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염심법 첫 수련 [타시점]
海東曆: 201년 7월 16일 · 시점: 유서란
밀월성(密月城)의 달은 성벽보다 낮게 떠 있었다.
밀월성은 밤에도 잠들지 않았다. 북쪽 성루의 압력계가 10분마다 짧은 쇳소리를 냈고, 외성 아래 증기 펌프들은 일정한 간격으로 숨을 쉬었다.
성에서 2km 떨어진 폐사(廢寺)는 그 소음이 닿지 않았다. 법당 지붕 절반이 내려앉아 하늘을 그대로 드러냈고, 뒤편 돌확 옆으로 끊어진 황동 배관이 뱀처럼 휘어 있었다.
“옛날 보일러실이랑 약탕실을 잇던 관이야. 끊어졌어도 물길만 이으면 냉각로 비슷하게는 돼.” 단비호는 그렇게 말하더니 반나절 만에 정말 만들어 냈다.
유서란은 그 냉각로 앞에서 청동 진맥기(診脈器)를 강민의 손목에 대고 있었다. 황실 의공원의 정식 장비보다 훨씬 낡았지만 맥의 세기와 기맥의 떨림, 코테르(機核) 잔류열을 한꺼번에 읽는 물건이었다.
따르륵.
바늘이 오른쪽으로 한 칸 튀었다. 강민은 검게 그을린 목탁상 옆 담요 위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자고 있었다. 피부는 뜨거운데 땀은 차가웠다. 가슴 안쪽에서 고장 난 피스톤 같은 진동이 올라와 법당 바닥의 먼지를 흔들었다.
“또 올라와?” 비호가 충혈된 눈으로 물었다. 냉각통의 황동관을 붙든 손은 쉬지 않았다. “물주머니 벌써 두 번 갈았는데, 방금 채운 것도 미지근해.”
“아직 폭주는 아니야.”
“아직?”
“그래. 아직이야. 그래서 지금 잡아야 해.”
“잡다가 누나 손이 먼저 익겠는데.”
서란은 대답 대신 강민의 이마를 닦았다. 젖은 수건에서 희미한 김이 올랐다.
“비무대에서 베지 않으려고 매번 불을 눌러 뒀잖아. 눌러 둔 건 사라지지 않아. 몸 안에서 빚이 돼서, 밤에 이자까지 붙여 돌아오는 거야.”
“이자 한번 비싸네.” 비호가 망치 ‘땅콩’의 손잡이를 꾹 쥐었다.
“너 눈이 토끼 같아. 교대로 눈 좀 붙여.”
“형이 저러는데 어떻게 자. 내가 자는 사이에 바늘이 튀면, 그건 내가 형을 못 지킨 게 되잖아.”
“……그래. 그럼 대신 물은 네가 책임져.”
“그건 자신 있어.”
폐사 외곽을 두 바퀴 돌고 온 장무겸이 문밖에서 말했다.
“사방은 조용하다. 하지만 밀월성 쪽 봉화대가 평소보다 늦게 꺼졌다. 태사부 쪽 눈이 완전히 빠진 건 아닌 듯하다.”
“오라버니, 문 가까이에 계셔 주세요. 민이가 크게 뒤틀리면 문밖으로 열이 먼저 빠질 거예요. 누가 다가오면 바로 알려 주세요.”
무겸은 더 묻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묻지 않는 건 믿기 때문이었다. 서란은 그 점이 고마웠다.
법당 한쪽에 가부좌를 튼 청우(淸雨)의 등 뒤에서 황동 기계법륜이 느리게 돌고 있었다.
“유 의원님. 소승이 법륜의 박자를 낮추면, 저분의 호흡을 조금 붙들 수 있을 듯합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해 주세요. 다만 강하게 누르지는 말아 주세요. 눌러서 꺼지는 불이 아니에요.”
“예. 누르지 않고, 길만 좁히겠습니다.”
