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장 서고 잠입
海東曆: 201년 8월 14일 · 해룡성 황궁 북쪽 회랑 / 황실 비밀 서고 · 시점: 강민
해룡성(海龍城)의 밤은 검령성의 밤보다 늦게 잠들었다. 청염 광탑이 밤새 푸른빛을 토했고, 내성의 황동 궤도 위로 경비용 기계 마차가 일정한 간격으로 지나갔다.
“환하고 질서 있네.” 강민은 객잔 이층의 낮은 창 앞에서 말했다. “그래서 더 불길해. 겉으로 한 치 틈도 없는 기계가 톱니 하나만 어긋나도 박살 나는 것처럼, 이 도시도 어디선가 오래 삐걱이고 있어.”
“청혈성 분노에, 백유강(白裕剛)이라는 이름에, 서신 귀퉁이까지.” 유서란(柳瑞蘭)이 약초 주머니를 여미며 받았다. “머릿속이 한꺼번에 시끄럽지?”
“누나는 어떻게 알아.”
“네 어깨가 올라가 있잖아.”
탁자 위에는 백도윤(白度倫)이 보낸 약도가 펼쳐져 있었다. 순찰로와 하수로, 서고 외벽의 환기구가 붉은 먹으로 그려져 있었다.
“여기 빈 동그라미는 뭐예요?” 단비호(段飛虎)가 지하 3층의 한 칸을 짚었다. “설명이 하나도 없어요.”
“황자 전하도 모르는 방이거나, 알아도 적을 수 없는 방이겠지.” 고륜(高崙)이 칼자국 패인 손끝으로 북쪽 회랑을 짚었다. “오늘 밤이다. 교대는 자정 무렵에 한 번 어긋난다. 정확히 여덟 분. 그 안에 첫 격자를 지나야 한다.”
“늦으면요?”
“다음 순찰과 마주친다. 빠르면 앞 순찰 꼬리에 걸리고. 궁 안의 길은 넓지만, 숨어들 자에게는 바늘구멍보다 좁다.”
장무겸(張武謙)은 창 전체에 낡은 면포를 감고 있었다. 창날이 벽에 스치기만 해도 쇳소리가 나기 때문이었다.
“무인이 칼을 숨기는 밤은 마음이 더 무겁군.”
“오늘은 살아 있는 사람을 줄이는 밤이 아니에요.” 서란이 말했다. “흔적을 줄이는 밤이에요. 환기구는 제가 그린 걸 보세요. 벽 두께랑 냄새가 역류하는 시간까지 적어 뒀어요.”
“누나, 이거 황자님 약도보다 자세해요.” 비호가 감탄했다.
“내가 배운 곳이니까.” 서란이 짧게 답했다. “이제는 네 형 몸의 비밀을 감춘 상자가 됐지만.”
비호는 탁자 밑에 쪼그려 앉아 황동 침 스물네 개를 천 위에 하나씩 늘어놓더니, 작은 회중시계를 들어 보였다.
“형, 이거 오늘 제일 중요해. 경보 장치는 자기 진동이 있어. 사람은 못 들어도 금속끼리는 알아들어. 황동 침으로 그 진동수를 살짝 밀어 주면, 장치는 자기가 아직 잔다고 착각해.”
“약도에 없는 장치가 나오면?”
“새것이면 내 손끝으로 못 읽을 수도 있지. 그때는…… 음, 속여야지.”
“무엇을 속인다는 겁니까.” 청우(淸雨) 대사가 천으로 감은 염주를 엄지로 굴렸다. 오늘은 염주에서 쇳소리가 나지 않았다.
“장치 귀를요. 아무 일 없다는 소리를 계속 들려주면, 장치도 한동안은 아무 일 없다고 믿을 거예요.”
아무도 웃지 않았다. 그래도 그 어린 임기응변이 공기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강민이 비호의 머리를 한 번 눌렀다.
“기름 묻어!”
소년은 투덜대면서도 손을 피하지 않았다.
그 순간 강민의 가슴 안쪽에서 청염기관(靑炎機關)이 낮게 떨었다. 멀리 광탑이 밝아지는 박자와 같았다.
“또 광탑이랑 같이 뛰지?” 서란이 눈치챘다.
“이름도 모르는 게 자꾸 대답하려고 해. 지금은 그걸 찾을 때가 아닌데. 먼저 살아남아야 하고, 누군가 감춰 둔 걸 직접 봐야 하니까.”
