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초아의 증언
海東曆: 201년 9월 22일
· 시점: 강민
우물 두레박이 올라올 때마다 물 대신 쇠사슬 소리가 났다.
강민은 그 소리를 세 번째 들은 뒤 걸음을 멈췄다. 항구로 이어지는 산길 아래, 서른 가구 남짓한 마을이 웅크리고 있었다. 지붕은 짚과 얇은 철판을 덧댄 모양이었고, 집집마다 굴뚝이 낮았다. 사람들은 일행을 보자 문을 닫았다. 아이가 내다보던 창도 어른 손에 가려졌다.
“우물 안에 뭔가 있어.” 비호가 먼저 내려갔다.
두레박을 끌어올리자 물통 바닥에 얇은 황동 조각이 걸려 있었다. 조각은 손톱만 했고, 검은 갈고리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하겸의 흑조갑과 같은 문양이었다.
강민의 콧등이 오래된 통증을 기억했다.
“누가 넣었지?”
비호가 주위를 둘러봤다. “우릴 따라온 사람.”
“사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청우가 우물가 흙을 살폈다. “발자국이 너무 가볍습니다.”
서란이 우물 뒤 장독대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마른 풀잎이 눌린 자국이 있었다. 몸집 작은 누군가가 밤새 웅크려 있었던 자리였다. 그녀가 손을 뻗자 장독 사이에서 돌멩이 하나가 날아왔다. 서란은 고개를 기울여 피했다.
“나오지 않으면 비호를 보낼 거야.”
“왜 나야?”
“너랑 비슷한 키잖아.”
“누나, 사람 마음 다치게 말하지 마.”
장독 뒤에서 작은 웃음이 새었다. 곧 열두세 살쯤 된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는 어깨 아래까지 엉켜 있었고, 오른쪽 뺨에는 오래된 화상 자국이 남아 있었다. 낡은 남색 저고리 안쪽에 짧은 칼을 숨기고 있었지만 손잡이를 잡은 손이 떨렸다.
소녀는 도망치지 않았다. 강민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그 흉터.”
첫 말이 그것이었다.
“콧등의 그 흉터, 검은 갈고리 손이 낸 거지요?”
강민은 대답 대신 황동 조각을 들어 보였다. “이걸 네가 넣었나?”
“맞아요.”
“왜 사흘 동안 따라왔지?”
소녀의 눈이 흔들렸다. “정말 그 사람과 싸운 건지 확인하려고요.”
“이하겸을 아느냐.”
이름이 나오자 마을 어딘가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소녀의 어깨가 움츠러들었지만 눈은 피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우리 집을 지웠어요.”
말은 담담했으나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서란이 가까이 가려 하자 소녀가 칼을 반쯤 뽑았다.
“다가오지 마세요.”
“상처를 보려는 거야.”
“안 아파요.”
“안 아픈 사람은 그렇게 이를 악물지 않아.”
서란은 더 다가가지 않고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자기보다 어린 이를 위에서 내려다보지 않으려는 자세였다.
“이름이 뭐야?”
“민초아.”
“난 유서란. 저쪽 말 많은 애는 단비호, 큰 창 든 사람은 장무겸 오라버니, 나이 많은 분은 고륜 어르신, 스님은 청우 대사님. 그리고 네가 보고 있는 사람은 강민이야.”
초아는 이름들을 외우듯 입술만 움직였다. 마지막으로 강민의 이름에서 멈췄다.
“강민.”
“그래.”
“백룡문과는 무슨 관계예요?”
마을의 바람이 갑자기 멎은 듯했다.
고륜이 한 걸음 다가왔다. “어디서 백룡문을 보았느냐.”
초아는 노장을 경계했다. “먼저 약속해요. 제가 말하면 저를 버리지 않는다고.”
“우리는 너를 잡으러 온 사람들이 아니다.” 강민이 말했다.
“잡으러 온 사람들도 처음에는 그렇게 말했어요.”
그 말 뒤에 숨은 일을 누구도 캐묻지 않았다. 아이에게 벌어진 피해는 눈앞의 흉터와 굳은 표정만으로 충분했다.
