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궁의 그림자
海東曆: 201년 8월 8일 · 시점: 강민
청혈성(靑血城)의 연기는 엿새가 지나도 강민의 목 안쪽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길 위에서 먹은 마른 빵에도, 새벽마다 식힌 물에도, 객잔 마룻바닥의 볏짚 냄새에도 그 연기가 끼어 있었다.
잊지 말라는 말. 진 것이 아니라는 말. 끌려가던 봉기 지도자의 목소리는 위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수갑처럼 손목에 매달려 있었다.
해동력 201년 8월 8일, 일행은 다시 황도 해룡성(海龍城)의 외곽에 섰다. 여름 한복판인데도 성벽 아래 공기는 차가웠다. 증기탑이 밤새 뿜은 매연이 새벽 기온을 붙들고 있었다.
“형, 보조문 앞 좀 보세요. 황실 의공원 수레가 세 줄이에요.” 단비호(段飛虎)가 턱짓을 했다. “자동병도 평소의 두 배고요.”
“상자 하나 열 때마다 감응침을 꽂네.” 유서란(柳瑞蘭)이 낮게 말했다. “짐꾼들 숨소리가 안 들려.”
“약재 수송로는 끝났소.” 고륜(高崙)이 말했다. 낡은 회색 장포 안쪽, 옷깃 깊은 곳에서 오래된 금실이 희미하게 빛났다. 외성 호위대가 쓰던 용린문(龍鱗紋)이었다. 그는 손바닥보다 작은 황동 통행패를 꺼냈다. 모서리는 닳았고 인장은 절반쯤 흐렸다. “오십 년 전의 이름이 아직 명부에 남아 있다면 지나갈 수 있겠지. 남아 있지 않다면, 이 늙은 목부터 날아갈 것이오.”
“어르신, 잠깐만…….”
장무겸(張武謙)이 손을 뻗었지만 고륜은 이미 성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강민은 본국검(本國劍)의 검자루를 눌렀다. 안쪽 작은 실린더가 맥박보다 반 초 늦게 떨었다. 청염심법 1경계에 오른 뒤로 세상의 진동이 가까이 느껴졌다.
“이 도시, 심장이 어긋나 있어.”
“도시한테 무슨 심장이 있어요?”
“있어. 듣기 싫어도 들려. 황궁 쪽에서 삐걱거려.”
비호는 대꾸하지 않고 압력계를 엄지로 눌렀다.
성문 위병이 패를 받아 들고 두 번 살폈다. 첫 번째는 의심으로, 두 번째는 두려움으로.
“……서라.”
판독구에 패가 끼워졌다. 안쪽에서 낡은 톱니가 헛도는 소리가 났다. 자동병 둘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청우(淸雨)가 눈을 감고 염주 한 알을 밀자, 쇠알이 작게 울었다.
“한 번 더.”
“얼마든지 하시오. 늙은 패라 성미가 급하지 않소.”
두 번째 헛돎. 서란은 약초 행낭을 고쳐 메는 척하며 침통 위치를 확인했다.
“……형, 숨.” 비호가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속삭였다.
“쉬고 있어.”
“안 쉬고 있어요. 둘 다 안 쉬고 있어요.”
세 번째 톱니가 돌아갈 때, 녹슨 소리가 뚝 끊겼다. 짧은 정적이 성문 아래로 내려앉았다.
위병이 고륜을 한 번 더 보았다. 그리고 패를 돌려주었다.
“……통과.”
길은 열렸다. 그런데 고륜의 얼굴은 밝아지지 않았다.
“통했는데 왜 그런 얼굴이세요?” 비호가 속삭였다.
“오십 년 전 이름이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는 게 다행인지, 불길한 건지 모르겠구려.”
강민에게 그 낡은 패는 열쇠가 아니었다. 아직 닫히지 않은 죄의 문고리 같았다.
성 안은 지난번보다 어두웠다. 새벽인데도 시장 천막 절반이 내려져 있었고, 큰길 양쪽에는 반백파(反白派)의 새 징발령이 검은 못으로 박혀 있었다.
“곡식, 구리, 젊은 장정, 의공 보조원, 기계 정비 견습.” 서란이 게시문을 훑으며 중얼거렸다. “명목은 다 다른데 인장은 하나야.”
“태사령부(太師令府).” 무겸이 짧게 읽었다.
