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겸(李河謙)의 재림
海東曆: 201년 9월 28일
· 시점: 이하겸
이하겸은 피 냄새보다 쇠가 식는 냄새를 먼저 맡았다.
동해로 이어지는 협로 아래, 얼마 전까지 불을 피운 흔적이 있었다. 재는 젖어 있었고, 돌 사이에는 말먹이로 쓴 귀리 껍질이 남아 있었다.
“다섯 시간 전이군.” 그는 젖은 재를 검은 갈고리 손가락으로 집으며 중얼거렸다. “예전 같으면 두 시간이면 따라잡았을 거리다. 그런데 흔적이 세 갈래로 흩어졌어.”
흑조갑(黑爪甲)의 감응 촉이 미세한 열을 읽어 냈다. 서란의 약재 냄새, 비호가 쓰는 기름, 무겸의 창대에 바른 송진, 그리고 새로 합류한 아이의 작은 발자국.
“짐이 늘었군.” 그는 혼잣말하며 웃었다. “짐이 늘면 느려지고, 느려지면 잡기 쉽지. 그런데 너희는 사람이 늘수록 흔적이 줄어드는구나. 한 놈이 못 지운 걸 다른 놈이 덮고, 누가 놓친 소리를 또 누가 듣고.”
소년이 영리해진 것이 아니었다. 소년 곁의 사람들이 서로의 눈이 되어 주고 있었다. 사냥감이 무리를 이루면 대개 공포가 전염되지만, 이들은 반대로 침착함이 번졌다.
“스팀갱의 무너진 갱도, 도공거리의 새 낙관, 청혈성의 진압 보고서, 황궁 외곽 지붕의 검흔.” 열이레 동안 따라온 자취를 하나씩 세던 그가 입술을 비틀었다. “검령성에서 흉터를 새겨 줄 때만 해도 분노가 먼저 움직이는 아이였는데. 지금은 분노를 세 번 삼킨 뒤에야 칼을 뽑아.”
그 변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죽이지 말 것. 청염기관이 충분히 여물 때까지 추적할 것. 천부항의 문이 열리면 심장을 회수할 것.” 그는 명령을 소리 내어 되뇌었다. “하지만 여물기 전에 손댈 수 없는 놈이 되어 버리면, 그땐 어쩌란 말이냐.”
그는 흑조갑의 다섯 칼날을 폈다. 검령성의 밤 이후 각 칼날에 새 톱니를 달았다.
“첫째는 검을 걸고, 둘째는 살을 찢고, 셋째는 관절을 끊는다. 넷째와 다섯째는 도망칠 방향을 지운다.” 사람 하나를 사냥하기 위해 만든 손이었다.
그는 협로 위의 소나무 가지를 올려다보았다. 가지 하나가 바람과 반대 방향으로 흔들렸다.
“덫이군.”
이하겸이 몸을 비튼 순간, 가느다란 쇠줄이 목이 있던 자리를 지나갔다. 줄 끝에 매달린 작은 방울이 울렸고, 멀리서 새가 날아올랐다.
“비호라는 꼬마.” 그는 줄을 끊지 않고 손가락으로 살짝 당겼다. 방울이 반대쪽에서 한 번 더 울렸다. “그래, 울려라. 추격자가 걸렸다고 알려 줘.”
이하겸은 일부러 덫을 밟았다.
“사냥은 들키지 않는 것보다, 사냥감이 어디서 기다리는지 아는 편이 재미있지. 급하게 덮치면 도망칠 테고, 준비하게 두면 뭘 배웠는지 볼 수 있다.”
그는 산비탈을 크게 돌아 높은 곳에 올랐다. 아래 계곡 옆으로 일행의 야영지가 보였다. 불은 하나뿐이었고, 천막은 바위 그림자 안에 숨겨져 있었다.
“아야, 누나! 너무 세게 묶잖아.” 강민이 얼굴을 찡그렸다. 서란이 그의 옆구리 붕대를 갈고 있었다.
“세게 묶어야 말 위에서 안 벌어져.”
“형 표정 봐. 태사령 앞에서도 저런 얼굴은 안 하더니.” 비호가 웃었다.
“그 톱니 내 거야. 내가 먼저 주웠어.” 새로 합류한 소녀가 비호의 손에서 금속 조각을 낚아챘다.
“주운 거랑 고친 거는 다르거든?”
