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淸雨) 대사의 등장
海東曆: 201년 7월 3일 · 시점: 강민
빗물받이 홈통에서 떨어진 물방울 하나가 황동 난간을 때리자, 난간 속 빈 관이 낮게 울었다.
해룡성(海龍城) 서남 관문은 오전 8시가 넘도록 납빛 하늘 아래 사람과 짐수레로 막혀 있었다. 장마 전선이 산맥에 걸린 탓에 검문소 등불은 꺼지지 않았고, 젖은 깃발은 바람을 먹지 못해 축 늘어져 있었다.
“형, 저 감응종은 사람이 아니라 쇠를 봐.” 단비호(段飛虎)가 공구가방을 끌어안고 성문 위 청동 새들을 훔쳐보았다. “관절에 의체가 있거나 코테르(機核) 반응이 있으면 먼저 울려. 근데 바늘이 자꾸 오른쪽으로 치우쳐. 누가 안쪽에서 기준을 일부러 높였어.”
“세 개가 한꺼번에 울리면?”
“위험한 반응이란 뜻이야. 상인은 맑게 한 번, 의체 병사는 거칠게 두 번.” 비호가 강민의 가슴께를 흘끗 보았다. “형은…… 아마 세 번.”
강민은 망토 모자를 낮게 눌러썼다. 나흘 전 폐기지 지하 저수조에서 청염심법(靑炎心法) 1경계를 붙잡은 뒤로, 가슴속 청염기관(靑炎機關)은 규칙을 얻었다. 그 규칙은 언제든 칼날로 바뀔 수 있었다.
“상인 놋단추에도 떨고 있군. 성문 검문이 아니라 사냥이다.” 장무겸(張武謙)이 창대를 어깨에 기대며 이를 악물었다.
유서란(柳瑞蘭)은 약상자를 끌어안은 채 강민의 얼굴보다 손끝을 더 자주 살폈다.
“누나, 손 그만 봐. 괜찮아.”
“괜찮은지는 내가 봐. 손끝이 식는지, 손목 무늬가 번지는지, 숨이 짧아지는지.”
“한 번도 안 놓치네.”
“놓치면 의공사가 아니지.”
검문 줄에는 스팀갱(蒸汽坑) 외곽에서 밀려난 노동자 가족과 도공거리 장인, 밀월성 통행패를 받으려는 무인들이 뒤엉켜 있었다. 반백파(反白派) 관복의 무사들은 그들의 짐을 일부러 쏟게 했다.
“성함이 뭐라고? 다시.” 한 무사가 장부를 두드렸다. “아까는 다르게 말했잖아.”
“세 번째입니다, 나리. 같은 이름입니다.”
“그럼 세 번 더 말해 봐.”
“스팀갱에서 밀려난 사람들까지 세워 두고 저러는군.” 무겸이 혀를 찼다.
“지친 사람 화를 돋워서 죄목을 만드는 거야.” 서란이 낮게 말했다.
“검령성에 있을 땐 그냥 무례한 검문인 줄 알았을 거야.”
“사부님 일 이후로는 달라 보이지?”
“길 아래엔 늘 다른 길이 있다.” 무겸이 앞을 본 채 말했다. “그 길을 파는 손은 대개 웃고 있고.”
그때 검문대 안쪽에서 짧은 비명이 터졌다.
열 살쯤 된 소년이 진창에 넘어져 있었다. 품에서 낡은 기계목어(機械木魚) 조각이 굴러 나왔다. 나무와 황동이 반쯤 섞인 작은 부품이었다.
“반백파 색출령을 모르는가. 기계목어는 금지된 절맥파(絶脈派)의 표식이다. 이 아이는 데려간다. 보호자는 뒤따라와 심문을 받는다!”
“폐사에서 주운 걸로 장난감을 만들었을 뿐이에요, 나리! 제발!”
아이 어머니가 무릎을 꿇자 무사는 부츠 끝으로 그녀의 턱을 밀어 올렸다. 주변 사람들은 고개를 숙였다. 살아남는 법을 배운 얼굴들이었다.
강민의 손가락이 본국검(本國劍) 검집을 건드렸다. 내부 실린더가 손바닥 아래에서 반응했다. 계산은 이미 끝나 있었다. 그 끝에는 피가 있었다.
“강민아.” 서란의 손이 그의 팔목 위에 얹혔다.
“누나, 지금 베면 빨라. 손목 하나, 아이 하나, 문 하나.”