둥, 둥, 둥. 강민의 숨이 그 박자에 잠깐 붙었다가 어긋났다. 서란이 그의 단전 위에 손을 얹었다.
“맥이 너무 일정해요. 사람 맥이 아니라 조립된 기관이 왕복하는 것 같아요.”
“단전은 어떻습니까.”
“비어 있어요. 그냥 빈 게 아니라, 누가 오래전부터 일부러 비워 놓은 것처럼 매끈하고 차가워요. 물이 있어야 할 자리에 불의 설계도가 놓여 있어요.”
“검령성에서도 보셨습니까.”
“그때는 병명처럼 보였어요. 이름 붙이고 분류하고 치료하면 된다고 믿었죠. 의공사한테는 그게 제일 익숙한 방식이니까.”
서란은 품에서 방수 천에 싼 낡은 종이를 꺼냈다.
“그거 또 보는 거야?” 비호가 눈을 키웠다. “황실 의공원에서 가져온 거라며. 걸리면 누나 목이 먼저 날아가는 거 아니야?”
“이미 가져왔으니, 지금 걱정해도 늦었어.”
“누나도 참 겁 없다.”
“겁나. 그러니까 읽는 거야.”
금제 서랍에서 훔치듯 베껴 온 기록이었다. 곰팡이 번진 가장자리, 지워진 제목 사이로 청염 반응, 단전 결손, 기계성 맥동이라는 글자가 남아 있었다.
“여기 환자가 셋 나와. 첫 번째는 청염을 병으로 보고 반응 부위를 잘라 냈어. 체온 41.7℃, 절개 후 청염 역류. 마지막 줄은 이래. 환자는 견디지 못했다.”
“두 번째는?”
“냉각통이랑 금속 침으로 눌러 뒀어. 사흘은 안정됐다고 적혀 있어. 나흘째 밤에 한꺼번에 터져서 치료실 벽을 녹였대. 마지막 줄은 똑같아.”
“……세 번째는?”
“감정의 근원을 끊으면 된다고 기억을 지웠어. 분노도 두려움도 애착도 없어지니까 폭주는 안 했지.” 서란의 손끝이 서늘해졌다. “마지막 줄은 이래. 환자는 더 이상 자신을 부르지 않았다.”
“죽은 것보다 끔찍하네.” 비호가 중얼거렸다.
“의공원 첫 금언이 있어. 병소를 찾아라, 분리하라, 제거하라. 곪은 살엔 맞는 말이야. 그런데 사람 가장 깊은 데 박힌 불을 병소라고 부르는 순간 의원 손이 칼이 돼. 그럼 환자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가 되고, 문제는 풀어 버리면 그만이지만 사람은 풀어 버릴 수 없잖아.”
“치료한다는 말이 때로는 자르는 말과 닮았군요.” 청우가 낮게 말했다.
서란이 마지막 장을 넘겼다. 검은 얼룩 사이에 공식 기록과 다른 흘림체가 남아 있었다.
“불을 끄려 하지 마라. 화로를 지어 주어라.”
“이건 누가 쓴 건데?”
“몰라. 글씨가 떨려. 서둘러서, 어쩌면 죽기 직전에 쓴 것처럼. 그 사람도 누군가의 손목을 붙들고 있었겠지.”
“누나.” 비호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형, 괜찮아질 수 있는 거지?”
거짓으로 안심시키기는 쉬웠다. 쉬운 말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괜찮아지게 만들 거야.”
“그거랑 괜찮아질 수 있다는 건 다르잖아.”
“그래. 달라.”
“그럼 어떻게 할 건데.”
“없애려고 하지 않을 거야. 잘라 내거나 눌러 두면 언젠가 민이 몸이 먼저 부서져. 기록이 다 그렇게 말하고 있어. 그러니까 없애는 치료가 아니라, 같이 살아가는 수련을 시켜야 해.”
“불이랑 같이 살아?”