사람들은 게시문 앞을 지나며 고개를 숙였다. 아무도 항의하지 않았다.
“청혈성 소식이 벌써 여기까지 왔나 봐요.” 비호가 속삭였다. “다들 눈을 안 마주쳐요.”
“소문은 증기보다 빠르니까.” 서란이 소매로 입가를 가렸다. “목소리를 높인 사람이 어떻게 끌려갔는지, 다 알고 있는 거야.”
날카로운 바퀴 소리를 내며 소형 증기차가 지나갔다. 창밖에서 아이 둘이 고철 바구니를 끌어안고 벽에 붙었다. 그때 차 뒤에 매달린 자동 팔이 바구니를 집어 올려 무게를 재더니, 황동 조각 한 줌만 남기고 나머지를 수거함에 쏟아 넣었다.
아이 하나가 울음을 삼키며 입술을 깨물었다.
강민의 발이 멈추려는 순간, 고륜의 손이 그의 팔목을 잡았다.
“지금 멈추면 저 아이도 우리도 모두 표식이 찍히오.”
“알아요. 그래서 더 화가 나요.”
“그 화는 아껴 두시오. 쓸 곳이 따로 있을 테니.”
강민은 이를 악물고 다시 걸었다. 비호가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형, 손이 차가워요.”
“……그래?”
“이상하네. 화가 나면 청염은 뜨거워지는 법인데, 여기서는 서리처럼 차가워.”
“황도의 분노는 원래 그렇소.” 고륜은 앞만 보며 말했다. “끓기 전에 얼어붙지.”
◆
일행이 숨은 곳은 서문 번화가에서 두 골목 비껴난 객잔 ‘무명루’의 2층이었다. 1층에서는 묽은 국수와 싸구려 술을 팔았고, 계단은 밟을 때마다 비명을 질렀다.
“이 삐걱임, 저는 마음에 들어요.” 비호는 들어서자마자 짐 속에서 손톱만 한 황동 쐐기 여섯 개를 꺼냈다. “몰래 올라오면 계단이 먼저 말해 줄 거 아니에요.”
“다른 방 손님이 올라와도 말해 주겠지.” 무겸이 말했다.
“그래서 이걸 따로 끼우는 거죠.” 비호는 쐐기를 문틈과 창문 아래에 하나씩 박았다. “끝을 바깥 진동에 떨도록 깎았어요. 누가 5m 안으로 오면 문가 쐐기가 울고, 3m까지 오면 창틀 쐐기가 늦게 따라 울어요.”
“늦게 우는 건 왜지?”
“처음 우는 건 알리는 거고, 늦게 우는 건 확인하는 거예요. 둘이 다 울면 진짜고요.”
무겸은 고개를 끄덕이고 창가에 앉았다. 청우는 방 한가운데에 염주를 풀어 작은 원을 만들었다.
“이 안쪽에서 말씀하시면 소리가 방 밖으로 한결 덜 새어 나갈 것입니다.”
객잔의 소음이 원 안쪽에서 한 겹 낮아졌다. 고륜은 마지막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 등불 심지를 낮췄다. 탁자에 펼친 지도는 접힌 자리가 희었지만, 황궁 외성의 회랑만큼은 어느 지도보다 정밀했다.
“지금 황궁은 두 갈래로 찢어졌소.”
그가 흰 바둑돌 하나를 황자 처소에 놓았다.
“백도윤(白度倫) 황자 전하를 중심으로 한 친백파(親白派). 수는 적으나 명분이 있소. 부친 세대의 죄를 덮는 대신 끌어안고, 기공과 기계가 사람을 살리는 쪽에 남아야 한다고 믿는 자들이지.”
“누가 붙어 있는데요?” 비호가 물었다.
“노신 몇, 의공원 일부, 창룡대 잔류 인맥. 황실 기록을 아직 팔아넘기지 않은 서고 관리들도 있소.”
검은 돌이 지도를 빠르게 덮었다. 태사령부, 외성 병기고, 자동병 공방, 증기탑 관리청, 세무 관청, 성문 감찰소. 비호가 세다 말고 손을 멈췄다.
“여덟 할이 넘잖아요.”
“병권만 따지면 그렇지. 돈과 기계와 창고까지 세면 더 기울어 있소.”
“그 많은 걸 누가 쥐고 있습니까.” 무겸의 턱 근육이 굳었다.
