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서고의 진실
海東曆: 201년 8월 20일 · 시점: 강민
해동력 201년 8월 14일 밤, 일행은 서고 안쪽 문의 첫 빗장을 깨웠을 뿐이었다. 그 너머에는 혈통의 맥과 황실 인장의 압력을 동시에 요구하는 봉인이 하나 더 있었다. 고륜은 그것을 보고 오래 침묵했다.
“이 문은 기록을 숨기려 만든 것이 아니라, 기록 앞에서 도망칠 사람을 걸러내려 만든 것이오.”
벽의 진법을 읽던 청우 대사가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그들은 물러났다. 돌아간 것이 아니라, 다시 들어오기 위해 숨을 골랐다.
“물러나는 것도 길이다.” 무겸이 그날 밤 강민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다만 이번에는 돌아올 길까지 계산해 두자.”
엿새 동안 해룡성(海龍城)의 밤은 더 숨이 막혔다. 반백파(反白派) 순찰대는 회랑을 하루에도 몇 번씩 바꿔 돌았다.
“교대 시각이 사흘 만에 세 번 바뀌었어요. 황자님이 그때마다 고쳐 적어 보내시는데, 이번 건 믿을 만해요.” 단비호(段飛虎)가 하수구에서 주워 온 녹슨 빗장을 확대경 아래 들어 보였다. “마모면으로 봉인 압력 차를 계산했어요. 이번엔 맞을 거예요.”
“지난번엔 틀렸고?”
“지난번엔 틀린 게 아니라 아직 덜 맞은 거예요.”
“맥은 매일 같은 시각에 짚었어.” 유서란(柳瑞蘭)이 강민의 손목에서 손가락을 떼며 말했다. “그날 이후로 한 번도 잠잠한 적이 없어. 지하의 문이 널 부르는 것 같아.”
“그럼 가야지.” 강민은 가슴을 눌렀다. “안 가면 이놈이 밤마다 나를 끌고 갈 것 같아.”
◆
8월 20일 밤, 그들은 다시 북쪽 회랑 아래로 내려갔다. 눅눅한 공기가 하수구 벽돌 틈마다 고여 있었고, 썩은 이끼와 묵은 쇳가루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장무겸(張武謙)의 창끝은 바닥에서 세 치쯤 떠 있었다.
“이번엔 소리 안 나게 하려고 가방 압력계도 눌러 놨어요.” 비호가 가방을 끌어안고 속삭였다. “그래도 바늘이 떨리는 건 어쩔 수가 없어요.”
“그 떨림이 형한테만 들린다더라.” 서란이 강민을 흘끗 보았다.
“들려.” 강민이 인정했다. “오늘은 평소보다 크게.”
서고의 첫 문 앞에서 백도윤(白度倫)이 기다리고 있었다. 예복은 없었다. 검은 무명 겉옷에 낡은 의장대 망토를 걸쳤고, 오른손 검지에는 황동 테를 두른 백옥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옥 안쪽 백룡문(白龍紋)이 강민의 박동과 같은 간격으로 푸르게 깜빡였다.
“전하, 그 반지가……” 청우가 낮게 말했다.
“알고 있소. 가리지 않겠소.” 백도윤은 오히려 강민을 똑바로 보았다.
“오늘 밤 본 것을, 나는 황실의 이름으로 부정하지 않겠소.”
강민은 대답 대신 가슴을 눌렀다. 손바닥 밑에서 쇠가 맞물리는 진동이 손을 밀어냈다. 백도윤이 반지를 문 중앙의 원형 홈에 끼웠다.
“압력판에 쐐기 세 개 넣었어요.” 비호가 속삭였다.
“진법은 소승이 낮추겠습니다.” 청우가 벽의 문양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마지막은 당신이오.” 고륜(高崙)이 강민을 보았다.
“피를 달라는 게 아니네요.” 문 앞에 서자 안쪽에서 낮은 울림이 올라왔다. “박동을 원하는구나.”