“그럼 가자.”
“……응. 들어가자.”
일행이 각자 물건을 집어 들었다. 무겸은 천으로 감싼 창을 등에 둘렀고, 서란은 가느다란 세검을 허리 뒤에 숨겼다.
“통행패는 가져가십니까, 어르신.”
“쓸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오.” 고륜이 패를 품 안쪽에 넣었다.
비호는 마지막으로 약도를 접어 강민에게 건넸다.
“형이 길 잃으면 안 되니까.”
“네가 길을 잃지 말아야지.”
“비호는 길 잃어도 기계 소리 따라가면 돼.”
“……그래, 그럼 내가 네 뒤에 있을게.”
사람의 발소리보다 톱니의 숨을 먼저 듣는 아이. 강민은 그 대답이 아팠지만 말리지 않았다. 이 길은 혼자서는 열 수 없었다.
◆
자정 무렵, 얇은 구름이 달을 가렸다. 좁은 골목 바닥의 구정물이 신발 밑창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멀리 궁성의 순찰 종이 두 번 울렸다.
“두 번째 종이 끝나고 쉰 걸음이오. 세시오.” 고륜이 속삭였다.
마흔여덟, 마흔아홉.
“지금.”
“걸쇠는 낮에 봐 뒀어요. 녹이 반쯤 먹었어.” 비호가 황동 침 하나를 밀어 넣었다. 딸깍 소리는 나지 않았다. 쇠창살이 오래 참은 숨을 내쉬듯 느리게 풀렸다.
“윽, 냄새.” 비호가 코를 쥐었다. “물때에 녹에 약재 찌꺼기까지 다 섞였어.”
하수로 안쪽은 축축하고 무거웠다. 얽힌 배관에서 응축수가 똑똑 떨어져 검은 수면에 파문을 만들었다.
“형, 발밑. 오른쪽이 푹 꺼졌어.”
“알았다. 밝히면 편할 텐데.”
“밝히면 들켜요. 참아요, 형.”
강민은 맨 앞에서 단전의 불길을 눌렀다. 그러자 벽 속 배관이 그의 심장 박자에 맞춰 미세하게 울었다.
“민아.” 서란이 뒤에서 불렀다.
“괜찮아.”
“거짓말은 평소처럼 못하네. 불을 삼키는 게 내뿜는 것보다 어렵지?”
“……많이.”
“그럼 숨을 길게. 내가 뒤에서 잡고 있을게.”
그녀의 손끝이 손목을 짚었다. 얇은 기공이 흘러들자 박동이 조금 가라앉았다.
“어때.”
“조금…… 조용해졌어요.”
“그 조용함을 아껴. 오늘 밤 쓸 데가 많을 거야.”
하수로가 꺾이는 곳에 첫 번째 자동 인형이 서 있었다. 머리 대신 납작한 접시가 붙어 있었다.
“저 접시가 바닥 떨림을 들어.” 비호가 손을 들어 모두를 세웠다. “사람은 못 봐. 발소리만 들어. 내가 먼저 갈게. 내가 손 흔들 때까지 한 걸음도 움직이지 마.”
“흔들지 않으면?”
“그럼 형이 날 구하러 오면 되지.”
소년이 침 하나를 접시 아래 홈에 밀어 넣고 다른 침으로 떨림을 옆으로 밀었다. 접시가 헛돌다 굳었다.
“하나.”
비호가 입술만 움직였다. 장치들은 촘촘했다.
“둘. 이건 벽 속에 숨었네.”
“누나, 뒤에 쥐 있어요. 아니, 쥐 말고 그냥 쥐.”
“쥐가 장치보다 시끄럽겠다.” 서란이 소매로 입을 막았다.
“셋, 넷은 물속에 반쯤 잠겼어. 너무 예민해서 오히려 속이기 쉬워. 다섯.”
그때 머리 위로 철제 군화 소리가 지나갔다. 누군가 하품을 삼키는 소리까지 얇은 벽을 타고 내려왔다. 일행은 무릎까지 찬 오물 속에서 벽에 붙었다.
“움직이지 마시오.” 고륜이 세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셋, 둘, 하나. “이제 됐소.”
“어르신, 아직 한 마디도 안 하셨는데 어떻게 아세요?”
“옛 궁은 소리를 두 번 속인다. 한 번은 들리는 곳에서, 한 번은 들리지 않는 곳에서.”