고륜은 흠집이 가로로 난 커다란 검은 돌을 태사령부 위에 올렸다. 한동안 손을 떼지 못했다.
“태사령 백유강(白裕剛). 황실 종친이며, 자동병 생산과 증기탑 보수 권한을 한 손에 쥔 자요. 겉으로는 제국을 강하게 만들겠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강함은 사람을 살리는 힘이 아니오. 사람은 고장 나기 쉬운 부품이고, 마음은 불필요한 유격이지. 제국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기계 병동으로 바꾸려는 자요.”
백유강.
그 이름이 떨어진 순간, 강민의 가슴이 얼었다. 청염이 솟구친 것이 아니었다. 반응로 한가운데에 얼음못이 박힌 듯, 차가운 진동이 늑골 안쪽을 긁고 지나갔다. 그는 탁자 모서리를 붙잡았다.
“강민아.”
서란의 목소리는 밖으로 새지 않을 만큼 작았지만, 침 하나가 맥문에 닿는 것처럼 또렷했다.
“……괜찮아, 누나.”
괜찮지 않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내의 이름이, 같은 백씨(白氏)라는 성이 왜 가슴속 기계와 이렇게 차갑게 맞물리는지 알 수 없었다.
“이름은 길을 열 수도 있고, 사람을 가둘 수도 있습니다.” 청우가 염주 한 알을 밀었다. “강민 공, 그 이름이 공의 몸을 흔든다 하여 공의 뜻까지 흔들 필요는 없습니다.”
“……예.”
강민은 짧게 답하고 호흡을 세었다. 들숨 셋, 멈춤 둘, 날숨 넷. 가장 기초적인 제어법인데, 오늘은 황궁 천장의 거대한 보일러를 맨손으로 눌러 식히는 일처럼 어려웠다.
고륜은 캐묻지 않았다. 침묵이 이미 대답이라는 걸 아는 노인이었다. 대신 지도 북쪽, 기록보관소와 폐쇄된 예식전 사이의 좁은 회랑을 짚었다.
“백유강의 수하들이 요 며칠 이 회랑을 드나들었소. 겉으로는 배관 보수라지만, 배관공치고는 군홧발이 너무 무거웠다더군. 황자 전하께서는 반백파가 오래 봉인된 서고를 찾기 시작했다고 보시오.”
“비밀 서고 말입니까?”
“황실 비장 서고. 공식 장부에는 없는 곳이오. 해동 초창기의 금기 기록, 잃어버린 동맹의 흔적, 제국이 스스로 지웠다고 믿는 죄들이 잠들어 있소.”
고륜은 검은 돌 셋을 지도 밖에 따로 놓았다.
“백유강은 명령을 칼처럼 내리지 않소. 장부처럼 내리지. 사람을 한 줄씩 적고, 쓸모를 매기고, 모자란 곳엔 기계를 붙이면 된다 하오. 반대하는 자는 역적으로 몰기 전에 먼저 ‘수리 불능’이라 부르지. 그 말이 붙으면 법정에 서기도 전에 공방의 고철더미로 밀려나오.”
서란의 손끝이 멈췄다.
“의공원에도 그런 말이 있었어요. 통증을 호소하면 ‘감정 잡음’이라고 붉은 줄을 그었죠. 환자의 몸을 고치는 방에서 치료보다 배치 가능 여부가 먼저 적혔고요.”
“누나는 그 말이 싫었구나.”
“잡음이라니. 사람의 아픔을 기계 오차처럼 지우는 말이잖아.” 서란이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 아프다고 말하면 먼저 듣는 게 의술입니다. 그런데 태사령부의 문서는 아픈 사람부터 분류해요. 그런 병동은 치료소가 아니라 감옥입니다.”
“기계가 정밀하다는 이유로 사람의 슬픔까지 조이면, 질서처럼 보이는 폭력이 되지요.” 청우가 고개를 숙였다. “이 지도는 누가 사람을 사람으로 부르고, 누가 부품으로 부르는지를 가르는 선입니다.”
강민은 흰 돌과 검은 돌을 내려다보았다.
“흰 돌이라고 깨끗한 건 아니겠죠. 저쪽에도 황실의 오랜 침묵이 있을 테고요.”
“그렇소. 백씨의 죄는 흰 돌 뒤에도 있지.” 고륜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잘못을 숨기는 자와, 잘못을 설계도 삼아 세상을 뜯어고치려는 자는 다르오. 후자가 더 차갑고, 더 멀리 가지.”