“밀지 마. 열어 줘.” 서란이 뒤에서 속삭였다.
“열어 줘……?”
“문이 대답을 기다리는 거야. 힘으로 때리면 닫혀.”
강민은 단전의 기운을 끌어올리는 대신 빈틈을 만들었다. 기계가 들어올 자리, 기록이 들어올 자리, 어쩌면 죄가 들어올 자리. 그 틈으로 청염이 가늘게 흘렀다.
철컥.
문이 안쪽으로 밀려났다. 먼저 닿은 것은 냄새였다. 200년 묵은 기름종이와 눌린 먼지, 그 밑의 희미한 탄내.
“불이 한 번 지나간 방 냄새야.” 무겸이 코를 찡그렸다.
“약 냄새도 섞여 있어요.” 강민이 숨을 삼켰다.
“병자를 살리려고 달인 탕약 냄새야.” 서란이 낮게 말했다. “아니면…… 병자의 몸을 열어 놓고 기계를 맞추던 방 냄새거나.”
방은 둥글었다. 천장은 낮았고 벽은 먹을 먹인 듯 검었다. 눈높이보다 조금 위로 수백 개의 작은 서랍이 박혀 있었다.
“서고라기보다 납골당 같군.” 무겸이 중얼거렸다.
“상아패마다 이름이 없어요.” 비호가 목소리를 낮췄다. “숫자랑 기호뿐이에요. 서랍이 몇 개나 되는 거야, 이거.”
“세지 마라.” 고륜이 말했다. “세다 보면 한 개도 못 놓고 나가오.”
한가운데 흑철과 백동(白銅)으로 짠 독서대 위에 사람 가슴만큼 두꺼운 책이 놓여 있었다. 백룡문과 흑철 톱니문이 나란히 박힌 표지 아래에 제목이 새겨져 있었다.
실맹내장(失盟內藏). 청염기관 원형기록 총서.
“실맹…… 잃어버린 동맹.” 강민의 시야가 흔들렸다. “연구선에서도, 용진도에서도, 어르신 입에서도 들었던 말이에요. 근데 여긴 소문이 아니라 책임자가 남긴 이름이네요.”
그가 손을 뻗자 서란이 손목을 잡았다.
“천천히.”
“누나.”
“네 맥이 너무 빨라.”
“무서워서 떠는 게 아니야.” 강민이 제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방 전체가 내 안의 기관이랑 맞물려 돌아. 서랍도, 독서대 밑 톱니도. 200년 동안 나를 기다린 것처럼.”
“열어 보게.” 고륜이 말했다. “이 방은 이미 당신의 박동을 들었소.”
서란의 손이 천천히 떨어졌지만 물러서지는 않았다. 첫 장은 마른 피부처럼 두꺼웠다. 해동제국(海東帝國)과 기계중원(機械中原)의 옛 인장이 나란히 찍혀 있었고, 그 아래 두 줄의 선언이 있었다.
“해동의 문장은 ‘멸망 뒤의 인간을 살리기 위하여’로 시작해요.” 강민이 읽었다. “중원 쪽은…… ‘살아남은 인간을 다스리기 위하여’로 끝나요.”
“같은 문서의 첫 장인데?” 무겸이 미간을 모았다.
“같은 문서인데 처음부터 뜻이 달랐어요. 두 줄 사이가 골짜기 같아요.”
“한쪽은 사람을 위하여, 한쪽은 사람 위에서.” 청우가 낮게 읊었다. “붓 한 자루가 두 시대를 가르는군요.”
“앞쪽 도면은 살리는 도구야.” 서란이 책장을 짚었다. “방사독에 망가진 심장과 폐를 대신할 기관. 끊어진 기맥에 증기 박동을 잇는 장치. 죽어 가는 아이를 위한 온열 반응로.”
“청염기관의 원형은 살리는 도구였구나.”
“적어도 처음에는.”
몇 장 뒤, 부드러운 곡선 위로 직선이 칼자국처럼 덧씌워져 있었다. 비호가 이를 악물었다.
