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점 · 강민 — 균열·낙인 단계

노장(老將)의 칼끝

第1部 · 話 24 · 검령성 · published

海東曆: 201년 7월 24일 · 시점: 고륜

고륜(高崙)은 그날 새벽, 비를 맞으며 칼을 풀었다.

밀월성(密月城) 성벽 위로 밤새 가는 비가 내렸다. 오십 년 동안 황실의 복도와 전장을 걸어온 늙은 귀는, 쇠가 식는 소리와 사람이 죽기 전 숨을 삼키는 소리가 얼마나 닮았는지 알고 있었다.

비무대의 소년, 강민(剛民)의 셋째 걸음이 아직 눈에 남아 있었다. 겉은 설무진(雪武陳)의 본국검이었지만, 세 걸음째 발목이 지면을 누르는 방식은 황실에서 사라진 백씨(白氏) 호위술의 잔향이었다. 그 걸음을 본 순간 오른쪽 무릎 뒤 흉터가 욱신거렸다.

폐사(廢寺) 마당에는 붕대가 흰 깃발처럼 젖어 흔들렸다. 장무겸(張武謙)은 창을 손질하다 고개를 들었고, 청우(淸雨)는 고륜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거기서 멈추시오.” 무겸의 창끝이 비를 갈랐다.

“발뒤꿈치와 손목을 한 선으로 묶었군. 창룡대 버릇이오.” 고륜이 작게 감탄했다. “요즘 젊은 창은 빠르기만 하고 깊이가 없던데, 당신 창은 뿌리를 잊지 않았소.”

“칭찬은 나중에 듣겠습니다.”

고륜은 등에 멘 낡은 창을 기둥 곁에 기대 세우고, 허리의 검을 칼집째 마루에 내려놓았다. 그 옆에 녹슨 황동 신분패. 황실 호위부 고륜.

“호위무사에게 검은 신분패보다 무거운 증명이오. 늙은이의 진심은 이것밖에 증명할 길이 없소.”

“형, 저 할아버지 비무대 관중석 그늘에 있던 분 맞죠?” 비호가 강민에게 속삭였다.

“박수도 야유도 안 하던 분이야.” 강민이 낮게 답했다.

“눈이 좋구려.” 고륜이 들었다는 듯 말했다. “그 그늘에서 오래 서 있었소.”

“진심을 증명하려면 칼을 내려놓는 것보다 먼저, 왜 우리를 따라왔는지 말하는 게 순서일 겁니다.” 무겸의 목소리는 낮았다.

법당 그늘에 선 강민의 왼쪽 가슴께에서 푸른 김이 희미하게 올랐다. 고륜의 손가락이 굽었다.

“보름쯤 전 비무대에서 보았소. 강민 공의 셋째 걸음. 본국검의 걸음이 아니었소. 설무진 공이 가르쳤을 리도 없소. 그 걸음은 황궁 봉인고 안쪽 기록에만 남아 있던 걸음이오.”

강민의 눈빛이 흔들렸지만 그는 묻지 않았다. 유서란(柳瑞蘭)이 한 걸음 앞에서 고륜의 호흡과 손을 살폈다.

“고륜 어르신, 말씀하시려는 것은 혈통입니까, 아니면 죄입니까?” 청우가 물었다.

“둘을 나눌 수 있었다면, 내가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오.”

고륜은 품에서 누렇게 바랜 명부 한 장을 꺼냈다. 이름 여섯 개. 맨 아래 고륜의 이름만 남기고, 위 다섯에는 먹줄이 굵게 그어져 있었다.

“사람 이름 위에 먹줄 긋는 건…… 처음 봐요.” 잠이 덜 깬 단비호(段飛虎)가 침을 삼켰다.

“쉰 해 전, 제삼 봉인고 앞에 서 있던 호위무사 여섯이오. 우리는 보고서를 보지 않았다고 기록했소. 그러나 모두 들었소.”

“무엇을 들으셨습니까.” 강민이 물었다.

“그 이야기 전에 이름부터 말하겠소. 하나는 국경 순찰 중 실종됐고, 하나는 병사로 기록됐는데 장례 때 얼굴을 볼 수 없었소. 하나는 가족과 함께 변방으로 쫓겨났고, 하나는 스스로 혀를 끊고 이름을 잃었소.”

“다섯째는요?”

