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점 · 강민 — 균열·낙인 단계

황실의 두 얼굴

第1部 · 話 31 · 검령성 · published

海東曆: 201년 9월 9일

· 시점: 강민

찻물이 황동 주전자 안에서 끓기 직전의 소리를 냈다.

아주 작은 기포들이 바닥을 두드렸다가 사라지는 소리였다. 강민은 그 미세한 울림을 들으며 다정(茶亭) 바깥의 자동병 수를 셌다. 회랑 왼편에 열둘, 오른편에 열둘. 처마 위에 감응안이 달린 기계 까마귀 넷. 연못 가장자리의 돌등 안에도 규칙적이지 않은 진동이 두 군데 있었다. 겉으로는 병기도 호위도 물린 독대였지만, 칼을 뽑는 순간 그를 갈아 버릴 장치가 사방에 숨겨져 있었다.

백도윤은 다정으로 이어지는 월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부터는 당신 혼자 가야 하오.”

황자의 얼굴은 평소보다 창백했다. 옥반지를 잃은 오른손이 소매 안에서 한 번 움켜쥐어졌다가 풀렸다. 그가 마련한 자리였지만, 이 자리가 누구의 뜻대로 끝날지는 황자 자신도 확신하지 못하는 눈빛이었다.

강민은 월문 너머를 보았다. 연못 위에는 붉은 연꽃이 몇 송이 남아 있었고, 그 가운데 한 남자가 등을 보인 채 앉아 있었다. 검은 관복, 은실로 수놓은 백룡문,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은 어깨선. 태사령 백유강(白裕剛)이었다.

“황자 전하.”

강민이 낮게 불렀다.

백도윤이 눈길을 들었다.

“제가 나오지 않으면, 누나와 비호를 먼저 내보내 주십시오.”

“그런 약속을 받으려고 이 자리를 만든 것이 아니오.”

“그래도 해 주십시오.”

“강민.”

황자는 더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짧은 침묵 뒤, 그는 소매 속 손을 내밀어 강민의 팔목을 잡았다. 힘이 세지는 않았지만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는 분명했다.

“당신이 나오지 않으면 나도 이 궁을 나가지 않겠소.”

그 말은 황자의 허세가 아니었다. 강민은 그의 눈에서 이미 여러 번 본 고집을 읽었다. 청혈성의 봉기 때 군문을 열었던 고집, 비밀 서고 앞에서 제 목숨보다 진실을 먼저 골랐던 고집이었다.

“그럼 둘 다 나가야겠네요.”

강민이 손을 빼며 웃었다. 웃음은 짧았지만 백도윤의 굳은 얼굴을 조금 풀어 주었다.

월문을 넘자 자동병들의 붉은 안광이 동시에 움직였다. 눈동자 스물넷이 강민의 발끝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콧등의 흉터로 올라왔다. 그가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목 안쪽 톱니가 맞물리는 소리가 따라왔다. 강민은 일부러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서두르는 것도, 위엄을 보이기 위해 느리게 걷는 것도 모두 상대에게 시간을 주는 일이었다. 그는 평소 도장 마당을 가로지를 때처럼 걸었다.

백유강은 돌아보지 않았다.

“앉거라.”

목소리는 낮고 매끄러웠다. 명령이면서도 초대처럼 들렸다.

강민은 그 맞은편에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찻상 하나뿐이었다. 상 위에는 찻잔 두 개, 주전자 하나, 작은 모래시계, 그리고 칼로 자른 듯 반듯한 백설탕 조각이 놓여 있었다. 다정 안에는 무기가 없었다. 적어도 사람의 눈에 무기로 보이는 것은 없었다.

백유강이 주전자를 들었다. 소매가 미끄러지며 손목의 일부가 드러났다. 피부와 황동이 만나는 경계가 지나치게 반듯했다. 의공사가 살을 봉합한 흔적이라기보다 장인이 낡은 부품을 갈아 끼운 흔적에 가까웠다.

