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하륜의 흔적, 동해로
海東曆: 201년 9월 16일
· 시점: 강민
맞은편 찻집의 문이 열리기 전에 비호가 난로를 걷어찼다.
붉게 달아오른 숯과 재가 바닥을 가로질러 쏟아졌다. 불티가 휘날리는 사이, 황동 감응실이 든 찻잔은 서재 안쪽으로 굴러갔다. 비호는 미리 풀어 둔 바닥 판자를 들추고 몸을 밀어 넣었다.
“저 찻잔이 계속 울리는 동안엔 밖에서 우리가 아직 방 안에 있다고 믿을 거야. 셋 셀 동안 안 내려오면 문 닫는다.”
“내가 마지막이다.” 장무겸이 창을 세워 문고리를 걸었다.
강민은 창밖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찻집 지붕에서 검은 옷자락이 솟았다.
“기계 까마귀 넷이 이쪽으로 몸을 돌렸어요. 감응망이 미끼를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고륜의 말과 함께 모두가 바닥 아래로 내려갔다. 무겸이 판자를 덮은 순간, 서재 창호가 안쪽으로 터졌다. 쇠침 수십 개가 베개와 이불로 만든 사람 형상을 꿰뚫었다. 위에서 칼집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고, 누군가 짧게 욕했다.
“여긴 황궁의 오래된 난방관을 손보려고 판 길이다.” 고륜이 낮게 일렀다. “높이가 1.5m도 안 되니 머리 조심해라.”
“조심하라고 해서 될 키가 아닙니다.” 무겸이 허리를 깊이 굽힌 채 투덜거렸다. 뜨거운 관이 벽을 따라 이어졌고, 이음새마다 증기가 가늘게 새었다.
“누나, 가방 무겁지 않아?” 비호가 몸집보다 큰 공구 꾸러미를 끌며 물었다.
“네 꾸러미보다는 가벼워. 앞이나 봐.” 서란이 약재 가방을 고쳐 멨다.
“추격자는 일곱뿐이 아닙니다.” 청우가 가장 뒤에서 판자 아래의 잠금쇠를 걸고 말했다. “지붕 위에 발소리가 열둘 더 있었습니다.”
“백유강이 황궁 한복판에서 우리를 죽일까요?” 강민이 물었다.
고륜이 앞장서며 대답했다. “죽이기보다는 길을 정해 주겠지. 동쪽으로.”
그 말이 끝나자 머리 위 배관에서 세 번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비호가 걸음을 멈췄다.
“팽창음이 아니야. 간격도 세기도 똑같아. 배관을 두드려서 우리 위치를 찾고 있어. 이 통로도 알고 있다고.”
“그럼 길을 바꾸자.” 무겸이 창끝으로 옆벽을 두드렸다.
비호가 지도를 꺼내 황동 등불 아래 펼쳤다. “앞으로 60m 가면 분기점이야. 오른쪽은 수문, 왼쪽은 폐세탁장. 수문은 분명 막혀 있을 거고.”
“폐세탁장으로 간다.” 강민이 말했다.
“거긴 지상까지 사다리가 18m야.”
“지붕으로 나가는 편이 골목에 갇히는 것보다 낫다.”
일행은 분기점까지 달렸다. 등 뒤의 배관 두드림이 가까워졌다.
“위아래를 동시에 훑고 있어.” 비호가 왼쪽 밸브에 매달렸다. 녹슨 축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안 돌아가! 녹이 다 먹었어!”
“비켜.”
강민이 손바닥을 밸브에 댔다. 청염을 직접 쏟지 않고, 금속 안쪽의 진동만 밀었다. 녹이 부서지는 감각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밸브가 반 바퀴 돌아가며 문이 열렸고, 뜨거운 증기가 얼굴을 때렸다.
동시에 뒤쪽 통로에서 쇠발굽 소리가 났다.
“가!” 무겸이 외쳤다.
모두가 문을 통과하자 고륜과 무겸이 양쪽에서 밸브를 잡아당겼다. 닫히는 철문 틈으로 검은 가면 하나가 보였다.
“이마에 반으로 갈라진 백룡문이 있다.” 고륜이 이를 물었다. “반백파 놈들이다.”