강민은 본국검을 벗어 땅에 내려놓았다. “지금 당장 믿으라고 하지 않겠다. 네가 말하지 않아도 여기서 해치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떠날 때까지 같이 있어. 네 뒤를 쫓는 사람이 있는지부터 확인하자.”
초아의 눈이 검에서 강민의 빈손으로 옮겨갔다.
“왜 검을 내려놔요?”
“네가 무서워하니까.”
“검이 없으면 저를 지킬 수 없잖아요.”
“주울 수 있는 거리에 놨다.”
비호가 피식 웃었다. 초아는 처음으로 그를 보았다.
“넌 몇 살이야?”
“열셋.”
“나도.”
“그럼 반말해도 되겠네.”
“싫어.”
“왜?”
“네가 먼저 말 많다고 했잖아.”
서란이 웃음을 삼켰고, 무겸의 굳은 입가도 아주 조금 풀렸다.
일행은 마을의 빈 방앗간에 자리를 잡았다. 주민들은 가까이 오지 않았지만, 해가 기울 무렵 늙은 여인이 죽 한 솥을 문 앞에 놓고 갔다. 초아는 그 여인을 ‘마을 할머니’라고 불렀다. 친할머니는 아니었고, 이곳에 흘러든 아이들을 번갈아 숨겨 주는 사람이었다.
죽을 먹고 나서야 초아는 입을 열었다.
“제가 여섯 살 때였어요. 비가 많이 왔어요. 검령성에서 이틀쯤 떨어진 길가에 살았는데, 밤중에 남자 한 명이 문을 두드렸어요. 품에 갓난아이를 안고 있었어요.”
강민은 손가락을 무릎 위에서 모았다.
“얼굴은 기억하느냐.” 고륜이 물었다.
“수염이 있었고, 왼쪽 눈 아래가 찢어져 있었어요. 옷에는 백룡문 인장이 달렸는데 반쯤 불에 탔어요. 아이는 울지도 못하고 숨만 쉬었어요.”
“그 사내가 무슨 말을 했지?”
“물만 달라고 했어요. 할머니가 미음을 끓여 줬는데, 그릇을 받은 손이 계속 떨렸어요. 아이를 내려놓지 않았어요. 자기가 먹지 않고 손가락으로 미음을 찍어 아이 입술에 묻혔어요.”
사소한 장면이었다. 그래서 더 믿을 수 있었다. 조작된 증언은 대개 큰 이름과 큰 사건을 말한다. 아이의 기억에는 젖은 도포, 떨리는 손, 미음 냄새가 남아 있었다.
“그 아이에게 표식이 있었습니까?” 청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가슴에 푸른 점이 있었어요. 점이라기보다… 불빛이 피부 아래서 움직이는 것 같았어요.”
강민의 왼쪽 가슴이 저릿했다.
초아가 강민을 보았다. “그 아이도 당신과 관계가 있어요?”
강민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모르겠어. 하지만 그 아이는 내가 아니야.” 가슴께로 올라갔던 손을 내리며 그가 말했다. “일곱 해 전이면 나는 이미 열한 살이었어.”
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그 애가 어디로 갔는지, 당신은 알까 싶었어요.”
푸른 빛이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사연이라 여길 수는 없었다.
“그 사내는 어디로 갔지?”
“검령성 쪽으로요. 떠나기 전에 할머니한테 종이 한 장을 줬어요. 무슨 일이 생기면 황궁의 고륜이라는 사람을 찾으라고.”
모두의 눈이 고륜에게 향했다.
노장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종이는?”
초아가 옷 안쪽에서 기름먹인 천을 꺼냈다. 여러 겹을 풀자 불에 그슬린 종이 조각이 나왔다. 글은 대부분 번졌지만, 끝부분의 두 글자는 읽을 수 있었다.
‘…고륜.’
고륜은 종이를 받지 못하고 손을 허공에 멈췄다. 오래도록 지워졌다고 믿은 이름이 아이의 품에서 돌아왔다.
“사내의 이름을 들었느냐.”
“할머니가 ‘운하’라고 불렀어요.”
고륜의 무릎이 흔들렸다. 그는 방앗간 기둥을 짚었다.
“운하… 살아 있었구나.”