찻물이 잔을 채웠다. 김이 피어오르며 두 사람의 얼굴을 잠깐 가렸다.

“온도는 78℃다.”

백유강이 말했다.

“이 찻잎은 그보다 뜨거우면 향이 죽고, 70℃ 아래로 내려가면 떫은맛이 남지. 인간은 늘 감으로 차를 망친다. 수치로 재면 간단한 것을.”

강민은 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

“차를 마시러 부르신 건 아닐 텐데요.”

“독을 걱정하느냐?”

“독은 누나가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럼 무엇이 걱정되지?”

“차를 마신 다음에 제가 무엇을 믿게 될지가 걱정됩니다.”

백유강의 눈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웃음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미세했고, 경계라 부르기에는 온도가 없었다.

“설무진이 너를 잘 가르쳤구나.”

스승의 이름이 나오자 강민의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굳었다. 가슴속 청염기관이 느리게 압력을 높였다. 그는 손목의 기계 염주를 엄지로 밀었다. 한 알. 두 알. 셋째 알에서 박동이 제 속도를 찾았다.

백유강은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분노를 셈으로 다스리는 버릇도 그 사람에게 배웠나?”

“살아남는 법을 배웠습니다.”

“살아남는 것과 다스리는 것은 다르다.”

“사람을 다스리는 것과 사람을 부품으로 쓰는 것도 다릅니다.”

첫 칼은 강민이 먼저 뽑았다. 칼날이 아니라 말이었지만, 백유강의 시선이 처음으로 정확히 그의 눈에 맞았다.

다정 바깥에서 기계 까마귀 하나가 날개를 접었다. 자동병들의 목 안쪽에서 동력이 한 단계 올라가는 소리가 났다. 백유강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태사령의 입술에 닿은 자리까지 정해져 있는 듯, 잔은 같은 각도로 내려왔다.

“네가 본 것을 말해 보아라.”

“무엇을요?”

“나를 괴물이라 부르려면 이유가 있어야 할 것 아니냐.”

“저는 아직 태사령을 괴물이라고 부른 적 없습니다.”

“아직.”

그가 그 한마디를 되짚었다.

강민은 찻잔 속을 내려다보았다. 맑은 황금빛 수면 아래, 잔 바닥에 새겨진 백룡의 비늘이 일그러져 보였다.

“스팀갱에서 사람들은 광산의 압력계보다 싸게 취급됐습니다. 청혈성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에게 반백파의 인장을 찍고, 그 인장이 없는 사람은 배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황궁 서고에는 죽은 사람의 이름 옆에 부품 번호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 모든 문서 끝에 같은 서명이 있었습니다.”

“내 서명이더냐?”

“태사령의 명령을 받은 자들의 서명이었습니다.”

“그러니 내 죄라는 말인가.”

“명령이 칼이라면, 칼자루를 쥔 손의 죄입니다.”

백유강은 설탕 조각 하나를 집어 찻잔에 넣었다. 사각형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으며 모서리부터 무너졌다.

“광부 한 명이 하루에 캐는 코테르 원석의 평균은 2.7kg이다. 보호 장구를 지급하면 생산량이 19% 떨어지고, 교대 시간을 늘리면 31%가 줄어든다. 그 손실로 겨울 난방을 끊으면 스팀갱 외곽에서 사흘 동안 몇 명이 얼어 죽는지 아느냐?”

“그래서 광부를 죽여도 된다는 겁니까?”

“죽였다고 말하지 않았다. 선택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선택을 당한 사람에게 물어본 적은 있습니까?”

백유강이 잔을 내려놓았다.

“사람은 자기 앞의 고통만 본다. 광부는 제 폐를 보고, 아이를 둔 어미는 제 아이의 방을 보며, 군인은 제 부대의 탄약만 본다. 제국은 그 모든 고통을 한꺼번에 보아야 한다. 누군가는 손가락 하나를 잘라 팔을 살려야 한다.”

“태사령은 늘 자르는 쪽에 서 있었겠지요.”