추격자가 쇠갈고리를 던졌고, 갈고리 끝이 문턱에 박혔다. 강민은 본국검을 뽑아 쇠줄을 베었다. 불꽃이 좁은 통로를 밝혔다. 문이 닫히며 추격자의 손가락 둘이 안쪽으로 끼었지만, 그는 비명도 지르지 않고 손을 빼냈다. 잘린 금속 손가락이 바닥에 떨어져 꿈틀거렸다.
“비명 한 번 없네.” 비호가 손가락을 발로 밀어냈다. “사람이야, 기계야?”
“반반이겠지.” 서란이 짧게 답했다.
“폐세탁장은 옛날에 황실 침구를 증기로 빨던 곳이다.” 고륜이 세탁통 사이를 지나며 말했다. “보일러가 터진 뒤로 십 년 넘게 버려졌지. 저 사다리를 오르면 황궁 밖 상가 지대다.”
강민이 덮개를 밀자 눅눅한 밤공기와 기름 냄새가 한꺼번에 들어왔다. 지상은 조용했다. 지나치게 조용했다.
“매복이다.” 고륜이 속삭였다.
그 순간, 건너편 지붕의 등롱이 꺼졌다. 이어 왼쪽, 오른쪽, 뒤쪽 등롱이 차례로 사라졌다. 어둠이 사각형으로 그들을 포위했다.
“무겸 형, 뒤.”
창이 먼저 움직였다. 장무겸은 몸을 돌리지 않은 채 창대를 뒤로 찔러 내려오는 칼을 막았다. 쇳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검은 가면 셋이 지붕에서 떨어졌고, 골목 양쪽에서 여섯이 더 나타났다.
“낮에 본 감시자들보다 무겁다.” 무겸이 창대를 고쳐 잡았다. “팔뚝에 자동 권선기, 허리엔 짧은 증기총이야.”
“생포 명령이다.” 선두의 가면이 말했다. “팔다리는 남길 필요 없다.”
비호가 혀를 찼다. “저게 생포야?”
첫 증기탄이 날아왔다. 무겸이 창대를 세워 탄의 궤도를 비틀었다. 탄환은 벽을 깨고 안쪽의 물관을 터뜨렸다. 차가운 물이 골목으로 쏟아졌다.
강민은 그 물을 이용했다. 발을 미끄러뜨리며 낮게 파고들어 선두의 무릎 뒤를 검집으로 쳤다. 상대가 중심을 잃자 손목을 꺾어 증기총을 떨어뜨렸다. 두 번째 가면이 옆에서 갈고리칼을 휘둘렀다. 강민은 반걸음 물러나 칼날을 흘린 뒤, 본국검의 등으로 팔꿈치 관절을 내려쳤다. 황동 관절이 찌그러지며 팔이 멈췄다.
“관절이 약점이에요! 황동이라 한 번 찌그러지면 안 돌아갑니다!”
“들었다!” 지붕 위에서 고륜이 두 명을 상대하며 외쳤다. 노장의 창은 빠르지 않았지만 빈틈이 없었다. 첫 찌르기는 적의 시선을 묶고, 두 번째는 퇴로를 지웠으며, 세 번째는 발밑 기와를 깨뜨렸다. 가면 하나가 미끄러지자 고륜은 창대로 허리를 감아 아래 골목의 빨랫줄 위로 던졌다. 줄이 끊어지며 젖은 옷과 함께 몸이 추락했다.
청우는 철장을 뽑지 않았다. 빈손으로 날아오는 칼목을 밀어 방향을 바꾸고, 팔꿈치 안쪽을 눌러 힘을 뺐다. 상대가 다시 달려들자 발뒤꿈치로 발등을 밟고 어깨를 벽에 부딪치게 했다. 뼈가 부러지는 대신 숨이 막히는 소리만 났다.
“그만두십시오.” 청우가 말했다. “다음은 관절이 상합니다.”
가면은 대답 대신 입안의 바늘을 뱉었다. 청우가 고개를 기울여 피했지만 바늘이 귓불을 스쳤다.
“경고를 듣지 않으셨군요.”