그 말은 곧 증명되었다. 여섯 번째 장치는 소리가 없었다. 바닥에 박힌 녹슨 못 같았는데, 비호가 그 앞에서 멈췄다.
“발목 절단용.” 모기 날개처럼 작은 목소리였다. “건드리면 발목 높이로 강철 줄이 튀어나와. 자르는 것보다 도망 못 가게 묶는 거야.”
“그 뒤엔 경비병이 오겠지.” 무겸의 턱이 굳었다.
비호는 침 두 개를 못 양옆에 박고 회중시계 태엽을 한 번 감았다.
“잠재운 거 아니야. 아직 기다리는 중이라고 믿게 했어. 못 빼지 말고 그냥 넘어가.”
아홉 번째 앞에서 소년의 손이 처음으로 멈췄다. 하수로와 환기구가 만나는 곳의 벽돌 한 장이었다. 이끼가 유난히 가지런했다.
“이상해.”
“왜.”
“안 떨려. 장치면 아주 작게라도 떨려야 하는데, 이건 죽은 금속 같아. 근데 죽은 금속이면 이끼가 이렇게 가지런하게 안 자라.”
“신형이군.” 고륜이 숨을 삼켰다.
“소리를 듣지 않는 물건일 수 있습니다.” 청우가 염주 한 알을 눌렀다. “기척을 듣거나, 열을 듣거나, 기맥을 듣거나.”
“기맥이면…… 저겠네요.” 강민이 한 발 물러났다. “여기서 제일 큰 불씨는 저니까.”
비호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말했다.
“그럼 듣게 만들면 돼.”
“무엇을.”
“아무 일 없는 소리.”
소년은 회중시계 뒷덮개를 열어 머리카락보다 가는 황동줄을 꺼냈다.
“형, 숨 참아. 청염 올라오면 이놈이 먼저 알아.”
“……참고 있다.”
“더 참아.”
줄 한쪽은 젖은 이끼에 묻고 다른 쪽은 태엽축에 감았다. 똑, 똑, 똑.
“눈금이 떴어.” 비호가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됐다. 아니, 아직. 아직 말하지 마.”
이끼 틈에서 황동 눈금 하나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듣고 있어.” 비호가 숨을 죽였다. “이제 이 장치는 시계 소리를 순찰 발자국으로 들을 거야. 아무도 안 왔다가, 아무도 안 가는 소리.”
“얼마나 버티지?” 무겸이 물었다.
“시계가 멈출 때까지.”
“그게 언제냐.”
“스물세 분쯤.”
모두의 얼굴이 굳었다. 들어가고, 도면을 찾고, 빠져나올 시간이 스물세 분.
“길 자체가 모래시계네.” 무겸이 낮게 중얼거렸다.
환기구는 성인 하나가 겨우 기어갈 만큼 좁았다.
“비호야, 무릎 밑에 이거 깔아.” 서란이 약초 천을 먼저 밀어 넣었다.
“대사님, 염주 벽에 닿아요.”
“알고 있다.”
기어 나가자 하수의 악취가 멀어지고 오래된 종이와 금속 먼지 냄새가 다가왔다.
“천장 관 좀 봐요.” 비호가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증기가 온도를 딱 붙잡고 있어요.”
“종이는 습기를 싫어하오. 비밀은 더 많은 걸 싫어하지.” 고륜이 낮게 말했다. “불, 곰팡이, 쥐, 그리고 진실을 보려는 손.”
첫 서가 구역에서 강민이 발을 멈췄다. 복도 끝에서 황동 자동병 둘이 걸어오고 있었다. 가죽 싼 발바닥은 소리가 없었고, 붉은 유리알이 좌우로 어둠을 갈랐다.
“무릎이 뒤로 꺾였어요. 걸음이 빨라.” 비호가 이를 악물었다. “침 꽂을 시간이 없어.”
“칼을 뽑으면 소리가 나고, 청염을 쓰면 빛이 나요.” 강민이 본국검(本國劍) 손잡이를 잡았다 놓았다. “그럼 어떻게……”
“관절.” 서란이 그의 팔을 스쳤다.
서란의 세검이 어둠 속에서 실처럼 빠져나가 자동병의 무릎 뒤 윤활구멍을 눌렀다.
“민아, 가슴!”
“응!”
강민의 손바닥이 동력부를 덮었다. 청염 대신 단전의 기운을 얇게 눌러 금속 안쪽의 박자를 끊었다.
“쓰러지면 소리 나요. 받쳐요!”