“며칠 전 밀월성 남문 밖에서 시체도 없이 사라졌소.” 고륜이 숨을 골랐다. “그 소식을 들은 날, 내가 마지막이라는 걸 알았소. 더 늦으면 내가 죽은 뒤에도 거짓말만 살아남을 테니까.”

비가 처마를 두드렸다. 무겸의 창끝은 아직 내려가지 않았다.

“그 보고서에 뭐라고 적혀 있었습니까.” 강민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차분해서 더 위태로웠다.

“쉰 해 전, 나는 스물일곱이었소. 봉인고 안에서 「청염 수용 혈맥 안정성 보고」라는 문서가 낭독되었소. 표제 아래에 백룡문(白龍紋)의 붉은 인장이 찍혀 있었고.”

“백룡문이라면…….” 서란이 낮게 되뇌었다.

“안에서 누가 울음을 삼키는 소리도 났소. 얼굴은 보지 못했소. 소리만 들었지.” 고륜의 입가가 비틀렸다. “상관이 내게 말했소. 문을 지키는 자는 문 안을 보지 않는다고. 나는 그 말을 평생의 명령처럼 몸에 박아 두었소.”

“그래서 보지 않으셨습니까.” 무겸이 물었다.

“보지는 않았소. 듣지 않은 것은 아니고.” 고륜은 강민을 정면으로 보았다. “청염은 우연히 붙은 불이 아니오. 백씨 가문의 일부 혈맥은 코테르(機核)와 기맥이 맞물리는 자리를 타고났다고 적혀 있었소. 그 자리로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병기로 만들 수도 있다고.”

“……단전이 비어 있는 것도, 거기 적혀 있었나요?” 서란이 물었다.

“첫 장 문장이 아직 귀에 남았소. 심장 주위 빈자리는 결손이 아니라 수용 자리다. 혈맥이 맞으면 불은 밖에서 심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깨어난다.” 고륜이 눈을 감았다. “잊었다고 믿었는데, 기억하지 않는 연습만 했던 모양이오.”

등잔불이 순간 푸르게 흔들렸다. 비호가 방열판을 꺼내려 하자 서란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막을 건 폭주가 아니야. 마음이야.”

강민이 한 걸음 다가오자 마루가 낮게 울렸다. 향로와 비호의 압력계 바늘이 동시에 떨렸다.

“형, 바늘이…… 형 걸음에 맞춰 떨어. 향로까지.” 비호가 속삭였다.

고륜은 확신했다. 기계가 소년을 알아보고 있었다.

“그럼 저는 무엇입니까.” 강민이 물었다.

고륜은 정확한 답보다 필요한 답을 골라야 했다.

“당신은 보고서가 아니오. 보고서는 사람을 설명하는 척하지만, 사람을 줄이는 글이오. 강민 공은 그 종이에 적힌 혈맥보다 크고, 찍힌 인장보다 무겁소. 다만 그 종이가 당신을 쫓아오고 있다는 사실만은 피할 수 없소. 그러니 동행하겠소. 나는 황궁의 길을 알고, 백유강(白裕剛)의 사람들을 알고, 봉인고 문이 어떤 소리로 잠기는지도 아오.”

“왜 이제야 말합니까.” 무겸의 창끝이 고륜의 목 앞에서 멈췄다. 검령성에서 스승을 잃은 사람들이 마땅히 품을 만한 분노였다.

“비겁했기 때문이오.”

누구도 말을 잇지 못했다.

“젊었을 때는 명령 뒤에 숨었소. 중년에는 가족 뒤에, 늙어서는 몸이 늙었다는 말 뒤에 숨었소. 그런데 보름 전 비무대에서 강민 공이 상대의 목 앞에서 검을 멈추는 것을 보았소. 멈출 수 있는 사람은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뒤늦게 배웠소.”

“늦었다고 해서 오지 말아야 할 길은 아닙니다.” 청우가 합장했다. “다만 그 길은 말보다 행동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알고 있소.”

고륜은 철갑 주머니에서 한쪽이 녹은 동판을 꺼냈다. 작은 구멍이 다섯 개 뚫려 있었다.

“이거…… 봉인문 감응 열쇠잖아요. 근데 망가졌어요.” 비호가 눈을 크게 뜨고 압력계를 댔다. 바늘이 강민의 박동과는 다른 느린 주기로 떨었다.