그는 상대의 턱과 쇄골 사이를 손가락 두 개로 짚었다. 가면은 그대로 무릎이 꺾여 쓰러졌다.
“강민아, 등은 내가 본다!” 서란이 골목 중앙에서 외쳤다. 쌍수 세검이 번쩍이며 다가오는 칼을 비껴 냈다. 그녀는 깊게 베지 않고 손목의 힘줄, 발목의 기맥, 어깨의 움직임만 끊었다. 한 명이 뒤에서 비호를 노리자 서란은 세검 하나를 던져 그의 소매를 벽에 박았다.
“비호야, 숙여!”
소년이 몸을 낮춘 위로 두 번째 세검이 날아가 적의 투구 끈을 끊었다. 투구가 벗겨지며 젊은 얼굴이 드러났다. 강민보다 몇 살 많아 보이지 않았다.
“반역자.” 공포로 흔들리는 눈과 달리, 입은 명령대로 움직였다.
“너, 나랑 별 차이도 안 나잖아…….” 비호가 그 얼굴을 보고 잠깐 멈췄다. 그 틈을 노려 다른 가면이 쇠사슬을 던졌고, 사슬이 비호의 발목을 감았다.
강민은 세 걸음 거리를 단숨에 좁혔다. 본국검을 아래에서 위로 쳐 올려 사슬을 끊고, 몸을 돌려 칼자루 끝으로 가면의 명치를 찍었다. 상대가 접히자 무겸의 창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비호, 움직여.”
“알아!”
“발목 피 나잖아!”
“나중에!” 비호는 주머니에서 작은 폭약나사 둘을 꺼냈다. “누나, 빨랫줄 고리 하나, 등롱 기둥 하나. 둘 다 끊으면 저놈들 둘로 갈라져!”
짧은 폭발과 함께 줄과 기둥이 동시에 무너졌다. 젖은 천과 등롱 기름이 골목을 가로막아 추격대의 진형을 둘로 갈랐다.
“지붕으로!” 강민이 외쳤다.
서란이 먼저 벽의 돌출부를 밟고 올라갔다. 비호가 뒤를 따랐고, 청우가 소년의 등을 밀어 주었다.
“고륜 어르신, 왼쪽을 쓸어 주십시오. 제가 벽을 세우겠습니다.”
“좋다. 네가 넓게 치면 내가 빈 곳을 찌르마.” 무겸과 고륜은 골목 어귀를 번갈아 막았다. 무겸이 넓게 휘둘러 적을 물리면 고륜이 빈 곳을 찔렀고, 고륜이 낮게 쓸어 발을 묶으면 무겸이 창대를 세워 벽을 만들었다. 오래 맞춰 온 형제 같은 움직임이었다.
강민은 마지막까지 남았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가면이 젊은 추격자 둘을 밀쳐 내며 앞으로 나왔다. 그의 투구에는 온전한 백룡문이 새겨져 있었다.
“태사령의 명을 거역하면 황도 어디에도 설 곳이 없다.”
“황도가 태사령 한 사람의 땅은 아닙니다.”
“제국이 너를 만들었다.”
“사람들이 저를 살렸습니다.”
지휘관의 증기총이 불을 뿜었다. 강민은 검면을 비스듬히 세웠다. 탄환이 날에 맞아 옆벽으로 튕겼고, 충격이 손목을 저리게 했다. 지휘관은 그 틈에 거리를 좁혀 짧은 도를 찔러 넣었다. 첫 합에서 도끝이 강민의 옆구리 옷을 찢었다. 둘째 합에서 본국검이 도의 손잡이를 눌렀지만, 상대는 의체 손목을 회전시켜 칼날을 뒤집었다. 셋째 합, 강민은 일부러 가슴을 열어 보였다.
지휘관이 미끼를 물었다. 도가 심장을 향해 곧게 들어왔다. 강민은 마지막 30cm에서 몸을 틀었다. 칼날이 갈비뼈를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그의 왼팔이 상대 팔꿈치를 감았다. 본국검의 검면이 투구 아래를 쳤다.
쾅.