“이건 보조 회로가 아니야. 제어 회로야. 이걸 넣으면 사람 기맥이 스스로 빠져나갈 틈이 없어져.”
“말 그대로냐?” 무겸이 물었다.
비호는 강민을 보았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말 그대로예요. 몸은 살아 있는데, 몸 안의 명령은 바깥에서 들어와요. 기계라면 끄면 되지만, 사람한테 이걸 박으면…… 사람을 끄는 법부터 배우게 되는 거예요.”
“살리려고 열어야 할 혈도랑 통제하려고 막아야 할 혈도가 같은 자리에 있어.” 서란이 손끝으로 입술을 눌렀다. “이건 수술서가 아니야. 수술서처럼 꾸민 쇠사슬이야.”
다음 장은 명부였다. 작고 가는 글씨의 이름들이 줄을 이었다. 생몰년도, 부모 이름도, 병명도 없었다. 두 글자만 반복되었다.
적합.
부적합.
“붉은 점은 적합에, 검은 사선은 부적합에 찍혀 있네요.” 강민이 목을 가다듬었다. “옆에 숫자가 있어요. 여섯, 아홉, 열둘, 열넷……. 이 숫자들, 나이가 아니죠?”
대답은 서란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이었다. 그녀의 엄지가 한 이름 옆에서 멈춰 있었다.
“이 이름…… 시장 골목에서 흔히 듣던 이름이야.” 서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옆에 ‘부적합’. 그 아래 작은 글씨로…….”
“뭐라고 적혀 있어?”
“재사용 불가.”
무겸의 창대가 낮게 울었다. 분노가 손을 타고 쇠로 번지는 소리였다.
“사람 이름 옆에 저런 말을 적은 놈들이 나라를 논했단 말인가.”
청우가 눈을 감았다. 염주가 한 알 움직였지만 소리가 나지 않았다. 고륜은 명부 대신 벽을 보았다. 이미 비슷한 것을 본 사람의 얼굴이었다.
“민아, 숨 쉬어.” 서란이 그의 등에 손을 얹었다.
“이 명부 어딘가에…… 내 자리도 있었을지 몰라. 이름도 없이, 숫자로.”
가슴속 기관이 쿵, 하고 눌렸다 풀렸다. 상아패들이 바람도 없는데 서로 부딪혔다. 이름 없는 아이들이 동시에 고개를 드는 소리 같았다.
“강민.” 서란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지금 입술 깨물었지.”
그 순간 혀끝까지 어떤 이름이 차올랐다. 자기보다 더 깊은 곳에 묻힌 이름. 부르는 순간 이 방의 기록이 몸 안으로 쏟아져 들어올 것 같았다. 강민은 피 맛이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다행히 피는 붉었다. 그 안쪽에서 푸른 열이 천천히 번졌다.
“……괜찮아. 안 불렀어.”
“계속 읽어야 하오.” 백도윤의 얼굴도 창백했지만 목소리는 도망치지 않았다. “여기까지 왔으니 끝까지 보아야 하오.”
“전하도 괴로우시잖아요.”
“이건 당신만의 죄가 아니오. 황실의 죄고, 백씨의 죄고, 해동의 죄요. 그러니 내가 먼저 눈을 돌릴 수는 없소.”
강민은 황자를 보았다. 죄 앞에서 등 돌리지 않는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무거운 위안이었다.
다음 묶음은 백씨 가문의 내부 기록이었다. 이쪽은 깊은 밤에 급히 쓴 손처럼 글씨가 떨렸다. 먹이 번지고 물방울 자국이 앉았다.
“나는 사람을 살리는 손으로, 사람을 재는 자를 만들었다.” 강민이 첫 줄을 읽고 손끝이 굳었다. “이름이…… 백유운(白裕雲).”
“변명이 없어요.” 서란이 작게 숨을 들이켰다. “처음 목적이 구원이었다고는 적었는데, 그걸 방패로 안 써요.”