“둘 다 조용히 해라. 경계 중이다.” 바깥을 돌던 무겸이 나무랐다.
“물 데웠습니다. 한 잔씩 드시지요.” 청우가 뜨거운 물을 나누었다. 고륜은 말없이 불에 장작을 넣었다.
이하겸은 입술을 비틀었다.
“검령성의 너한텐 이런 밤이 없었지.” 그가 바람에 대고 속삭였다. “그땐 스승 뒤를 따라다니며 제 힘의 크기만 재던 아이였다. 흑영이 도장을 덮치자 모든 걸 혼자 막으려 했고. 그래서 흔들기 쉬웠어. 분노를 건드리고 이름을 물으면 몸이 먼저 튀어 나왔으니까.”
사소한 동작들이 서로를 연결했다. 그는 그 연결이 칼보다 성가신 방패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누가 먼저 알아차리나 보자.” 그는 흑조갑의 감응침을 땅에 꽂았다. 진동이 흙을 타고 야영지까지 퍼졌다.
첫 번째는 청우였다. 노승의 고개가 아주 조금 들렸다. 두 번째는 비호였다. 소년이 금속 조각을 멈추고 바닥을 보았다. 강민은 세 번째였다. 그는 붕대를 묶는 동안 움직이지 않았지만, 오른손이 자연스럽게 본국검 가까이 갔다.
“셋이나 듣는군.” 이하겸은 감응침을 뽑았다. “사냥꾼 하나의 발소리를 셋이 나눠 들으면, 기습의 값이 떨어진다.”
그는 야영지 쪽에서 바람이 올라오는 방향을 골라 냄새를 감추고 더 내려갔다. 70m 거리의 바위 뒤에 엎드리자 대화가 들렸다.
“초아, 그 표식 어디서 났다고 했지?” 강민이 물었다.
“우물에 넣은 건 제가 주운 거예요. 우리 마을을 지운 사람들이 떨어뜨렸어요.”
소녀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이하겸은 그녀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그때 그 하수구 꼬마로군.” 그가 숨죽여 내뱉었다. “검령성 인근의 작은 마을. 임무는 불탄 문서 회수였고, 아이 하나가 하수구로 도망쳤지. 쫓을 가치가 없다고 봤는데.”
그 아이가 지금 강민 옆에 있었다. 자신이 끝냈다고 생각한 일들이 끝나지 않고 사람의 얼굴을 얻어 돌아와 있었다. 이상한 불쾌감이 목 안을 긁었다.
“검은 갈고리 손을 만나면 알아볼 수 있어?” 비호가 물었다.
“손보다 냄새로 알아. 뜨거운 기름 냄새가 나.”
“관절에 쓰는 흑유 냄새를 기억하는군.” 이하겸은 손목 밸브를 잠가 냄새를 줄였다.
“만나면 뒤에 있어.” 강민이 말했다.
“싫어요.”
“싸우라는 뜻이 아니야.”
“저도 봐야 해요. 도망치면 또 꿈에서 더 크게 나와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럼 내 뒤에서 봐.” 강민이 답했다. “내가 가리지 않을게.”
이하겸의 손가락이 바위 표면을 긁었다.
“가리지 않겠다, 라.” 그가 입속으로 되뇌었다. “복수에 불타는 놈들은 대개 피해자의 눈을 제 칼로 가리지. 대신 죽여 주겠다며 남의 분노를 빌려 제 욕망을 채운다. 그런데 너는 보되 칼을 쥐지 말라고 하는구나.”
“검령성의 밤에 네 콧등에 흉터를 내고 일부러 살려 둔 건 명령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바위 너머의 소년에게 들리지 않을 말을 이었다. “상처가 사람을 어떻게 바꾸는지 보고 싶었지. 대부분은 흉터를 숨기거나, 흉터를 준 놈을 닮아. 평생 복수만 하다 죽든가, 약한 놈을 찾아 같은 상처를 남기든가.”
강민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 사실이 사냥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하겸은 품에서 작은 유리관을 꺼냈다. 조하륜이 준 붉은 분말이었다. 다리 위에서 흩뿌리면 청염 반응을 자극해, 검령성 때처럼 분노와 통증을 한꺼번에 끌어올릴 수 있었다.