“받았다.” 무겸의 창대가 두 번째의 어깨를 받쳤다.
“발목은 내가!” 비호가 바닥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침을 꽂았다. 딱, 소리가 날 뻔했다.
“대사님!”
“이미 했습니다.” 청우가 튕긴 염주 알이 낮은 떨림으로 그 소리를 삼켰다.
“세워 두면 멀리선 잠깐 멈춘 순찰로 보일 거예요.” 서란이 속삭였다.
붉은 유리알이 빛을 잃었다. 강민은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손에 남는 게 싫네요. 베는 거랑 숨을 끊는 건 달라요.”
“그래서 오늘 밤이 더 서늘한 거다.” 무겸이 말했다. 함성도 피도 없이, 침묵과 기름으로 하는 싸움이었다.
“스물 분 남았어.” 비호가 입술을 깨물었다.
안으로 갈수록 자물쇠는 정교해졌다. 이름 대신 문양만 새긴 서가 앞에서 강민이 멈췄다.
“백룡문(白龍紋)…… 근데 반만 있어요. 누가 손으로 가린 것처럼.”
세 번째 갈림길에서 고륜이 바닥의 석재 색을 살피더니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으로 꺾었다.
“약도와 다릅니다.” 청우가 말했다.
“그래서 왼쪽이다. 궁 안 약도는 늘 한 걸음 늦다. 권력이 두려워하는 방은 약도에서 먼저 지워진다.”
그 말대로 통로 끝에는 문 대신 낡은 환기구가 있었다. 서란이 먼지를 손끝으로 훑었다.
“최근에 열렸어요. 이 긁힌 자국, 새거예요.”
“누가?”
비호의 물음에 대답은 없었다. 모두 같은 이름을 떠올리고 있었다. 조하륜(趙河崙).
“침몰한 연구선, 잘린 서신…… 이젠 황궁 가장 깊은 벽까지네요.” 서란이 이를 물었다.
강민이 먼저 들어가 먼지 위를 손바닥으로 짚었다.
“무슨 일이냐.” 무겸이 뒤에서 물었다.
“발자국이 있어. 한 사람이야. 가볍고, 서두르지 않았어. 도둑 걸음이 아니라 주인 걸음이야.”
환기구 끝, 지하 3층 보관실 문틀 위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禁藏圖庫.
“금장도고. 금지된 도면을 두는 곳이오.” 고륜이 낮게 읽었다.
비호의 호흡이 달라졌다. 형을 식혀 줄 방법. 폭주를 막을 냉각의 단서.
“……여기다. 여기 있을 거야.” 비호가 공구 가방을 세게 움켜쥐었다. “형, 나 손 떨려요.”
“천천히 해. 시간은 네가 정하는 거야.”
“스물세 분이 정해 준 거거든요.”
“자물쇠가 아니라 진법이야.” 비호가 문 앞에 엎드렸다. “황동판 네 개가 다 다른 속도로 돌고, 가운데 감응부가 기맥을 읽어. 잘못 건드리면 경보가 아니라 안의 도면이 타.”
“하나, 둘…… 이상한데.”
청우가 곁에 앉아 염주 네 알을 바닥에 놓았다. 알들이 황동판의 움직임에 맞춰 미세하게 떨렸다.
“대사님, 뭐 하세요?”
“쇠가 도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잠시 조용히 해 주십시오.” 한참 뒤 청우가 낮게 일렀다. “셋째 판이 거짓으로 돕니다.”
“맞아요, 겉보기보다 반 박자 느려! 대사님, 이거 소리로 어떻게 아셨어요?”
“염주도 오래 굴리면 거짓말하는 쇠를 압니다.”
비호는 침 네 개를 판 가장자리에 걸고 손톱으로 톡톡 건드렸다.
“너, 문하고 얘기하는 것 같다.” 강민이 속삭였다.
“사람한텐 말로 설득하잖아. 기계한텐 박자로 하는 거야. 조금만…… 거의 다…….”
황동판 네 개가 동시에 멈췄다. 불길도 경보도 없었다. 문이 안쪽으로 조금 밀려났다.
“열렸어.”
바로 그때, 지나온 복도에서 낮은 기계음이 났다.
“시계는 아직 안 멈췄어!” 비호가 고개를 돌렸다. “다른 거야.”
“안으로.”
일행이 보관실로 몸을 숨기자마자 복도 끝에 자동병 셋이 나타났다. 네 발로 바닥을 긁었고, 등에는 경보관이 돋아 있었다.