“아니다.”

백유강이 처음으로 곧바로 부정했다.

그는 오른손으로 왼쪽 소매를 잡아 천천히 걷어 올렸다. 팔꿈치 아래가 황동 의체였다. 금속 표면에는 장식이 없었다. 대신 오래 사용한 공구처럼 미세한 긁힘과 열변색이 겹쳐 있었다. 손목에는 세 개의 압력 밸브가 달려 있었고, 손가락 마디마다 가느다란 관이 박혀 있었다. 의체가 움직일 때마다 안쪽의 작은 톱니가 서로를 핥는 소리를 냈다.

“스무 살 때 왼손의 떨림이 처음 시작됐다. 청염 잔류증이었다. 서른둘에는 팔꿈치까지 번졌지. 글씨가 흔들리면 명령이 흔들리고, 명령이 흔들리면 수천 명이 죽는다. 나는 잘랐다.”

그가 손가락을 폈다. 금속 손가락은 인간의 손보다 부드럽고 정확하게 움직였다.

“마흔에는 잠을 없앴다. 두 시간마다 기핵 자극을 주면 뇌가 휴식한 것과 같은 효과를 얻는다. 마흔다섯에는 왼쪽 눈의 망막을 바꾸었다. 눈물 때문에 관측이 흐려지는 일이 없어졌지. 나는 남에게 요구한 선택을 내 몸에도 적용했다.”

강민은 그 의체를 바라보았다. 혐오보다 먼저 든 감정은 뜻밖에도 슬픔이었다. 백유강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남을 기계로 만들기 전에 자기 자신부터 기계로 만들었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탐욕으로 사람을 죽이는 자는 탐욕을 빼앗으면 멈출 수 있지만, 스스로를 희생했다고 믿는 자는 멈출 이유를 잃는다.

“후회하지 않습니까?”

“후회는 이미 끝난 선택을 다시 계산하는 낭비다.”

“그럼 어젯밤 잘 주무셨습니까?”

백유강의 금속 손가락이 멈췄다.

강민은 자신도 모르게 그 질문을 던졌다. 태사령이 조금 전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준 셈이었다.

바깥의 바람이 연못을 훑었다. 연꽃 잎 하나가 뒤집혀 창백한 뒷면을 드러냈다. 모래시계의 모래가 절반쯤 내려와 있었다.

백유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그날의 대화에서 처음으로 계산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강민은 차를 들었다. 독이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이 남자가 어떤 온도로 세상을 삼키는지 알고 싶었다. 차는 정확히 따뜻했다. 혀를 데우지 않았고 식지도 않았다. 향은 깊었으며 떫은맛은 거의 없었다. 완벽에 가까운 차였다.

그 완벽함이 무서웠다.

“맛이 어떠냐?”

“따뜻합니다.”

“그게 전부냐?”

“사람을 살릴 만큼은 따뜻하고, 마음을 녹일 만큼은 아닙니다.”

백유강의 입가에 얇은 선이 생겼다. 이번에는 분명한 미소였다.

“너는 설무진보다 말이 날카롭구나. 그 사람은 끝까지 내게 미안하다고 했다.”

“스승님이 태사령께 무엇을 미안해했습니까?”

“네가 아직 모르는 것을 내가 먼저 말하면 재미가 없지.”

“사람 목숨을 두고 재미를 말합니까?”

“목숨이 아니라 혈통을 말하는 것이다.”

강민의 가슴이 크게 울렸다. 찻잔의 수면에 둥근 파문이 번졌다. 청염기관의 반응을 감춘다고 감췄지만, 백유강의 왼쪽 눈동자 안쪽에서 푸른 광점이 한 번 깜빡였다. 태사령의 눈에도 감응 장치가 들어 있었다.

“백씨가 무슨 일을 했는지 이미 봤겠지. 서고의 명부, 백유운의 기록, 봉인 부대의 인장. 너는 네가 그 죄와 무관하다고 생각하느냐?”

“무관하다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 곁에 와라.”

