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하륜의 두 번째 손
海東曆: 201년 9월 2일 · 시점: 강민
해룡성(海龍城)의 뒷골목에서는 썩은 물과 젖은 석탄재, 오래 말린 약재 냄새 사이로 수은을 닦아 낸 기름종이 특유의 차갑고 미끈한 냄새가 났다. 강민은 그 냄새를 사흘째 따라가고 있었다.
백도윤(白度倫)이 내준 황궁 동쪽 외곽의 낡은 관사에서도 누구 하나 먼저 잠들지 못했다. 창호지 너머로 순찰병의 그림자가 길어질 때마다 방 안의 숨이 멎었다.
“다들 눈을 감고 누워 있는데 칼자루는 쥐고 있네.” 비호가 이불 속에서 속삭였다. “제가 제일 먼저 잠들 줄 알았는데 안 되네요.”
“그건 네가 제일 오래 깨어 있어서다.” 무겸이 어둠 속에서 낮게 받았다. “자라. 내일도 일이 있다.”
“형은요? 형도 안 자잖아요.”
“……자고 있어.”
“거짓말.”
“도려진 책장, 끊어진 호적 낙장, 황자님이 주신 옥반지 속 천부항(天府港)의 좌표.” 장무겸(張武謙)이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다 한 방향을 가리키는데, 정작 가리키는 손가락이 안 보이는군.”
“그 손가락 이름은 다들 알잖아요.” 강민이 말했다. “조하륜(趙河崙).”
“형, 여기 이 서명 좀 봐.” 단비호(段飛虎)가 서고에서 챙겨 온 도면 귀퉁이를 손톱으로 톡톡 쳤다. “본문은 거의 긁혀 나갔는데 여백 결재란 하나가 살아 있어. 먹으로 쓴 이름은 허명 같아. 근데 밑에 찍었다 지운 화인이 있어. 톱니 세 개가 맞물린 문양.”
“도공거리에서 보던 옛 상단 낙관 같은 건가?” 강민이 물었다.
“비슷한데 훨씬 작고 깊어. 종이가 아니라 금속판에 찍던 압력으로 눌렀어.”
“상단 이름은?” 무겸이 물었다.
비호는 균열 난 확대 렌즈를 눈앞에 붙였다.
“청황상단. 공식으로는 약재랑 방부용 기름을 다루는데, 장부상 수은 소모량이 말이 안 돼. 누나가 의공원 쪽에서 확인했어.”
유서란(柳瑞蘭)이 붉은 표시가 빼곡한 약재 장부를 펼쳤다.
“조하륜의 옛 연구실이 문을 닫은 뒤에도 같은 명의로 방부용 수은과 기름종이가 해마다 들어갔어. 표본 보관 정도가 아니야. 썩지 않게 뭔가를 계속 감싸고 닦아야 하는 양이야. 폐기된 기관 장기나 오래된 의체를 다룰 때 쓰는 조합이지. 그런데 그게 정식 창고가 아니라 뒷골목으로 빠졌다는 건…….”
“연구를 멈춘 적이 없다는 뜻이겠지.” 고륜(高崙)이 말끝을 받았다. 마른 쇳조각 같은 목소리였다.
“찾아야 합니다.” 창가의 청우(淸雨) 대사가 빗소리 속에서 육환장 고리를 작게 울렸다. “다만 찾는 순간, 저쪽도 우리가 무엇을 찾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강민은 손목의 기계 염주를 엄지로 한 알 넘겼다.
“대사님이 주신 거, 잘 쓰고 있어요. 화가 오르면 한 알 넘기고 숨 한 번.”
“그 한 알이 칼보다 먼저 가야 합니다.”
◆
청황상단 창고는 해룡성 서남부 무연동(霧煙洞)에 있었다.
“낮엔 기름종이 묶음에 싸구려 의체 부품, 가짜 코테르(機核) 조각 파는 골목이에요.” 비호가 설명했다. “오후엔 경비대가 한 번씩 돌고, 상인들은 웃으면서 세금을 내요. 근데 해가 지면 약재상 현판이 붉은 천으로 가려져요. 그 아래로 아는 사람한테만 보이는 톱니 표식이 나와요.”
“그럼 낮에는 장사꾼, 밤에는 다른 무언가로군.” 고륜이 말했다. “각자 위장해서 사흘만 보세.”
“그런데 저는 뭘로 위장해요?” 비호가 물었다.
“굴뚝 청소부다.” 고륜이 답했다.
“또 시꺼메지는 거예요?”
“그래서 위장이 되는 거다. 얼굴이 검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으니까.”