“보고서 원본은 훔쳐 오지 못했소. 그런 용기가 없었소.” 고륜이 말했다. “불이 났던 날 문틈에서 떨어진 이 감응판 하나를 감추었을 뿐이오. 비 오는 밤이면 저 구멍 사이로 바람이 지나며 휘파람 소리를 냈소. 오십 년 동안, 봉인고 안에서 삼켜진 누군가의 숨소리처럼 들렸지.”

“의공원 진맥 기호랑 닮았어요. 혈맥을 읽는 표식이에요.” 서란이 눈썹을 찌푸렸다.

“무공의 기록이 아니라 의공의 기록이라면, 그 보고서는 사람을 단련한 문서가 아니라 사람을 다룬 문서였겠군요.” 청우가 낮게 말했다.

강민은 손을 뻗다가 거두었다.

“……손대면 반응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더는 우연이라고 못 하겠죠.”

그가 주먹을 쥐었다. 굳은살 박인 어린 손이었다. 황궁의 서류는 이런 손을 수용체라 불렀다.

“세 번째 단서라는 말을 내가 감히 붙인다면,” 고륜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첫째는 당신의 몸이, 둘째는 황도의 기록이 증명했을 것이오. 내가 가져온 셋째는 이것이오. 오래전부터 누군가 혈맥과 기관과 봉인을 같은 설계도 위에 올려 두었고, 그 위에 백씨의 인장이 있었다는 사실. 그 인장이 선인지 악인지 말할 자격은 내게 없소. 다만 있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겠소.”

그때 법당 뒤 목제 풍경이 뚝 끊어졌다.

“뒤쪽 담장!”

비호의 외침과 동시에 쇠못 세 개가 안쪽으로 튀어 들어왔다.

“엎드려!” 서란이 강민의 어깨를 눌렀다.

“하나!” 무겸의 창이 첫 쇠못을 쳐냈다.

“둘째는 소승이.” 청우의 육환장 고리에 두 번째 쇠못이 걸려 떨어졌다.

셋째는 기둥 곁의 창을 낚아챈 고륜의 창끝에 스쳐 방향을 잃고 기둥에 박혔다. 쇠못 끝에서 톱니벌레 한 마리가 찢어진 날개를 떨었다.

“반백파 척후요. 나를 따라온 것이오.”

“어르신을 따라왔다기보다,” 비호가 톱니벌레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거 귀 노릇 하는 놈이에요. 우리 이야기 처음부터 듣고 있었던 것 같은데요.”

정답이었다. 담장이 폭발하듯 무너지며 검은 우비의 척후 여덟이 쏟아졌다. 철가면, 황동 렌즈, 손목의 톱니 칼날, 등의 증기 압축통.

“보고서가 꿈꾸던 미래의…… 가장 조잡한 그림자들이오.” 고륜이 창을 고쳐 쥐었다.

“증인은 회수한다.” 가장 앞선 척후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말끝마다 금속성 진동이 섞였다. “청염 반응체는 훼손 금지. 동행자들은 현장에서 정리.”

“저들이 말하는 반응체가 저입니까.”

고륜은 답하지 못했다.

“말은 나중에. 지금은 살아남는 게 먼저다.” 무겸이 앞으로 나섰다.

마당은 너비 12미터도 되지 않았다. 좁은 곳에서는 숫자보다 호흡과 간격이 힘이다. 고륜은 반 걸음 물러나며 창끝으로 빗물 고인 바닥을 쳤다.

“렌즈 먼저 흐리시오! 눈을 잃으면 저들은 반 토막이오!”

튀어 오른 물이 척후 둘의 렌즈를 덮었다. 무겸의 곧은 창이 손목 관절을 쳐 칼날을 떨구었고, 고륜의 늙은 창은 감아 들어가 무릎 뒤 증기 호스와 팔꿈치 압력 밸브를 건드려 쓰러지는 몸을 다른 척후의 진로에 밀어 넣었다.

“압축통은 뒤를 치지 마오! 불이 붙소!”

“알겠습니다!”

“시주, 오른쪽!” 청우의 육환장이 강민의 옆구리를 노리던 칼날을 밀어냈다.

“고맙습니다, 대사님!”

“무겸 공, 오른발을 너무 빨리 버리오!”

“지금 가르칠 때입니까?”