투구가 골목 바닥을 굴렀다. 지휘관의 목이 드러났다. 강민은 검날을 2cm 앞에서 멈췄다.
“강민아!” 뒤쪽 지붕에서 서란이 그를 불렀다.
강민은 지휘관의 눈을 보았다. 두려움보다 체념이 먼저 들어 있었다. 태사령의 명령을 따르다 죽는 것이 자기 몫이라고 이미 받아들인 얼굴이었다.
“돌아가서 전해.”
“무엇을.”
“나는 도망치는 게 아니라고.” 강민이 검을 거두었다. “가야 할 곳으로 가는 거다.”
그는 지휘관의 어깨를 밀어 골목 반대편으로 넘어뜨리고 벽을 뛰어올랐다. 지붕 위에서 비호가 내민 손을 잡아당겼다. 일행은 기와지붕을 가로질러 달렸다. 청염 광탑들이 푸른 불을 쏘아 올렸고, 운하의 증기선들이 흰 김을 길게 남겼다.
“뒤에 붙었어! 40m… 아니, 30m!” 비호가 돌아보며 외쳤다. “앞에도 막혔어!”
두 지붕 사이가 5m 넘게 벌어져 있었다. 아래는 야시장 골목, 사람과 수레가 뒤엉켜 있었다.
“뛰어내리면 저 사람들이 다친다.” 서란이 숨을 몰아쉬었다.
무겸이 창을 지붕 끝에 박았다. “줄을 걸어.”
비호가 쇠줄을 창끝에 묶고 맞은편 굴뚝으로 표창을 날렸다. 첫 표창은 벽돌을 깨고 빠졌다. 두 번째가 굴뚝의 철띠에 걸렸다.
“한 명씩!”
서란이 민첩하게 줄을 타고 건넜다. 청우, 비호, 고륜이 뒤따랐다. 강민이 건너려는 순간 추격대의 쇠침이 날아왔다. 무겸이 등을 돌려 창대로 막았지만 한 발이 어깨를 스쳤다. 피가 튀었다.
“무겸 형!”
“가.”
“같이 가요.”
강민은 줄을 잡지 않고 뒤로 돌아섰다. 추격자 셋이 동시에 지붕에 올라왔다. 첫 번째의 도를 흘려 기와에 박히게 하고, 두 번째의 발목을 걷어찼다. 셋째가 창을 찔러 왔을 때 무겸의 창이 옆에서 부딪쳐 궤도를 틀었다.
“네가 막으면 내가 건넌다.” 무겸이 말했다.
“청염은 못 써요. 이 지붕에서 불 붙이면 야시장까지 번져요.”
“그럼 검 무게로 버텨.”
두 번 받아 내고 한 번 밀어내는 사이 무겸이 줄을 탔다. 마지막으로 강민은 발밑 기와 세 장을 차올려 추격자의 시야를 가리고 몸을 날렸다. 줄이 크게 흔들렸다. 아래 야시장의 불빛이 빠르게 지나갔다.
“당겨!” 고륜과 청우가 줄을 당겼다. 강민이 지붕 가장자리를 붙잡는 순간 비호가 쇠줄의 고정쇠를 끊었다.
“길 없앴다!” 줄이 추격대 쪽으로 떨어졌다.
일행은 황궁 외곽의 종루까지 달려가서야 멈췄다. 서란이 무겸의 어깨부터 살폈다.
“깊진 않은데 증기침 열 때문에 살이 부풀었어. 오라버니, 팔 움직여 봐.”
무겸이 천천히 팔을 들었다. “괜찮다.”
“강민이랑 똑같은 말 하지 마. 둘 다 환자야.”
“나는 한 번 말했다.”
“한 번도 많아.” 서란은 침을 놓고 해독약을 바르다 강민의 옆구리를 발견하고 눈을 흘겼다. 칼끝이 살을 얕게 그어 피가 배어 나와 있었다. “너도 앉아.”
“누나, 지금 시간이—”
“앉아.”
강민은 종루 바닥에 순순히 앉았다. 비호가 옆에서 웃었다.
“형은 태사령한테도 안 밀리더니 누나한텐 바로 지네.”
“너도 발목 내놔.”