강민은 노장을 재촉하지 않았다. 고륜이 숨을 고른 뒤 설명했다. 운하는 봉인 부대의 전령이었고, 백씨 가문의 아이를 검령성으로 옮기는 임무를 맡았던 사람이다. 공식 기록에는 그날 밤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초아가 본 것은 일곱 해 전이다. 내가 아는 이송 임무와는 다른 일이야.” 고륜이 잠시 말을 멈췄다. “그때 운하가 누구의 아이를 데리고 있었는지는 나도 모른다.”
강민은 얼굴도 모르는 사내와 그 품에 안긴 아이를 떠올렸다. 미음을 찍어 먹이던 손은 무엇이 두려워 떨렸을까. 자신을 구한 기억은 아니었다. 그래도 폭우 속에서 누군가 아이 하나를 살리려 했다는 사실은 남았다. 그 아이가 지금 어디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 뒤 무슨 일이 있었지?”
초아의 표정이 닫혔다.
“검은 갈고리 손이 왔어요. 몇 년 뒤에. 종이를 찾으러.”
서란이 물었다. “이하겸이 직접?”
“가면을 썼지만 손을 봤어요. 쇠손가락이 다섯 개였고, 끝이 갈고리였어요. 할머니는 종이가 없다고 했어요. 그 사람들은 집을 뒤졌고….”
초아는 말을 멈췄다. 손바닥의 상처가 다시 벌어질 만큼 주먹을 쥐었다.
강민이 낮게 말했다. “그 뒤는 말하지 않아도 된다.”
“말해야 해요.”
“지금 아니어도 된다.”
“아니요. 계속 안 말해서 다 없어졌어요.”
소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실험장으로 끌려갔어요. 어른들은 팔에 번호를 새겼고, 아이들은 따로 데려갔어요. 저는 하수구로 도망쳤어요. 돌아왔을 때 집은 타고 있었고, 할머니는 없었어요.”
직접적인 장면보다 돌아온 아이가 본 빈집이 더 선명했다. 방앗간 안에서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초아가 강민을 노려보듯 말했다. “그래서 끝까지 말할 거예요. 제가 본 사람, 들은 이름, 다요. 죽어도.”
“죽지 않고 말해야 한다.” 강민이 대답했다.
“그게 마음대로 돼요?”
“마음대로 안 되니까 같이 하자는 거다.”
초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증언이 끝난 뒤에도 초아는 한동안 손을 펴지 못했다. 손톱 자국에서 피가 배어나오자 서란이 약을 바르려 했지만, 소녀는 이번에는 칼을 뽑지 않았다. 다만 손을 내주는 데 시간이 걸렸다.
“따가울 거야.” 서란이 말했다.
“괜찮아요.”
“괜찮지 않아도 돼.”
초아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보았다. 살아남은 아이에게 괜찮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사치에 가까웠다. 아프다고 말하는 순간 뒤처지고, 무섭다고 말하면 끌려갔다. 그래서 먼저 괜찮다고 말하는 법부터 배웠다.
서란은 약을 바른 뒤 붕대를 감았다. 너무 세게 묶지 않았고, 풀리지도 않게 했다. 초아는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왜 저를 믿어요?”
“아직 전부 믿는 건 아니야.” 서란이 솔직하게 답했다. “네가 우리를 사흘 따라왔고, 우물에 흑조 표식을 넣었잖아. 함정일 가능성도 생각하고 있어.”
초아의 얼굴이 굳었다.
“하지만 네 상처와 두려움은 거짓말이 아니야. 사람을 믿는 것과 상처를 치료하는 건 별개야.”
그 대답에 소녀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거짓말처럼 다정한 말보다 경계하면서도 손을 내미는 태도가 오히려 믿을 만했다.
강민은 방앗간 밖으로 나가 마을을 둘러보았다. 집들은 모두 문을 닫았지만 커튼 뒤에서 눈이 움직였다. 우물 옆에는 마른 피가 씻긴 흔적이 있었고, 창고 벽에는 번호표를 떼어 낸 못 자국이 줄지어 있었다. 인신매매 조직은 이 마을을 한두 번 지나간 것이 아니었다.