“응. 불을 가두는 감옥이 아니라, 불이 있을 자리를 만드는 거야.”
비호가 제 앞의 엉성한 냉각통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이건 감옥이야, 자리야?”
“지금은 버팀목.”
“나중엔?”
“나중엔 민이가 스스로 자기 안에 만들 자리의 모형.”
비호가 배관 하나를 더 조이자 압력계 바늘이 조금 안정되었다.
“그 금빛 침은 안 써?” 침통을 연 서란의 손을 보고 비호가 물었다. 안에는 짧은 금침 세 개가 들어 있었다.
“금침은 기맥을 열어 주는 만큼 잘못 놓으면 맥을 찢어. 오늘 필요한 건 열어젖히는 게 아니라 아주 가는 물길이야.”
서란은 금침을 닫고, 끝이 둥근 청동침 열 개를 꺼냈다. 굳은살 박인 강민의 열 손가락 끝에 희미한 푸른 빛이 번져 있었다.
“분열(分熱)의 침법.”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청우가 눈을 떴다.
“지금 지었으니까요.”
“위험하겠군요.”
“위험하지 않은 길은 이미 다 실패했어요.”
“그렇다면 소승은 곁에서 박자를 지키겠습니다.”
“고마워요, 대사님.”
첫 침이 오른손 엄지 끝에 얕게 들어가자 푸른 열이 실처럼 솟았다. 서란은 피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받아냈다. 뜨거운 바늘을 손톱 밑에 밀어 넣는 듯했다. 열이 갈 길을 못 찾으면 다시 혈관으로 돌아간다.
“비호야, 압력.”
“오른쪽 눈금 반 칸 내려갔어. 아니, 다시 올라가. 누나, 빨라.”
“물주머니 갈아.”
“알았어!”
“두 번째.” 서란이 왼손 엄지에 침을 놓았다. “세 번째. 지금은?”
“반 칸 내려갔다가…… 어, 제자리에서 안 움직여! 버티고 있어, 누나!”
“말하지 말고 눈금만 봐. 움직이면 바로 불러.”
무겸이 말없이 들어와 물동이를 밀어 주고는 문턱에 무릎을 굽혔다.
“서란아. 내가 대신 받을 수 있는 열이냐.”
“아니요, 오라버니. 이건 맥을 아는 손이 받아야 해요.”
“네 손이 상한다.”
“손은 낫습니다.”
네 번째 침이 왼손 검지에 닿자 강민의 눈꺼풀이 떨렸다.
“사부님…….”
서란의 손이 멈췄다.
“제가…… 또 늦었습니다…….”
폐사 안이 조용해졌다. 검령성의 밤은 아직 누구에게도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청염이 솟았다. 푸른 빛이 손등을 타고 번개처럼 갈라졌고, 진맥기 바늘이 끝까지 튀어 오르다 딱 소리와 함께 멈췄다.
“누나!”
“뒤로 물러나!”
비호가 냉각통을 안고 굴렀다. 무겸이 창대로 기둥을 찍어 떨어지는 지붕 조각을 막았다.
“서란아, 물러서라!”
“안 돼요! 지금 길이 끊기면 열이 그대로 심장으로 역류해요!”
서란은 왼손으로 강민의 손목을 붙잡고 오른손으로 여섯 번째 침을 들었다.
“강민아, 들리면 숨을 내쉬어.”
열이 손등을 핥고 지나갔다. 눈앞이 하얘졌지만 그녀는 목소리를 낮췄다. 겁먹은 사람을 붙들 때 가장 먼저 흔들리면 안 되는 건 손이 아니라 목소리였다.
“네가 늦은 게 아니야. 지금은 거기가 아니야. 여기는 밀월성이야. 폐사야. 비호가 옆에 있고, 무겸 오라버니가 문을 지키고 있고, 청우 대사님이 박자를 잡고 있어.”
강민의 눈썹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그리고 나는 여기 있어.”