“빠르고, 피가 나고, 저 종이 울리겠지. 그다음엔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전부 방패가 돼.”
가슴속 불이 오히려 날카로워졌다. 베는 것은 쉽다. 베지 않고 구하는 것이 어려웠다.
찰랑—
맑은 금속음이 줄 뒤쪽에서 굴러왔다. 낡은 회색 승복의 사내가 여섯 고리 달린 육환장(六環杖)을 짚고 비를 맞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마흔을 조금 넘긴 얼굴이었다.
“……스님?” 무겸이 낮게 중얼거렸다. “허리에 칼 한 자루 없는데, 저길 걸어서 들어가?”
“포대에서 약초가 삐져나왔어요. 빵도요.” 비호가 목을 뺐다. “가슴에 건 건 호심경인가? 그냥 청동인데.”
사내는 아이를 잡은 무사 앞에서 허리를 깊게 숙였다.
“대인, 그 물건은 절맥파 표식이 아닙니다. 폐사에서 쓰던 기계목어의 공명추입니다. 아이의 죄가 있다면 고장 난 소리를 장난감으로 여긴 죄뿐입니다.”
“중놈이 검문을 가르치나?”
“가르치려는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틀린 죄목은 사람을 더럽히고, 더럽혀진 사람은 오래 씻기 어렵습니다.”
“말이 길다. 소속을 대라.”
“청우(淸雨)라 합니다. 한때 동쪽 폐사에 머물렀고, 지금은 길 위에서 밥을 얻어먹는 승려입니다.”
“그럼 네가 대신 심문을 받으면 되겠군.”
무사의 팔꿈치에서 톱니 칼날이 튀어나왔다. 빗물에 젖은 작은 이빨들이 은빛으로 번뜩였다. 팔이 청우의 목을 향해 뻗었다. 사람을 때리는 데 익숙한 자의 손이었다.
찰랑—
청우는 물러서지 않았다. 장대를 세워 무사의 손목 아래를 받치고, 쇠고리 하나를 팔꿈치 바깥쪽에 걸었다. 밀지도, 당기지도 않았다.
“어, 어어……?”
무사의 몸이 제 힘에 쏠려 젖은 나무판 위에 무릎부터 떨어졌다.
쾅!
“대인, 더 움직이면 목숨이 아니라 숨길이 다칩니다. 죽지는 않으나 사흘 동안 물도 삼키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일어나지 마십시오.”
협박처럼 들리지 않았다. 뜨거운 물을 조심하라고 일러 주는 사람 같았다.
“저 중놈을 잡아라!” 무사의 동료 셋이 동시에 창을 겨누었다. “움직이면 목을 친다!”
“셋은 내가 맡는다.” 무겸의 창끝이 낮아졌다. “서란, 세검은 아직 뽑지 마.”
“손만 얹었어요.” 서란이 약상자 끈을 풀며 대꾸했다.
“나사 폭약 두 개 꺼냈어. 아직 안 던져, 아직!” 비호가 속삭였다.
성문 위 감응종이 울렸다. 그러나 가장 왼쪽 종 하나만 작게 흔들렸다.
“저 사람…… 기계가 없는데 기계를 이겼어.” 비호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기계를 이긴 게 아니야. 기계가 붙은 사람을 넘어뜨린 거지.” 강민이 말했다. 말하고 나서 스스로 놀랐다.
“코테르 반응이 거의 없어. 저 몸으로 의체 무사를…….” 서란이 숨을 삼켰다.
“비어 있는 거다.” 무겸이 창대를 고쳐 쥐었다. “비어 있으니 상대 힘이 그 빈 곳으로 떨어지는 거지.”
“비어 있으면 힘이 어디로 가는데요?”
“그걸 알면 내가 저 스님 제자 한다.”
검문소 안쪽에서 휘파람이 세 번 울렸다. 증기차고 철문이 열리고, 바퀴 달린 자동병 두 대가 밀려 나왔다.
“자동병이다! 앞에 달린 거 갈고리 발사관이야!” 비호가 외쳤다. “죽이는 물건이 아니야. 눕혀서 묶고 끌고 가는 물건이야!”
“그게 더 나쁘다.” 무겸이 이를 갈았다.
군중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고, 좁은 줄이 무너져 아이들이 넘어졌다. 강민은 그제야 검을 뽑았다. 칼날은 아래를 향했다.