제안은 너무 자연스럽게 나왔다. 백유강은 협박도 회유도 하지 않았다. 마치 원래 있어야 할 부품을 제자리에 끼우자고 말하는 사람 같았다.

“네 청염기관은 제국의 것이다. 네 피에는 백씨의 설계가 흐른다. 나는 질서를 완성할 수 있고, 너는 그 질서에 심장을 줄 수 있다. 백도윤은 좋은 아이지만 왕이 되기에는 너무 많이 망설인다. 고륜은 과거에 묶였고, 청우는 죄책감에 묶였으며, 네 동료들은 너 하나를 살리기 위해 제국 백만 명을 위험에 빠뜨릴 것이다.”

“그들은 저를 살리기 위해 사람이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람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름답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겨울의 보일러를 돌리지 못한다.”

“사람을 태워 보일러를 돌리면 그건 제국이 아니라 화장터입니다.”

강민의 대답이 떨어진 순간, 다정 바깥의 돌등 하나가 미세하게 열렸다. 안쪽에서 바늘통의 압력이 차오르는 소리가 났다. 강민은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고 위치를 기억했다. 오른쪽 뒤 4m, 높이 70cm. 바늘이 날아오면 상을 뒤집어 막고 연못 쪽으로 몸을 던질 수 있었다. 그러나 백유강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네가 느끼는 것은 두려움인가?”

“분노에 가깝습니다.”

“청염은 분노를 먹지.”

“그래서 굶기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굶긴 불은 언젠가 주인을 먹는다.”

“먹이지 않은 불보다, 남의 몸을 태워 키운 불이 먼저 주인을 먹겠지요.”

두 사람의 말이 찻상 위에서 맞부딪혔다. 칼날은 보이지 않았지만 한 문장이 끝날 때마다 다정의 공기가 더 얇아졌다. 강민은 자신이 백유강을 미워하면서도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이해가 더러운 물처럼 목에 걸렸다. 태사령이 처음부터 괴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매번 가장 효율적인 선택을 했고 그 선택이 쌓여 지금의 얼굴이 되었다면, 자신 역시 어떤 순간에 같은 길을 택할 수 있었다.

검령성의 밤이 떠올랐다. 이하겸의 목을 벨 수 있었던 순간. 스팀갱에서 감독관을 용광로에 밀어 넣고 싶었던 순간. 청혈성에서 항복한 근위병의 가슴을 찌르려다 멈춘 순간. 분노가 옳은 이유를 입고 다가올 때, 칼은 언제나 가벼워졌다.

백유강이 그 흔들림을 읽은 듯 물었다.

“네가 나와 다르다고 확신하느냐?”

강민은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다르다고 외치는 것은 쉬웠다. 그러나 다름은 말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스승의 마지막 얼굴, 폐갱에서 기침하던 광부, 청혈성의 무너진 집 앞에서 식은 밥을 나누던 여인을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에게 칼을 겨눈 자를 살려 보냈을 때 느꼈던 두려움을 생각했다. 죽이지 않은 선택이 늘 옳다는 확신은 없었다. 다만 죽이는 일이 쉬워지지 않게 붙드는 것, 그것이 지금 자신이 가진 전부였다.

“확신하지 않습니다.”

백유강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그래서 묻고, 듣고, 멈춥니다. 제가 틀릴 수 있다는 걸 잊지 않으려고요. 태사령과 저는 같은 피에서 나왔을지 몰라도, 태사령은 틀릴 가능성을 자기 몸에서 잘라 냈습니다. 저는 그걸 남겨 두겠습니다.”

“흔들림을 미덕이라 부르는구나.”

“흔들려도 사람을 향해 서는 것이, 흔들리지 않고 사람을 밟는 것보다 낫습니다.”

백유강은 한동안 강민을 보았다. 태사령의 시선이 흉터를 지나 눈, 목, 가슴으로 내려갔다. 의공사가 병자의 상태를 살피는 것 같기도 했고, 장인이 오래 잃어버린 기계의 마모를 확인하는 것 같기도 했다.