“세 마리…… 아니, 세 대. 가까워져요.” 서란이 속삭였다.
“문 뒤로 붙어라. 숨 죽이고.” 고륜이 낮게 일렀다.
“개야, 기계야……?” 비호가 숨을 죽였다.
“둘 다 억지로 붙인 거다.” 무겸이 창을 풀려 하자 강민이 손으로 막았다.
“창이 움직이면 경보관이 울려요. 여긴 종이랑 기름뿐이라 불도 안 돼요.”
자동병 하나의 앞발이 문지방에 닿는 순간, 강민이 바닥의 먼지를 손끝으로 튕겼다.
“지금!”
서란의 세검이 문틈으로 들어가 경보관 밑동을 막았다. 비호가 굴러 나가 앞발 관절에 침을 꽂았다. 기계 울음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대사님, 소리!”
“걱정 마십시오.” 청우의 염주가 범음 같은 떨림으로 울음을 눌렀다.
강민은 두 번째 자동병의 등에 올라탔다. 푸른 불길이 손끝까지 치밀었다.
“형, 불 쓰면 안 돼!”
“알아.” 쓰는 순간 이 밤도 끝난다. 그는 불길을 삼키고 내공을 가늘게 빼내 동력 축의 박자를 비틀었다. “무겸 형, 기울어요! 오른쪽이에요!”
“잡았다.” 무겸이 창대로 쓰러지는 몸체를 받쳐 벽에 기대게 했다.
“세 번째는 내가 맡겠소.” 고륜이 허리띠의 쇠고리를 던져 뒷다리 관절을 묶었다.
“감응부 눌렀어. 끝!” 비호가 숨을 몰아쉬었다. “형, 저 한 대는 내가 살렸어. 진짜로.”
“살렸다고 하면 안 되지. 재웠다고 해야지.”
“재웠어, 재웠어.”
“쉿. 발소리요.” 고륜이 손을 들었다. “이번엔 사람이오.”
등불을 든 젊은 군졸이 모퉁이를 돌아오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교대까지 십오 분. 아, 졸려 죽겠네.”
얼굴에는 여드름 자국이 남았고, 턱끈이 비뚤어져 있었다.
“민아, 칼은 안 돼.” 서란이 속삭였다.
“……죽이지 않아.”
“알면 됐어. 소리만 내지 마.”
“알아. 저 사람은 백유강도, 조하륜도 아니야. 명령받은 병사일 뿐이야.” 강민이 검자루에서 손을 뗐다.
군졸의 눈이 문가 그림자를 향했다.
“거기 누구……”
입이 열리려는 순간, 강민이 소리 없이 다가가 목 옆 수혈(睡穴)을 짚었다. 군졸의 몸이 무너졌다. 등불은 흔들렸지만 꺼지지 않았다.
“미안하다.”
서란이 벽감에 기대앉힌 군졸의 맥을 확인했다.
“두 시간 안엔 안 깨. 다치진 않았어.”
비호가 떨어진 호패를 주웠다.
“유광. 북문 초소 소속이래.” 소년은 그것을 군졸의 허리끈에 조심스레 다시 걸었다. “흔적은 지워도, 사람 거는 건드리면 안 돼.”
“그래.” 강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이지 않고 지나갈 수 있으면 지나가자. 진실은 훔쳐도, 사람 이름은 훔치지 말고.”
“형이 그렇게 말하니까 규칙 같다.” 비호가 작게 웃었다.
“규칙이다. 오늘부터.” 무겸이 짧게 덧붙였다. “어둠 속에서 우리를 잃지 않으려면 그런 게 하나는 있어야지.”
“열여섯 분.” 비호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보관실은 천장까지 닿는 철제 서랍의 숲이었다. 서랍마다 황동 명패가 붙어 있었다.
“여기서 한 칸씩 열 시간은 없어.” 무겸이 낮게 말했다.
“한 칸씩 안 열어. 명패만 읽으면 돼.” 비호가 벌써 사다리 비슷하게 서랍을 타고 올랐다. “성벽 보강도, 황실 수로도, 광탑 배관도…….” 비호가 명패를 훑었다. “도공한텐 도면이 글보다 먼저 읽혀. 선 하나, 빈칸 하나가 다 말을 해.”
“민아, 문가는 내가 볼게. 군졸 숨소리 안 새게 약초 주머니 걸어 뒀어.” 서란이 말했다.