비호의 웃음이 사라졌다.
“백도윤 전하가 알려 준 마지막 은신처는 북동쪽 제지 공방이다.” 고륜이 붕대를 감는 동안 말했다. “새벽까지 종이를 삶는 증기 냄새가 짙어서 추적용 감응향을 흐려 줄 거다.”
공방 안에는 백도윤이 먼저 와 있었다. 황자는 평민의 회색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고, 머리에는 종이 가루가 묻어 있었다. 강민은 잠깐 웃음이 났다.
“잘 어울리십니다.”
“황자보다 종이 장수가 낫다는 뜻이오?”
“적어도 덜 눈에 띕니다.”
“당신 옆구리의 피보다야 그렇겠지.” 백도윤은 웃지 못하고 강민의 상처를 보았다. 그는 품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상자 안에는 손바닥 두 개를 합친 크기의 황동 기계 새가 누워 있었다. 한쪽 날개는 아직 덜 닫혀 있었다.
“이건 궁의 전령조 중 가장 오래된 개체요. 새끼 태엽은 내가 가지고, 어미 태엽은 당신이 가지시오.” 황자가 작은 원통형 태엽을 강민의 손에 올렸다. “새는 이 진동을 따라 돌아오오. 당신이 어느 바다에 있든, 내 소식은 닿을 것이오.”
“차갑네요.” 강민은 태엽을 쥐었다. “전하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숙부님은 정식으로 반역을 선포하지 않았소. 황제 폐하의 건강이 나빠졌다는 명목으로 외성 병영의 지휘권을 가져가고, 세금 창고와 청염 광탑의 연료 배급을 손에 쥐었지. 칼을 뽑지 않고도 도시의 목을 조르는 방식이오.”
“그럼 다음 수는요?”
“백성들에게 선택을 주는 척할 것이오. 반백파의 인장을 받으면 겨울 연료를 주고, 거부하면 배급 명부에서 이름을 지우겠지. 굶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숙부님 편에 서면, 나중에는 그들을 반역자로 묶어 나와 싸우게 할 것이오.”
강민은 스팀갱의 광부들을 떠올렸다. “명령과 생존 사이에 끼인 사람을 적으로 정해 버리면, 그때부터 태사령의 계산 안에서 움직이게 되겠군요. 어떻게 막으실 겁니까?”
“배급 창고의 장부를 공개할 것이오. 부족해서 나누지 못하는 것과, 복종을 얻기 위해 숨기는 것은 다르니까.”
“문서를 공개하면 전하를 거짓말쟁이로 몰 겁니다.”
“그래서 증인이 필요하오.” 백도윤은 공방 주인인 늙은 여인을 불렀다. “이분은 황실 납품 문서를 사십 년 동안 만든 장인이오. 반백파 명령서의 종이와 먹이 어느 창고에서 나왔는지 손끝으로 가려내시지. 나는 귀족의 증언보다 이런 손이 더 오래 버틴다고 믿소. 당신이 동해에서 진실을 찾는 동안 나도 황도에서 사람을 모으겠소.”
“무모하십니다.” 강민이 말하고는 곧 덧붙였다. “제가 동쪽으로 가는 것도 다르지 않지만요. 전하,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말해 보시오.”
“반백파 인장을 받은 사람들을 모두 적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연료가 없어서 받은 사람도 있을 겁니다.”
백도윤은 잠시 생각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죄와 생존을 구분하라는 뜻이군.”
“제가 돌아왔을 때 싸워야 할 사람이 줄어들었으면 합니다.”
“당신은 적을 줄이는 데 관심이 많군.”
“적을 늘리는 건 태사령이 잘하니까요.”
황자가 작게 웃었다. 피로했지만 무너지지 않은 웃음이었다.
“위험합니다, 전하.”
“당신이 할 말은 아니오.” 백도윤이 손을 내밀었다. 옥반지가 사라진 손이었다. 강민은 그 손을 잡았다. 왕족의 예도, 무인의 맹세도 아닌 악수였다. “언젠가 다시 만나 제국의 죄를 끝냅시다.”
“반드시.”
“정문으로 오겠다는 약속도 잊지 마시오.”