고륜이 곁으로 왔다.
“주민들이 왜 싸우지 않았는지 묻고 싶으냐.”
“묻고 싶지만, 답은 알 것 같습니다.”
“한 번 저항한 집을 골라 사라지게 하면 나머지는 문을 닫는다. 두 번이면 이웃의 울음도 못 들은 척하게 되지.”
“그럼 세 번째에는요?”
“자기가 문을 닫았다는 사실을 잊으려 한다.”
고륜의 말에는 자신의 과거가 섞여 있었다.
강민은 가장 가까운 집 문 앞에 본국검을 내려놓고 앉았다. 안쪽에서 숨소리가 들렸다. 그는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말하고 싶은 사람이 스스로 열 때까지 기다렸다.
한참 뒤 문틈이 조금 벌어졌다. 늙은 남자가 눈 하나만 내보였다.
“그 아이를 데려갈 거요?”
“원한다면 같이 갈 겁니다.”
“그 조직이 다시 오면 마을은 끝이오.”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 주십시오.”
“말하면 우리도 죽소.”
“말하지 않아도 아이를 계속 데려갑니다.”
노인의 눈이 흔들렸다.
강민은 설득하려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저희가 떠난 뒤에도 위험한 건 압니다. 그래서 조직 우두머리만 잡고 끝내지 않을 겁니다. 장부와 연결된 관리 이름을 찾아 황자 전하에게 보낼 겁니다. 다만 첫 문은 이 마을에서 열어야 합니다.”
문 뒤에서 다른 목소리가 났다. “황자를 어떻게 믿어?”
“믿지 않아도 됩니다. 증거를 여러 사람에게 나눠 두십시오. 한 명이 사라져도 남게.”
침묵이 길어졌다.
문이 조금 더 열렸다. 늙은 남자 뒤에는 세 사람이 서 있었다. 한 여인은 아이 신발 하나를 품에 안고 있었다.
“소금창고가 줄지어 서 있소.” 남자가 말했다. “동쪽 일곱 번째 창고는 밤마다 수레가 들어가오. 사람을 실은 수레는 소리가 다르지. 바퀴가 같은데도 더 무겁게 운다.”
강민은 그 말을 기억했다.
다른 집에서도 사람이 나왔다. 처음에는 한 명, 그 뒤에는 둘씩. 누구는 번호표 조각을 가져왔고, 누구는 조직이 쓰는 기름 냄새를 설명했다. 한 젊은 어머니는 아이가 사라진 날짜를 정확히 말했다. 그 증언들은 제각각 작았지만 모이자 길이 되었다.
방앗간 안에서는 비호와 초아가 서로의 공구를 구경했다. 초아는 비호의 표창을 만져 보려다 손을 뗐다.
“날카로워.” 비호가 말했다.
“칼도 있어.”
“그건 제대로 못 쓰잖아.”
초아가 눈을 흘겼다. “너는 잘 써?”
“나는 던져.”
“보여 줘.”
비호는 방앗간 벽의 못을 향해 표창을 던졌다. 표창은 못에서 20cm 떨어진 곳에 박혔다.
초아가 웃었다. “못 맞췄네.”
“원래 저기 맞히려던 거야.”
“거짓말.”
“바람이 불어서.”
“방 안인데?”
비호가 얼굴을 붉혔다. 초아는 처음으로 또래를 놀리는 평범한 아이처럼 보였다.
강민이 들어오자 두 아이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뭐 했어?”
“아무것도.” 둘이 같은 말로 답했다.
서란이 혀를 찼다. “벌써 한패네.”
초아는 잠시 망설이다 강민에게 물었다. “검은 갈고리 손을 만나면 죽일 거예요?”
방앗간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이하겸을 말하는 것이었다.
강민은 즉답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죽이고 싶었다.”
“지금은요?”
“지금도 그 마음이 없어졌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럼 왜 안 죽였어요?”
“죽일 수 있는 순간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죽이는 것만 생각하면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되기 때문이기도 해.”
초아는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사람을 그렇게 많이 죽였는데요.”
“그래서 죗값은 치르게 해야 해.”
“죽이는 것과 달라요?”