“저는 품팔이꾼, 어르신은 수레꾼이라고 하셨죠.” 무겸이 확인했다. “서란은 약재 바구니, 대사님은 법당, 강민은 물장수.”
“물통 무겁겠다……” 강민이 중얼거렸다.
“무거워야 진짜처럼 보이는 법입니다.” 청우가 웃지 않고 말했다.
첫째 날 밤, 위장을 푼 일행이 관사에 모였다.
“굴뚝에 반사경 넣어서 마당 봤어.” 비호가 먼저 말했다. “문은 세 번 열렸어.”
“물장수 하면서 나도 봤어.” 강민이 이었다. “한 번은 진짜 약재, 한 번은 수은 냄새 나는 도기 항아리 여섯 개. 마지막은 빈 수레였는데…… 나오지 않았어요.”
“법당에서 하루 종일 목탁 치며 세어 보니 드나든 발이 낮과 밤에 다릅니다.” 청우가 말했다. “밤 발이 더 무겁더군요.”
“바닥짐이 있겠군.” 고륜이 손바닥 위에 쌀알만 한 쇳가루를 올려 보였다. “수레바퀴가 긁고 간 자리에서 긁어 왔다. 겉바퀴는 가볍게, 안쪽엔 철심. 빈 수레처럼 보여도 바닥 아래에 뭘 숨길 수 있어.”
“창고 안에 뭘 쌓아 두는 걸까요.”
“쌓아 두는 게 아니라 빼내려고 모으는 거겠지.” 무겸이 말했다.
“그럼 빼낼 때를 기다려야겠네요. 오늘은 구경만 했으니까.” 비호가 하품을 삼켰다.
“구경도 일이다. 내일은 냄새를 맡자.” 서란이 약초 바구니를 풀었다.
둘째 날은 비가 내렸다.
“비가 오면 골목이 더러워지는데, 오히려 정직해져요.” 서란이 약재 바구니를 들고 걸으며 속삭였다. “낮에 숨던 냄새가 물에 젖어 다 올라오거든.”
창고 뒤 배수구 앞에서 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기름종이랑 수은만이 아니야. 냉각액 냄새가 섞였어. 아주 묽지만 빙륜(氷輪) 계열 코테르를 보존할 때 쓰는 배합이랑 닮았어.”
“빙륜?” 강민이 되물었다.
“청염과 반대 성질의 냉각 코테르래. 의공원에서도 실물 본 사람은 거의 없어. 기록만 남아 있지. 네 몸의 열을 누르는 데 필요한 게 언젠가 그런 종류일 수 있다는 건…….”
서란은 말을 끝내지 않았다.
“누나, 거기서 멈추면 더 무서워.” 강민이 작게 웃으려 했다.
“그러니까 묻지 마.” 서란의 멈춤이 곧 대답이었다.
그날 밤 비호는 지붕 위에 엎드려 젖은 기와 사이로 표창 하나를 굴렸다. 표창은 수레 밑을 스치고 돌아왔다.
“줄이 당겨졌다가 풀렸어. 밑에 뭐가 있어.” 비호가 표창을 코끝에 대고 그을음을 문질렀다. 푸른빛이 희미하게 번졌다. “맞아, 바닥짐 있어. 그리고 이거, 톱니 화인. 조하륜 표식이야.”
“확실하냐.” 지붕 아래에서 무겸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을음이 푸르게 번지는 건 코테르 가루 섞인 먹뿐이에요. 이 골목에서 이런 먹 쓰는 사람, 한 명밖에 없어요.”
◆
셋째 날 밤, 비는 멎었지만 골목 돌 틈마다 검은 물이 고여 있었다.
“겉으론 그냥 낡은 목조 창고인데.” 비호가 벽에 귀를 댔다. “안에서 피스톤 소리가 나. 아주 천천히 왕복해.”
“사람 숨소리가 아니에요.” 강민이 속삭였다. “명령을 기다리는 기계 소리예요.”
그는 염주를 넘겼다. 들숨. 청염의 박동을 단전 아래로. 본국검(本國劍)을 쥔 손목의 힘을 풀었다.
“들어간다.” 고륜의 말과 함께 무겸이 측면 널문을 밀었다.
“잠겨 있지 않다.”
“그게 더 불길하오.”
기름종이와 수은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 나왔다. 2층 높이 천장 아래 황동 도르래가 어둠 속에 매달려 있었고, 벽마다 약재 상자와 낡은 의체 부품이 쌓여 있었다.
“창고치고는 도르래가 너무 좋아요.” 비호가 속삭였다. “이건 공방이야.”
“그리고 가운데만 너무 깨끗하군.” 무겸이 말했다.
