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점 · 강민 — 균열·낙인 단계

황자의 선택

第1部 · 話 29 · 검령성 · published

海東曆: 201년 8월 26일 · 시점: 백도윤

비밀 서고의 가장 깊은 방은 숨을 쉬지 않았다.

어린 시절 내궁 돌계단 밑에서 들리던 낮은 쇳소리를, 어른들은 오래된 배수로의 물소리라고 했다. 백도윤(白度倫)은 이제 알았다. 그것은 200년 동안 닫혀 있던 죄의 심장이 황궁 바닥 아래에서 느리게 뛰어 온 소리였다.

강민(剛民)은 독대 앞에서 불 꺼진 코테르(機核)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유서란(柳瑞蘭)은 명부를 접으며 눈을 들지 못했다.

“칼 지나간 길이 너무 매끄러워요.” 단비호(段飛虎)가 도려진 단면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종이 결까지 읽은 손이에요. 학자거나, 학자보다 더 지독하게 기록을 믿는 도둑이거나.”

“조하륜.” 고륜(高崙)이 낮게 이름을 뱉었다.

“서고 점검관 서명까지 남기고 간 자가 이렇게 깨끗하게 도려냈다는 건, 들키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이야.” 서란이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면 들켜도 상관없다는 뜻이거나.” 무겸이 낮게 받았다.

백도윤은 독대 모서리를 잡았다. 목 안쪽에서 쇳가루 같은 것이 긁혔다.

“백씨는 제국의 은인이다.”

어릴 적 부친이 그를 무릎에 앉히고 자주 하던 말이었다. 폐허 위에서 해동이 다시 일어선 것은 백씨가 기공과 기계를 함께 붙들었기 때문이라고. 그 말이 지금 명부 한 장 앞에서 종잇장처럼 찢어지고 있었다.

‘은인이라.’

조정에서 반역은 ‘불온한 소요’가 되었고, 학살은 ‘진압 과정의 불가피한 손실’이 되었다. 그러나 아이의 심장을 열어 청염기관(靑炎機關)의 원형을 시험했다는 문장은 어떤 관용구로도 덮이지 않았다.

강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고함을 쳤다면 견딜 만했을 것이다.

“강민.” 백도윤이 처음으로 먼저 불렀다.

소년이 천천히 눈을 들었다.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황실이 아무것도 몰랐다고 말하지 않겠소.”

장무겸(張武謙)의 손이 장창을 감쌌고, 청우(淸雨)가 반쯤 감은 눈을 떴다.

“모른 척했을 수는 있소. 기록을 잠갔고, 이름을 바꿨고, 죄를 공으로 덧칠했을 수는 있소. 그러나 그 또한 죄요. 덮어 둔 자는 베지 않았다는 이유로 결백해지지 않소.”

“……”

“당신이 짊어진 것이 핏줄이라면, 내가 짊어진 것은 그 핏줄을 권력의 말로 장식해 온 왕관이오.”

“전하께서 그걸 인정하신다고 해서……” 강민의 목소리는 마른 쇳소리 같았다. “죽은 사람들이 돌아오지는 않습니다.”

“알고 있소. 그러니 사과만으로 끝낼 생각은 없소.”

그때였다. 서고 바깥 회랑의 등불 하나가 꺼졌다. 바람이 들지 않는 지하였다. 둘째, 셋째. 일정한 간격으로 어둠이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

“제가 잠재운 경보가 아니에요.” 비호가 압력계를 바닥에 댔다. 바늘이 세 번 튀었다가 왼쪽으로 기울었다. “다른 선이에요. 회랑 기둥 속 감시선. 처음부터 두 겹이었어요.”

“누군가 황자의 허가와 별개로 이 서고를 감시해 왔다는 뜻이오.” 백도윤의 얼굴이 굳었다.

“배신자는 안에 있군.” 고륜이 말했다.

“궁 안에만 있는 게 아닐 수도 있소.” 백도윤이 낮게 받았다. “내 곁에 있었을 수도 있소.”

회랑 너머에서 쇳발 소리가 몰려왔다.

