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점 · 강민 — 균열·낙인 단계

청염심법 1경계

第1部 · 話 20 · 검령성 · published

海東曆: 201년 6월 27일 · 시점: 강민

흉갑 안쪽 작은 종은 새벽부터 울리고 있었다.

처음엔 벌레가 황동판을 갉는 소리처럼 가늘었다. 강민은 피로가 귀 안쪽에서 만드는 헛소리라고 여겼다. 사흘 전 백호 1식을 처음 깨우고, 반백파 정찰 자동병을 부수며, 청염기관(靑炎機關)을 평소보다 몇 배나 밀어 올렸으니 그 정도 여운은 남을 수 있었다.

단비호는 밤새 백호 1식 발목 관절에 매달려 관절유를 채웠고, 장무겸은 폐기지 바깥 통로를 돌며 두 번째 정찰병이 남긴 발자국을 지웠다. 유서란은 강민 손목에 침을 놓으며 세 번이나 말했다.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바로 불러. 참는 건 수련이 아니라 사고야.”

강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참았다.

해룡성 외곽의 버려진 보급 폐기지는 황도 관청 문서에 오래전 닫힌 곡물 창고로만 남아 있었다. 벽 속을 뜯어 보면 곡물과 아무 상관없는 황동 배관과 고압 밸브, 코테르(機核) 감응구가 뿌리처럼 얽혀 있었다. 일행이 숨은 곳은 그 아래 세 번째 층, 백호 1식 격납실에서 사다리 네 개를 더 내려가야 닿는 지하 저수조였다. 천장은 낮고 벽은 습기로 검게 젖었으며, 흐름을 잃은 바닥 물길에서 녹 냄새와 이끼 냄새가 함께 올라왔다.

조용한 곳이라 종소리가 더 또렷했다.

딸랑.

강민이 손바닥을 가슴에 얹었다. 흉갑 안쪽 경보 감응구가 살갗 너머에서 가늘게 떨렸다. 비호가 급히 달아 둔 물건이었다. 원래 백호 1식의 작은 보조 경보 부품인데, 강민 가슴 떨림을 재려고 손바닥보다 작게 깎아 붙였다. 평소엔 조용하다가 과열이 일정 수치를 넘으면 안쪽 얇은 은선이 떨리며 종처럼 울렸다.

딸랑.

이번엔 조금 길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뜨거워졌다. 손톱 밑으로 푸른빛이 차올랐다 사라졌다. 오른손을 물에 담갔다. 찬 물이 손가락을 감쌌지만 곧 손등 주변에서 얇은 김이 올랐다.

“아직 괜찮아.”

혼잣말이 물에 닿자마자 힘을 잃었다. 괜찮지 않았다. 몸 안에서 뭔가가 계단을 하나씩 내려가는 게 아니라 계단을 통째로 부수며 떨어지고 있었다. 단전은 묵직했고 왼쪽 가슴은 너무 가벼웠다. 심장이 몸을 붙드는 게 아니라 몸이 심장을 겨우 붙들고 있었다. 청염기관은 일정하게 뛰지 않았다. 쇠사슬을 문 짐승이 이빨로 쇠를 갉듯 박동과 박동 사이를 뜯어냈다.

등 뒤에서 발소리가 났다.

“형.”

비호였다. 잠을 거의 못 잔 얼굴이었다. 눈 밑에 그을음이 묻었고 손등은 관절유와 재로 얼룩져 있었다. 손엔 땅콩 대신 길쭉한 압력계와 가죽끈으로 묶은 정비 노트가 들려 있었다. 강민 손 주변에서 오르는 김을 보더니 말없이 세 걸음 다가왔다.

“형, 손 좀.”

“괜찮아.”

“안 괜찮을 때 형이 제일 먼저 하는 말이 그거야. 손.”

강민은 웃으려 했지만 입꼬리가 안 올라갔다. 오른손을 내밀었다. 비호가 압력계 바늘 끝을 손목 안쪽에 댔다. 바늘이 가볍게 떨리더니 곧 오른쪽 끝까지 튀었다.