그는 마개를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약으로 흔들면 네가 얼마나 자랐는지 알 수가 없지.” 사냥꾼의 자존심이 명령보다 먼저 움직였다. “내 말로 흔든다.”
“강민아, 정말 싸울 거야?” 야영지에서 서란이 물었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어.”
“거짓말.”
“반은.”
“나머지 반은?”
“확인하고 싶어.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얼마나 다른지.”
“같은 생각이로군, 꼬마.” 이하겸은 낮게 웃었다.
“자신을 확인하기 위해 상대를 도구로 삼으면, 상대도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마십시오.” 청우가 끼어들었다.
강민이 잠깐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분노가 올라올 때는 이름에 답하지 마십시오.”
“대사님은 제 이름을 알면서 안 알려 주시잖아요.”
“그래서 다른 사람이 묻는 이름에도 서둘러 답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하겸은 눈을 좁혔다.
“저 중이 봉인의 규칙을 알고 있다.” 조하륜의 밀지에는 이름의 발화가 천부항 개문과 연결된다고 쓰여 있었다. 노승은 그 사실을 입에 올리지 않으면서 소년을 지키고 있었다. “먼저 저 중을 떼어 내야 하나. 아니지. 중을 치면 꼬마는 싸움을 피하지 않을 테고, 두 창도 같이 움직인다. 지금은 죽이는 게 아니라 시험하는 거다.”
야영지는 한 시간 뒤 움직였다.
“불 완전히 끄고 재 흩어.” 고륜이 일렀다.
“발자국은 제가 지울게요.” 민초아가 마른 솔가지를 끌었다.
“북쪽 가짜 흔적은 내가 만든다!” 비호가 달려갔다.
“꼬마들아, 바람 방향이 틀렸다. 이쪽으로 꺾어라.” 고륜이 마지막에 손을 봤다.
“무거운 건 이리 줘.” 무겸이 가장 큰 짐을 들었다. 서란은 강민의 걸음이 느려질 때마다 속도를 맞췄다.
“뒤처진 분 없으십니까?” 청우가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가장 강한 놈의 속도가 아니라, 가장 느린 놈을 버리지 않는 방식이라.” 높은 곳에서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이하겸이 중얼거렸다. “그런 무리는 가져 본 적이 없군.”
흑영에 들어온 날부터 동료는 경쟁자였고, 임무에 실패한 자는 이름이 지워졌다. 흑조갑을 받기 전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도 없었다. 자신조차 가끔 잊었다.
“사냥감의 모닥불을 오래 봤더니 마음이 물러졌나.” 그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그는 절벽 아래로 내려와 일행보다 앞질러 폐석교로 향했다. 다리는 오래되어 흔들렸고, 아래 급류는 불리해지면 사라지기 좋은 길이었다.
“증기관에 쇠줄을 걸고, 난간 아래 탈출용 갈고리를 숨긴다. 바닥 돌 하나는 느슨하게.” 그는 준비를 하나씩 끝냈다. “약은 쓰지 않는다.”
두 시간 뒤 길은 폐석교로 이어졌다. 아래에는 빗물로 불어난 계곡이 검게 흐르고 있었다. 다리 폭은 3m, 길이는 40m 남짓. 양옆 난간은 절반이 무너졌고, 중간에는 오래된 증기관이 드러나 있었다.
강민이 다리 중앙에 서 있었다. 실제로 자란 것은 몇 달뿐인데도 검령성 때보다 키가 커 보였다. 콧등의 흉터는 더 이상 상처가 아니라 얼굴을 나누는 하나의 선이었다.
“오른쪽 절벽 위에 장무겸, 교각 뒤에 고륜, 왼쪽 수풀에 유서란과 단비호.” 이하겸이 냄새로 위치를 짚었다. “중은 어디에도 없다. 그게 제일 위험하군.”
“꼬마야.” 이하겸이 다리 입구에 섰다.
강민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네 진짜 이름이 무엇이냐.”
말이 닿는 순간 청염기관의 박동이 달라졌다. 흑조갑 손등의 감응침이 세 번 떨렸다. 그러나 소년의 엄지가 손목 염주를 한 알 넘겼다. 첫 박동은 거칠었고, 두 번째는 짧았으며, 세 번째부터 일정해졌다.
“벌써 다스리는가.” 이하겸의 웃음이 옅어졌다.