“근위 군화 소리에 톱니 마찰음이 섞였어요.” 비호가 귀를 기울였다. “이건 일반 군화가 아니에요.”

“반백파(反白派)가 자동 의족 병사들을 근위병 사이에 넣은 것이오.”

“전하, 숫자는?” 무겸이 창끝을 낮췄다.

“이 길을 막으려면 최소 스무 명. 동쪽 계단으로 왔으니 남쪽도 곧 막힐 것이오. 서쪽 배수로로 갑시다.”

“잠겨 있지 않습니까?” 서란이 물었다.

“잠겨 있소. 그러나 황실의 잠금은 황실의 피로 열린다.”

“피로요?” 비호가 입을 벌렸다.

“상징적 표현이오.” 백도윤은 짧게 답했다가, 우습지 않은 농담이었음을 깨닫고 덧붙였다. “대체로는 인장으로 열린다는 뜻이오.”

비호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빛이 스쳤다. 그 작은 틈이 얼어붙은 공기를 잠깐 흔들었다. 그러나 곧 서고 바깥에서 낮은 명령이 들렸다.

“문을 봉쇄하라. 황자를 해치지 말고, 나머지는 생포한다. 특히 가슴에 청염 반응을 보이는 소년은 반드시 산 채로 잡아라.”

강민의 눈빛이 변했다.

“저를 알고 있어요.”

“서고 침입을 적발한 게 아니오.” 백도윤이 낮게 말했다. “누군가 처음부터 당신이 여기 오기를 기다렸소.”

그는 서책을 닫았다. 너무 낡아 통째로 가져갈 수 없었다. 백유운(白裕雲)의 유고가 적힌 낱장만 품속 방수 주머니에 넣고, 명부는 서란에게 건넸다.

“이건 의공사의 손에 있어야 하오.”

“전하께서는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서란이 그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이 명부가 세상에 나오면, 백씨를 은인이라 부르던 사람들은 전하를 배신자라 부를 겁니다.”

“그들이 그렇게 부르면, 나는 그 이름도 받아야겠지.”

서란은 더 묻지 않았다. 명부를 약재 주머니 은침갑 아래에 넣었다. 종이를 숨기는 손이 아니라, 환자의 심장을 보호하는 손놀림이었다.

백도윤은 제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검지에 황동 테를 두른 백옥 반지. 안쪽에 청금석 줄이 혈관처럼 박혀 있었다. 태어난 날부터 그의 손에 맞춰 다시 깎아 온 인장이었다. 인장을 잃는 황자는 말의 절반을 잃는다.

그러나 강민에게는 말이 아니라 길이 필요했다.

그는 반지를 뺐다. 손가락에 남은 하얀 자국이 낯설었다. 반지 안쪽 홈을 손톱으로 누르자 딸깍, 옥의 안쪽 층이 얇게 벌어졌다.

“그 안에 공간이 있었어요?” 비호의 눈이 번쩍 뜨였다.

“황실의 장식은 대개 장식이 아니오.”

그는 머리카락보다 얇은 황동 필름을 꺼내 강민의 손바닥에 올렸다. 그 위에 빈 반지를 얹고 손가락을 접어 쥐여 주었다.

“천부항(天府港).”

고륜의 얼굴 근육이 굳었다. 청우는 눈을 감았다. 필름을 빼앗듯 들여다보려던 비호는 서란에게 손등을 맞고 물러났다.

“이게 무엇입니까.” 강민이 물었다.

“200년 전, 잃어버린 동맹의 마지막 결정이 내려진 비밀 기지의 좌표요. 해동과 중원이 한 책상에 앉아 구원의 이름으로 죄를 결정했던 곳. 그리고 백씨가 뒤늦게 그 죄를 봉인하려 했던 곳.”

“왜 지금까지 숨겼습니까.”

“내가 숨긴 것이 아니오. 나 역시 조각만 갖고 있었소. 좌표는 대대로 황자의 인장에 새겨졌지만,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설명되지 않았소. 황실은 때때로 진실을 보관하는 대신 진실의 의미를 죽여 버리오. 의미가 죽으면 물건은 장식이 되니까.”