비호는 노트 한쪽에 ‘수리 불능이라는 말 금지’라고 삐뚤게 적었다.
“제가 형 고친다고 할 때랑은 완전 반대네요. 저는 형이 형으로 남게 조이는 건데.”
“그래, 넌 반대야.” 강민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 서고에…… 형의 청염기관을 설명할 도면도 있을까요?”
“있을 가능성이 커.” 서란이 먼저 답했다. “의공원에 말만 전해지는 기록이 있었어. 청염기관의 원형은 의술로 시작됐는데, 어느 순간 황실 기록에서 통째로 빠졌다고. 불태워진 게 아니라 황궁 안 어딘가로 옮겨졌다고.”
비호의 눈빛이 변했다. 두려움과 기대가 한꺼번에 올라왔다. 그는 공구가방에서 갈색 노트를 꺼냈다. 앞쪽에는 강민의 심박 눈금이, 뒤쪽에는 아직 빈 냉각 장치 항목이 있었다. 소년은 그 빈 칸을 오래 보다가 덮었다.
“근데…… 그게 미끼일 수도 있겠죠. 형을 끌어들이려고.”
“그럴 수도 있다.” 무겸이 말했다. “그래서 더 눈을 크게 뜨고 들어가야지.”
그때 창틀 아래 쐐기 하나가 아주 작게 울었다. 무겸이 소리 없이 창가로 붙었다. 골목을 지나는 건 술 취한 짐꾼 둘이었다. 그 뒤, 맞은편 처마 그늘에 검은 우산을 든 사내가 잠깐 멈춰 섰다가 사라졌다.
“우연이라 보기엔 발걸음이 너무 고르게 죽어 있군.”
“이 성 안에서는 우연도 보고서를 쓴 뒤에야 움직이오.” 고륜이 등불을 더 낮췄다.
“그럼 벌써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걸 안다는 거예요?” 비호가 쐐기를 노려보았다.
“알든 모르든, 안다고 여기고 움직이는 게 오래 사는 법이다.”
톡.
천장 환기구에서 소리가 났다.
“위예요!” 비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덮개 틈으로 손가락만 한 황동 기계 새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종잇장 같은 날개, 관절마다 묻은 붉은 칠. 새는 흰 돌과 검은 돌 사이에 내려앉았고, 가슴 해치가 열리며 돌돌 만 서신이 굴러나왔다.
“황자 전하의 인장입니다.” 고륜이 봉인을 확인했다.
강민은 봉인보다 새의 날개 끝을 보았다. 얇은 흠집이 있었다. 부딪힌 자국이 아니라, 아주 가는 칼로 금속 껍질만 벗겨 낸 흔적이었다.
고륜이 서신을 펼쳤다. 장황한 인사는 없었다. 북쪽 회랑의 약도, 순찰 교대 시각, 하수구 수위 변화, 내성 호위대의 교대 폭. 황자는 자기 이름으로 열 수 있는 문과 열 수 없는 문을 나눠 표시해 두었다. 마지막 줄은 이랬다.
— 진실은 더 오래 숨겨 두면, 죄가 아니라 무기가 됩니다. 내가 열 수 있는 문을 열겠습니다. 당신들은 내가 들어갈 수 없는 어둠으로 들어가 주십시오.
“획 끝이 눌려 있네요.” 강민이 말했다. “쓰는 동안 손에 힘이 많이 들어갔어요.”
“목을 건 글이오.” 고륜이 짧게 답했다.
“신뢰라고 하기엔 위험하고, 부탁이라고 하기엔 무겁네요.” 강민은 서신을 내려다보았다. “잊지 말라는 말은 길 위의 사람한테만 주어진 게 아니었나 봐요. 궁 안에 남은 사람도 자기 방식으로 잊지 않으려 하고 있어요.”
“근데 이상해요.” 비호가 서신 오른쪽 아래 귀퉁이를 가리켰다. 작은 결손이 있었다. 무겸이 등불을 비추자, 낡아서 떨어진 것치고는 단면이 지나치게 깨끗했다.
서란이 침 끝으로 종이 섬유를 살짝 들어 올렸다.
“봉한 뒤에 잘린 게 아니야. 봉하기 전, 종이가 다 마르기 전에 잘렸어.”