무겸이 대꾸하면서도 발을 고쳤다. 톱니 칼날이 옆구리 2센티미터 앞을 스쳐 갔다.

“살아 있을 때 배우는 것이 제일 빠르오.”

강민이 본국검을 뽑았다. 청염이 검신 안쪽 실린더를 따라 일었다가 얇은 선으로 가라앉았다.

“날이 아니라 검면으로.” 그가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목이 아니라 동력부로.”

가슴을 노리고 달려든 척후의 압축통 고정핀을 쳐 증기를 빼고, 무릎 톱니를 두드려 쓰러뜨린 뒤 검집으로 어깨를 눌렀다.

“살려 둡니까?” 고륜이 물었다.

“말하게 해야 합니다.”

진실을 듣기 위해 분노를 미루는 일. 소년은 자기 안의 불과 싸우고 있었다.

“사람이면 살려야 해.” 서란이 쓰러진 척후에게 청동침을 꽂아 압력통의 진동을 가라앉혔다. 붉게 덴 손끝 그대로였다. “기계가 섞여 있어도, 아직 맥이 있으면.”

고륜은 부끄러웠다. 평생 너무 많은 얼굴을 숫자로 처리해 온 자신이었다.

“형, 왼쪽 항아리 뒤!” 비호가 기둥 뒤에서 폭약 나사를 굴렸다. 젖은 흙바닥이 깨져 진창이 되자 돌진하던 척후 둘의 발목이 동시에 꺾였다. 그는 곧장 압력계를 들여다보고 소리쳤다. “누나, 형 열 올라가!”

“강민아, 세 호흡만 낮춰!”

남은 둘이 강민을 노렸다. 하나는 정면, 하나는 처마 위였다. 고륜은 무릎이 삐걱거리는 것도 잊고 창대를 세워 처마에서 내려오는 칼날을 받았다. 손목이 비틀렸지만 놓지 않았다.

“무겸 공!”

고륜이 창대를 눕히자 무겸이 그것을 밟고 솟구쳤다. 은선처럼 뻗은 창끝이 처마 위 척후의 압축통을 꿰뚫었다. 폭발은 없었다. 고륜이 먼저 밸브를 닫아 두었기 때문이다.

“이게 호흡이오, 무겸 공!”

“알겠습니다, 어르신!” 늙은 창과 젊은 창이 처음으로 같은 호흡을 완성했다.

정면의 척후가 강민의 가슴을 찔렀다. 청염이 치솟아 빗방울이 허공에서 하얗게 증발했다.

“강민!” 무겸이 외쳤다.

“민아, 방향! 방향만 줘!”

강민은 불을 날이 아니라 방패처럼 펼쳤다. 푸른 막에 닿은 톱니 칼날의 회전축만 녹아내렸다. 척후가 무릎을 꿇었다.

“누가 보냈습니까.”

대답하려는 순간 척후의 목 안쪽 기계 봉인이 먼저 반응했다. 청우의 육환장과 서란의 침이 뻗었지만 늦었다. 짧은 증기음과 함께 척후는 피 섞인 숨을 뱉고 쓰러졌다.

“목 안에 봉인이……” 서란이 이를 악물었다. “누가 이 사람들 혀 안쪽에 침묵을 심어 놨어.”

고륜은 쓰러진 척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들도 누군가의 보고서가 되어 버렸구나.”

“말하지 못하게 만든 게 아닙니다.” 청우가 척후의 감긴 눈을 쓸어 주며 말했다. “말하면 죽게 만든 것이지요.”

강민은 검을 천천히 거두었다. 청염은 사라졌지만 빗물 속에 푸른 김이 오래 남았다. 마당에는 무너진 담장과 찢어진 붕대가 흩어져 있었다.

무겸이 창을 쥔 채 고륜에게 다가왔다. 눈빛의 의심은 남았지만 처음의 날카로움은 조금 무뎌져 있었다.

“방금 그 발판, 창룡대에서 쓰는 방식과 닮았습니다.”

“닮은 것이 아니라, 원래 같은 우물에서 나온 물이오.” 고륜이 젖은 수염을 훑었다. “황실 호위부가 창룡대에서 갈라져 나왔고, 창룡대는 변방의 창술을 끌어안아 자랐소. 그런데 황궁은 늘 자기가 뿌리라고 말하지. 늙은 자들이 흔히 하는 거짓말이오.”