“이것이…… 제 핏줄의 끝까지 데려다줄 거라는 말입니까.”

“그렇소. 그러나 끝이 해답이라는 뜻은 아니오. 때로 끝에는 더 깊은 문이 있소. 그 문 앞에서 무엇을 선택할지는 당신이 정해야 하오.”

강민의 입술이 잠깐 움직였다. 어떤 이름이 혀끝에 걸린 듯했다. 백도윤도 호적 낙장에 남은 또 다른 이름을 보았다. 그러나 지금 그것을 입에 올리는 것은 폭력이었다. 황자는 삼켰다.

“지금은 나갑시다.”

쾅! 서고 문이 안쪽으로 움푹 찌그러졌다. 충각이었다. 천장에서 먼지가 쏟아졌다.

“세 번 더 치면 열립니다!” 비호가 압력계를 챙겼다.

“두 번 안에 나간다.” 무겸이 말했다.

“한 번 안에 나가면 더 좋고요!”

백도윤은 독대 뒤편 백룡문(白龍紋) 부조의 빈 홈에 반지를 뺀 손가락을 넣었다. 홈이 지문을 읽듯 차갑게 조여 왔다.

“전하, 손가락이……” 서란이 숨을 삼켰다.

“맥박을 보는 장치요. 200년 전 장인들은 신분을 증명하는 데에도 사람의 몸을 열쇠로 삼았소.”

벽 한쪽이 옆으로 밀리며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틈이 생겼다. 녹슨 물 냄새가 밀려왔다. 서쪽 배수로였다.

쾅! 경첩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

“비호, 먼저.”

“왜 늘 제가 먼저예요?”

“작으니까.”

“그 이유 너무 자주 쓰십니다!”

비호는 투덜대며 틈으로 미끄러졌다.

“길은 있어요! 다만 냄새가 사람을 죽일 것 같아요!”

“죽기 전에 달리면 된다.” 고륜이 건조하게 말했다.

서란과 청우가 뒤따랐다. 강민이 들어가려는 순간 두 번째 충각이 문을 때렸다. 문 중앙이 크게 벌어졌다. 황동 가면 너머에서 고장 난 풍구 같은 호흡이 새어 나왔다.

“나오라, 황자 전하. 태사령께서 전하의 안전을 보장하라 하셨습니다.”

백유강(白裕剛)의 그림자가 이 지하까지 내려와 있었다.

“내 안전을 보장한다는 말은, 내 선택을 감금하겠다는 뜻이겠지.”

“전하의 선택은 제국의 안정을 해칩니다.”

“제국이 죄 위에 안정되어 있다면, 흔들리는 편이 낫다.”

백도윤은 검을 뽑았다. 그 소리에 가장 놀란 것은 그 자신이었다. 의식 때 허리에 차던 예복의 일부였다.

“전하, 검술은…….” 고륜이 낮게 물었다.

“황족의 교양으로 배웠소. 교양과 실전 사이에 강이 하나 있다는 것도 배웠지. 오늘 처음 건너 보겠소.”

“전하.” 강민이 그를 보았다.

“가시오.”

“전하 혼자서는……”

“혼자가 아니오.” 백도윤이 고륜을 흘끗 보았다.

“늙은이를 방패로 쓰는 법을 벌써 배우셨군요.”

“황궁에서 배운 것 중 쓸 만한 게 그것뿐이오.”

고륜의 입가가 희미하게 움직였다. 확실히 웃음이었다.

“가자. 전하와 고륜 장군이면 길목 하나는 버틴다.” 무겸이 강민의 어깨를 잡았다.

강민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 가슴의 낮은 청염 박동을 백도윤도 느꼈다.

“강민. 이 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사과가 아니오. 길을 여는 것이오. 당신이 여기서 나가지 못하면, 내가 방금 한 말은 모두 좋은 문장으로 끝날 뿐이오. 좋은 문장은 세상을 바꾸지 못하오. 살아남은 사람이 바꾸지.”