“때로는 같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분노해서 죽이는 것과, 더는 다른 사람을 해치지 못하게 책임을 묻는 건 달라야 한다.”
“그 차이를 어떻게 알아요?”
강민은 잠깐 웃었다. “나도 배우는 중이야.”
초아가 실망한 듯 입술을 내밀었다. 확실한 답을 기대했을 것이다.
청우가 옆에서 말했다.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질문을 버리지는 않습니다.”
“대사님은 항상 어려워요.” 비호가 끼어들었다.
“죄송합니다.”
“또 존댓말.”
짧은 웃음이 지나간 뒤, 초아는 자기 칼을 꺼내 바닥에 놓았다. 칼날은 잘 갈려 있었지만 손잡이는 너무 커서 아이 손에 맞지 않았다.
“이건 할머니가 준 거예요. 도망칠 때 쓰라고.”
무겸이 칼을 들어 균형을 살폈다. “너에게는 무겁다.”
“버리라는 거예요?”
“아니다. 손잡이를 줄이자.”
그는 비호에게 공구를 빌려 손잡이 나무를 깎았다. 초아의 손에 맞춰 두께를 줄이고, 미끄러지지 않게 천을 감았다.
“칼은 마지막에 써라.” 무겸이 건네며 말했다. “먼저 소리치고, 도망치고, 사람을 불러. 그다음에도 길이 없을 때만.”
“싸우는 사람이 도망치라고 해요?”
“살아남는 것이 이기는 싸움도 있다.”
초아는 새 손잡이를 쥐어 보았다. 처음으로 칼이 자기 것이 된 듯 손에 맞았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 마을 사람 셋이 방앗간으로 와서 조직의 수레가 들어오는 시간을 알려 주었다. 보통 밤 아홉 시, 닭 울음 세 번이 망을 보는 자들의 신호였다. 그들은 겁에 질려 있었지만 이번에는 문을 닫고 숨는 대신 우물 뒤와 지붕 위에 자리를 잡기로 했다. 직접 싸우지는 못해도 어느 길로 도망치는지 보고 종을 울리기로 했다.
강민은 그들에게 무기를 들라고 하지 않았다.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을 정하게 했다. 누군가는 아이들을 숨기고, 누군가는 말의 고삐를 끊으며, 누군가는 관청으로 보낼 증언을 복사했다.
초아는 그 모습을 보며 물었다. “사람들이 왜 갑자기 나와요?”
“갑자기 나온 게 아니야.” 강민이 답했다. “계속 문 뒤에 있었어. 문을 열 이유가 생긴 거지.”
밖에서 닭이 갑자기 울었다. 해가 진 뒤였다.
비호가 일어났다. “닭이 아니라 신호야.”
방앗간 벽 너머로 수레 바퀴가 여러 대 멈추는 소리가 났다. 주민들의 문이 닫혔고, 개가 짖다가 짧게 끊겼다.
고륜이 창을 들었다. “몇 명이지?”
청우가 귀를 기울였다. “앞에 열둘, 뒤에 여섯. 수레 안에도 있습니다.”
초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사람들이에요.”
“누구?”
“아이들을 사 가는 사람들.”
방앗간 문이 발로 차여 열렸다. 굵은 목에 쇠고리를 두른 사내가 들어섰다. 한쪽 귀가 기계 집게로 바뀌어 있었고, 허리에는 번호표 묶음이 달려 있었다.
“민초아.”
그가 이름을 부르자 소녀가 뒤로 물러났다.
“값이 세 번이나 올랐다. 실험 생존자에 백씨 증언까지. 네 목 하나면 우리도 바다를 건널 수 있겠구나.”
강민이 사내 앞을 막았다. “아이에게서 떨어져.”
“너희가 새 주인이냐?”
“주인이 아니다.”
“주인 없는 아이는 물건이지.”
그 말이 끝나기 전에 무겸의 창대가 사내의 턱을 올려쳤다. 거구가 문밖으로 날아가 진흙에 처박혔다.
“오라버니, 너무 세게 쳤어.” 서란이 말했다.
“말이 더럽더군.”
