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란의 선택, 비호의 발견
海東曆: 201년 10월 11일
· 시점: 유서란·단비호
강민의 열은 사흘째 새벽에도 41℃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유서란은 침 여섯 자루를 뽑아 천 위에 놓았다. 모두 손잡이까지 뜨거워져 있었다. 황금 기공을 흘려보낸 백동침은 원래 체온보다 조금 따뜻해지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끝부분이 검게 변색됐다. 그녀는 물에 적신 천으로 손가락을 감싼 뒤 새 침을 집었다.
“누나, 손.”
단비호가 옆에서 말했다.
“괜찮아.”
“형이랑 똑같은 말 하지 마.”
“너까지 잔소리할래?”
“잔소리가 아니라 화상이라고.”
비호가 서란의 손목을 잡았다. 손가락 끝마다 잔불에 데인 자국이 겹쳐 있었다. 일부는 물집이 터져 굳은살 아래로 피가 배어 나왔다. 침을 놓을 때마다 감각이 둔해졌지만, 서란은 아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소년은 입을 다물고 작은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밤새 깎아 만든 백동 씌우개 열 개가 들어 있었다. 침 손잡이에 끼우면 열이 손가락으로 바로 전해지는 것을 늦출 수 있었다.
“이거 써.”
“언제 만들었어?”
“형 자는 동안.”
“너도 잤어야지.”
“누나도 안 잤잖아.”
둘은 잠깐 서로를 노려보았다. 먼저 시선을 피한 쪽은 서란이었다. 그녀는 씌우개 하나를 침에 끼웠다. 손가락에 닿는 열이 확실히 줄었다.
“고마워.”
“다 쓰고 말하지 말고 지금 말해.”
“지금 했잖아.”
“한 번 더.”
서란이 비호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밀었다. “고맙다, 비호야.”
소년은 만족한 듯 코를 훔쳤다.
황궁 방어전 뒤 강민은 꼬박 이틀 동안 눈을 뜨지 못했다. 첫날에는 맥이 너무 빨라 서란이 수를 세다 놓칠 정도였고, 둘째 날 밤에는 반대로 박동이 1분에 서른 번까지 떨어졌다. 청염기관이 과열과 정지를 번갈아 오갔다. 냉각통 두 개를 비우고도 열이 남자 비호는 황궁의 빙고에서 얼음을 실어 왔고, 서란은 황금 기공을 손끝이 저릴 때까지 흘려 넣었다.
강민은 셋째 날 새벽 잠깐 눈을 떴다.
“누나.”
“응.”
“이겼어?”
“살아 있으면 이긴 거야.”
“전하는?”
“살아 있어.”
“비호는?”
“옆에 있어.”
소년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서란이 가슴을 눌렀다.
“움직이지 마.”
“물 좀.”
비호가 잔을 들고 왔다. 강민은 두 모금 마신 뒤 다시 눈을 감았다. 잠들기 전 입술이 움직였다.
“동쪽으로 가야 해.”
“깨어나고 말해.” 서란이 대답했다.
그러나 강민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사흘이 지나면서 황궁의 상처도 모양을 드러냈다. 무너진 회랑은 임시 기둥으로 받쳤고, 불탄 처마에는 젖은 천이 걸렸다. 돌아선 근위병 중 일부는 무기를 버리고 투항했지만, 많은 수가 백유강이 장악한 외성으로 빠져나갔다. 백도윤은 부상한 어깨를 붕대로 감은 채 밤낮없이 사람을 만났다.
서란은 황자의 상처도 치료했다.
“전하, 이대로 움직이면 팔이 굳어요.”
“궁이 굳는 것보다 낫소.”
“팔이 굳으면 검도 못 듭니다.”
“당신들은 곧 떠날 것이잖소. 남은 내가 들어야 하지 않겠소.”
서란은 말없이 화살 자국 주변을 눌렀다. 백도윤이 이를 악물었다.
“강민은 어떻소?”
“살아날 거예요.”
“살아나는 것과 괜찮아지는 것은 다르지 않소?”
서란의 손이 멈췄다.
황자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더 묻지 않았다. 대신 품에서 얇은 서류철을 꺼냈다.
“방어전 때 나온 금속판을 조사했소. 동쪽 좌표는 황궁 서고의 빙륜 도면과 일부 겹치오.”
서란의 눈이 좁아졌다. “빙륜?”
“당신이 찾던 냉각 코테르 말이오.”
“도면은 비호한테 있습니다.”
“그 도면의 관리 서명을 보았소?”
서란은 대답하지 못했다.