강민은 마침내 몸을 돌렸다. 배수로 입구에서 한 번 더 돌아보았다.

“죽지 마십시오.”

백도윤은 대답 대신 검끝을 조금 들어 보였다.

세 번째 충각에 철문이 터졌다. 첫 합은 백도윤의 패배였다.

“윽……!”

상대의 팔뚝 보조 피스톤이 칼끝을 반 초 더 빠르게 밀어 넣었고, 그의 손목이 바깥으로 꺾였다. 고륜의 창이 적의 팔꿈치를 쳐 내지 않았다면 검은 첫 합에 떨어졌을 것이다.

“전하. 칼을 보지 마십시오. 사람의 어깨를 보십시오.”

“지금 가르치는 중이오?”

“죽기 전에 배우시면 빠릅니다.”

둘째 합, 그는 적의 어깨가 먼저 움찔하는 것을 보고 반보 물러섰다. 칼날이 앞섶을 찢고 어깨에 뜨거운 선을 그었다. 정쟁에서 피는 대개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 오늘 처음으로, 그의 선택이 자신의 살갗을 열었다.

“검으로 못 이기면 자리로 버티겠소.” 그는 두 사람이 겨우 설 만한 길목 한가운데에 섰다. “조정에서 평생 해 온 일이오. 어느 자리에 서느냐가 곧 권력이지.”

고륜의 창이 왼쪽을, 서툰 검이 오른쪽을 막았다. 넘어져 들어온 병사의 목을 치려던 순간, 가면 안쪽의 공포에 질린 눈과 마주쳤다. 검끝이 비껴 손등만 쳤고, 고륜이 창대로 턱을 찍어 기절시켰다.

“전하, 전장에서 망설이면 죽습니다.”

“죽이지 않아도 멈출 수 있으면 멈추고 싶소.”

“그 마음은 좋습니다만, 다음번에는 반 초만 빨리 하십시오.”

“노력하겠소.”

“노력은 살아남은 뒤에 평가하겠습니다.”

배수로 안쪽에서 비호가 외쳤다.

“이쪽 수문이 막혔어요! 백 년 전에 녹슨 게 아니라 누가 최근에 다시 용접해 놨어요!”

“열 수 있느냐?” 무겸의 목소리.

“열 수 있느냐고 묻지 말고 시간을 주세요!”

“얼마나?”

“제 자존심을 지키려면 3분, 살아남으려면 1분 30초!”

“1분 30초라.” 백도윤이 이를 악물었다. “정쟁에선 한숨도 안 되는 시간인데, 검을 들고 서니 긴 생이구려.”

피가 손목까지 내려와 손잡이가 미끄러웠다. 뒤쪽에서 또 다른 명령이 들렸다.

“황자를 비켜라. 노장부터 처리한다.”

셋이 동시에 고륜에게 달려들었다.

“장군, 아래!”

“압니다, 전하!”

셋째가 낮게 파고들자 백도윤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발을 걸자 병사의 의족이 비틀리며 무릎 관절이 꺾였다. 쇠 찢어지는 소리와 비명이 터졌다. 의족을 부쉈을 뿐인데, 그 비명은 살이 찢기는 소리와 다르지 않았다.

“물러나라. 더 다치기 전에.”

병사는 대답 대신 단검을 뽑았다. 칼날이 뺨을 스쳤고, 고륜의 창대가 그 손목을 후려쳤다.

“전하. 자비를 베푸실 때도 상대의 다른 손은 보십시오.”

“오늘 배울 게 많군.”

“살아남으시면 내일부터 정식으로 가르쳐 드리지요.”

“열렸어요!” 비호가 외쳤다. “다만 수문이 열리면 물이 옵니다!”

“얼마나?” 서란의 목소리.

“많이요!”

“정확히.”

“엄청 많이요!”

배수로 깊은 곳에서 둔중한 물소리가 일었다.

“고륜 장군. 셋을 세면 물러나시오.”

“전하께서 먼저 물러나십시오.”

“황자의 명령이오.”