찰칵.

작은 멈춤쇠가 부러졌다. 비호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누나 부를게.”

“비호야.”

“지금 장난 아니야. 내 압력계가 약해서 부러진 게 아니야. 형 몸 안에서 밀려 나오는 힘이 너무 세서, 바늘이 끝까지 가기도 전에 축이 먼저 꺾였어.”

비호가 뒤도 안 보고 뛰었다. 몇 분 안 돼 서란이 침통과 냉각통을 들고 내려왔고 무겸이 창을 들고 뒤따랐다. 무겸 갑주 어깨에 바깥 순찰 때 묻은 흙먼지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가 저수조 입구를 막아서며 짧게 물었다.

“반백파냐?”

“아니요, 오라버니. 더 급한 건 안쪽이에요.”

서란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흉갑 고리를 풀어 감응구를 꺼냈다. 그녀 손바닥 위에서도 계속 울렸다. 얇은 은선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그 빨강 밑에서 푸른 점이 간간이 뛰었다.

“강민아, 언제부터였어?”

“새벽부터 조금.”

“조금?”

“처음엔 종이 한 번만 울렸어.”

“지금은 네 몸 전체가 종이야.”

서란이 손목을 잡았다. 손가락이 닿자마자 그녀 팔까지 떨렸다. 강민의 맥은 뜨거웠다. 사람 핏줄이 아니라 압력이 넘쳐 터지기 직전의 증기선 같았다. 빠르고, 사이사이 빈 구멍이 있었다. 구멍마다 청염이 치솟았다 떨어졌다. 서란의 금빛 기공이 손목으로 스며들자 가슴 안쪽 푸른 불꽃이 그걸 밀쳐 냈다.

“안 들어가.”

“누나 기공이 안 들어간다고?” 비호가 숨을 삼켰다.

“밀려나. 냉각통도 늦어. 비호야, 저수조 둘레에 방열판 둘러. 무겸 오라버니, 입구 막아 주세요. 안쪽 소리가 새면 누가 오기 전에 폐기지가 먼저 우리 위치를 알려 줄 거예요.”

“알았다.”

무겸은 더 묻지 않았다. 창끝으로 입구 옆 녹슨 고리를 끌어당기자 두꺼운 철문이 천천히 내려왔다. 오래된 사슬이 천장에서 비명을 질렀다. 문이 닫히자 저수조는 바깥과 끊어졌다. 네 사람의 숨, 물 위 김, 끊이지 않는 종소리만 남았다.

서란이 강민 등 뒤에 무릎을 꿇고 침 세 개를 꺼냈다. 하나는 단전 위, 하나는 왼쪽 가슴 아래, 하나는 목덜미 기맥 길목. 침이 들어가자 푸른빛이 침끝을 타고 올라왔다. 보통 열이면 쇠가 붉어져야 했다. 강민의 열은 침을 푸르게 물들였다. 서란이 이를 악물고 자기 기공을 침 길을 따라 밀어 넣었다.

“숨 낮춰.”

“하고 있어.”

“아니, 네가 생각하는 숨 말고. 적을 볼 때 숨도 아니고, 기체 깨울 때 숨도 아니야. 네 안에서 불이 올라오기 전, 불이 아직 이름도 없던 자리까지 낮춰.”

강민이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시야 가장자리 푸른 잔상이 더 짙어졌다. 검령성의 불길. 사부 설무진의 등. 붉은 밤, 콧등을 가르던 차가운 통증, 지하 연구소 벽, 가슴속으로 들어오던 금지된 심장. 기억들이 순서 없이 몰려왔다. 화가 나면 더 뛰었고, 죄책감이 깊어지면 더 뜨거워졌다. 백호 1식이 첫발을 딛던 박자, 광휘은신이 안개 속에서 기체를 감추던 박자, 자동병 관절이 으스러지던 박자까지 한꺼번에 몸 안에서 싸웠다.