“네 심장은 설계대로 자랐구나.”

그 말에 강민의 손이 본능적으로 가슴 위로 올라갔다.

“무슨 뜻입니까?”

“그대로의 뜻이다.”

“제 몸 안에 무엇을 넣었습니까?”

“나는 넣지 않았다.”

“그럼 누가—”

“질문이 늦었다.”

백유강이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바닥에 남은 마지막 모래가 떨어지기도 전에, 다정 바깥에서 종이 세 번 울렸다. 약속된 독대 시간이 끝났다는 신호였다.

강민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스승님과 무슨 관계였습니까?”

“친구였다.”

대답은 뜻밖에도 짧았다.

“그가 내 동생을 살렸고, 나는 그의 제자들을 죽였다. 사람의 관계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강민의 목 안쪽이 뜨겁게 조였다.

“검령성의 습격을 명령했습니까?”

“직접 명령하지 않았다.”

“막을 수 있었습니까?”

이번에는 백유강이 침묵했다.

강민은 그 침묵에서 답을 들었다.

본국검의 손잡이가 등 뒤에서 뜨겁게 느껴졌다. 한 걸음이면 상을 넘어갈 수 있었다. 두 걸음이면 검을 뽑아 태사령의 목에 닿을 수 있었다. 그 전에 자동병 스물넷과 바늘통 둘, 기계 까마귀 넷이 움직일 것이다. 자신은 죽을 수 있었다. 백유강도 상처를 입을 수 있었다. 그러나 검령성의 죽음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태사령이 원하는 계산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 될지도 몰랐다.

강민은 주먹을 폈다.

“언젠가 다시 묻겠습니다.”

“그때는 대답이 달라질 것 같으냐?”

“제가 달라져 있을 겁니다.”

“더 강해져서?”

“더 많은 사람의 말을 듣고 와서.”

백유강이 작게 웃었다.

“사람의 말은 서로 모순된다.”

“그 모순까지 안고 가는 것이 제국을 다스리는 일 아닙니까?”

“너는 아직 제국을 모른다.”

“태사령은 아직 사람을 모릅니다.”

강민은 찻잔을 상 위에 내려놓았다. 잔 바닥의 백룡이 이제는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월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강민.”

백유강이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걸음이 멈췄다.

“그 심장, 잘 간수하거라.”

강민은 돌아보지 않았다.

“언젠가 제국이 회수할 물건이니.”

청염기관이 세게 뛰었다. 그 박동이 다정의 찻잔들을 울렸다. 짤랑, 아주 작은 소리가 연달아 났다. 자동병들의 안광이 밝아졌지만 강민은 검을 뽑지 않았다. 그는 손목의 염주를 한 알씩 넘기며 월문을 빠져나왔다.

백도윤이 곧바로 다가왔다.

“다친 곳은?”

“없습니다.”

“무슨 말을 들었소?”

강민은 대답 대신 황자의 어깨 너머를 보았다. 회랑 기둥 뒤, 처마 위, 연못 건너의 그림자들이 하나씩 움직였다. 독대가 끝났는데도 감시는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여기서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백도윤은 묻지 않고 앞장섰다. 두 사람은 별궁을 나와 황자의 작은 서재로 향했다. 길목마다 시녀와 환관들이 고개를 숙였지만, 강민은 그중 누가 백유강의 귀인지 알 수 없었다. 모두가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높이로 허리를 굽혔다. 황궁은 사람이 많을수록 외로워지는 곳이었다.

서재에는 유서란과 장무겸, 단비호, 청우, 고륜이 기다리고 있었다. 문이 닫히자 서란이 강민의 손목을 낚아채 맥을 짚었다.

“열이 올랐어.”

“차가 뜨거웠나 봐.”

“농담할 때 아니야.”

“정말 안 다쳤어, 누나.”

“안 다친 사람 심장이 이렇게 뛰어?”