고륜은 찰나 그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추격병들이 다시 밀려들었다. “둘.” 백도윤이 검을 적의 발목 높이에 비스듬히 걸었다. “셋.”

고륜이 창대로 등롱을 모두 깨뜨렸다. 어둠이 터졌다.

“뛰시오!”

두 사람이 배수로로 몸을 던진 순간, 풀려난 물이 검은 짐승처럼 통로를 덮쳤다. 병사들이 뒤엉키는 소리, 가면이 돌바닥에 부딪히는 소리, 증기 호스가 끊어지는 소리.

물살에 벽으로 내던져진 백도윤의 팔을 누군가 잡아 끌었다. 녹슨 사다리를 붙든 강민이었다. 물은 차가운데 그 손만 이상하게 뜨거웠다.

“전하!”

“괜찮소.” 거짓말이었다. 어깨가 깨진 듯 아팠다. “길은?”

“전하 손이 차가워요. 피도 안 멈췄고요.” 강민이 그를 끌어올렸다.

“물길 따라가면 폐약재 창고 아래로 빠져요!” 비호가 손을 흔들었다. “근데 병사들도 곧 돌아올 거예요!”

“전하도 함께 가셔야 합니다.” 무겸이 말했다.

“나는 여기서 갈라지겠소.”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사라지면 황궁 전체가 뒤집혀 의공원, 문서고, 시장까지 다 봉쇄될 것이오. 당신들이 빠져나갈 틈이 사라진다.”

“그 몸으로 돌아가면 붙잡힙니다.” 서란이 매섭게 말했다.

“붙잡히는 것과 머무르는 것은 다르오. 나는 황자요. 아직 내 이름으로 열 수 있는 문이 있고, 멈출 수 있는 명령이 있으며, 시간을 벌 수 있는 거짓말이 있소.”

“거짓말을 하시겠다는 겁니까?” 강민이 물었다.

“정치를 하겠다는 뜻이오.”

백도윤은 젖은 황동 기계 새의 꼬리 깃을 서란에게 건넸다.

“의공원 남쪽 약재상 ‘푸른 박하’의 주인은 아직 내 사람이오. 이 깃을 보이면 뒷문을 열어 줄 것이오. 시장 수로를 타고 동쪽 거처로 빠지시오. 오늘 밤 안에 세 번 장소를 바꾸시오. 같은 불빛 아래에서 두 번 자면 안 되오.”

“전하 사람이라는 걸 어떻게 믿습니까?” 비호가 물었다.

“믿지 마시오. 확인하시오. 박하 말린 냄새가 나지 않으면 들어가지 말고, 주인이 먼저 ‘오늘 약값은 비싸다’고 말하지 않으면 도망치시오.”

“황궁 사람들은 암호도 약값으로 합니까?”

“좋은 암호는 평범해야 하오.”

“오늘 밤 전하께 많은 것을 배웁니다.” 청우가 낮게 웃었다.

“나 역시 배우고 있소. 도망칠 때 냄새도 확인해야 한다는 것.”

위쪽 회랑에서 호각이 울렸다. 백도윤은 강민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강민. 아까 내가 말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소.”

“무엇입니까.”

호적 낙장의 다른 이름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그는 끝내 삼켰다.

“당신이 누구인지, 남이 먼저 정하게 두지 마시오.”

강민은 오래 침묵하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륜이 황자를 따라 돌아서려 하자 백도윤이 손을 들었다.

“장군은 저들과 가시오. 내 곁에는 아직 궁의 벽과 이름이 있소. 저들에게는 길을 아는 사람이 필요하오.”

고륜의 얼굴에 고통이 스쳤다. 그는 물속에서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불완전한 예라 더 무거웠다.

“살아 계셔야 합니다.”

“나도 그러려고 하오.”

“말만 번지르르한 황자는 싫어합니다.”

“그럼 내일도 싫어할 수 있게 해 보겠소.”

고륜은 입술을 꽉 다물고 돌아섰다. 일행이 좁은 수로 너머로 멀어졌다. 마지막으로 강민이 돌아보았다. 백도윤은 손을 들지 않았다. 손을 들면 붙잡고 싶어질 것 같았다.