딸랑딸랑딸랑.

비호는 저수조 가장자리를 뛰어다녔다. 낡은 철판을 물속에 세우고 백호 1식 예비 장갑에서 뜯어 온 얇은 방열판을 벽에 기댔다. 손이 데어도 소리를 삼켰다. 작은 손바닥에 물집이 오르는 동안에도 정비 노트를 바닥에 펼쳐 놓고 수치를 외쳤다.

“물 표면 47도! 아니, 51도! 너무 빨라! 누나, 이러다 물이 먼저 끓어!”

“냉각통 열어.”

“벌써 반 열었어! 다 열면 터질 수도 있어!”

“터지기 전에 얘가 먼저 터져. 열어!”

비호가 보조 밸브를 이로 물어 당기다시피 열었다. 푸른 서리 섞인 흰 김이 관에서 뿜어졌다. 냉기와 열기가 저수조 위에서 부딪히자 지하 전체가 안개로 찼다. 강민은 그 안개 속에서 반쯤 물에 잠긴 채 몸을 구부렸다. 물이 허리까지 찼는데도 살갗은 끓는 쇳덩이처럼 뜨거웠다. 청염기관이 한 번 크게 뛰자 저수조 물이 둥글게 밀려 나갔다가 벽을 때리고 돌아왔다.

쾅.

“바깥으로 울림이 새고 있다.” 무겸이 입구에서 창을 세웠다. “폐기지 위쪽 배관이 같이 떤다.”

“적이 와요?” 비호가 물었다.

“아직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소리면 쥐도 길을 찾겠다.”

무겸이 창대를 벽에 기대고 두 손으로 문고리를 눌렀다. 저수조 안에서 생긴 열과 냉기가 갈 곳을 못 찾아 문을 밀어 대고 있었다. 그가 버티지 않으면 문이 열리고, 푸른 김이 폐기지 위층으로 터져 나간다. 그 빛은 황도 외곽 어디서든 보일 것이었다.

서란이 강민 귓가로 몸을 바짝 낮췄다.

“강민아. 내 말 들어. 냉각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다 했어. 더 누르면 네 기맥이 얼고, 덜 누르면 청염이 올라와. 이제 네가 해야 해.”

“뭘.”

목소리가 갈라졌다.

“길을 정해. 청염 나오는 길을 막지 말고, 네가 지나가게 할 길을 정해.”

“나 아직 그거 몰라.”

“몰라도 해. 모르는 걸 해내야 사는 때가 있어.”

차가운 말이었다. 차가워서 다정했다. 서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비호의 숨도, 문을 버티며 이를 악무는 무겸의 소리도 들렸다. 청염기관의 굉음 속에서도 세 사람의 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 자신을 붙들고 있는 건 냉각통도 침도 방열판도 아니었다. 자기 안으로 무너지는 불 앞에서 세 사람이 도망치지 않고 남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게 아주 작은 못처럼 마음 깊은 곳에 박혔다.

강민이 물속에서 두 손을 폈다. 손끝에서 청염이 실처럼 새어 나왔다. 본능적으로 밀어내려 했다. 밀어낼수록 더 크게 솟구쳤다. 억지로 문을 닫으면 안쪽 압력이 벽을 찢듯, 힘으로 누른 청염은 다른 길을 찾아 기맥을 갉아먹었다.

“막는 게 아니야.” 강민이 이를 악문 채 중얼거렸다. “타게 두는 것도 아니야.”

첫 수련의 새벽이 떠올랐다. 검령성 도장 보일러 앞에서 황동 밸브를 손대지 않고 열던 순간. 그때 그는 증기를 이기려 하지 않았다. 증기가 가려는 방향을 먼저 듣고, 그보다 조금 앞에서 길을 열었다. 압력에 명령한 게 아니라 압력과 약속했다.