“검까지 들고 오겠습니다.”
“그때는 내 호위들이 놀라지 않게 미리 전갈을 보내시오.”
짧은 농담 뒤 두 사람은 손을 놓았다. 누구도 작별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작별이라고 부르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았다.
“누나, 의공원 옛 동료한테 맡길 거 챙겼어?” 강민이 물었다.
“쓰지 않을 약재랑 청혈성 포로 명단. 벌써 보냈어.” 서란이 답했다. “비호는 항구 창고에서 폐부품 살 때 쓸 상단 표식 챙겼고.”
그동안 비호는 기계 새의 날개축을 황동 침으로 임시 고정하고, 피가 스며든 태엽 상자를 새 종이로 감쌌다. 새의 목을 열어 음성관을 확인하던 그가 손을 멈췄다.
“전하, 이거 원래 있었어요? 음성관 안에 바늘이 박혀 있는데.”
백도윤이 가까이 와 보았다. “없었소. 내가 마지막으로 감을 때는 깨끗했소.”
“끝에 검은 독이 말라붙었어요. 누가 이 새를 잡았다가 풀어 준 거예요. 새를 따라가서 전하 위치를 찾으려고.” 비호는 바늘을 뽑아 불에 넣었다.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새도 믿으면 안 되네.”
“새가 배신한 것은 아닙니다.” 청우가 말했다. “잡은 사람이 상처를 입힌 것이지요.”
비호는 전령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알아요. 그냥 화나서 그래요.”
“화가 난 대상이 누구인지 구분하시는 것은 중요합니다.” 청우는 미소를 보였다. 황도의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해당하는 말이었다.
“창날은 종이 두루마리 속에 숨기자.” 무겸이 무기를 평민 상단의 화물처럼 감싸며 말했다. “본국검은 제지 칼 상자에 넣고.”
“약재 냄새는 종이풀로 덮을게. 향이 세서 개도 헷갈릴 거야.” 서란이 가방 겉에 풀을 발랐다.
강민은 콧등의 흉터를 천으로 가렸다. “걸음이랑 체격은 못 숨기겠는데.”
“형은 짐꾼처럼 걸어.” 비호가 말했다.
“짐꾼이 어떻게 걷는데?”
“어깨 힘 빼고, 앞을 너무 보지 말고, 힘든 척.”
“실제로 힘든데.”
“그럼 잘하겠네.”
동문 검문소에는 평소보다 세 배 많은 병사가 배치돼 있었다. 반백파의 흰 띠를 두른 순검관이 화물 수레를 하나씩 열어 보았다. 강민 일행은 수레 밑의 얕은 공간에 몸을 숨겼다. 바퀴가 돌 때마다 바닥 자갈이 등과 팔을 때렸다. 무겸은 큰 몸을 접느라 숨을 깊이 쉬지 못했고, 고륜은 창대가 움직이지 않게 팔로 눌렀다.
검문관의 장화가 수레 옆에서 멈췄다.
“종이뿐인가?”
공방 여인이 대답했다. “황궁 장부용입니다.”
“황궁은 오늘부터 반백청의 명령을 받는다.”
“종이는 명령을 가리지 않습니다.”
“입을 조심해라.”
칼이 종이 뭉치를 찌르는 소리가 났다. 칼끝이 수레 바닥을 뚫고 내려와 강민의 뺨에서 5cm 떨어진 곳에 멈췄다. 비호의 몸이 굳었다. 서란이 소년의 손을 잡았다.
검문관이 칼을 뽑았다. “다음.”
수레가 다시 움직였다. 성문 바깥 1km를 지나 숲에 들어간 뒤에야 일행이 바닥에서 나왔다.
“황자 전하께 전하시오.” 공방 여인은 수레를 멈추지 않은 채 말했다. “종이는 불에 타도 재가 글자를 기억한다고.”
“꼭 전하겠습니다.” 강민은 수레 뒤에서 고개를 숙였다.
버드나무 숲에는 말 일곱 필과 식량이 준비돼 있었다. 그러나 안장 하나에 검은 깃털이 꽂혀 있었다.