무겸이 처음으로 희미하게 웃었다. 고륜은 창대로 젖은 마당에 짧은 선 셋을 그었다.

“지금 전부를 가르칠 수는 없소. 다만 하나만 기억하시오. 창은 찌르는 물건이기 전에 길을 정하는 물건이오. 적을 꿰뚫을 길, 동료가 빠져나갈 길, 그리고 내가 물러나야 할 길. 젊은 창이 가장 늦게 배우는 것이 세 번째 길이오.”

“……세 번째 길.” 무겸이 그 선을 눈에 담았다. “저는 늘 앞만 보았습니다.”

“젊은 창은 다 그렇소. 그래서 늙은 눈이 필요한 것이오.”

고륜은 마루 위의 황실 검을 내려다보았다. 명령 뒤에 숨던 검이 이제는 비에 젖은 목검처럼 초라했다. 그는 검을 허리에 차지 않고 기둥 곁에 세웠다.

“늙은 창은 눈이 되겠소. 손은 젊은 쪽이 맡으시오.”

“눈이면 정비 기록도 잘 보시겠네요.” 비호가 중얼거렸다.

“눈이 되겠다는 분이 방금 제 발까지 가르치셨습니다.” 무겸이 어깨를 으쓱했다.

“눈은 발도 보는 법이오.”

피비린내 남은 마당에 짧은 웃음이 번졌다. 비호가 척후의 가슴 안쪽에서 젖은 명령지를 꺼냈다. 붉은 인장이 번졌지만 몇 줄은 또렷했다.

“증인 고륜 회수 실패 시 제거. 청염 반응체 생포. 황궁 보고 전, 청혈성 징발 작전과 접촉 금지.” 비호가 더듬더듬 읽었다. “접촉 금지라니…… 우리가 거기 가면 안 된다는 소리잖아요.”

“청혈성?” 무겸이 눈을 좁혔다.

고륜의 낯빛이 변했다.

“황도로 가는 길목의 요새 도시요. 곡물과 병력이 모이는 곳이지. 반백파가 그곳을 건드린다면 단순한 추격이 아니오. 민심을 꺾고 병력을 끌어모으려는 것이오.”

그때 산길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비를 뚫고 어린 역참 소년이 달려와 문턱에서 굴러떨어졌다. 얼굴은 흙과 눈물로 범벅이었고 오른팔에는 찢어진 붉은 천이 묶여 있었다.

“밀월성에…… 밀월성에 도움을 청하러 왔습니다.”

“다친 데부터 보자. 숨부터 쉬어.” 서란이 소년의 찢어진 팔을 잡았다.

“어디서 왔습니까.” 강민이 무릎을 꿇었다.

소년이 피 말라붙은 목패를 내밀었다. 거칠게 새긴 세 글자. 청혈성.

“누가 그런 소리를 합니까.” 무겸이 물었다.

“징발대가요……. 붉은 인장을 들고 왔습니다.” 소년이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곡식 삼 할이랑, 젊은 사람들이랑…….”

고륜의 명부, 먹줄 그은 다섯 이름 아래 비어 있던 마지막 줄에 빗물이 떨어져 검게 번졌다. 소년이 이를 악물고 마지막 말을 뱉었다.

“닷새 안에 젊은 사람들을 바치라 했습니다. 거부하면 성문 앞에서 전부…… 보여 주겠다고 했습니다.”

“숨이 너무 빨라. 물부터 마셔.” 서란이 소년에게 물주머니를 내밀었다.

“바친다니…… 사람을요?” 비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닷새예요, 누나.” 강민이 일어섰다.

“민아, 몸이 아직—”

“알아요. 그래도 가야 해요.”

“청혈성의 길목이라면 내가 아오.” 고륜이 명부를 접어 품에 넣었다. “다만 그 도시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우리는 구경꾼이 아닐 것이오.”

비가 다시 굵어졌다. 강민의 청염기관이 낮게 울었다. 고륜은 자신이 동행을 청하러 온 것이 아니라 첫 전장으로 끌려왔음을 깨달았다. 젖은 명령지의 마지막 줄이 빗물에 천천히 드러났다.

“다음 수거지는 청혈성. 증인이 합류하면, 소년의 눈앞에서 도시를 꺾어라.” 비호가 읽다가 목이 메었다. “소년이라면…… 형 얘기죠?”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 話 24 終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