그의 숨이 아주 조금 길어졌다. 서란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침을 놓았다. 열이 여섯 갈래로 나뉘어 손끝으로 흘렀다.
“비호야, 물.”
“여기!”
서란은 젖은 천을 강민의 목 뒤에 대고 황금빛 기공을 손목으로 흘려 넣었다. 그녀의 기공은 청염처럼 날카롭지 않고 약탕의 김처럼 부드러웠다. 정면으로 싸우면 진다. 대신 불꽃이 부딪힐 벽을 둥글게 만들었다. 깨진 진맥기 바늘은 더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손바닥이 대신 맥을 읽고 있었다.
강민이 눈을 떴다. 동공에 푸른 빛이 떠 있었다. 그는 자기 손끝에 박힌 침과 서란의 붉게 부푼 손을 보았다.
“누나…… 내가 또…….”
“아직 아무것도 안 태웠어.”
“손이……. 빼. 내가 참을게.”
“그 말이 제일 위험해.” 서란의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참는 건 닫는 거야. 닫으면 안에서 더 뜨거워져. 오늘부터는 참는 게 아니라 듣는 거야.”
강민은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그녀에게 매달렸다. 열여덟 살의 소년은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잃었고, 다시 잃을까 봐 자꾸 자기 안으로 문을 잠갔다.
“네 몸 안의 청염을 적으로만 보면, 넌 평생 네 몸이랑 싸워야 해. 그런데 사람이 자기 몸하고 평생 싸우면, 언젠가 제일 지켜야 할 마음부터 닳아.”
“그럼 어떻게 해.”
“불꽃이 어디로 가고 싶은지 먼저 들어. 그다음에 길을 내. 길을 내고도 넘치면, 조금 덜어. 네가 다 혼자 견디려 하지 말고.”
“그걸 누가 받아.”
서란은 대답 대신 흘러나온 열을 다시 제 손으로 받았다.
“안 돼. 누나가 다칠 거잖아.”
“돼. 의원은 환자 대신 아프려고 있는 사람이 아니야. 하지만 환자가 자기 몸을 적으로 여기지 않게 곁에서 길을 보여 주는 사람은 맞아.”
“강민 시주님.” 청우가 낮게 염주를 굴렸다. “유 의원님의 말씀대로, 우선 듣는 것부터 해 보시지요. 불을 누르지 마시고, 불이 부딪히는 곳을 보십시오.”
강민이 숨을 들이켜자 청염이 치밀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이를 악물었다.
“악물지 마. 숨을 막으면 불도 막혀. 막힌 불은 터져.”
“힘을 빼면…… 흘러넘쳐.”
“그러니까 힘을 빼는 게 아니라, 방향을 주는 거야.”
“형, 보일러 기억나?” 비호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압력 너무 높을 때 밸브 확 열면 터지고, 꽉 닫아도 터지잖아. 살짝, 진짜 살짝 열어서 김 빼는 거. 그거랑 비슷한 거 아니야?”
“맞아. 비호 말이 정확해.”
비호가 어깨를 움츠리다 슬쩍 웃었다. 강민의 맥에 아주 작은 망설임이 끼어들었다. 기계 같던 박자 사이에 끼어든, 살아 있는 사람의 맥이었다. 서란은 그 흔들림이 반가웠다. 완벽한 기계의 박동보다 불완전한 사람의 맥이 훨씬 낫다.
“하나.” 청우가 세었다.
강민이 숨을 들이켰다.
“둘.”
그는 숨을 멈추지 않고 아주 조금 내쉬었다.
“셋.”
서란은 황금빛 기공을 조금 뒤로 물렸다. 너무 많이 도우면 그의 길이 되지 않고, 너무 적게 도우면 그가 탄다. 그 좁은 간격을 놓치지 않는 것이 의공이었다.
강민의 오른손 약지 끝에 손톱만 한 푸른 불꽃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그것은 날뛰지 않았다. 심지 위 등불처럼 고요했다.