“같은 말로 두 번 흔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흔드는 건 확인일 뿐이다. 부서지는지는 네 몫이지. 검령성의 밤엔 이름 한마디에 몸부터 튀어 나오더니.”
“그날 넌 일부러 날 살려 뒀지.”
“상처가 사람을 어떻게 바꾸는지 보고 싶었다.”
흑조갑이 벌어졌다. 강민의 본국검도 칼집을 벗어났다.
첫 합은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다섯 칼날이 부챗살처럼 펼쳐져 강민의 시야를 가렸다. 정면의 세 칼날은 미끼였고, 진짜 공격은 손목 아래 접힌 여섯 번째 침이었다. 검령성에서 강민의 뺨을 찢은 침이었다. 이번에는 검면이 먼저 내려왔다. 침이 쇠에 튕겼고, 강민은 반걸음 물러나며 흑조갑의 손목을 칼집으로 쳤다. 칼날을 회수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기억했구나.” 이하겸은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잊을 수가 없었다.”
둘째 합. 이하겸은 오른쪽 어깨를 열어 빈틈을 보였다. 검끝이 그쪽으로 움직이는 순간, 왼발로 돌조각을 차 눈을 노리며 흑조갑을 아래에서 올렸다. 강민은 눈을 감지 않았다. 검 손잡이로 돌을 쳐 내고 몸을 비틀었다. 갈고리 하나가 옆구리 옷을 찢었지만 살은 깊이 베지 못했다. 소년은 오히려 더 들어와 어깨로 가슴을 밀고, 무릎으로 허벅지를 찍었다.
“너무 붙었군.” 거리가 가까워 긴 칼날이 불리해졌다. 이하겸은 팔꿈치로 강민의 등을 내리쳤다. 소년이 흔들린 순간, 본국검의 칼등이 이하겸의 갈비뼈를 올려쳤다. 둔탁한 충격이 몸 안으로 파고들었고, 둘은 동시에 떨어졌다.
“검령성에서는 그런 싸움을 못 했지.”
“그때는 혼자였으니까.”
강민의 대답과 함께 절벽 위에서 장창이 떨어졌다. 장무겸이었다. 창끝은 목이 아니라 오른쪽 퇴로를 찍었다. 이하겸이 왼쪽으로 피하자 교각 아래에서 고륜의 창이 올라왔다. 두 창이 앞뒤로 길을 잘랐다.
“넷이서 한 사람을 잡겠다?” 이하겸이 비웃었다.
“넌 검령성에서 수십 명을 끌고 왔다.” 무겸이 말했다. “공평을 찾기엔 늦었다.”
“정면은 제가 맡겠습니다!”
“높은 선은 내가 지운다!”
“그럼 낮은 곳은 내 몫이지.” 고륜이 창을 낮췄다.
셋째 합부터 싸움의 모양이 바뀌었다. 이하겸은 흑조갑 하나로 세 방향을 받아 냈다. 첫 칼날로 본국검을 걸고, 둘째로 무겸의 창대를 밀며, 셋째와 넷째를 바닥에 박아 몸을 회전시켰다. 다섯째 칼날이 고륜의 소매를 찢었다. 피가 흐르는데도 노장의 창끝은 이하겸의 발목을 쫓았다.
“늙은이는 오래 버티는 법을 안다.” 고륜이 말했다.
“오래 사는 법은 몰랐나 보군.” 이하겸이 몸을 낮춰 갈고리 셋으로 고륜의 창대를 감았다. 톱니가 돌아가며 나무를 갈아 냈다.
“어르신, 그대로 잡고 계십시오!” 무겸의 창끝이 흑조갑 손등의 압력통을 찍었다.
칙.
푸른 증기가 새어 나왔다. 칼날 회전이 느려졌다. 이하겸은 손을 거칠게 빼며 뒤로 뛰었고, 강민이 따라붙었다. 본국검이 위에서 내려오고 흑조갑이 옆으로 받아 냈다. 불꽃이 두 사람 얼굴 사이에서 튀었다.
“왜 죽이지 않았지?” 이하겸이 물었다.
“누구를.”
“황도의 추격대. 너는 두 번 목을 벨 수 있었다.”
“네가 그걸 보고 있었나.”
“나는 늘 보고 있다.”
“그럼 이것도 봐.” 강민이 검을 놓았다.
