자동병 둘과 교전. 기체 손상 경미. 조종자 과열 징후 명확. 기체는 사람이 타야 움직인다. 그러므로 정비사는 기체만 보아서는 안 된다.」
철필을 멈췄다가 한 문장을 더 적었다.
「기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거짓말은 늘 사람이 한다.」
쓰고 나서야 손이 떨리는 걸 알았다. 비호는 철필을 내려놓고 백호 1식 발등에 걸터앉았다. 강철 발등은 차가웠다. 그래도 그 안쪽 깊은 데에 작은 열이 남아 있었다. 살아 있는 열이었다.
밤이 깊을 때까지 그들은 격납고를 정리했다.
“발자국은 내가 지운다.” 무겸이 바깥으로 나가며 말했다. “둘이 왔으면 셋째가 근처에 있었을 수도 있다.”
“파편은 만지지 마.” 서란이 비호를 막았다. “침에 독성 윤활액 묻어 있어. 내가 골라낼게.”
“누나는요? 누나 손은 괜찮아요?”
“나는 장갑 꼈어. 너처럼 두 마디 큰 거 말고.” 강민은 서란의 명령으로 누워 있었지만 잠들지 못했다. 백도윤의 기계 새는 천장 배관 위에 앉아 말없이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비호는 마지막으로 노심 냉각판을 점검했다. 손을 댈 수 있을 만큼 식어 있었다. 그런데 한가운데 작은 푸른 점이 남아 있었다. 백호 1식 것이 아니라 형의 청염이 남긴 점이었다.
“꺼져야 하는데.” 비호가 중얼거렸다.
그 순간 격납고 깊은 곳에서 가느다란 종소리가 울렸다.
딸랑.
비호가 얼어붙었다. 백호 1식에서 난 소리가 아니었다. 강민 곁에 놓아 둔 흉갑 안쪽 감응구에서 난 소리였다. 서란이 고개를 들었다. 강민도 눈을 떴다.
“누나, 지금 그거…….”
“쉿.”
두 번째 종소리가 울렸다. 이번엔 조금 더 길었다.
딸랑—
비호가 기록판을 떨어뜨렸다. 황동판이 바닥에 부딪혀 큰 소리를 냈다. 아무도 그쪽을 보지 않았다. 모두의 눈이 강민의 가슴에 붙어 있었다. 얇은 옷감 밑에서 푸른빛이 아주 천천히, 잠에서 깬 심장처럼 번지고 있었다.
격납고 바깥, 부서진 자동병 렌즈 조각 하나가 진흙 속에서 마지막으로 붉게 깜빡였다.
“누나.” 비호가 겨우 입을 뗐다. “형 가슴…… 백호 1식이랑 같은 색이야.”
비호는 그제야 알았다. 오늘 깨어난 건 백호 1식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