“조하륜이오.”
황자의 말이 방 안에 무겁게 떨어졌다.
그날 오후, 서란은 비호를 황궁 서쪽의 빈 정비실로 불렀다. 문을 잠그자 소년이 품에서 접힌 도면을 꺼냈다. 황실 서고에서 빼낸 냉각 격실 도면이었다. 여러 번 펼쳐 본 자국이 가득했고, 가장자리에는 비호가 적은 수치와 화살표가 빽빽했다.
“여기.” 비호가 한 지점을 짚었다. “청염기관 열이 2경계에서 지금의 세 배까지 올라간다고 보면, 황금 기공이 빼낼 수 있는 건 절반도 안 돼. 냉각통을 크게 만들어도 이동 중에는 물과 압력이 부족해.”
“그래서 빙륜이 필요해.”
“응. 사람 몸의 열을 빼앗는 게 아니라 청염의 진동 자체를 느리게 하는 코테르.”
비호는 도면 위에 황궁에서 나온 금속판을 올렸다. 구멍과 선이 일부 겹쳤다.
“근데 이상해. 빙륜 격실은 북쪽 설원 계통 기술이야. 왜 동쪽 천부항 좌표랑 맞물리지?”
“이백 년 전 봉인할 때 옮겼을 수도 있어.”
“아니면 천부항이 물건을 숨긴 곳이 아니라, 여러 곳의 봉인을 여는 중심일 수도 있고.”
서란은 도면 아래쪽의 서명을 보았다.
趙河崙.
조하륜.
먹이 마른 뒤에도 차가운 독 냄새가 나는 듯했다.
“이 사람이 강민 몸의 구조를 알고 있어.” 서란이 말했다.
“그렇겠지. 검령성 습격 전부터.”
“그럼 우리가 빙륜을 찾으러 가는 것도 예상할 거야.”
비호가 먹붓을 들었다. 그는 조하륜의 이름 위에 굵게 선을 그어 지웠다. 종이가 찢어질 만큼 여러 번 칠했다. 그리고 옆에 제 이름을 적었다.
段飛虎.
“이제부터 이 격실 정비사는 나야.”
서란은 그 글씨를 보며 웃지 못했다. 열세 살 아이의 손이었지만 획에는 이상할 만큼 단단한 고집이 들어 있었다.
“비호야.”
“왜.”
“강민한테 말해야 해.”
“형이 깨어나면.”
“빙륜 좌표까지.”
소년은 고개를 들었다. “말하면 당장 가겠다고 할걸.”
“그래도 숨기면 안 돼.”
“누나는 형한테 손 화상 난 거 말할 거야?”
서란이 입을 다물었다.
비호가 도면을 접었다. “우리 둘 다 똑같아. 형한테 짐 얹기 싫어서 중요한 걸 숨기고 있어.”
“내 손은 중요한 게 아니야.”
“형 심장 고치는 손인데 왜 안 중요해?”
소년의 말은 단순해서 피할 곳이 없었다.
서란은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검령성에서 강민의 청염이 처음 폭주했을 때, 자신은 맨손으로 그의 가슴을 눌렀다. 그 뒤로 늘 자기가 식혀 줄 수 있다고 믿었다. 누나이자 의공사로서, 자신만큼은 그를 놓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2경계의 열은 그 믿음을 부쉈다.
“나만으로는 안 돼.”
말이 입 밖에 나오자 가슴이 서늘해졌다.
비호는 놀리지 않았다.
“그래서 둘이 하는 거잖아.”
“둘로도 모자랄 수 있어.”
“그럼 셋, 넷 찾으면 돼.”
“사람 목숨이 그렇게 간단해?”
“복잡하니까 부품을 늘리는 거야.”
서란이 소년을 보았다.
비호는 언제나 기계를 사람보다 단순하게 여겼다. 망가지면 원인을 찾고, 부족하면 덧대며, 열이 오르면 식히면 된다고 믿었다. 그 믿음이 때로는 무모했지만, 지금은 서란에게 필요했다.
“좋아. 강민이 완전히 깨어나면 같이 말하자.”
“손도.”
“그건—”
“같이.”
“알았어.”
두 사람은 새끼손가락을 걸지 않았다. 그런 약속보다 도면 위에 나란히 적힌 이름이 더 확실했다.
강민이 다시 잠든 뒤, 서란은 그의 침상 곁에서 맥박표를 작성했다. 한 시간마다 박동과 체온, 청염 반응을 기록했다. 숫자는 일정하지 않았다. 열이 내려가면 심장이 느려졌고, 심장이 안정되면 청염기관이 갑자기 진동했다. 사람의 몸과 기계의 반응이 서로를 밀고 당겼다.