마당에서 쇠사슬이 날아왔다. 강민이 검을 뽑아 쳐 냈다. 수레 세 대의 덮개가 열리며 조직원들이 쏟아졌다. 수레 안쪽에는 아이들이 직접 보이지 않았다. 대신 작은 신발과 끊어진 밧줄, 울음을 막는 천 조각이 남아 있었다. 피해는 무대 밖에 있었지만 그 흔적만으로 충분했다.
“아이들은 어디 있지?” 강민이 물었다.
우두머리가 피를 뱉으며 웃었다. “찾아봐.”
조직원들이 덤벼들었다.
첫 합에서 강민은 앞선 둘의 칼을 교차시켰다. 두 번째에서 손목을 비틀어 한 명의 칼을 빼앗고, 칼집째 다른 한 명의 관자놀이를 쳤다. 무겸은 마당 입구를 막아 수레 쪽 병력이 방앗간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창끝이 빠르게 움직여 무릎, 어깨, 손목만 찍었다. 쓰러진 자가 일어나려 하면 창대가 가슴을 눌렀다.
서란은 초아를 등 뒤에 두고 세검을 펼쳤다. 쇠사슬이 날아오자 한 칼로 고리를 걸고 다른 칼로 연결 부위를 끊었다. 끊어진 사슬이 바닥을 때렸다. 비호는 방앗간의 밀가루 포대를 터뜨려 흰 가루를 공중에 퍼뜨렸다.
“불 쓰지 마!”
그가 외치자 조직원 하나가 증기총의 불씨를 켜려다 멈칫했다. 그 순간 청우가 철장으로 총구를 눌러 바닥을 향하게 했다. 탄환이 진흙을 파헤쳤다.
“아이를 사고파는 분들에게 자비를 말하기 어렵습니다.” 청우의 목소리는 여전히 공손했다. “그래도 죽이지는 않겠습니다.”
철장이 사내의 갈비뼈 아래를 쳤다. 그는 숨이 끊긴 듯 쓰러졌지만 맥은 남아 있었다.
우두머리는 혼란을 틈타 방앗간 안으로 뛰어들었다. 쇠고리가 달린 팔로 초아의 머리채를 잡아당기고 칼을 목에 댔다.
“움직이면 이 상품부터 망가뜨린다.”
강민의 검끝이 멈췄다.
초아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눈만 크게 떴다.
우두머리가 뒤로 물러나며 웃었다. “검 버려.”
강민은 본국검을 놓았다. 쇠가 바닥에 닿았다.
“다들.”
무겸과 서란도 무기를 낮췄다.
비호는 손을 들었지만, 손가락 사이에 작은 연막나사 하나를 숨겼다. 강민은 그걸 보지 않은 척했다.
“좋아. 이제 길을 비켜.”
우두머리가 초아를 끌고 문 쪽으로 움직였다. 칼날이 소녀의 피부에 닿아 붉은 선이 생겼다.
강민은 우두머리의 눈을 보았다. 시선이 자기 검과 출입문 사이를 오갔다. 사람을 인질로 잡는 자는 상대가 인질만 본다고 믿는다. 그래서 자기 발밑을 보지 않는다.
비호의 연막나사가 굴렀다.
펑.
회색 연기가 방앗간을 채웠다. 강민은 눈을 감고 소리로 움직였다. 우두머리의 숨, 초아의 발이 바닥을 긁는 소리, 칼날이 옷깃에 스치는 마찰. 그는 검을 줍지 않았다. 맨손으로 두 걸음을 파고들어 우두머리의 팔꿈치 안쪽을 쳤다. 칼 든 손이 잠깐 굳었다. 강민은 그 손목을 잡아 바깥으로 비틀고, 손날로 팔의 힘줄을 내려쳤다.
칼이 떨어졌다.
초아가 몸을 낮춰 빠져나왔다. 서란이 곧바로 아이를 끌어안았다. 강민은 우두머리를 벽에 밀어붙였다.
“아이들은 어디 있지?”
“죽여 봐.”
강민의 청염이 검집 안에서 푸르게 번졌다. 벽의 나무가 열기로 검게 변했다. 우두머리의 웃음이 사라졌다.
“동쪽 소금창고.”
“몇 번?”