“그러면 황자의 처소 안에서?” 무겸의 얼굴이 굳었다.
고륜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겸은 자국을 더 오래 살폈다.
“게다가 숨이 없습니다. 베는 자는 아무리 섬세해도 끝에서 숨을 드러냅니다. 이건 칼날이 닿을 때부터 떨어질 때까지 힘의 높낮이가 거의 없어요. 검술이 아니라, 같은 두께의 종이를 수백 번 도려내 본 사람의 작업입니다.”
“검객은 분노하거나 망설이지. 작업자는 망설이지 않고.” 고륜이 서신을 코끝에 가져갔다. 낡은 종이와 등유 냄새 사이에 약품 냄새가 희미하게 묻어 있었다. “푸른 용제 냄새요. 실험실에서 금속을 닦을 때 쓰던. 이건 궁 안의 보통 서리 손이 아니오. 글을 아는 자, 실험실을 아는 자, 황자의 서신이 언제 봉해지는지도 아는 자요.”
“침몰 연구선에서 본 것과 같아요.” 강민이 중얼거렸다. “칼을 쓰되 검객처럼 쓰지 않는 손. 학자의 손이에요.”
“조하륜(趙河崙).”
이름은 비호의 입에서 먼저 나왔다. 소년은 말해 놓고 입을 다물었다.
“……말해 놓고 나니까 더 싫네요.”
“이미 나온 이름이다.” 무겸이 낮게 받았다. “백유강이 황궁의 거대한 검은 톱니라면, 그자는 톱니 사이로 기어드는 가느다란 침이겠지.”
“침 하나가 기계 전체를 다른 쪽으로 돌릴 수도 있소.” 고륜이 덧붙였다.
“둘 중 어느 쪽이든 나빠요.” 비호가 중얼거렸다. “안쪽에 적이 있거나, 적이 안쪽을 자기 방처럼 드나들거나.”
“황자 곁에 이미 적이 있는 것이오, 아니면 적이 곁에 설 만큼 가까이 들어온 것이오.” 고륜이 낮게 말했다. “어느 쪽이든 서신은 이미 누군가에게 읽혔소.”
“두 그림자가 서로 다른 곳에서 오는 듯하나 같은 등불 아래 서 있군요.” 청우가 염주를 지도 가장자리에 놓았다. “한쪽은 힘으로 성문을 잠그고, 다른 한쪽은 글자의 귀퉁이를 훔칩니다.”
“그럼 잠입을 미뤄야 합니다.” 무겸이 말했다. “길이 새고 있다면 들어가는 순간 포위됩니다.”
“미루면 그들이 먼저 들어갈 것이오.” 고륜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그 서고에서 무엇이 사라졌는지 우리는 영영 알 수 없게 되겠지.”
서란이 강민을 보았다. 가지 말자는 눈이 아니었다. 네 몸이 버틸 수 있겠느냐고, 이 진실이 청염기관을 또 얼마나 흔들겠느냐고 묻는 눈이었다.
강민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가슴은 여전히 서늘했다. 그 얼음 틈으로 떠오른 건 두려움만이 아니었다. 검령성의 무너진 지붕. 설무진(雪武陳)의 마지막 눈빛. 청혈성 골목에서 쓰러진 좌판들.
“들어가야 합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백유강이 어떤 사람인지, 조하륜이 무엇을 잘라 갔는지, 황실이 무엇을 숨겼는지 확인해야 해요. 제 몸 때문만은 아닙니다. 청혈성에서 끌려간 사람들도, 검령성에서 죽은 사람들도, 게시문 앞에서 고개 숙인 사람들도 같은 톱니에 눌려 있어요. 그 톱니가 어디서 돌기 시작했는지 보지 않으면 멈출 수도 없습니다.”
“그럼 준비할게요.” 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감응 장치 진동수를 읽는 걸 다시 깎을게요. 이번엔 속이는 게 아니라 들리지 않는 척하게 만들어야 해요.”
“나는 의공원 쪽 환기구 배치를 떠올려 볼게.” 서란이 말했다. “오래전 구조라 달라졌을 수 있지만, 공기가 드나드는 길은 쉽게 안 바뀌어.”
“나는 길목을 맡겠다.” 무겸이 장창 이음쇠를 조였다. “베지 않고 쓰러뜨릴 방법을 먼저 생각하마. 그래도 막아야 할 칼이 있으면 내가 막는다.”