백호 1식 조종석에서도 그랬다. 강철 짐승은 그의 의지에 굴복해 움직인 게 아니었다. 기체가 딛으려는 무게를 단전이 받아 냈고, 숨이 기체 관절에 시간을 주었다.

“기체는 사람이 타야 움직인다.” 강민이 비호가 적어 둔 말을 되뇌었다. “그럼 몸도 그래.”

청염기관이라는 기계를 품은 이상 그는 자기 몸을 타야 했다. 몸을 버리고 힘만 붙잡을 수 없었다. 심장을 적으로 여기고 싸울 수도 없었다. 불을 괴물로 몰면 괴물이 됐고, 불을 주인으로 삼으면 자신이 사라졌다. 그 사이, 칼날보다 얇은 길을 찾아야 했다.

강민은 숨을 네 번으로 나눴다.

첫 숨은 듣기였다. 청염기관의 미친 박동을 끝까지 들었다. 도망치지 않고, 분노로 덮지도 않았다. 박동은 엉망이 아니었다. 너무 빠를 뿐이었다. 그 안에 일정한 중심 박자가 있었다. 고장 난 톱니도 완전히 제멋대로 돌진 않는다. 축 하나가 틀어졌을 뿐이고, 축이 어디 있는지 알면 다시 맞출 수 있다.

둘째 숨은 낮추기였다. 단전 깊은 곳에 남은 정종기공의 잔불을 끌어내렸다. 아래로, 더 아래로. 가슴의 불길과 부딪히게 하지 않고 발바닥 밑 물의 차가움까지 내려보냈다. 물은 끓고 있었지만 그 밑 돌바닥은 아직 차가웠다. 그 차가움을 기맥의 바닥으로 삼았다.

셋째 숨은 잇기였다. 단전에서 머리카락처럼 가는 실 하나를 만들어 청염기관 점화구 가장자리로 보냈다. 닿자마자 타 버렸다. 다시 만들었다. 또 탔다. 다시 만들었다. 세 번째 실이 닿았을 때 힘을 넣지 않았다. 가장 빠른 박동 사이 아주 짧은 틈에 실을 걸기만 했다.

넷째 숨은 맞추기였다.

딸랑.

종이 한 번 울었다. 길지 않았다. 가슴 안에서 솟구치려던 푸른 불꽃이 실에 걸린 듯 방향을 바꿨다.

강민이 두 눈을 떴다. 물 위 안개가 멈춘 것처럼 보였다. 안개가 멈춘 게 아니었다. 감각이 너무 정밀해져서 물방울 하나하나가 움직이는 속도까지 따로 느껴졌다. 청염이 기맥을 찢고 나오는 길목마다 작은 문을 만들었다. 닫힌 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무 데로나 열리지도 않았다.

“강민아?”

서란의 목소리가 멀었다. 대답하면 숨이 깨질 것 같았다. 대신 오른손 검지를 물 위로 천천히 들어 올렸다.

손끝에서 푸른 불꽃이 피었다. 예전 청염처럼 터지지 않았다. 배관을 찢지도, 물을 끓이지도, 살갗을 태우지도 않았다. 바람 없는 방에서 심지가 곧게 선 작은 등불 같았다. 물 위 안개가 그 빛을 받아 얇게 푸르게 물들었다.

비호의 입이 벌어졌다.

“누나, 저거…… 수치가 이상해. 열은 떨어지는데 힘은 안 떨어져. 아니, 오히려 더 맑아졌어.”

서란이 손목을 다시 잡았다. 이번엔 기공이 밀려나지 않았다. 금빛 기공이 청염 옆을 지나가도 두 힘이 서로 물어뜯지 않았다. 다른 톱니 두 개가 같은 축 위에서 각자 속도를 맞추듯 부딪히지 않고 지나갔다. 서란의 눈이 젖을 듯 흔들렸다.

“박동이…… 잡혔어.”

“잡혔다는 건?” 무겸이 문에서 몸을 돌렸다.

“폭주가 멈췄다는 게 아니에요. 폭주가 길을 찾았다는 거예요.”