그녀의 손가락이 맥 위를 세게 눌렀다. 화가 난 얼굴이었지만 손끝은 조심스러웠다. 비호는 강민의 뒤를 돌아보며 옷에 추적 장치가 붙었는지 살폈다. 작은 집게로 소매 끝을 뒤지던 소년이 은실 한 올을 뽑아 냈다. 실 끝에는 먼지보다 작은 황동 진동추가 달려 있었다.

“이것 봐. 차만 마시고 왔다더니 선물도 받았네.”

비호가 이를 드러냈다.

고륜의 얼굴이 굳었다.

“태사령의 감응실이다. 옷감에 붙여 두면 반경 3km 안에서 움직임을 읽을 수 있지.”

비호는 진동추를 찻잔 안에 떨어뜨렸다. 곧장 부수는 대신 서재 난로 위에 올려 두었다.

“부수면 들킨 걸 알잖아. 이건 오늘 밤까지 여기서 잠자는 걸로 해.”

장무겸이 창을 벽에 기대며 물었다.

“무슨 이야기를 했지?”

강민은 다정에서 오간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했다. 백유강의 의체, 효율과 질서에 대한 주장, 설무진과 친구였다는 말, 청염기관을 제국의 소유라고 부른 대목까지.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방 안의 공기는 무거워졌다. 서란은 손을 놓지 않았고, 청우는 눈을 감은 채 염주를 굴렸다. 고륜은 백유강이 검령성 습격을 막을 수 있었는지 묻는 대목에서 턱을 굳게 다물었다.

모든 말을 들은 뒤 백도윤이 창가로 가 섰다.

“숙부님은 어떤 분이시던가.”

강민은 곧바로 답하지 못했다.

악하다고 말하면 쉬웠다. 미쳤다고 부르면 더 쉬웠다. 그러나 백유강은 단순한 악인이 아니었다. 자신이 옳다고 믿으며, 그 옳음을 위해 자기 몸까지 잘라 낸 사람. 그래서 설득하기 어렵고, 그래서 쓰러뜨린 뒤에도 같은 생각이 다른 얼굴로 되살아날 사람.

“차는 따뜻했습니다.”

강민이 마침내 말했다.

“그게 제일 무서웠습니다.”

백도윤은 그 뜻을 알아들었다. 황자는 창밖을 향한 채 눈을 감았다.

“숙부님은 늘 따뜻한 것을 주었소. 어린 시절 내가 열병을 앓았을 때도 밤새 물수건을 갈아 주셨지. 다음 날에는 열병이 번질 수 있다며 내 시종 셋을 변방으로 보냈소. 그중 둘은 길에서 죽었고.”

아무도 말을 잇지 못했다.

청우가 조용히 눈을 떴다.

“선의가 사람을 살리는 것은 아닙니다. 선의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가 사람을 살립니다.”

그는 누구에게도 반말을 쓰지 않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태사령은 자신의 고통을 근거로 타인의 고통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그 사슬은 매우 단단합니다.”

“끊을 수 있을까요?” 백도윤이 물었다.

“끊어야 할 때가 오면 끊어야겠지요. 다만 사슬 끝에 묶인 사람이 몇인지 먼저 보아야 합니다.”

강민은 자기 가슴에 손을 얹었다. 백유강이 말한 ‘설계대로 자란 심장’이라는 문장이 안쪽에 남아 있었다. 백씨의 죄, 청염기관, 설무진의 속죄, 태사령의 의체. 네 번째 단서가 하나의 방향을 가리켰다. 자신과 백유강은 우연히 만난 적이 아니었다. 같은 설계도에서 갈라져 나온 두 손이었다. 하나는 사람을 부품으로 만들고, 다른 하나는 부품이 된 사람을 다시 사람으로 돌려놓으려 했다.