그들이 사라진 뒤 황자는 제 선택을 되짚었다. 친백파의 운명을 저들의 길에 묶었다. 인장을 잃었다. 궁 안의 배신자를 적으로 돌렸다.

“……살아남아야 한다.” 그는 젖은 칼자루를 쥐고 중얼거렸다. “그 선택을 문장으로 끝내지 않으려면.”

모퉁이를 돈 추격병 셋이 그를 발견했다.

“저기다! 황자 전하다!”

“오지 마라. 이것이 보이느냐.” 백도윤은 벽의 붉은 긴급 손잡이를 내렸다. “황족 명령권이다. 열려라.”

흰 김이 터졌다. 그 틈에 그는 점검문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좁은 문이 어깨 상처를 사정없이 긁었다.

점검문 너머는 의공원 뒤편의 폐약재 건조실이었다. 말라붙은 약초 냄새와 곰팡이 냄새. 벽을 짚고 겨우 선 그에게 늙은 시종령이 다가왔다.

“전하. 상처가……”

“소리 낮춰라. 죽을 정도는 아니다.”

“전하께서 의술을 언제 익히셨습니까.”

“지금은 농담을 받을 기운이 없다.”

시종령은 붕대를 감으며 빠르게 보고했다.

“동쪽 회랑이 봉쇄되었습니다. 태사령 쪽 사람이 내궁 문서고를 장악했고, 곧 이쪽도 수색할 겁니다. 친백파(親白派)는 절반만 연락이 닿았습니다. 절반은 침묵했습니다.”

“침묵한 쪽은 이미 흔들리는 것이겠지. 세 통을 보내라. 첫째, 의공원 약재 수송선은 오늘 밤 검문을 받지 않는다. 황자 직권이다. 둘째, 내궁 서쪽 배수로는 누수 사고로 폐쇄한다. 셋째, 반백파가 비밀 서고에 무단으로 병력을 투입했다는 항의문을 태사령에게 보낸다.”

“태사령에게요? 그러면 전하께서 서고에 계셨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미 안다. 모르는 척하는 시간을 내가 빼앗는 것이다. 궁 안에서 몰래 칼을 휘두른 자는 대낮의 회의장에서는 손을 숨겨야 한다.”

“그 틈에 강민 일행이 빠져나가는군요.” 시종령이 매듭을 짓다 멈췄다. “인장은 어디에 있습니까?”

“주었다.”

“누구에게……”

“가야 할 사람에게.”

늙은 시종의 한숨에는 책망과 두려움, 그리고 아주 작은 안도가 섞여 있었다.

“그 반지가 없으면 명령권 절반이 흔들립니다.”

“그러면 나머지 절반으로 버틴다. 나도 이제 조정이 좋아하는 것만 고를 생각이 없다.”

그때 천장 환기구 덮개가 톡 떨어졌다. 손바닥만 한 황동 기계 새가 굴러 나왔다. 시종령이 소매에서 침을 꺼냈다.

“황실 연락용이 아닙니다, 전하. 균형추 위치가 다릅니다.”

“톱니 문양이 너무 가늘군. 장식보다 기능을 먼저 생각하는 손이다.” 백도윤이 낮게 말했다. 학자의 손길이었다.

부리에서 밀려 나온 기름종이에는 한 줄이 적혀 있었다.

‘전하께서 첫 검을 뽑으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먹은 아직 마르지 않았다. 지나치게 정중해서 더 끔찍했다. 뒷면에도 글이 있었다.

‘이제 제 두 번째 손도 움직일 차례입니다.’

그 순간 복도 밖에서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약재 수송선 봉쇄 명령을 받들러 왔습니다.”

백도윤은 시종령을 보았다. 시종령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아무 명령도 보내지 않았다.

“문을 열까요, 전하?”

백도윤은 젖은 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리고 처음으로 깨달았다.

조하륜(趙河崙)의 손은 서고의 책장만 도려낸 것이 아니었다. 이미 황자의 문고리 위에 놓여 있었다.

— 話 29 終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