“이하겸의 표식이다.” 무겸이 주변을 살폈다. “기다리고 있었군.”
고륜은 깃털을 뽑아 냄새를 맡았다. “흑조갑의 기름이 아니다. 누군가 흉내 냈다.”
“줄기에 글자가 있어요.” 강민이 깃털을 돌려 보였다. “‘동.’ 길을 막는 대신 방향을 알려 주고 있네요.”
“태사령이 우리가 동쪽으로 가는 걸 원해.” 비호가 말했다.
“조하륜도 그렇다.” 서란이 덧붙였다.
“그럼 다른 길로 갈까요?” 비호가 물었다.
“아니. 함정이라는 걸 안다고 목적지를 버릴 순 없어. 답은 동쪽에 있으니까.” 강민은 동쪽 하늘을 보았다. “대신 저쪽이 정한 방식으로 걸어갈 필요는 없지. 큰길은 버린다. 낮에는 숨어 쉬고, 해 질 무렵부터 움직인다. 흔적은 북쪽으로 하나, 남쪽으로 하나씩 남기자.”
무겸이 물었다. “동쪽 흔적은?”
“남기지 않아요.”
“그럼 이거 달자.” 비호가 말 안장 아래에 작은 기계 발굽을 달았다. “말이 북쪽으로 간 것처럼 발자국을 찍어 줘.”
“나는 남쪽 길에 낡은 통행패 조각을 흘리마.” 고륜이 말했다. 그는 옛 통행패가 말소된 것을 확인하고 아무 말 없이 반으로 부러뜨렸다.
청우는 덫 대신 경보 방울만 설치했다.
“잡으러 오는 사람까지 배려합니까?” 강민이 물었다.
“다치게 하지 않고 시간을 얻을 수 있다면 그 편이 낫습니다.”
“대사님은 끝까지 어렵게 싸우시네요.”
“쉬운 방법은 대개 다른 사람에게 비용을 넘깁니다.”
강민은 그 말을 기억해 두었다. 백유강의 효율과 가장 멀리 있는 문장이었다.
해가 지자 일행은 숲을 빠져나왔다. 성벽 위에서는 검문 종이 계속 울렸다. 그 소리가 멀어질수록 강민은 자신이 단순히 도시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올 이유를 더 많이 짊어지고 간다는 것을 느꼈다.
“사흘째인데 또 그 회색 비둘기야.” 비호가 하늘을 가리켰다. “벌써 두 번째.”
“묵은 우물가에 삼각형 발자국도 있었다. 반백파 정찰병 신발이지.” 고륜이 말했다. “논둑과 폐철로를 번갈아 걷자.”
“무겸 형 어깨가 아물 때까진 속도를 줄이고, 대신 밤마다 야영지를 두 번씩 옮깁시다.” 강민이 말했다.
일주일째 되는 날, 동쪽 지평선에 바다의 빛이 처음 나타났다. 아직 물은 보이지 않았지만 공기에서 소금 냄새가 났다. 강민은 말을 멈추고 그 냄새를 오래 들이마셨다.
검령성에서 시작된 길이 육지의 끝을 향하고 있었다. 가슴속에서 부르지 못한 이름 하나가 떠오르려 했다. 그는 억지로 밀어내지도, 붙잡지도 않았다. 다만 아직 그 이름을 자기 것으로 삼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아직은 아니다.’
손안의 황동 태엽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날 일행은 폐염전의 바람막이 창고에서 잠깐 쉬었다. 소금이 굳은 바닥은 희게 갈라져 있었고, 벽에는 오래전 항로를 표시한 낙서가 남아 있었다.
“이건 진짜 뱃길, 이건 밀수꾼 암호.” 비호가 선들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암호 쪽이 더 많네.”
서란은 강민의 옆구리 상처를 다시 꿰맸다. “황도에서 나온 뒤 계속 벌어졌어. 말을 탈 때 몸을 너무 비틀었지?”
“추격자가 뒤에 있었잖아.”
“추격자한테 상처가 낫는 시간을 달라고 하진 못해도, 네가 안장에서 덜 흔들릴 수는 있어.”
“다음부터 조심할게.”
“그 말 기록해 둬야겠다.”