“가운데 색 봐. 1,200℃는 넘을 텐데…… 형 손이 안 타.” 비호가 숨을 죽였다.
“형 손가락에 등불이 켜졌어.” 비호가 속삭였다.
“이게…… 나야?” 강민이 물었다.
“전부는 아니야. 하지만 네 일부는 맞아.”
강민의 눈이 젖었지만 울지는 않았다.
“기억해. 없애야 할 괴물이 아니라, 네가 책임져야 할 불이야.”
“책임…….”
“그래. 청우 대사님이 말했잖아. 파괴자가 아니라 책임자가 되라고.”
청우가 조용히 합장했다. 바람이 깨진 벽으로 스몄지만 불꽃은 흔들리지 않았다. 강민의 호흡에만 맞춰 작아졌다 커졌다. 그러다 왼쪽 가슴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쿵.
“누나, 안 돼. 다시 올라와.”
“알아.” 서란은 마지막 네 개의 침을 쥐었다. “이제부터가 진짜 수련이야.”
“뭘 하면 돼?”
“도망치지 마. 누르지도 마. 불꽃이 커지는 걸 봐. 그리고 네가 먼저 이름을 붙여.”
“이름?”
“사람은 이름 붙인 것에서 조금 덜 도망쳐.”
강민은 이를 악물려다 서란의 눈을 보고 멈췄다.
“분노.”
불꽃이 거칠어졌다.
“다음.”
“두려움.”
가장자리가 떨렸다.
“다음.”
강민의 목이 잠겼다.
“……그리움.”
불꽃이 크게 흔들렸다. 서란은 마지막 침을 놓았다. 열 손가락이 동시에 타는 듯했다.
“좋아.” 통증 속에서도 서란은 웃었다. “이제 내쉬어. 분노도, 두려움도, 그리움도 다 네 안에 있어. 하지만 네 전부는 아니야.”
강민이 숨을 내쉬었다. 불꽃이 여러 갈래로 갈라져 침을 타고 흘렀고, 서란은 넘어온 열을 기공으로 감싸 돌확의 찬물로 흘려보냈다. 물이 즉시 끓었다. 하얀 김이 법당을 채웠다.
새벽 4시 가까이 되어서야 청염은 잦아들었다. 강민은 다시 잠들었다. 이마의 주름이 풀려 있었고, 맥은 기계 박자와 사람의 흔들림 사이에서 불안정하게, 그러나 살아 있는 리듬을 만들었다.
“꿈속에서도 늦고 있었던 거냐, 저 녀석은.” 문턱의 무겸이 낮게 말했다.
“우리 모두 그날 밤을 아직 끝내지 못했어요, 오라버니.”
무겸은 대답 대신 창대를 쥔 손을 폈다 쥐었다.
누구도 크게 웃지 않았다. 다들 서로가 아직 숨 쉬는지를 확인할 뿐이었다. 서란이 마지막 침을 뽑자 열 손끝이 붉게 부풀어 있었고, 손톱 가장자리가 희미하게 푸르렀다.
“누나!” 비호가 벌떡 일어났다.
“쉿. 민이 깬다.”
“그게 문제야? 누나 손 봐. 이거 그냥 데인 거 아니잖아.”
“괜찮아.”
“의원들이 제일 자주 하는 거짓말이 그거라며. 누나가 그랬잖아.”
“기억력도 좋네.”
“웃지 마. 진짜로.”
서란은 손을 숨기려다 펼쳐 보였다. 숨기면 아이는 더 무서워한다.
“피부 화상은 이틀이면 가라앉아. 안쪽 열은 황금기공으로 빼낼 거야. 다음에는 이렇게 많이 받지 않게 할 거고.”
“다음에도 할 거야? 누나가 계속 다치면서?”
“아니. 다음에는 민이가 오늘보다 조금 더 스스로 길을 낼 거야. 내가 받는 열은 줄어들고, 민이가 책임지는 자리는 넓어질 거야.”