“뭐—” 이하겸의 판단이 순간 늦었다. 비어 있는 강민의 오른손이 흑조갑 손목을 붙잡았고, 왼손이 팔꿈치를 밀었다. 관절이 꺾이는 방향으로 힘이 들어왔다. 소년은 검을 버리고 체술로 파고들었다.
이하겸은 이마로 강민의 얼굴을 들이받았다. 흉터가 다시 터지며 피가 났다. 그러나 강민은 놓지 않았다. 무겸의 창대가 무릎 뒤를 쳤고, 고륜의 창끝이 옆구리 갑옷 틈을 찔렀다. 처음으로 이하겸의 몸이 무릎을 꿇었다.
“물러서라!” 그가 흑조갑 안쪽의 비상 밸브를 열었다. 고압 증기가 폭발하듯 뿜어져 강민과 두 창수가 동시에 밀려났다. 그는 뜨거운 김 속에서 몸을 굴려 본국검을 걷어찼다. 검이 난간 밖으로 날아갔다.
다리 아래에서 쇠줄이 튀어 올랐다. 비호가 미리 걸어 둔 회수선이 칼집 고리에 걸렸고, 소년이 몸을 젖혀 검을 다시 끌어올렸다.
“형, 공구 잃어버리면 혼난다!” 비호의 목소리가 수풀에서 들렸다.
유서란의 세검이 이어서 날아왔다. 첫 검은 어깨 보호판을 관통했고, 두 번째는 흑조갑과 팔 사이의 관을 끊었다. 사람을 죽이는 곳이 아니라 기계가 사람을 움직이는 지점이었다. 흑조갑의 칼날 둘이 멎었다.
“의공사가 무기를 고장 내는군.” 이하겸이 이를 드러냈다.
“사람을 고치는 것보다 쉽네.” 서란이 답했다.
“발 디딜 데 하나 더 없앤다!” 비호가 폭약나사를 던져 다리 바닥의 돌을 깨뜨렸다. 강민의 검이 정면에서 압박하고, 두 창이 퇴로를 좁혔다. 서란의 세검은 멈춘 관절을 계속 노렸다. 밟을 곳이 한 걸음씩 줄었다.
“피를 주고 손을 가져가지.” 이하겸은 일부러 왼쪽 어깨를 내주었다. 강민의 검이 살을 베는 순간, 남은 칼날로 소년의 손목을 노릴 계산이었다.
강민은 베지 않았다. 검끝을 마지막에 틀어 의체의 관만 끊었다.
“이런—” 계산이 어긋났다. 무겸의 창대가 가슴을 때렸고, 고륜의 창끝이 옆구리 갑옷을 뚫고 살을 파고들었다. 뜨거운 피가 흘렀다. 이하겸은 뒤로 비틀거리며 난간에 기대었다. 아래 계곡이 검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끝내자.” 강민이 검을 겨눴다.
“끝?” 이하겸은 피 묻은 이를 드러냈다. “너는 아직 시작도 못 했다.”
그가 왼손으로 난간 아래의 증기관을 내리쳤다. 오래된 관이 터지며 다리 전체가 흔들렸다. 뜨거운 증기와 돌조각이 솟았다.
“서란, 엎드려!” 무겸이 서란 쪽을 가렸다.
“꼬마, 이리 와!” 고륜이 비호를 끌어당겼다.
이하겸은 그 틈에 난간 밖으로 몸을 던졌다. 흑조갑 끝의 갈고리가 아래쪽 쇠줄에 걸렸고, 그는 증기 속에서 반대편 절벽으로 미끄러져 갔다.
“자라라, 꼬마야!” 그의 웃음이 계곡에 울렸다. “수확은 익은 뒤가 제맛이니!”
강민이 본국검을 던지려다 멈췄다. 거리는 이미 30m가 넘었고, 아래에는 급류가 있었다. 검을 잃으면 다음 추격을 버틸 수 없었다.
이하겸은 2km 떨어진 폐수로까지 가서야 쇠줄을 놓았다. 고륜의 창끝이 간을 비껴갔지만 피가 멈추지 않았다. 흑조갑의 압력통 둘은 망가졌고, 손가락 두 개는 움직이지 않았다.
“두 번이다.” 그는 벽에 기대 숨을 고르며 웃었다. “어깨를 내줬을 때 한 번, 난간에 몰렸을 때 한 번. 날 죽일 수 있었는데 멈췄어. 약해서가 아니라 골라서.”