“좌우 통로는 우리가 맡겠소.” 고륜과 무겸이 갈라섰다.
“지하 3층…… 북서 격실…… 냉각…… 아니, 이건 물 저장고. 여긴 황실 빙고. 아냐, 아냐. 형, 조금만.”
마침내 비호가 가장 아래 서랍 앞에서 멈췄다. 녹슨 명패 아래, 얼음 바퀴처럼 둥글게 말린 문양.
氷輪.
“찾았다.”
그가 서랍에서 꺼낸 도면을 바닥에 펼쳤다. 누렇게 변한 종이였지만 선은 아직 살아 있었다.
“봐, 북쪽 회랑, 하수로, 금장도고…… 그리고 더 아래로 내려가는 봉인 계단. 그 끝에 방이 하나 있어. 빙륜(氷輪) 격실.”
“형을 식힐 수 있어.”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안에 몇 달 동안 삼켜 온 두려움이 다 담겨 있었다. “검령성 이후로 매일 밤 형 박동표 고쳤어. 누나가 진맥하다 말 삼킬 때마다 무서웠고.”
강민이 비호의 어깨를 잡았다. “아직 단서일 뿐이야.”
“단서라도 좋아. 비호는 단서로 물건 만들어. 형은 걱정하지 마.”
웃으려던 얼굴에서 빛이 빠졌다.
“……형, 여기. 여백에 뭐가 적혀 있어.”
도면 여백의 관리 기록이었다.
“마지막 점검. 해동력 199년 11월 3일.” 강민이 읽었다. “서명…… 조하륜.”
趙河崙. 먹글씨였지만 살아 있는 손처럼 보였다.
“연구선에도, 황자의 서신에도, 이제 여기까지. 늘 한발 앞서 있어요. 먼저 들어와 보고, 잘라 내고, 빈칸만 남기고 사라지고.”
“칼 들고 달려드는 놈보다 그런 놈이 더 무서운 법이다.” 무겸이 낮게 말했다.
“이자는 황자의 곁에도, 서고에도, 격실에도 손을 댔다.” 고륜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궁 안에 뿌리가 있다. 하나가 아니다.”
“그림자는 발이 없어도 길을 압니다.” 청우가 눈을 감았다.
비호가 도면을 접으려는데 아래에서 색인표 한 장이 드러났다.
“격실 이름이랑 열람 권한인데, 거의 다 먹으로 지워졌어.” 비호가 손가락으로 짚었다. “맨 아래 한 줄만 남았어. 앞은 긁혀 나갔고…….”
……진화 관련 원본. 심층 봉인.
“진화……?” 강민의 숨이 멎었다. “청혈성에서 들은 거랑은 달라요. 여기선 사람을 가르는 칼 같아요.”
청염기관이 광탑과 어긋난 박자로 떨었다. 서고 어딘가에서 다른 심장이 그를 부르는 듯했다.
끼이이익.
보관실 가장 안쪽 철벽에 세로선이 생기고 있었다. 수십 개의 톱니가 맞물려 돌며 철판이 좌우로 갈라졌다.
“문이야……. 벽 속에 문이 있었어.” 비호가 중얼거렸다.
“백룡문과 흑철 톱니문이오.” 고륜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둘이 서로를 물어뜯듯 맞물려 있구려.”
“내가 연 게 아니야.” 비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도 건드리지 않았어.” 서란이 세검을 뽑았다.
무겸이 창의 천을 풀었고, 고륜의 손이 칼자루에 얹혔다. 틈에서 탄내 섞인 바람이 흘러나왔다.
“불타다 만 기록 냄새예요.” 서란이 코를 막았다. “누가 오는 게 아니야. 문이 안에서 먼저 열리고 있어.”
“민아, 물러서.”
“잠깐만, 누나. 뭔가…… 글자가 떠.”
“무슨 글자냐.” 무겸이 창끝을 문 쪽으로 겨눴다.
“아직 몰라요. 푸른빛이 모였다 흩어졌다 해요. 이건…….”
강민은 물러서지 않았다. 문 너머 어둠에서 푸른빛이 글자가 되려다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다. 가장 앞의 한 글자만 또렷하게 살아났다.
백(白).
그 순간 멀리 하수로 어딘가에서 회중시계가 마지막으로 한 번 울었다.
똑.
그리고 북쪽 회랑 전체에서, 잠들어 있던 경보관들이 동시에 숨을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