비호는 못마땅한 얼굴로 공구가방에서 지독한 냄새의 연고 병을 꺼냈다.
“도공거리에서 산 거야. 철판 데였을 때 바르는 거라는데, 사람 손에도…… 아마 되겠지.”
“아마?”
“내가 아직 사람 손에 실험을 못 해 봤거든.”
서란이 작게 웃자 비호도 울상인 채로 웃었다.
“서란아, 기록으로 남길 거냐.” 무겸이 물었다.
“네. 남겨야 해요.”
“누가 보면 위험할 수도 있다.”
“그래서 더 남겨야 해요.”
서란은 아픈 손가락으로 붓을 쥐고 기록 뒷면에 천천히 적었다.
“해동력 201년 7월 16일. 분열의 침법 1차 시도. 청염은 제거 대상이 아니라 공존 대상. 명명 호흡에 반응. 시술자 손끝 열상. 환자 생존. 수련 가능성 확인.”
“환자 생존이래.” 비호가 어깨 너머로 읽다가 코를 훌쩍였다. “형 들으면 웃겠다.”
붓끝이 ‘환자’라는 글자 옆에서 멈췄다. 그녀는 작게 덧붙였다.
동생.
환자라는 말은 거리를 만들고, 동생이라는 말은 책임을 만든다. 누나. 그 단어는 따뜻한 말이면서 쇠로 만든 울타리였다.
강민이 뒤척였다. 잠결에도 그는 청우가 준 염주 알 하나를 손가락 사이에서 돌리고 있었다.
“민아. 너를 고장 난 사람으로 보지 않을게.”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대신 네가 네 불꽃을 남에게 떠넘기려 할 때는, 내가 제일 먼저 화낼 거야. 알았지?”
강민의 입가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서란은 그것을 대답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새벽빛이 들자 법당 뒤 벽의 오래된 글씨가 드러났다. 청우가 그 글씨 앞에서 조용히 합장했다.
“자비는 칼보다 늦게 오면 칼보다 무겁다……. 누가 새겼을까요.” 서란이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다만 오늘 밤 우리가 늦지 않았다는 뜻으로 읽겠습니다.”
“이 배관, 버리지 말고 챙겨 둘게요.” 비호가 망가진 냉각통을 분해하며 말했다. “다음에도 해야 한다면 더 잘 만들 수 있으니까.”
“오늘 안에 움직여야겠죠?” 서란이 물었다.
“백유강의 군세가 황도로 모인다는 첩보가 사실이라면, 밀월성도 오래 안전하지 않다.” 무겸이 밀월성 쪽 하늘을 살폈다. “비무대에서 우리를 본 눈도 너무 많고.”
“민이는 반나절은 더 쉬어야 해요.”
“그럼 반나절 쉰다. 그 뒤에는 해 질 무렵 움직이자.”
“오라버니도 좀 쉬세요.”
“나는 서서 쉬는 법을 안다.”
“그거 쉬는 거 아니거든요, 오라버니.”
무겸은 못 들은 척 문밖으로 나갔다. 그 평범한 말들에 서란의 가슴이 조금 내려앉았다.
그때, 산문 쪽에서 쇠가 돌에 닿는 소리가 났다.
무겸의 발소리가 멎었다. 비호가 공구를 움켜쥐었고 육환장 고리가 낮게 울었다. 서란은 부은 손으로 강민 앞을 막아섰다.
“비무대의 그 소년이 여기 있소?”
늙었으나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목소리였다.
“누, 누구야……?” 비호가 속삭였다.
“움직이지 마라.” 무겸의 창끝이 산문을 겨눴다.
잠시 뒤, 쇠와 가죽이 바닥을 치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깨진 벽 틈으로, 누군가 칼집째 푼 검을 문턱 앞에 내려놓는 것이 보였다.
“해치러 온 것이 아니오. 오십 년 늦은 증언을 하러 왔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