“일곱 번째.”
“몇 명이지?”
“열하나.”
강민은 그를 죽이지 않았다. 무릎 뒤를 차 쓰러뜨리고 쇠고리로 손을 묶었다.
일행은 즉시 소금창고로 향했다. 창고는 마을에서 2km 떨어진 폐염전 끝에 있었다. 문을 부수자 안쪽에서 억눌린 울음이 터졌다. 아이들은 살아 있었다. 직접적인 상처는 보여 주지 않았고, 서란은 먼저 등불을 낮추고 담요를 둘렀다. 청우는 자물쇠를 부쉈으며, 비호는 목에 걸린 번호표를 하나씩 잘라 냈다.
초아는 가장 어린 아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제 괜찮아.”
아이는 믿지 못하고 그녀를 바라봤다.
초아가 다시 말했다. “나도 잡혀갈 뻔했어. 그러니까 네가 무서운 거 알아.”
그 말에 아이의 손이 천천히 초아의 소매를 잡았다.
새벽이 밝을 때까지 마을 사람들은 창고로 모였다. 숨어 있던 부모들이 아이를 찾았고, 가족이 없는 아이는 방앗간 할머니가 맡았다. 우두머리와 조직원들은 밧줄에 묶여 마을 광장에 앉았다. 강민은 이들을 황도 관청에 넘기기 전에 연결된 상단과 관리의 이름을 전부 받아 내겠다고 말했다.
우두머리의 허리띠에서는 검은 철패가 나왔다. 한쪽에는 조하륜의 독필 문양, 다른 쪽에는 천부항으로 이어지는 오래된 항로 표시가 새겨져 있었다.
비호가 철패를 등불에 비췄다. “이 사람들, 아이를 팔려고만 한 게 아니야.”
철패 가장자리에는 작은 글씨가 있었다.
‘생존 증인 — 개문 재료.’
초아가 그것을 보았다. 얼굴이 굳었지만 도망치지 않았다.
“저도 같이 갈게요.”
서란이 물었다. “어디까지?”
“끝까지.”
“그 말이 얼마나 긴지 알아?”
“몰라요. 그래서 가 보려고요.”
비호가 옆에서 입을 열었다. “근데 우리 일행은 밥값을—”
서란이 소년의 뒤통수를 때렸다.
“아야!”
초아가 처음으로 소리 내 웃었다.
구출된 아이들은 한동안 누구의 손도 잡지 않았다. 헛간 문이 열렸는데도 밖으로 뛰쳐나오지 못하고 서로의 소매만 움켜쥐었다. 안에는 오래된 짚 냄새와 식은 땀, 약한 마취향이 엉겨 있었다. 서란이 무릎을 꿇고 가장 가까운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이제 문은 열렸어. 바로 나오지 않아도 돼.”
아이의 입술이 떨렸다. “또 닫을 거예요?”
“아니.”
“어른들은 다 그렇게 말했어요.”
서란은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약재 가방을 내려놓고, 양손을 아이가 볼 수 있는 곳에 펼쳐 보였다. 침도 칼도 들지 않은 빈손이었다.
“그럼 네가 먼저 확인해. 밖에 나가 보고, 돌아와도 문이 열려 있는지 봐.”
민초아가 먼저 헛간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문은 그대로 열려 있었다. 아이들이 그 모습을 지켜봤다. 두 번째로 나간 아이는 문턱을 밟고 한참 서 있었다. 세 번째 아이는 햇빛을 보자 울음을 터뜨렸다. 그제야 나머지도 조금씩 움직였다.
강민은 우두머리를 마을 회관 기둥에 묶었다. 사내는 입술이 찢어진 채 웃었다.
“우릴 죽이면 끝날 것 같나? 동쪽 길마다 우리 같은 자가 있다.”
“누가 아이들을 주문했지?”
“사람이 아니라 문이 주문했지.”
“문이 말을 해?”
“피가 말하지. 기억이 말하고.”
강민이 한 걸음 다가가자 사내의 웃음이 흔들렸다. 본국검은 뽑지 않았다. 오히려 그 점이 더 두려운 듯했다.
“개문 재료가 무슨 뜻이지?”