그러나 두 손이 끝내 다른 방향으로 움직일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그날 오후, 일행은 서재 바닥에 황도의 지도를 펼쳤다. 백도윤은 붉은 먹으로 태사령 직속 순검대의 초소를 표시했고, 고륜은 그 위에 오래된 황궁 수로와 폐쇄된 화물 통로를 덧그렸다. 지도는 금세 피가 흐르는 혈관처럼 복잡해졌다. 어느 길로 나가도 백유강의 눈을 피하기 어려웠다. 정문은 순검대가 잡고 있었고, 남쪽 수문은 반백파 관리가 바뀐 지 사흘째였다. 서쪽 운하에는 세관선이 두 배로 늘었다. 동쪽으로 이어지는 상단 길만 아직 열려 있었으나, 그 길 역시 지나치게 깨끗했다.

“길을 열어 둔 거야.” 비호가 지도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우리가 그쪽으로 가길 바라는 거지.”

“조하륜의 흔적도 동쪽에 있습니다.” 청우가 말했다. “미끼와 목적지가 같은 방향이라면, 더 조심해야 합니다.”

무겸이 창끝으로 세 곳을 차례로 짚었다. “여길 막으면 골목으로 빠지고, 골목이 막히면 지붕을 탄다. 지붕까지 막히면 운하로 내려가야 한다. 어느 경우든 셋으로 갈라졌다 다시 합류하는 편이 낫다.”

서란이 고개를 저었다. “갈라지는 건 안 돼. 강민 몸이 아직 완전히 식지 않았어. 청염이 한 번 더 치솟으면 내가 곁에 있어야 해.”

“누나, 난 괜찮아.”

“괜찮다는 말 오늘만 네 번째야. 다섯 번째 하면 침을 목에 꽂을 거야.”

“목은 좀 위험하지 않나?”

“그러니까 입을 다물라는 뜻이야.”

비호가 웃음을 터뜨렸고, 무겸도 입가를 잠깐 풀었다. 긴장한 사람들 사이로 짧은 웃음이 지나갔다. 백도윤만 웃지 못했다. 황자는 지도 한쪽에 손을 짚은 채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강민은 그 옆으로 다가갔다. “전하께서 저희와 함께 나가시면 더 위험해집니다.”

“그 말을 하려고 가까이 왔소?”

“예.”

“그럼 듣지 않겠소.”

“전하.”

“나는 이 궁에 남아야 하오. 그건 알고 있소. 숙부님이 황도를 장악하려 한다면, 누군가는 안에서 문을 열어 두어야 하니까.” 백도윤은 낮게 이어 갔다. “하지만 남는 것과 버려지는 것은 다르오. 당신들이 떠난 뒤 내가 이곳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 약속은 받고 싶소.”

강민은 황자의 손을 보았다. 옥반지가 있던 자리에 엷은 눌림 자국만 남아 있었다. 왕족의 손이라기보다 너무 많은 문서를 넘기고 너무 많은 사람의 손을 잡은 젊은이의 손이었다.

“살아 계십시오.”

“그것뿐이오?”

“태사령이 만든 질서 안에서 사람을 숫자로만 보지 말아 주십시오. 저희가 동쪽에서 무엇을 찾든, 돌아왔을 때 함께 끝낼 사람이 필요합니다.”

백도윤은 한참 뒤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도 살아 돌아오시오.”

“약속하겠습니다.”

“쉽게 하는 약속은 믿지 않소.”

“그럼 어렵게 하겠습니다.” 강민은 본국검을 뽑지 않은 채 칼집째 바닥에 세웠다. “이 검을 다시 황궁 바닥에 세우겠습니다. 그때는 숨어 들어오지 않고 정문으로 오겠습니다.”

황자의 눈에 처음으로 작은 빛이 돌아왔다. “그 약속은 마음에 드는군.”

대화가 끝난 뒤, 고륜은 강민을 따로 불러 복도 끝의 빈 무기고로 데려갔다. 노장은 문을 닫고도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벽에는 오래된 창과 검이 줄지어 걸려 있었으나 모두 날이 무뎌진 의장용 무기였다.

“태사령의 왼팔을 보았느냐.”

“봤습니다.”