“무겸 형, 사람들부터 빼내요. 비호, 감응종 멈출 수 있어?”
“종은 힘들어. 대신 바늘은 속일 수 있어! 삼십 초만 줘!”
“누나, 다친 사람들 뒤쪽으로.”
“너는?”
“베지 않고 막아 볼게.”
서란은 반대하지 않았다. 대신 붕대 뭉치를 던졌다.
“왼손에 감아. 손바닥이랑 검등 사이에 끼게. 그래야 베는 대신 밀고 꺾을 수 있어.”
“고마워, 누나.”
“고맙다는 말은 다 끝나고 해.”
쉭—카앙!
첫 갈고리를 칼등으로 쳐내자 청염이 칼날 위로 오르려 했다. 강민은 단전 아래를 조였다. 1경계의 요체는 여는 힘이 아니라 닫아야 할 때 닫는 힘이었다. 두 번째 갈고리가 무겸의 방패에 박혔다.
“밀어!”
“그래, 같이 간다!”
무겸이 갈고리 강선을 자동병 바퀴축에 감아 방패째 들이받았다. 자동병이 제 몸을 묶은 채 옆으로 돌며 넘어졌다. 바퀴가 허공에서 헛돌았다.
“형, 바늘을 왼쪽으로 묶을게!” 비호가 기둥 아래로 기어가며 소리쳤다. 작은 손이 젖은 덮개를 열고 공구를 밀어 넣었다. “근데 세게 치면 풀려! 너무 화내지 마!”
“그 말이 제일 어렵다!”
두 번째 자동병이 쇠그물을 쐈다. 그물 끝마다 무게추가 달려 사람 팔다리에 감기도록 만든 물건이었다.
“뛰지 마요, 형! 뒤에 사람 있어요!”
“알고 있어!”
강민은 뛰지 않았다. 낮게 파고들어 검등으로 중심추를 눌렀다.
“시주, 오른쪽으로 반 걸음.”
청우의 목소리와 함께 육환장이 들어왔다. 쇠고리 셋이 그물 모서리를 낚아챘다.
찰랑, 찰랑, 카랑—!
그물이 방향을 바꾸어 달려들던 무사 셋의 발목을 감았다. 셋이 한꺼번에 넘어졌다. 강민은 목을 겨누지 않고 손목과 어깨 관절을 검등으로 때렸다. 관절 빠지는 둔탁한 소리가 이어졌다.
“끄아악, 내 팔!”
“저놈들 다시 일어난다!” 무겸이 외쳤다.
“그러니까 더 정확히 눌러야죠!”
살려 두려면 더 정확해야 했다.
“대사님, 손목만 노리십니까!” 무겸이 창대로 두 명을 밀어내며 외쳤다.
“사람은 손목으로 칼을 쥐니까요.” 청우가 찌르는 자의 손목을 쇠고리에 물렸다. “도망치는 분은 발목 앞 흙탕물 하나면 됩니다. 성난 분은 숨이 드나드는 옆구리를 누르면 되고요.”
“그게 다 말이 되는 소리예요?”
“말이 되게 하는 데 삼십 년 걸렸습니다.”
누구의 머리도 깨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도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마지막 검문장이 군중 쪽으로 몸을 틀었다. 오른쪽 어깨 전체가 기계 의체였고, 안쪽에 작은 코테르 반응관이 세 줄 박혀 있었다. 손목에서 사슬칼 두 개가 떨어져 나왔다.
“멈춰라. 한 발만 더 오면 이 줄부터 자른다.”
“저 밧줄 뒤에 애들이 있어요!” 서란이 외쳤다.
“알고 있다, 의공사. 그래서 골랐지.”
“형, 안 돼! 밧줄 끊기면 다 아래 배수로로 굴러!” 비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증기차고에서 나온 뜨거운 물이야!”
강민의 눈앞이 푸르게 번졌다. 어깨 반응관 세 줄이 너무 또렷했다. 저 관만 태우면 된다. 그러나 그 열은 사람의 살을 피해 가지 않는다.
청우가 그의 왼편에 섰다.
“시주, 지금 눈은 적을 보고 있지 않습니다. 자기 안의 불을 보고 있습니다.”
“비켜요. 저자는 사람을 방패로 세웠습니다.”
“그래서 죽이기 쉽습니다. 그래서 죽이지 않기 어렵습니다.”
“어려운 걸 고르다 늦으면 사람들이 다칩니다.”