“다음 줄을 읽어 볼게요.” 강민이 목을 가다듬었다. “‘구원이라는 말은 너무 쉽게 지배의 옷을 입는다. 내가 늦게 깨달았다. 늦게 깨달은 죄 또한 죄다.’”
비호가 정비 노트를 꺼내려다 그만두었다.
“기록하려고 쓴 문장이 아니네요. 견디려고 쓴 문장이에요.”
“왜 해동은 그 도면을 버리지 못했을까요?” 서란이 물었다.
“두려움이라 적혀 있소.” 고륜이 대신 읽었다. 목소리가 낮고 거칠었다. “핵멸망을 다시 맞을 두려움, 약한 몸으로 다음 재앙을 못 견딜 두려움, 중원의 병기를 해동만 못 가지면 먼저 무너질 두려움. 그것들이 양심을 한 줄씩 깎아, 의공사의 손을 병기장인의 손으로 바꿨다고.”
마지막 줄은 더 번져 있었다. 강민이 천천히 소리 내어 읽었다.
“‘이것은 의술이 아니다. 인류에 대한, 영원히 씻기지 않을 죄다. 훗날 내 피를 이은 자가 이 글을 읽거든, 힘을 계승했다 말하지 말라. 먼저 죄를 계승했다고 말하라.’”
책장을 더 넘길 수 없었다. 가슴속 반응로가 얼어붙는 듯하더니, 다음 순간 뼈 안쪽에서 더 무겁게 움직였다. 쿵. 쿵. 네 몸이 이 종이의 마지막 장이라고. 강민은 독서대 가장자리를 붙잡았다.
“그러면 나는…….”
무기냐고도, 실패작이냐고도 묻지 못했다. 죄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말하지 않아도 된다.” 무겸이 뒤에서 낮게 말했다. “지금 네가 하려던 말은 나도 안다.”
“……형은 모르세요.”
“모르는 척하마. 그게 낫다면.”
“사람은 자신이 태어난 까닭을 고를 수 없소.” 청우의 목소리가 뒤에서 낮게 들렸다. “다만 그 까닭을 무엇으로 끝낼지는 고를 수 있소.”
“……위로가 아니네요, 대사님.”
“위로가 아니오. 도망치지 말라는 말이오.”
칼 같은 말이었다. 그러나 사부 설무진(雪武陳)의 마지막 눈빛과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분노만으로는 이 명부를 덮을 수 없었다.
“잠깐만.”
비호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소년은 책의 등 쪽을 손톱으로 훑고 있었다. 실로 묶인 자리에 아주 얇은 백동 판이 숨어 있었다. 구리 핀을 판과 종이 사이에 밀어 넣자 세 번째에 낮게 걸렸다.
“여기, 장이 빠져 있어요.”
“누가 찢었느냐?” 무겸이 창을 세웠다.
“찢은 게 아니에요. 칼도 아니고 도공 끌도 아니에요. 너무 얇고 너무 일정해요. 정교한 소도(小刀)예요. 종이 올을 따라 들어가서 필요한 장만 숨을 끊듯 도려냈어요.”
서란이 등불을 비스듬히 대자 단면에 미세한 푸른 얼룩이 드러났다.
“코테르(機核) 가루를 묽게 푼 기록용 푸른 먹물이야. 연구선에서 본 서신 귀퉁이 자국이랑 같아.”
강민의 등줄기가 서서히 식었다. 고륜이 단면을 들여다보았고 노장의 눈동자가 아주 작게 흔들렸다.
“무인이 아니오.”
“예?”
“무인은 빼앗을 때 상처를 크게 남기오. 이건 상처를 남기지 않는 데 익숙한 손이오. 학자의 손, 관리의 손, 궁 안 자물쇠를 제 집 문처럼 여는 손.”
백도윤이 말없이 독서대 안쪽의 얇은 백동 기록판에 반지를 비췄다. 점검자의 이름이 하나씩 떠올랐다.