“나는 상대가 공포나 분노로 움직일 때 가장 잘 죽였다. 그런데 넌 이제 칼이 아니라 선택으로 싸우는구나.” 그는 침을 뱉었다. “재미없게 자라는군.”
그는 흑조갑 손등의 작은 원통을 열었다. 조하륜의 밀지였다. 독에 젖은 종이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검게 변했다.
‘대상을 죽이지 말 것. 천부항의 개문석까지 유도할 것. 이름이 발화되는 순간 심장을 적출할 것.’
그 아래에 덧붙인 문장이 있었다. ‘네가 수확자라 착각하지 마라.’
“착각이라.” 이하겸은 종이를 찢어 입안에 넣고 씹었다. 독이 혀끝을 태웠다. “물에 적시면 글자가 다시 떠오르니 삼켜야지. 흔적 남기지 않는 법까지 가르쳐 주셨지, 조하륜 어르신. 그걸 배울 때마다 내가 사람인지 도구인지 궁금했다. 답은 늘 임무 뒤로 미뤘고.”
그는 폐수로 벽의 녹슨 밸브를 돌렸다. 오염된 물로 상처를 씻자 옆구리 안쪽의 잘린 살이 벌어졌다. 흑조갑은 피부에 박은 나사 여섯 개로 팔뼈와 연결돼 있었다. 압력통이 망가지면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나사가 살을 긁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깨진 통을 떼어 내, 비상용 철사로 관을 묶고 녹인 송진으로 틈을 막았다.
“예전엔 이 시간이 싫지 않았는데.” 왼손만으로 하는 수리는 느렸다. “고통은 살아 있다는 증거였고, 망가져도 다시 사냥할 수 있다는 건 자랑이었지.”
오늘은 달랐다. 죽일 힘이 있는데도 죽이지 않은 눈이 자꾸 떠올랐다. 연민도 오만도 없이,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지 스스로 고르는 고집만 있는 눈이었다.
“선택.” 이하겸은 그 단어를 씹어 뱉었다. “내게 그런 게 있었던 때가 언제였더라.”
흑조갑을 처음 달던 날, 태사령의 공방에는 마취향이 없었다. 어린 사냥개가 고통을 이겨 내야 명령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팔뼈가 드러났고, 대장장이들은 붉게 달군 나사를 그대로 박았다.
“울면 동생에게 같은 수술을 하겠다고 했지. 그래서 안 울었다.” 그는 어둠에 대고 말했다. “끝나고 나서야 알았다. 동생은 이미 죽어 있었다는 걸.”
“그날부터 남이 내미는 선택지는 믿지 않았다. 어느 쪽을 골라도 칼 든 놈이 이기는 판이었으니까. 그래서 내가 칼 쥔 쪽이 되기로 했는데.” 그는 이를 갈았다. “넌 칼을 쥐고도 판을 바꾸려 드는구나.”
이하겸은 벽을 주먹으로 쳤다. 움직이지 않던 흑조갑 손가락 하나가 더 부러졌다. 통증이 팔 전체를 타고 올라왔다.
폐수로 입구 쪽에 놓아 둔 실 하나가 끊어졌다. 누군가 내려오고 있었다.
“사람 걸음이 아니다.” 그는 등불을 끄고, 피가 떨어진 자리에 폐기름을 부으며 귀를 기울였다. “발뒤꿈치가 먼저 닿지 않아. 목인이나 자동병도 아니고. 사람 관절을 본떴는데 체중이 지나치게 고르게 실렸어.”
그는 배수구 옆에 몸을 붙이고 남은 두 칼날을 소매 안에 숨겼다.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면 목을 자르고, 실패하면 폐수관을 터뜨려 함께 묻힐 생각이었다.
발소리가 멎었다. 어둠 속에서 먼저 냄새가 왔다. 사람의 땀이나 피가 아니라, 새 황동을 산으로 씻은 냄새였다. 조하륜의 공방에서 막 나온 물건에게서만 나는 냄새였다.
“숨을 필요 없다.” 목소리는 금속판을 긁는 듯 평평했다.
이하겸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돌멩이를 반대편으로 튕겼다. 상대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붉은 빛 세 개가 어둠 속에서 차례로 켜졌다.