“늦지 않게 고르시면 됩니다.”
말은 부드러웠지만 육환장 끝은 이미 낮게 깔려 있었다. 강민을 막는 자세가 아니라 강민이 갈 길의 옆을 비워 두는 자세였다.
“같이 들어가 드리겠습니다. 시주는 불을 어디로 내려보낼지만 정하십시오.”
“……검이 아니면 어디로요.”
“발이 있지 않습니까.”
강민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청염을 검 대신 발바닥으로 내려보냈다. 발밑 물웅덩이가 푸른 김을 올렸다.
“비호! 밧줄 왼쪽 말뚝!”
“보였어!”
나사 폭약이 낮게 굴렀다. 폭발이라 부르기 민망한 소리와 함께 말뚝 고정나사가 풀렸다.
“밧줄 느슨해졌습니다! 시주, 지금!” 청우가 육환장을 땅에 박아 쇠고리 사슬로 밧줄을 감아 당겼다.
“무겸 형, 방패!”
“맡겨라!”
“할머니, 제 손 잡으세요! 발 디디지 말고 미끄러져 오세요!” 서란이 노인의 팔을 붙잡아 뒤로 넘겼다.
강민은 검문장에게 곧장 뛰지 않았다. 오른쪽으로 반 바퀴 틀어 성문 기둥의 황동 배관을 검등으로 쳤다. 갇혀 있던 증기가 터져 나와 흰 장막을 만들었다. 사슬칼이 헛공기를 갈랐다.
“어디야, 어디 갔어!”
대답 대신 장막 속에서 검이 거꾸로 들어왔다. 칼끝이 아니라 손잡이 끝이 의체 어깨 아래 제어구를 찍었다.
딱!
작은 소리였다. 그러나 검문장의 오른팔 전체가 멎었다.
“내 팔…… 내 팔이 안 움직여!”
“제어구다. 죽은 게 아니라 잠든 거야.” 무겸이 외쳤다.
강민은 무릎 안쪽을 발등으로 걷어차고 붕대로 사슬칼의 둔한 면을 감아 끌었다. 비틀거리는 검문장의 등뼈 옆 근육을 청우의 육환장이 눌렀다. 검문장이 고꾸라졌고, 검등이 그의 손목을 바닥에 박았다.
“끝났습니다.” 청우가 말했다.
“놔라! 이 괴물 놈들……!”
의체 팔은 꿈쩍하지 않았다. 힘을 조금만 주면 이 손목을 으스러뜨릴 수 있었다. 그 생각이 든 순간 강민은 손에서 힘을 뺐다. 아직 그것을 원하는 부분이 자기 안에 있다는 사실이 더 서늘했다.
성문 앞에 잠깐 아무 소리도 없었다. 곧 아이 어머니가 아이를 끌어안고 울기 시작했다.
“차고 문은 쇠사슬로 걸어 잠갔다. 북은 울려도 안에서 나오진 못해.” 무겸이 숨을 골랐다.
서란이 강민의 왼손을 잡아 붕대를 풀었다. 천이 검게 그을려 있었다.
“펴 봐. 손가락 하나씩.”
“손바닥만 좀 벗겨졌어. 아프지도 않아.”
“손목 무늬 번진 건 안 보여? 아침엔 여기까지였어.”
“……알아.”
“베지 않았다고 대가가 없는 건 아니네.”
“알아.”
“알면 다음부터 더 아껴. 네 몸은 네 것만 아니야.”
강민은 대답하지 못했다. 예전이었다면 무겁게 들렸을 말이 지금은 붙잡아 주는 말처럼 들렸다.
“……응, 누나. 아껴 볼게.”
“아껴 보는 게 아니라 아끼는 거야.”
“응.”
청우는 쓰러진 무사들의 손목을 묶지 않았다. 숨쉬기 편하게 자세를 고쳐 주고, 발목이 뒤틀린 자에게는 젖은 천을 대고, 턱이 빠진 자의 턱은 손가락 두 개로 맞추었다. 비호가 얼굴을 찡그렸다.
“대사님, 저 사람들 또 일어나면 우리 뒤통수 칠 텐데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더 멀리 가야지요. 치료하지 말자는 뜻은 되지 않습니다.”
“엄청 비효율적인데요.”
“사람을 살리는 일은 대개 비효율적입니다. 그래서 기계가 대신하기 어렵습니다.”