“대부분 오래전 죽은 서고 관리들이오. 그런데 맨 아래 한 줄은…… 두 해 전이오. 점검 사유는 ‘습기 제거 및 내장 문서 보존’.” 황자의 목소리가 굳었다. “서명은…….”
조하륜(趙河崙).
방의 모든 소리가 멀어졌다.
“서신의 칼자국, 빙륜 격실의 점검 서명, 그리고 이 빈 장.” 강민이 말했다. “문을 부수고 들어온 게 아니에요. 안에서 열쇠를 받은 거예요.”
“궁 안 누군가가 그자를 들여보냈다는 말이군.” 무겸이 이를 갈았다.
“두 해 전이면 황자 전하께서도 아시는 분입니까?” 서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름은 들어 보았소. 서고 점검관 목록에서 지워진 줄 알았소.” 백도윤이 입술을 깨물었다. “지워진 것이 아니라, 지운 것이었구려.”
“그자가 가져간 장에는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백도윤이 물었다.
비호가 빈자리의 앞뒤 장을 살폈다.
“앞 장은 제어 회로 구조, 뒤 장은 그걸 무력화하는 봉인 원리예요. 다리 한복판만 잘린 거죠. 제어하는 법이거나, 제어를 끊는 법이거나. 더 나쁜 건…… 둘 다일 수도 있어요.”
“동해로 갔다는 단서와 맞물리는군요.” 청우가 말했다.
“그자는 진실을 알려고 달아난 게 아니오.” 고륜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훔친 뒤, 그 진실의 가격을 알고 달아난 것이오. 그 가격을 치를 자도 이미 골랐겠지.”
누런 종이들 사이에서 빈자리만 방금 생긴 상처처럼 하얬다.
“그 장을 되찾아야 해.” 강민이 말했다.
“읽는 것보다 훨씬 위험한 일이다.” 무겸이 그를 보았다. “읽는 건 과거의 문을 여는 거지만, 되찾는 건 살아 있는 자의 손목을 붙잡는 거니까.”
“알아요. 200년 된 죄가 아니라 오늘 밤에도 돌아가는 죄예요.”
백도윤은 독서대 옆의 서랍을 열었다. 인장에 반응해 저항 없이 밀려 나왔다. 마른 붓과 봉랍 조각, 그리고 시험 삼아 적은 듯 흐릿한 문장이 남은 백지 한 장.
“‘기록은 살아남은 자의 변명이 아니라, 죽은 자가 마지막으로 붙잡는 손이다.’” 황자가 천천히 읽었다. “황자로 태어난 자에게 기록은 대개 권력의 도구였소. 그런데 이 방에서는 권력이 짓밟은 사람들의 마지막 뼈 같구려.”
서란은 명부를 다시 펼쳐 이름의 수를 세고 있었다.
“적합, 부적합, 사라진 줄, 지워진 줄…….” 눈가가 붉었지만 눈물은 떨어지지 않았다. 울기 전에 외워야 할 이름이 너무 많았다.
“누나.”
“괜찮아. 괜찮아져야 해. 이걸 본 사람이 무너지면, 이 이름들은 또 한 번 버려지는 거니까. 누가 이 사람들을 재료로 셌으니, 이제 누군가는 사람으로 다시 세어야 해.”
비호가 정비 노트를 펼쳐 명부 첫 이름부터 옮겨 적기 시작했다.
“단면 본뜨려던 거 아니었냐.” 무겸이 말했다.
“그것도 할 거예요. 근데 이게 먼저예요.”
글씨가 비뚤어지고 잉크가 번졌다. 무겸이 말없이 망토 귀퉁이를 찢어 잉크병 밑에 받쳐 주었다.
청우가 벽에서 상아패 하나를 조심스럽게 빼 보았다. 뒤쪽 홈에 머리카락 같은 황동 심지가 들어 있었다.