비호가 정비 노트에 급히 적었다. 손은 떨렸지만 글씨는 또렷했다.

‘청염심법 1경계. 위기 속 도달. 동기화 안정. 숨 네 단계: 듣기, 낮추기, 잇기, 맞추기.’

잠깐 망설이다 마지막 줄을 덧붙였다.

‘형이 불을 이긴 게 아니다. 형이 불이 지나는 길에 같이 섰다.’

그 순간 가슴 안쪽에서 또 한 번 큰 떨림이 일었다. 이번엔 달랐다. 부수는 충격이 아니라, 오래 멈춰 있던 거대한 기관이 처음으로 제 규격에 맞는 톱니를 찾아 끼우는 소리였다.

저수조 벽의 낡은 감응구들이 하나둘 희미하게 켜졌다. 200년 동안 잠들어 있던 옛 장치들이 안정된 청염 주기를 받아 아주 잠깐 눈을 떴다. 바래서 알아보기 어렵던 문양이 벽에 떠올랐다. 백씨 가문의 흰 용 문양이 아니었다. 그보다 오래된, 검과 톱니가 서로를 감싼 둥근 문양이었다.

강민은 그 문양을 보았지만 뜻을 몰랐다. 아직 알아선 안 되는 것처럼 문양은 곧 꺼졌다.

물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83도까지 올랐던 온도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방열판에 맺힌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고 냉각통 밸브에서 찢어지는 소리가 멎었다. 감응구 종도 멎었다. 손끝에 뜬 작은 청염만 남았다.

강민은 그 불꽃을 보았다. 아름답다고 느낀 건 처음이었다. 전엔 늘 무서웠다. 검령성의 밤과 스승의 죽음, 가문의 죄, 황실의 그림자, 반백파의 칼날이 떠올랐다. 지금 손끝 불꽃은 아무것도 빼앗지 않았다. 그냥 있었다. 물 한 방울이 물인 것처럼, 불 한 점이 불인 것처럼.

이 힘에 당하기만 하는 사람은 아니구나. 그렇다고 이 힘의 주인이라고 쉽게 말할 수도 없구나.

“힘은 주인이 아니라 책임질 사람을 찾는다.”

어디서 온 말인지 몰랐다. 스승 목소리 같기도 했고 자기 안에서 처음 생긴 문장 같기도 했다. 강민이 손끝 청염을 조심스럽게 단전으로 거뒀다. 불꽃은 사라지지 않고 가슴으로 돌아갔다. 청염기관이 한 번, 두 번, 세 번 뛰었다. 세 번 모두 같은 간격이었다.

서란이 그제야 뒤로 주저앉았다. 밤새 버틴 긴장이 풀렸는지 침통 쥔 손이 무릎 위로 떨어졌다. 강민이 물속에서 일어나려 하자 곧장 눈을 치켜떴다.

“움직이지 마.”

“괜찮아졌어.”

“그 말 금지. 적어도 오늘 하루는 금지.”

“나도 찬성.” 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 괜찮다고 하면 대체로 뭐가 부러졌거나, 터졌거나, 곧 터질 예정이야.”

강민이 아주 작게 웃었다. 웃음이 나왔다는 게 낯설었다. 몇 시간 전엔 입을 열면 푸른 불이 목구멍을 찢고 나올 것 같았다.

무겸도 문가에서 숨을 내쉬었다. 손바닥에 사슬 자국이 깊게 패여 있었다. 대충 털어 내고 강민을 보았다.

“살아남았구나.”

“무겸 형이 문 안 막았으면 폐기지 지붕 날아갔을 거예요.”

“그랬으면 황도 사람들이 아침 구경은 제대로 했겠지. 변방 도장 출신 하나가 해룡성 외곽 창고를 푸른 찜통으로 만들었다고.”