비호는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반박할 말이 딱 떠오르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 말은 우리 도공 꼬마한테 꽤 오래 남겠군.” 무겸이 낮게 웃었다. “나도 오래 남을 것 같고.”
“남는다면 소승에게 복입니다.”
청우가 비호에게도 허리를 숙였다. 비호가 당황해 뒷머리를 긁었다.
“대사님은 저 같은 꼬마한테도 절을 하시네요.”
“관복이든 공구가방이든, 숨이 붙어 있는 자리는 다 같은 높이입니다.”
서란이 아이를 끌어안은 어머니에게 약봉지를 쥐여 주었다.
“하루 두 번, 긁힌 데 발라 주세요. 그리고 오늘은 이 성문으로 다시 오지 마세요.”
“고맙습니다, 아가씨…… 고맙습니다.”
두 번째 경보 북이 울렸다. 오래 머물 수 없었다. 비호가 감응종 나사를 반쯤만 조이며 씩 웃었다.
“추격대가 다시 쓰려고 하면 바늘이 엉뚱한 데로 헛돌 거야.”
◆
일행은 서남 관문을 빠져나와 해룡성 외곽 폐수로 길로 접어들었다. 밀월성 방면 역참으로 돌아가는 샛길이었다. 맨 뒤에서 걷는 청우의 고리 소리는 일행 안쪽에서만 맴돌았다.
“대사님은 왜 거기 계셨습니까. 우연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강민이 걸음을 늦추며 물었다.
“우연이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소승이 시주들을 기다린 것도 맞습니다.”
“우리를요?”
“설무진(雪武陳) 대협께서 생전에 길 위의 빚을 하나 남기셨습니다. 갚을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강민의 몸이 굳었다. 비 냄새와 증기 냄새 사이로 검령성의 불탄 마당 냄새가 되살아났다.
“……사부님을 아십니까.”
“오래전, 소승이 사람을 살리지 못해 산문을 떠돌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설 대협께서 말없이 밥 한 그릇과 잠잘 처마를 내어 주셨지요. 검은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칼을 든 사람이 언제 칼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보라 하셨습니다. 오늘 그 빚을 조금 돌려드릴 수 있었습니다.”
“……고맙다는 말로는 너무 작습니다.”
“작아도 됩니다. 큰 말은 대개 무겁기만 합니다.”
강민은 목이 잠겨 더 말하지 못했다. 사부는 죽은 뒤에도 길 위에 손을 남겨 두고 있었다.
“이것을 전하려고 기다렸습니다.” 청우가 젖은 포대에서 낡은 목갑을 꺼냈다. 뚜껑의 먹글씨는 빗물에 번져 있었지만, 무겸은 한눈에 알아보고 표정을 바꾸었다.
“밀월성(密月城) 비무첩……?”
“예. 7월 10일, 밀월성에 제국 각지의 무인들이 모입니다. 겉으로는 비무 대회입니다. 그러나 황도 안에서 묻기 어려운 말들이 그곳 술자리와 대기실에서 오갑니다. 반백파의 흐름도 더 또렷하게 보일 겁니다.”
“함정일 가능성이 크군.” 무겸이 목갑을 노려보았다.
“그럴 겁니다. 그래서 소승도 함께 가려는 것입니다.”
“함정인 줄 알면서 가자고 하시는 겁니까.”
“함정이 아닌 길은 이제 거의 없으니까요.”
“왜 우리에게 이걸 주십니까.”
“시주께서는 오늘 베지 않고 막으려 하셨습니다. 아직 서툴지만, 그 서툶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과는 길을 함께 걸어도 된다고 배웠습니다.”
“우리 곁에 있으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죽지 않기 위해 걷는 길도 있지만, 죽지 않게 하기 위해 걷는 길도 있습니다. 소승은 후자를 조금 더 믿습니다.”
“그럼 앞으로 밥은 네 그릇이 아니라 다섯 그릇이네.” 비호가 중얼거렸다.
“밥값 걱정부터 하는 거냐.” 무겸이 혀를 찼다.
“저는 정비사잖아요. 늘어난 입이 제일 먼저 계산돼요.”
“소승은 하루 한 끼면 됩니다.” 청우가 말했다. “두 그릇 드시는 분 몫까지 나눠 먹겠습니다.”
“누가 두 그릇 먹는데요?” 비호가 눈을 흘기며 서란을 보았다.