“사람의 맥을 흉내 내는 심지요. 죽은 기록에까지 맥을 붙여 놓았소. 이 방은 잊지 않으려고 만든 방이기도 하오. 문제는 잊지 않은 자들이 반성하지 않았다는 것. 기억이 곧 참회는 아니오. 기억도 권력의 손에 들어가면 다음 죄를 더 정교하게 만드는 연료가 되오.”
그 말에 고륜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독서대 아래의 흑철 발판을 가리켰다.
“발자국이오. 최근 것. 성인 남자보다 작고 가벼운데 뒤꿈치 압력이 유난히 일정하오. 오래 앉아 글 쓰는 자의 걸음이지. 그자는 병사가 아니오. 붓으로 사람을 죽이는 자요.”
“검으로 맞서는 적이면 베면 되는데.” 강민이 중얼거렸다. “붓이면 먼저 뭘 숨겼는지부터 찾아야겠네요. 어느 문장을 지웠는지, 어느 이름을 바꿨는지.”
그는 본국검(本國劍)의 자루를 쥐었다. 검끝이 이제는 적의 목만이 아니라 기록의 빈칸도 가리키는 것 같았다.
“그 전에 여기서 살아 나가야 한다.” 무겸이 말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깥에서 가느다란 금속음이 한 번 울렸다. 잠시 뒤 두 번. 비호가 얼어붙었다.
“……형, 방금 그거.”
“들었다. 왜 그러냐.”
“교대 신호 아니야. 안쪽 봉인이랑 바깥 경보 진법이 맞물리는 소리야. 누가 둘째 문을 밖에서 잠갔어!”
백도윤이 반지를 보았다. 백룡문의 푸른빛 대신 붉은 점 하나가 안쪽에서 번지고 있었다. 황자의 손가락이 처음으로 떨렸다.
“누군가 인장의 권한을 덮어씌웠소.”
“궁 안에서만 가능한 일입니까?” 서란이 물었다.
백도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것이 대답이었다.
무겸이 회랑 쪽으로 돌아서자 창끝이 바닥을 긁어 불꽃이 튀었다. 청우가 육환장 고리를 놓았다.
“소승도 이제 소리를 감출 때가 아닌 듯합니다.”
“이름들은 두고 가. 함부로 들고 달아날 수 없어.” 서란이 명부를 서책 안에 다시 끼웠다.
“상처 모양만은 가져갈게요.” 비호가 빠진 장의 단면을 투명판으로 본떴다.
강민은 서책을 덮지 않았다. 손바닥을 백유운의 마지막 줄 위에 얹었다. 먼저 죄를 계승했다고 말하라. 문장이 손금 아래에서 차갑게 닿았다.
“아직 어떤 이름도 못 부르겠어요.” 그가 낮게 말했다. “그래도 뭘 외면하면 안 되는지는 알 것 같아요.”
가슴속 기관이 들은 것처럼 무겁게 울었다.
“발소리요.” 고륜이 이를 물었다. “자동병이오. 일정하고, 망설임이 없소. 그 사이에 사람도 섞였구려.”
“몇이오?” 백도윤이 물었다.
“열이 넘소. 앞이 아니라 양쪽에서 조여 오고 있소.”
회랑 쪽에서 낮고 단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명령을 많이 내려 본 자의 목소리였다.
“안쪽 문을 봉쇄하라. 서고의 증인은 한 명도 밖으로 내보내지 마라.”
비호가 숨을 삼켰다. 무겸의 손등에 힘줄이 섰다. 강민이 검자루를 잡았고, 서란이 그 곁에 섰다.
그때 문밖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울렸다. 모두가 아는 목소리였지만, 갈라진 인장 위에 칼을 세운 듯 낮고 선명했다.
“황자 전하. 선택하십시오. 저들을 넘기시겠습니까, 아니면 함께 반역자가 되시겠습니까?”
백도윤의 얼굴에서 마지막 핏기가 사라졌다. 모든 시선이 그에게 모였다. 강민은 그 순간 백씨와 황실과 해동제국이 한꺼번에 숨을 멈추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백도윤의 손이, 천천히 자신의 황실 인장 반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