“그 팔을 잃은 날 나도 황궁에 있었다.”

강민의 눈이 좁아졌다. 고륜은 먼지가 앉은 창대를 손으로 훑었다.

“청염 실험실에서 사고가 났다. 백유강은 안에 갇힌 연구자 셋을 꺼내려다 팔을 잃었다. 그중 하나가 설무진이었다.”

“스승님이요?”

“그래. 그때까지만 해도 둘은 서로 목숨을 맡기는 사이였다. 사고 뒤 무엇이 갈라놓았는지는 나도 전부 모른다. 다만 백유강이 그 팔을 잃은 뒤부터, 사람의 몸을 바꿔 살리는 연구에 집착했다. 처음에는 살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처음에는.”

“사람이 가장 두려운 때는 처음부터 악할 때가 아니다. 옳은 일을 하다 멈추는 법을 잊었을 때다.”

강민은 다정에서 느낀 슬픔의 정체를 조금 알 것 같았다. 백유강의 의체는 죄의 증거이면서 한때 누군가를 살리려 했던 흔적이었다. 그 흔적을 안다고 해서 지금의 죄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한 사람이 어디까지 멀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왜 이제 말씀해 주십니까?”

“네가 오늘 그 사람을 죽이지 않고 돌아왔으니까.”

고륜은 의장용 창 하나를 벽에서 내려 강민에게 건넸다. 창대 안쪽에 작은 홈이 있었고, 그 속에는 오래된 백룡문 인장이 찍혀 있었다.

“이건 50년 전 봉인 부대의 표식이다. 네가 찾는 답이 황궁 안에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동쪽으로 가거든, 백룡의 발톱이 바다를 향하는 곳을 찾아라.”

강민이 더 묻기 전에 고륜은 창을 다시 벽에 걸었다. 노장의 말은 늘 필요한 만큼만 나왔다. 그러나 그날의 한마디는 백유강의 차보다 오래 입안에 남았다.

해가 기울자 황궁의 청염 광탑이 하나씩 불을 밝혔다. 붉은 노을 위로 푸른 불빛이 솟았다. 비호는 감응실을 단 찻잔을 난로 곁에 두고, 그 주위에 베개와 이불을 사람 모양으로 쌓았다. 서란은 강민의 가슴에 열을 내리는 침 세 자루를 놓았다. 장무겸과 고륜은 밤 경계를 나누었고, 백도윤은 문서를 태우기 시작했다. 너무 많은 것이 한꺼번에 움직였다.

강민은 창문 틈으로 맞은편 찻집을 보았다.

낮부터 같은 자리에 앉아 있던 손님 일곱이 보였다. 누구도 차를 마시지 않았고, 누구도 서로 말을 섞지 않았다. 그들은 평범한 상인과 필사관, 노파, 짐꾼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일곱 사람의 발끝이 모두 같은 각도로 출입문을 향하고 있었다.

강민이 손을 본국검으로 옮겼다.

강민은 창문을 닫지 않았다. 상대가 보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는 대신, 자신도 그들을 보고 있음을 알리고 싶었다. 그는 서재 탁자 위에 찻잔 하나를 올려놓고 낮에 마신 차와 같은 높이까지 물을 따랐다. 백유강의 완벽한 온도를 흉내 낼 수는 없었다. 물은 이미 식어 있었다. 그러나 그 차가움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사람은 식고, 흔들리고, 실수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손이 필요하다. 강민은 창밖의 일곱 그림자에게 보이도록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천천히 빈 잔을 내려놓았다. 그것은 도발도 승리 선언도 아니었다. 따뜻함을 독점한 자에게 보내는 대답이었다.

그때 난로 위 찻잔 안에서 황동 진동추가 세 번 울렸다.

첫 번째 울림에 맞은편 찻집의 등불이 꺼졌다.

두 번째 울림에 지붕 위 기계 까마귀들이 동시에 날개를 폈다.

세 번째 울림이 끝나자, 손님 일곱이 한 사람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 話 31 終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