“싸움 마당이야. 일부러 비워 놨어.” 비호가 침을 삼켰다.
그 끝에서 진홍색 안광 열두 개가 동시에 켜졌다.
“열둘이야.” 비호가 속삭였다. “팔꿈치가 한 번 더 접혀. 어깨 뒤엔 톱니 칼날.”
검령성의 밤이 떠올랐다. 무너진 도장, 불길 너머의 안광, 스승 설무진(雪武陳)의 마지막 숨. 강민의 손이 검을 반쯤 뽑았다.
“강민 시주.” 청우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불은 먼저 자리를 봅니다.”
찰칵.
염주 한 알이 분노의 목줄을 잡았다. 그는 스승의 얼굴을 지우려 애쓰는 대신 똑바로 떠올렸다. 그리고 그 열을 태우지 않고 칼끝의 방향으로만 옮겼다.
“왼쪽 셋은 내가 막는다!” 무겸이 뛰어들어 짐짝 더미를 무너뜨렸다. 깨진 항아리에서 수은 방울이 죽은 별처럼 흩어졌다. “비호!”
“알았어! 줄만 끊을게!”
채광창이 깨지며 표창이 쏟아졌다. 소년은 자동병이 아니라 등불 줄과 도르래 잠금핀, 상자 묶음 끈만 잘랐다. 쇠사슬이 풀려 자동병 둘의 어깨를 감았다.
“목 아래 감응부요!”
“보고 있소.” 고륜의 창끝이 한 치 들어가 붉은 눈을 껐다. 크게 휘두르는 법이 없었다. 발을 반 보 옮기고, 적이 뻗어 올 길목을 미리 비웠다가 끊었다.
“장군님 창은 왜 한 번도 안 휘둘러요?” 비호가 도르래 위에서 소리쳤다.
“휘두르면 길목이 열리니까! 말 말고 줄이나 끊어라!”
“서란 누나, 오른쪽!”
“알아!” 서란의 쌍검이 장갑판 틈을 찾아 들어갔다. 팔꿈치 보조 관절 사이, 목덜미 배관의 가장 얇은 자리. 그녀는 적을 부수는 사람이 아니라 멈추는 사람이었다. 은침이 관절 밸브를 잠그자 쇠 손가락이 머리카락 끝에서 멈췄다. “고마워, 강민아.”
“누나야말로!”
그 호칭이 강민의 호흡을 한 번 더 붙잡아 주었다. 혼자 싸우는 게 아니었다.
“강민, 넷이 한꺼번에 간다!” 무겸이 외쳤다.
“예!”
강민이 검을 뽑자 청염이 호흡을 따라 얇아졌다. 불이 아니라 선이, 선이 아니라 맥이 되었다. 청염심법(靑炎心法) 1경계.
“형, 터뜨리지 마!”
“안 터뜨려.”
“하나.” 첫째의 팔꿈치 톱니가 청염에 닿아 과열되더니 스스로 걸렸다.
“형, 침!”
“봤어.” 둘째가 쏜 압축침은 수은 위로 미끄러진 발끝 아래로 빗나갔다.
“보이는 칼이 아니라 칼을 보내는 발을 보십시오.” 청우의 옛말을 떠올리며 셋째의 회전축을 검끝으로 누르자 붉은 눈 하나가 툭 꺼졌다.
“넷째는 달라!” 서란이 외쳤다. “얼굴에 흠집, 감응부가 두 겹이야!”
“내 호흡을 읽어.” 강민이 이를 물었다. “반 박자 늦게 움직이면서 청염 가는 데서 비켜나.”
넷째의 왼팔이 열리며 검푸른 독이 묻은 바늘이 부채처럼 펼쳐졌다.
“독침이다!”
“형 말고 저기야!” 서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비호 착지점!”
도르래 줄을 타고 막 뛰어내린 비호를 향해 바늘이 돌아갔다. 분노가 다시 솟았다.
찰칵.
“안 된다.”
자동병이 아니라 자기 안의 불길에게 한 말이었다. 강민은 몸을 던져 검을 세웠다. 청염이 얇은 막처럼 퍼져 침들의 박자를 비틀었다. 독침 여섯 개가 반 치씩 어긋나 비호의 옆머리를 비껴 기와 조각에 박혔다.
“형…….”
“내려가.”
넷째가 가슴을 열었다. 안쪽에서 튀어나온 필관 끝이 붉게 달아오르며 싸움 도중에 바닥에 글자를 새겼다.
수확.
“수확……?” 비호가 읽었다. “싸우는 도중에 글을 써? 누가 멀리서 저 손을 빌려 쓰고 있는 거야.”