비호가 피식 웃다가 곧 정색했다. “웃을 일 아니에요. 진짜로 지붕 몇 장 들렸어요. 위층 배관 셋이 같이 울었고 넷째 배관은 지금도 떨려요. 반백파 귀가 멀지 않았으면 오늘 안에 누가 확인하러 와요.”

무겸의 눈빛이 다시 차가워졌다. “그럼 오래 못 있겠군.”

“움직일 수는 있어요.” 서란이 강민 손목을 놓지 않은 채 말했다. “다만 뛰면 안 되고, 싸우면 더 안 되고, 백호 1식 조종석엔 절대 다시 들어가면 안 돼요. 적어도 사흘은.”

“사흘?” 비호가 되물었다. “누나, 너무 짧아. 최소 일주일은 쉬어야 해. 내 장치도 다시 짜야 하고 냉각통도 거의 죽었어.”

“나도 일주일이라고 하고 싶어. 근데 우리가 일주일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겠어.”

서란의 눈이 저수조 벽으로 향했다. 조금 전 켜졌다 사라진 문양이 있던 자리였다.

“누나도 봤어?” 강민이 물었다.

“봤어.”

“무슨 뜻인지 알아?”

“몰라. 근데 모르는 문양이 사람 몸 반응에 맞춰 켜지는 건, 대체로 좋기만 한 일은 아니야. 이 폐기지가 그냥 은신처가 아니고, 백호 1식도 그냥 병기가 아니라는 거지. 네 가슴이 안정되니까 죽은 장치들이 기다렸다는 듯 반응했잖아. 좋은 징조일 수도, 더 깊은 위험 입구일 수도 있어.”

“문양은 못 그렸어. 너무 빨리 사라져서.” 비호가 노트를 넘겼다. “대신 위치는 적었어. 저기서 동쪽 벽까지 2.7미터, 바닥에서 1.4미터. 다음에 또 켜지면 본뜰 거야.”

“다음에?” 서란이 눈을 가늘게 했다.

“다음이 없으면 제일 좋지. 근데 우리한텐 늘 다음이 있었잖아.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농담처럼 들렸지만 아무도 웃지 못했다.

강민이 저수조 가장자리를 붙잡고 천천히 일어났다. 서란이 막으려 했지만 그는 무리하지 않고 물 밖으로 한 발만 옮겼다. 몸이 무거웠다. 하지만 아까의 무게와 달랐다. 폭주가 아래로 끌어내리는 무게가 아니라 스스로 져야 할 도구의 무게였다. 젖은 바지가 돌바닥에 물 자국을 남겼다. 벽에 기대 숨을 골랐다.

“1경계가 뭔지 알 것 같아.” 강민이 천천히 말했다. “강해지는 게 아니야. 적어도 오늘 나한텐. 안 죽는 거야. 내 안의 힘한테 안 잡아먹히려고 그 힘이랑 한 방에 앉는 법을 배우는 거. 검 휘두르기 전에 검집을 만드는 거. 불 쏘기 전에 화로를 세우는 거.”

“누구 이기기 전에 자기를 안 태우는 법.” 서란이 덧붙였다.

“응. 그게 지금 나한테 제일 필요했어.”

잠깐 말이 없다가 강민이 입을 열었다.

“미안해.”

세 사람이 동시에 그를 보았다. 강민이 젖은 머리에서 떨어지는 물을 손등으로 훔쳤다.

“아까 괜찮다고 한 거. 거짓말이었어.”

“드디어 인정했네.” 비호가 입을 삐죽였다. “기록해도 돼?”

“하지 마.”

“이미 했어. ‘형, 안 괜찮은데 괜찮다고 함. 앞으로 위험 신호로 지정.’”

서란이 처음으로 작게 웃었다. 피로에 젖었고, 조금 화가 나 있었고, 그보다 더 깊이 안도한 웃음이었다. 그녀가 강민 젖은 어깨에 마른 천을 덮어 주었다.