“살아남은 놈은 머릿속에 길을 품고 있어. 할아비가 본 문, 어미가 들은 암호, 자식이 물려받은 공포. 조하륜 님은 그걸 모으신다.”
“그래서 사람을 부품처럼 분류했나.”
“제국도 늘 그랬어. 우린 값을 붙였을 뿐이야.”
강민의 손등에 핏줄이 솟았다. 하지만 검을 뽑는 대신 기둥의 밧줄을 더 조였다. 사내가 숨을 삼켰다.
“너희가 붙인 값은 네가 법정에서 하나씩 읽게 될 거다. 아이들 이름도 네 입으로 말해.”
“황도가 널 지켜 줄 것 같아?”
“황도가 못 지키면 우리가 지킨다.”
그 말은 크지 않았지만 회관 안의 사람들이 모두 들었다. 문틈에 숨어 있던 마을 어른 하나가 앞으로 나왔다. 이어 둘, 셋이 더 나왔다. 그들은 여전히 강민 일행을 믿지는 못했다. 다만 붙잡힌 자들을 넘겨줄 경비조를 자신들이 만들겠다고 했다. 첫 번째로 손을 든 이는 우물가에서 문을 닫았던 노인이었다.
“우리도 모른 척한 죄가 있소.”
강민은 그를 꾸짖지 않았다. “그 죄는 다음 아이를 모른 척하지 않는 걸로 갚으세요.”
해 질 무렵까지 마을은 조용히 움직였다. 아이들에게 따뜻한 죽을 먹이고, 가족을 찾을 명단을 만들고, 도망친 인신매매단의 길목을 막았다. 비호는 헛간 자물쇠를 뜯어 녹인 뒤 농기구 고리로 다시 만들었다. 같은 쇠가 사람을 가두는 데도, 일상을 이어 주는 데도 쓰였다.
초아는 그 과정을 끝까지 지켜봤다. 누군가에게 구해진 사람으로만 남을지, 다음 사람을 구하는 쪽으로 걸어갈지 결정하는 얼굴이었다.
그날 밤 서란은 초아의 헝클어진 머리를 빗겨 주고 여벌 의공사복을 줄여 입혔다. 비호는 표창 던지는 법을 보여 주다 벽의 항아리를 깨고 또 혼났다. 무겸은 아무 말 없이 초아에게 짧은 호신봉을 깎아 주었다. 청우는 아이가 잘 때 문밖에 앉아 염주를 굴렸다.
마을 경비조가 첫 순찰을 나설 때, 구출된 아이 하나가 우물가에 멈춰 섰다. 아이는 물을 마시지 못하고 두레박 줄만 바라봤다. 초아가 옆에 서서 먼저 한 모금 마셨다. 독이 없다는 설명보다 누군가 같은 물을 마시는 모습이 더 빨리 두려움을 걷어 냈다. 아이는 작은 손으로 그릇을 받아 들었다. 그 모습을 본 강민은 앞으로 열어야 할 문이 절벽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강민은 철패를 들고 마을 밖으로 나왔다. 동쪽 하늘 아래 바다 안개가 길게 누워 있었다. 조하륜은 증인들을 모으고 있었다. 천부항의 문을 여는 데 왜 살아남은 사람의 기억이 필요한지는 알 수 없었다.
등 뒤에서 작은 발소리가 났다. 초아가 담요를 두른 채 다가왔다.
“강민.”
“왜 안 자?”
“한 가지 더 기억났어요.”
“뭔데?”
“운하 아저씨가 아이를 안고 떠나기 전에 할머니한테 말했어요.”
초아는 비 오는 밤의 목소리를 흉내 내듯 아주 작게 말했다.
“‘이 아이가 자기 이름을 찾는 날, 바다가 먼저 문을 열 겁니다.’”
강민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운하가 말한 아이는 자신이 아니라, 초아가 보았던 이름 모를 갓난아이였다.
그 아이의 이름과 바다가 무슨 관계인지 묻기도 전에, 철패 안쪽에서 태엽이 돌아갔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검은 갈고리 문양이 갈라지며, 그 아래 감춰진 동쪽 좌표 하나가 붉게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