“노리는 데가 목이 아니야, 가슴이야!” 서란이 외쳤다. “민아, 막아!”
일격이 강민의 가슴, 스승이 목숨으로 지켜 낸 청염기관(靑炎機關)으로 들어왔다.
“발목!” 청우의 육환장이 관절을 빼앗았다.
“눌렀다!” 무겸의 창대가 등을 찍었다.
“흉곽 고정했소!” 고륜이 외쳤다.
“강민!”
“첫째, 둘째…… 셋째.” 본국검의 푸른 선이 세 개의 압력 고리를 차례로 끊었다. 안광이 한순간 밝아졌다가 꺼졌다.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청염은 여전히 검 안에서 숨과 같은 속도로 뛰었다.
“끝까지 유지하셨군요.” 청우가 말했다. 칭찬이 아니라 확인이라 더 깊이 박혔다.
“아직 화는 나 있어요, 대사님. 사부님 생각하면 지금도 찢어질 것 같고요.” 강민이 숨을 골랐다. “근데 검은 제 손에 있었어요.”
“그거면 되었습니다.”
그때 뒤편 쇠문이 열리며 운반병 둘이 뛰쳐나갔다. 하나는 납빛 원통을 메고, 하나는 기름종이 꾸러미를 안고 있었다.
“도면이다!” 비호가 외쳤다. “저 꾸러미, 도면이야!”
무겸이 던진 창이 한 놈의 납빛 원통을 스쳤다. 새어 나온 푸른 김이 물웅덩이를 서리처럼 얼렸다.
“냉각 봉인통이야!” 서란이 소리쳤다. “깨지면 이 골목 사람들까지 다친다!”
“등에 뭘 멨는지 모르는데 불을 크게 쓰면 골목 전체가 인질이 돼요. 불은 안 써요.” 강민이 청염을 손가락 굵기로 줄이고 벽의 황동 배관에 기운을 흘렸다. 증기가 터졌다. “비호, 지금!”
“갈고리 핀 끊었어!”
“무릎은 내가 밀겠소!” 고륜의 창이 운반병의 무릎 뒤를 밀었다.
강민은 넘어지는 놈을 베지 않고 등짐 끈만 잘랐다.
“누나, 원통!”
서란이 떨어지는 원통을 쌍검 사이에 걸었다.
“잡았어. 밸브는 기공으로 감쌌어. 김 가라앉는다.”
“다른 하나는 지붕이다!”
“죽이지 마십시오.” 청우가 육환장을 세웠다. “품은 것을 보아야 합니다.”
강민은 벽을 밟고 지붕에 올랐다. 젖은 기와가 발밑에서 미끄러졌다.
“위에서 더 빨라요!” 비호가 아래에서 소리쳤다.
“눈으로 안 쫓아!” 강민이 마주 외쳤다. “박자를 들어. 관절이 움직이기 전에 한 번 멈춰.”
그 짧은 정적에 맞춰 검끝으로 꾸러미의 쇠고리만 끊어 품에 받았다.
“받았어요!”
“발은 내가 막는다!” 무겸의 창이 아래에서 처마를 깨뜨리며 올라왔다.
“소승이 박자를 흐리겠습니다.” 청우의 고리 소리에 감응판이 헛박자를 밟았다. 그 반 박자에 강민의 검면이 목덜미를 내리쳤다.
안광이 꺼졌다. 아래 골목에서 늦은 장사를 접던 노파가 겁에 질린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강민이 칼날을 거꾸로 감추자, 노파는 문을 닫지 않았다.
“……할머니,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얼른 안으로 들어가세요.”
노파는 대답 대신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문틈을 조금 더 열어 주었다.
일행은 다시 창고로 돌아왔다. 멀리서 경비대 호각이 울렸다.
“형, 왜 그렇게 봐?” 비호가 물었다.
“문을 안 닫으셨어. 그게…… 이상하게 고마워서.”
비호가 떨리는 손으로 넷째의 감응부 덮개를 열었다. 방금 독침이 자신을 노렸다는 걸 깨달은 뒤였지만 손은 멈추지 않았다.
“이거 일반 명령판 아니야. 직접 조종할 수 있게 보조 감응판을 붙였어. 멀리 있는 손을 여기 하나 더 달아 둔 것처럼.”
“두 번째 손이군.” 고륜이 중얼거렸다.
“여기 없는데도 여기 있는 거네요.” 강민이 바닥의 ‘수확’ 두 글자를 내려다보았다. “서명으로, 장부 숫자로, 감응판으로, 이 글자로.”
무겸이 안쪽 벽판을 밀자 숨겨진 방이 드러났다.