“소승은 소리를 낮추겠습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남기 위해 들어가는 길이라면, 첫 칼은 늦게 뽑힐수록 좋습니다.”
고륜이 흰 돌 하나를 북쪽 회랑으로 옮겼다. 늙은 손이었지만 돌을 놓는 순간만큼은 젊은 호위무사처럼 곧았다.
“여섯 날 뒤, 순찰 교대가 가장 느슨해지는 밤이 있소. 그때가 기회요.”
그날 밤 고륜은 기억 속 회랑을 종이에 다시 그렸다. 붓이 모퉁이를 돌 때마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겨울마다 물이 고이던 모퉁이가 여기였소. 이 기둥 뒤에선 호위병들이 몰래 담배를 피웠고. 이 배관의 김이 사람 숨소리를 가려 주었지.”
“여기 배관이 아직 살아 있으면 소리막이로 쓸 수 있어요.” 비호가 그 위에 눈금을 얹었다. “이 계단은 속 빈 철판일 거예요. 잘못 디디면 아래층 감응부까지 울려요. 대신 무겸 형이 먼저 크게 한 번 밟으면, 뒤따르는 작은 소리는 배관 반향에 묻혀요.”
“내가 일부러 소리를 내라는 말이냐.”
“형 발이 제일 커서요.”
무겸이 대꾸 대신 비호의 머리를 한 번 눌렀다. 소년은 웃으며 작은 황동 침 끝을 갈고, 회중시계 뒷판을 열어 얇은 진동판을 붙였다. 장난감 같아도 목숨을 몇 초씩 사 줄 물건이었다.
서란이 강민의 손목을 붙잡았다.
“네 몸은 지금 화가 난 게 아니라 경계하고 있어. 화가 나면 청염이 위로 솟는데, 지금은 안으로 말려 들어가. 백유강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그럼 서고에서 그 이름이 나오면?”
“더 심해질 수 있어. 네가 버티겠다고 해서 믿는 건 아니야. 버틸 길을 내가 준비할 뿐이지.”
“누나는 늘 내가 대답하기 전에 결론을 정해 놓네.”
“의공사는 환자의 허세를 믿지 않아.”
말끝에 작고 따뜻한 숨이 섞여 있었다. 그 숨이 강민의 가슴속 얼음을 조금 녹였다.
밤이 깊자 1층의 술잔 소리도 잦아들었다. 무겸은 장창을 분해해 이음쇠마다 기름을 먹였고, 청우는 염주를 두 손 사이에 놓고 방의 숨소리를 낮췄다.
“잠은 안 자십니까, 스님.”
“소승은 이 방이 잠드는 소리를 듣는 중입니다.”
“그럼 저도 그 소리 듣다 자겠습니다.” 무겸이 이음쇠를 조이며 낮게 웃었다.
탁자 위에는 낡은 통행패와 새 서신이 나란히 놓였다. 죄는 늘 기록으로만 남는 게 아니라고, 강민은 생각했다. 때로는 아직 작동하는 낡은 물건의 떨림으로 남는다고.
그는 서신을 다시 집었다. 잘린 귀퉁이는 손톱 한 마디도 되지 않았는데, 그 작은 부재가 서신 전체보다 큰 소리를 냈다.
“이렇게 작은데, 서신 전체보다 큰 소리가 나요. 누가, 왜 하필 그 부분만 가져갔을까요. 거기 이름이 있었을까요, 길이 있었을까요.”
“아니면 경고였겠지.” 고륜이 통행패를 서신 옆에 내려놓았다.
바로 그때, 탁자 위 기계 새가 접고 있던 날개를 한 번 떨었다. 모두의 손이 멈췄다.
“동력 꺼져 있어요. 노심도 식었고요.” 비호가 해치를 열고 말했다. “움직일 이유가 없는데…….”
날개가 다시 떨렸다. 그 떨림에 맞춰 서신의 잘린 귀퉁이가 작게 들렸다. 강민이 손끝으로 종이 섬유를 누르자, 틈에서 머리카락보다 가는 황동 톱니 하나가 굴러 나왔다.
“이빨이 여섯 개예요.” 비호가 숨을 들이켰다. “여섯 번째 안쪽에…… 글자가 있어요.”
바늘 끝으로 긁은 세 글자. 읽는 순간, 강민은 가슴속 청염기관이 다시 한 번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이미 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