“나 아니야.” 서란이 강민을 가리켰다.
“나도 아닌데…….”
서란은 진맥하듯 청우의 손등과 눈빛을 번갈아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대사님, 강민이 무리하면 말려 주세요. 이 아이는 자기 몸을 도구처럼 써요.”
“소승이 말린다고 멈출 분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럼 넘어뜨려 주세요.”
“그것은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청우가 처음으로 아주 작게 웃었다.
비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오랜만이라 강민은 괜히 성문 바깥 비구름을 올려다보았다.
“형, 귀 빨개졌다.”
“비 맞아서 그래.”
“비 그쳤는데?”
“……그치는 중이다.”
“대사님. 비살(非殺)은 살려 두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청우는 곧장 답하지 않았다. 폐수로 끝에서 바람이 불어와 승복 끝단이 젖은 다리에 달라붙었다. 길가의 깨진 석등 안에는 녹슨 향대가 남아 있었다.
“아닙니다. 숨을 남기는 것은 가장 낮은 단계입니다. 비살은 상대가 다음 죄를 짓지 못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때로는 손을 묶고, 때로는 길을 끊고, 때로는 스스로를 보게 해야 합니다. 살려 두었는데 더 많은 사람을 해치게 했다면, 그것은 비살이 아니라 방치입니다.”
“베지 않는다고 용서가 되는 것도, 죽이지 않는다고 책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군요.”
“예. 비살은 부드러운 길이 아니라, 더 오래 지켜봐야 하는 길입니다.”
“그럼 오늘 우리는 제대로 한 겁니까.”
“절반쯤 했습니다.”
“나머지 절반은요?”
“밀월성에서 확인하게 될 듯합니다. 오늘 검문소는 손끝입니다. 손목과 팔꿈치와 어깨는 따로 있을 것입니다. 팔을 움직인 머리도 있겠지요.”
“대사님, 방금 말은 꽤 무섭게 들립니다.” 무겸이 돌아보았다.
“무섭게 들렸다면 소승의 말재주가 부족한 탓입니다. 본래 일은 더 무서울 수 있습니다.”
“정중하게 겁주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군.”
그때 비호의 주머니에서 무언가가 삐져나왔다. 청우의 시선이 거기 머물렀다. 비호가 헛기침을 했다.
“훔친 물건은 언젠가 손을 무겁게 합니다.”
“훔친 거 아니에요! 주운 거예요, 주운 거!”
투덜거리면서도 비호는 그것을 강민에게 건넸다. 자동병의 감응추였다. 손바닥에 올리자 작은 코테르 파편 안쪽에서 낯익은 떨림이 전해졌다.
“비호야, 이거 방금 검문소 것 맞지?”
“응. 자동병 배 안쪽에서 빠진 거야. 겉은 제국 표준품인데 안쪽은 누가 손댔어. 일부러 청염 쪽에 예민하게 맞춘 것 같아. 형 같은 반응을 찾으려고.”
서란의 얼굴이 굳었다. 강민이 눈을 감자 감응추가 가슴의 열에 답하듯 떨었다.
“검문이란 이름을 빌린 그물이군.” 무겸이 말했다.
“사람들 공포까지 빌려서요.” 강민이 감응추를 쥐었다.
청우가 목갑을 한 번 흔들어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속이 너무 얕군요.”
“제가 볼게요.” 비호가 목갑을 뒤집어 손톱으로 바닥을 긁었다. “어? 이중이에요. 이 얇은 판, 풀로 붙인 게 아니라 밀랍으로 막았어요.”
얇은 나무판 아래에서 기름 먹인 종이가 나왔다. 가장자리가 밀랍으로 봉해져 있었고 붉은 관인이 찍혀 있었다. 청우가 읽기 전에 강민이 먼저 첫 줄을 보았다.
『7월 10일 밀월성 비무대에서 청염 반응자를 유도할 것.』
그 아래에 더 작은 글씨가 있었다.
『검을 뽑지 않으면, 의공사를 겨누어라.』
“의공사면…… 누나잖아.” 비호의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졌다.
서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겸의 창끝이 바닥을 긁었다. 강민의 손끝에 푸른 열이 올라왔고, 이번에는 청우도 곧장 막지 않았다.
멀리 밀월성 방면 산길 위에서, 아직 보이지 않는 종이 세 번 울렸다.
찰랑.
찰랑.
찰랑.
청우의 육환장이 아닌 다른 종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