“적었어. ‘강민, 다음부터 조심.’” 비호가 벽에 숯으로 적는 시늉을 했다. 강민이 소금 조각을 던졌고 소년은 웃으며 피했다.
“바다는 사람을 숨겨 주기도 하고, 흔적을 더 오래 남기기도 한다.” 고륜이 창고 입구에서 동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육지에서는 발자국이 지워지지만 바다에서는 어느 항구에서 물을 채웠는지, 어떤 돛을 썼는지 모두 소문이 된다.”
“그럼 소문보다 빨리 움직여야겠군.” 무겸이 창대를 닦으며 답했다.
“조하륜의 사람들이 이미 이 길을 썼습니다.” 청우가 벽의 낙서 하나를 가리켰다. 검은 먹으로 그려진 선 끝에 갈고리 모양이 있었다.
“그 아래 새로 긁은 자국도 있어요.” 강민이 몸을 낮췄다. “점 일곱 개가 동쪽으로 이어졌네요. 하루 간격으로 남긴 표식입니다.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요.”
서란이 바늘을 정리했다. “기다리게 해. 우리는 다친 사람까지 챙기면서 갈 거니까.”
“문서는 한 사람이 다 들고 있지 말자.” 강민이 짐을 펼쳤다. “세 묶음으로 나눕시다.”
“첫 묶음은 내 창대 속에 넣지.” 무겸이 말했다.
“둘째는 내 약재 상자 이중 바닥에.” 서란이 이었다.
“셋째는 내가 고친 물통 뚜껑 안!” 비호가 손을 들었다.
“나는 빈 문서통을 차겠다.” 고륜이 허리띠를 고쳤다. “추격자가 붙으면 내가 미끼를 들고 북쪽으로 빠지마.”
“또 혼자 남으려는 거잖아요.” 강민이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늙은 사람 하나가 시간을 사는 게 가장 값싼 경우도 있다.”
“우린 사람 값을 그렇게 매기지 않아요.”
고륜이 그를 오래 보았다. 젊은 시절 믿었던 군율이라면 철없다고 꾸짖었을 대답이었다. 그러나 황궁에서 몇 번이나 서로를 버리지 않아 살아난 얼굴들을 보고 나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는 빈 문서통을 풀어 비호에게 던졌다.
“그럼 이것도 덫으로 써라.”
“재가루랑 고추씨 채울게. 급하게 열면 눈이랑 코가 난리 날 거야.” 비호가 뚜껑을 채우며 진지하게 말했다. “죽이지 않아도 두 분은 벌 수 있어.”
청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두 분이면 한 사람을 살릴 수도 있습니다.”
강민은 창고 바닥에 남은 발자국까지 지운 뒤 황도 쪽을 돌아보았다. 성벽 위 광탑은 멀리서도 푸르게 빛났다. 그 안에서 백도윤은 자기 이름과 황자의 자리를 걸고 시간을 벌고 있을 터였다.
“살아서 다시 만나자.”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문장이었다. 서란은 들었지만 묻지 않았다. 대신 강민의 옷깃을 바로 세우고, 목 아래에 냉각용 향낭을 매달아 주었다.
그 말이 끝난 뒤, 창고 지붕 위에서 금속 날개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새다! 서쪽에서 비틀거리며 내려와!” 비호가 외쳤다. 한쪽 날개가 피와 기름에 젖은 기계 새가 강민의 어깨에 닿자마자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백도윤 전하의 전령조야.” 강민이 새의 배를 열자 짧은 종이쪽지가 나왔다. 그의 얼굴이 굳었다. “전하 글씨가 아니에요. 획이 지나치게 가늘고, 먹 끝에서 독 냄새가 나요.”
“조하륜의 필체다.” 고륜이 낮게 말했다.
“뭐라고 적혀 있어?” 서란이 물었다.
“‘동해로 오라. 네 심장이 열 문은 하나뿐이다.’” 강민이 읽었다. 그 아래에는 피로 찍은 작은 백룡 발톱이 있었다.
그때 기계 새의 목 안쪽에서 다른 목소리가 낮게 새어 나왔다.
“조하륜은 혼자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