“다음부턴 내가 묻기 전에 말해. 네 몸은 네 것만이 아니야. 네가 쓰러지면 비호도 같이 무너지고, 무겸 오라버니도 같이 막아야 하고, 나도 네 몸속까지 들어가서 싸워야 해. 그러니까 숨기지 마.”

“응, 누나.”

순순한 대답이 오히려 모두를 잠깐 멈추게 했다. 비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형, 진짜 한 번 죽을 뻔하고 나면 말 잘 듣는구나. 무섭다.”

“비호야.”

“농담이야. 반쯤.”

무겸이 바닥에 놓인 부러진 압력계를 주웠다. 바늘 축이 완전히 꺾여 있었다. 잠깐 내려다보다 비호에게 건넸다.

“고쳐 쓸 수 있겠느냐?”

“고치기는 해요. 근데 원래대로는 못 써요. 형 맥 재려면 이제 이걸로는 안 돼요. 더 정밀한 걸 만들어야 해요. 사람 몸 재는 장치랑 기계 힘 재는 장치 중간쯤 되는 이상한 물건이요.”

“이름은?”

“청염 대조계. 아니, 너무 딱딱해. 형 전용 거짓말 탐지기?”

“기각.” 강민이 바로 잘랐다.

“그럼 나중에 정하지.”

그 사소한 대화가 저수조 공기를 조금 사람 사는 데처럼 만들었다. 조금 전까지 이곳은 터지기 직전의 보일러실이었다. 이제는 젖은 옷과 부서진 압력계, 지친 웃음과 차가운 돌바닥이 있는 은신처였다. 살아남은 뒤에야 알 수 있는 평범함이었다.

서란이 그 자리에서 다시 진맥했다. 이번엔 한 번으로 끝내지 않았다. 왼손목, 오른손목, 목덜미, 명치 아래, 단전 위. 다섯 곳을 차례로 짚으며 눈을 감았다. 그녀 손끝이 지나갈 때마다 강민은 몸 안 길들이 다시 이름을 얻는 것 같았다. 아까는 모든 길이 불길로 뭉개져 있었다. 이제 좁지만 분명한 통로가 있었다. 청염기관에서 단전으로, 단전에서 팔 기맥으로, 팔에서 손끝으로, 다시 손끝에서 가슴으로. 완전한 순환이라기엔 거칠고 안전하다기엔 아직 뜨거웠지만, 적어도 길이었다.

“맥이 네 번에 한 번씩 깊게 가라앉아.”

“네 번에 한 번. 깊이.” 비호가 받아 적었다.

“그냥 쓰지 말고 뜻도 적어.”

“뜻?”

“이건 쉬어 가는 박자야. 청염이 계속 밀고만 나오면 몸이 못 버텨. 근데 지금은 네 번째 박동마다 안으로 물러나. 강민이가 방금 만든 길이 불한테도 숨 쉴 자리를 준 거야.”

비호가 잠깐 멈췄다가 노트 한 줄을 길게 비우고 평소보다 훨씬 조심스러운 글씨로 적었다. ‘불한테도 숨 쉴 자리를 준다.’ 그 문장이 마음에 들었는지 밑줄을 두 번 그었다.

무겸이 저수조 계단 위를 한 번 더 확인하고 돌아왔다. 표정이 조금 굳어 있었다.

“위층 배관 두 곳이 푸르게 물들었다. 아주 옅지만 흔적이 남았다. 해가 완전히 뜨면 눈 밝은 놈은 본다.”

“닦으면 지워져요?”

“겉은 지우겠지. 냄새는 남는다. 쇠 탄 냄새, 물 끓은 냄새, 그리고 코테르가 깨어났다 다시 잠든 냄새.”

강민은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흉터 생긴 콧등보다 손등의 얇은 푸른 핏줄 무늬가 더 낯설었다. 예전 같으면 바로 검을 잡았을 것이다. 적이 오면 먼저 나가 막겠다고 했을 것이다. 이번엔 잠깐 입을 다물었다. 힘이 안정됐다고 바로 써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무겸 형.”

“말해라.”