비호는 표 옆에 자기 방식의 표시를 덧붙였다. 맥박이 빨라질 때 냉각통 압력이 얼마나 떨어지는지, 어느 밸브를 열면 관이 얼어붙는지 작은 기호로 적었다. 서란에게는 난잡한 낙서처럼 보였지만 소년은 모든 표시를 기억했다.
“이건 뭐야?”
“형이 헛소리한 시간.”
“무슨 말 했는데?”
“스승님 찾았어. 그리고 누나한테 가지 말라고 했고.”
서란의 손이 멈췄다.
“나한테?”
“응. 정확히는 ‘누나, 불 가까이 오지 마’라고.”
열 속에서도 강민은 검령성의 폭주를 다시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자기가 타는 것보다 곁의 사람이 다치는 것을 먼저 두려워했다. 그 마음이 서란을 아프게 했다.
“그 말도 표에 적어.”
“왜?”
“몸이 아니라 마음이 언제 흔들리는지도 알아야 하니까.”
비호는 잠깐 망설이다 여백에 문장을 적었다. 글씨가 평소보다 작았다.
서란은 다른 부상자들도 돌봐야 했다. 내궁 의공소에는 침상이 부족해 바닥까지 사람이 누워 있었다. 황자 편 근위병과 반백파에서 돌아선 병사가 나란히 치료받았다. 처음에는 서로 욕을 했고, 한쪽이 물을 마시면 다른 쪽이 그릇을 걷어찼다. 서란은 두 사람의 다친 다리를 같은 붕대로 묶어 버렸다.
“움직이면 둘 다 아파.”
“왜 저놈과—”
“싫으면 싸우지 말고 빨리 나아.”
둘은 욕을 삼켰다. 다음 날 아침에는 한 병사가 다른 병사에게 물그릇을 건넸다. 화해가 아니라 목이 말라 보였기 때문이었다. 서란은 모른 척했다.
부상자 중에는 백유강의 자동병에 몸 일부를 다친 사람도 있었다. 한 시녀는 오른손 감각을 잃었고, 늙은 문지기는 왼쪽 귀를 듣지 못했다. 서란은 치료할 수 없는 것을 솔직히 말했다. “예전처럼 돌아오지 않을 수 있어요.”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절망했지만, 거짓 희망보다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함께 찾는 편이 낫다고 믿었다.
비호는 그들을 보며 정비실에서 폐부품을 가져왔다. 시녀의 손목을 고정하는 가벼운 지지대, 문지기가 진동으로 소리를 느낄 수 있는 작은 황동판을 만들었다. 완벽하지 않았지만 당장 컵을 들고 문 두드림을 느끼게 해 주었다.
“너는 언제 이런 걸 배웠어?” 문지기가 물었다.
“망가진 걸 많이 봐서요.”
“사람도 부품처럼 보이느냐?”
비호는 고개를 저었다. “부품은 바꾸면 되는데 사람은 바꾸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더 어렵죠.”
그 말을 들은 서란은 소년을 새롭게 보았다. 비호가 기계를 좋아하는 것은 사람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기계는 고칠 방법을 보여 주기 때문에 좋아했다. 사람에게도 그 가능성을 주고 싶어 했다.
밤이 되면 두 사람은 강민에게 돌아왔다. 서란이 맥을 보고, 비호가 냉각통을 확인했다. 둘 다 피곤해 말을 줄였지만 손의 순서는 점점 맞아 갔다. 서란이 침을 놓기 전에 비호가 압력을 낮추고, 비호가 관을 바꾸기 전에 서란이 기맥을 막았다. 처음에는 서로 지시했지만 사흘째부터는 눈빛만으로 알았다.
한 번은 냉각통의 관이 얼어 막혔다. 압력이 급격히 올라가며 뚜껑이 흔들렸다. 비호가 맨손으로 밸브를 잡으려 하자 서란이 팔을 쳐 냈다.
“데어.”
“그럼 터져.”
서란은 침 두 자루로 강민의 열 흐름을 잠깐 다른 쪽으로 돌렸다. 그 사이 비호가 두꺼운 천을 감아 밸브를 열었다. 뜨거운 증기가 천장을 쳤다. 둘은 서로 얼굴을 보고 한동안 숨만 몰아쉬었다.
“누나가 없었으면 손 날아갈 뻔했네.”
“네가 없었으면 통이 터졌어.”
“그럼 비긴 거야?”