“두루마리, 항해도, 수은 병……. 벽 화인 몇 개는 아직 젖어 있다. 방금까지 누가 있었어.”
서란이 두루마리를 풀었다. 청염기관 단면도였다.
“중요한 데는 지우고 거짓 선을 덧그렸어. 그래도…….”
“알아봐.” 강민의 손끝이 종이를 구길 뻔했다. “사부님이 목숨으로 이어 준 자리야. 그게 남의 책상 위에서 분해돼 있네.”
찰칵.
“괜찮아?”
강민은 고개를 끄덕이려다 솔직하게 저었다.
“괜찮지 않아. 그런데 괜찮지 않은 채로도 검을 놓치지는 않을 수 있을 것 같아.”
“그거면 지금은 충분해.”
비호가 항해도를 펼쳤다.
“동해(東海) 너머 섬들 중에 한 곳만 바늘 자국으로 종이가 해졌어. 적도(赤島). 붉은 섬.”
“동해열도(東海列島) 언저리다.” 무겸의 눈이 좁아졌다. “해룡성에서 바로 갈 수는 없다. 항구를 거쳐야 하고, 배와 안내인이 필요하다.”
“어르신, 그 표식 아세요?” 비호가 항해도 모서리의 세 갈래 물결과 작은 검 문양을 가리켰다.
“……아직 말할 때가 아니오.” 고륜은 오래 보다가 입을 닫았다.
“여기 또 있어.” 서란이 서랍 깊은 곳에서 봉하지 않은 편지를 꺼냈다. “수신인이 없어. 보내려다 만 건지, 일부러 남긴 건지……. 글씨가 지나치게 단정해. 조하륜이야. 첫 줄이…….”
그녀의 목소리가 멈췄다. 강민이 받아 읽었다.
“‘심장은 아이 안에서 잘 자라고 있다.’”
“민아…….”
“‘불안정하던 박동은 청염심법 1경계 진입 뒤 예상보다 빠르게 안정되었다. 설무진의 임시 봉합은 조악했으나 효과적이었고, 유서란의 의공 개입은 변수이나 아직 통제 가능하다. 단비호의 냉각 기록은 반드시 회수해야 한다. 수확의 때는 내가 정한다.’”
“민아, 염주…….” 서란이 그의 손목을 보았다.
“괜찮아. 이번엔 넘길 필요가 없어. 너무 차가워졌거든.” 가슴 한가운데서 푸른 불이 조용히 압축되었다. “내 몸을…… 밭처럼 보고 있었군.”
“문장 뒤로 병참과 명령 줄이 보이오.” 고륜이 편지를 다시 훑었다.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는 뜻이오.”
서란이 비호를 보았다. 소년이 노트를 품에 끌어안고 있었다.
“안 줘.” 목소리는 작았지만 한 글자마다 못이 박혀 있었다. “내 기록은 형을 고치려고 쓴 거야. 저런 사람 손에 넘기려고 쓴 게 아니야.”
“알아.” 강민이 그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때 꺼졌던 넷째의 오른손이 움직였다. 남은 보조 태엽이 필침을 밀어 바닥 먼지를 긁었다.
끼익. 궁. 안.
“막아요!”
세 번째 글자가 시작되기 전에 무겸의 창대가 그 손목을 부쉈다.
“궁 안.” 강민이 읽었다. “두 번째 손은 이 뒷골목에만 있는 게 아니에요.”
그때 깨진 채광창으로 황동 기계 새가 날아들었다. 날개 한쪽에 피가 묻어 있었다.
“전하의 새요.” 고륜이 부리에 물린 종이를 펼쳐 읽었다. “‘내일 아침, 황궁 별궁 다정. 태사령 백유강(白裕剛)이 당신을 부른다. 거절하지 마시오. 그는 이미 당신의 심장을 알고 있소.’”
“함정이다.” 무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알면서 부르는 거겠지.” 고륜이 종이를 접었다. “거절하면 더 나쁜 방식으로 부를 자요.”
아무도 바로 말하지 못했다.
“거기까지 알면서 부르는 거라면.” 서란이 낮게 말했다. “민아, 가지 않는 길은 없는 거네.”
“가야지. 이번엔 내가 먼저 볼게.” 강민이 중얼거렸다. “누가 내 심장을 아는지.”
깨진 등불이 하나씩 늦게 꺼졌다. 죽은 것은 이 방의 손들뿐이었다. 더 큰 손이, 더 따뜻한 찻잔을 들고, 황궁 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민은 손목의 염주를 한 알 넘겼다.
찰칵.
이번에는 분노를 누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내일 아침, 그 손을 똑바로 보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