“열, 움직임, 청염 잔향.” 이하겸이 감응등을 하나씩 짚었다. “사냥개 하나 감시하자고 사냥개보다 비싼 걸 보냈군.”
그와 같은 흑조갑이 하나 더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 팔의 주인에게는 얼굴이 없었다. 매끈한 황동판이 피부를 덮었고,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붉은 감응등 세 개만 켜져 있었다. 목 아래에는 잘린 사람의 손가락 마디 일곱 개가 짧은 끈에 꿰여 있었다. 손톱마다 검은 먹으로 작은 글자가 쓰여 있었다.
“실패한 사냥개들의 이름 첫 글자.” 이하겸이 그 장식을 알아보았다. “태사령의 감찰관은 임무를 망친 놈에게서 손가락을 하나씩 거두지. 세 번이면 팔, 다섯 번이면 얼굴. 너는 황동판으로 얼굴을 가린 게 아니라, 이미 빼앗긴 거로군. 너도 한때 이름이 있었나?”
붉은 감응등 가운데 하나가 깜박였다. “임무와 무관한 질문.”
“그 말이면 있었군.”
“전투 준비를 해제하라.”
“내 팔에 달린 칼을 떼면 그게 해제다.”
“필요하면 떼어 주겠다.” 감찰관의 오른팔에서 가느다란 절단선 여섯 개가 펼쳐졌다. 칼날이 아니라 수술용 톱, 실패한 부품을 회수하는 자의 무기였다.
이하겸은 강민을 좇아온 길 끝에서 마주할 자기 미래를 보았다. 이름도 얼굴도 없이 명령만 반복하는 황동판. 그 미래가 처음으로 죽음보다 싫었다.
“감찰 명령.” 기계음이 울렸다. “이하겸, 대상에 대한 사적 집착이 임무를 방해하고 있다.”
이하겸은 피 묻은 손으로 흑조갑을 다시 폈다. 두 칼날만 움직였지만 충분했다. “누가 보냈지?”
“태사령과 조하륜의 공동 명령.” 황동 얼굴이 한 걸음 다가왔다. “천부항까지 네가 길을 연다. 문이 열리는 순간, 수확은 우리가 한다.”
황동 얼굴이 허리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내 던졌다. 병 안에는 이하겸의 피가 들어 있었다.
“협로에서 흘린 피를 벌써 모아 갔군. 색과 기름 섞인 정도만 보고 내 흑조갑이 얼마나 상했는지 계산했겠지.”
“수리 부품과 약은 다음 집결지에 준비돼 있다.”
“내가 거기로 갈 거라고 생각하나?”
“당신은 갈 수밖에 없다. 태사령은 당신의 흑조갑에 회수침을 심었다.”
이하겸의 팔 안쪽이 순간 따끔했다. 오래전 수술 자국 하나가 붉게 부풀었다. 명령을 거스르면 혈관을 따라 독이 퍼지는 장치였다.
“그래서였군.” 그가 낮게 웃었다. “아무리 멀리 가도 팔이 무거워지던 게.”
감찰관이 돌아섰다. 이하겸은 칼날을 펼쳤다가 멈췄다.
“지금 저 목을 베어도 독은 남는다. 따라가면 끝에 손가락 장식 하나가 되고.” 그가 혼잣말했다. “둘 다 남이 만든 결말이지. 그럼 세 번째는…… 꼬마를 죽이는 대신, 천부항까지 가는 길에서 나를 묶은 손부터 잘라 내는 결말.”
그 생각은 아직 계획이라 부르기 어려웠지만, 흑조갑 안쪽에서 오래 잠든 감각 하나를 깨웠다. 이하겸은 웃음을 멈췄다.
감찰관의 발소리가 다시 어둠 속으로 멀어졌다. 이하겸은 쫓지 않았다. 깨진 흑조갑을 접고 유리병 속 자기 피를 주머니에 넣었다.
“남이 모아 간 내 피 정도는 내가 챙기지.” 사소한 행동이었지만, 그날 처음으로 그는 임무가 아니라 자기 뜻으로 무언가를 챙겼다.
폐수로 위에서는 동해로 향하는 화물차의 바퀴 소리가 지나갔다. 사냥감과 감찰자, 그리고 자신을 묶은 독이 모두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이하겸은 벽을 짚고 일어섰다.
“꼬마를 사냥하는 줄 알았는데.”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나 역시 누군가의 사냥개였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