“위층 흔적은 제가 지울게요. 싸우러 가는 게 아니라, 제가 만든 흔적을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요.”

서란이 곧장 눈을 들었다. 강민이 그녀가 말하기 전에 덧붙였다.

“천천히 갈게. 비호가 옆에서 수치 재고, 누나가 멈추라면 멈출게.”

“형이 방금 자기가 감시받겠다고 먼저 말했어.” 비호가 놀란 얼굴로 보았다. “이거 진짜 기록해야 해.”

“그것도 하지 마.”

“이미 했어. 두 번째 줄.”

위층으로 올라가는 길은 짧았지만 쉽지 않았다. 사다리 첫 세 칸에서 다리가 흔들렸고, 넷째 칸에서 청염기관이 한 번 깊게 꺼졌다. 서두르지 않았다. 네 번째 박동을 기다렸다. 불이 안으로 숨을 들이는 박동. 거기에 맞춰 손에 힘을 주자 몸이 다시 따라왔다.

“됐어?” 아래서 서란이 물었다.

“됐어. 진짜로.”

작은 성공이었다. 그 작은 성공 덕분에 방금 얻은 경지가 허공의 이름이 아니라 실제로 몸을 붙드는 기술이라는 걸 더 분명히 알았다.

위층 배관엔 정말 푸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손가락 한 마디 길이의 가느다란 선. 등골이 서늘해졌다. 저 선 하나가 누구 눈에 띄면 폐기지 비밀도, 백호 1식의 존재도, 일행의 동선도 다 흔들릴 수 있었다.

헝겊으로 무작정 문지르지 않았다. 손끝에 아주 작은 청염을 올리고 흔적의 박자를 들었다. 아직 불이 남아 있었다. 억지로 지우면 쇠가 더 깊게 상한다. 그 불이 자기 손끝 불꽃과 같은 박자로 숨을 내쉴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장 약한 순간 젖은 천으로 눌렀다. 푸른 선이 거짓말처럼 옅어졌다.

“형, 지금 그거……” 비호가 뒤에서 거의 속삭였다. “싸움보다 더 어려운 정비야.”

강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속으로는 인정했다. 적을 베는 것보다 남은 흔적을 다치지 않게 거두는 일이 더 어려웠다. 그 어려움이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평범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저수조로 돌아오자 위층에서 아주 희미한 소리가 났다. 처음엔 물방울인 줄 알았다. 똑. 똑. 똑. 일정한 간격. 무겸이 곧장 창을 집었다. 비호는 노트를 덮고 공구 가방에서 폭약나사 두 개를 꺼냈다. 서란이 강민을 뒤로 밀려 했다. 강민은 이번엔 숨기지 않고 말했다.

“움직일 수 있어. 싸우진 않을게.”

“그 약속 지켜.”

말이 끝나기 전에 위층 소리가 바뀌었다.

딸랑.

강민 몸이 굳었다. 감응구 종은 이미 멎어 있었다. 이번 종소리는 흉갑 안이 아니라 폐기지 위층, 닫힌 철문 너머에서 났다. 작은 쇠고리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 적 자동병 톱니음도, 반백파 정찰병 신호음도 아니었다. 이상하게 맑았다. 녹슨 폐기지와 어울리지 않는 소리였다.

딸랑, 딸랑.

“누구냐.” 무겸이 창끝을 문틈으로 겨눴다.

잠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문 너머에서 낯선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늙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낮고 정중했고, 이상하게도 강민 가슴 안 박자와 같은 속도로 말을 골랐다.

“문을 부수러 온 이는 아닙니다. 다만 이 폐기지 아래에서, 살려고 애쓰는 불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습니다.”

강민이 숨을 멈췄다. 노인의 목소리가 잠깐 쉬었다가 더 가까이에서 물었다.

“그 불을 익힌 소년은, 사람을 태우는 법보다 사람을 살리는 법을 먼저 배울 생각이 있습니까?”

— 話 20 終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