“사람 살리는 데 승부가 어딨어.”
“그래도 내가 조금 더 잘했지?”
서란은 대답 대신 소년의 머리를 눌렀다.
넷째 날 새벽, 강민의 체온이 처음으로 38℃ 아래로 내려갔다. 서란은 안도하는 대신 더 긴장했다. 과열 뒤 급격한 저하는 청염기관이 멎기 전 징후일 수도 있었다. 그녀는 가슴에 귀를 대고 박동을 들었다. 기계음과 심장 소리가 서로 다른 간격으로 뛰었다.
“비호야, 공명판.”
소년이 작은 황동판을 가져왔다. 가슴 가까이 대자 두 종류의 진동이 모래 위에 선을 그렸다. 심장 선과 기관 선이 계속 엇갈렸다.
“맞춰야 해.” 서란이 말했다.
“어떻게?”
“내 기공으로 심장을 늦추고, 네가 기관 압력을 올려.”
“반대 아냐? 열이 높은데 압력을 올려?”
“지금은 열보다 박동이 끊기는 게 더 위험해.”
비호는 질문을 더 하지 않았다. 서란이 황금 기공을 흘리자 강민의 심장 박동이 조금 느려졌다. 동시에 비호가 밸브를 5도씩 열어 청염기관의 진동을 높였다. 두 선이 가까워졌다가 다시 벌어졌다.
“조금 더.”
“누나 손 떨려.”
“알아. 계속해.”
세 번째 조정에서 두 선이 겹쳤다. 강민의 숨이 깊어졌다. 서란은 그제야 힘을 풀었다. 손끝 감각이 사라져 침 하나를 떨어뜨렸다.
비호가 주워 들었다. “이래서 빙륜이 필요한 거지?”
“그래.”
“누나 기공으로 매번 맞추면 누나도 망가져.”
말이 잔인할 만큼 정확했다. 서란은 부정하지 않았다.
“빙륜이 있으면 청염 진동을 일정하게 늦출 수 있어. 내가 사람 쪽만 보면 돼.”
“그럼 찾자.”
“강민이 싫다고 하면?”
“형이 싫다고 할 이유가 뭐야?”
“자기 때문에 우리가 위험해지는 걸 싫어하잖아.”
비호는 잠든 강민을 보았다. “그건 형이 정할 일이 아니지. 위험해질지 말지는 우리도 정해.”
서란은 그 문장을 마음에 새겼다.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상대의 선택을 빼앗는 것도 백유강의 방식과 닮을 수 있었다. 자신이 강민에게 중요한 사실을 숨기는 이유가 사랑이라 해도, 결과가 통제라면 다르지 않았다.
“그래. 같이 말하자.”
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낮, 두 사람은 황궁 지하 빙고와 폐정비실을 뒤졌다. 냉각통에 쓸 백동관, 얼음 압력을 견딜 고무 가죽, 오래된 온도계를 모았다. 물건을 가져갈 때마다 장부에 적었다. 비호는 훔치는 게 아니라 빌리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서란은 돌아왔을 때 갚을 수 있도록 목록을 남겼다.
정비실 한쪽에는 방어전에서 회수한 목인 동력부가 쌓여 있었다. 비호는 그중 하나를 열어 작은 냉각 날개를 발견했다. 적의 부품이지만 사람을 살리는 데 쓸 수 있었다. 그는 망설였다.
“이걸 쓰면 태사령 기술을 쓰는 거야.”
서란이 답했다. “기술이 죄를 짓는 건 아니야. 어떻게 쓰는지가 중요하지.”
“청우 대사님 같은 말 한다.”
“존댓말은 안 하잖아.”
둘은 냉각 날개를 분해해 새 통에 달았다. 날개가 돌면 물이 얇은 관을 빠르게 지나 열을 더 많이 빼낼 수 있었다. 첫 시험에서 관이 터져 둘 다 흠뻑 젖었고, 두 번째에도 관이 터져 다시 흠뻑 젖었다. 세 번째에야 일정하게 돌아갔다.
비호는 기뻐서 소리쳤다가 잠든 부상자들에게 욕을 들었다. 서란은 웃음을 참으며 소년의 입을 막았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강민을 살리는 일이 한 번의 영웅적인 희생이 아니라 수십 번의 실패와 작은 수정이라는 것을 배웠다. 침 하나의 재질, 관의 굵기, 물의 온도, 잠든 사람의 표정까지 모두 중요했다.
그 뒤 사흘 동안 황궁은 조금씩 숨을 되찾았다. 무겸의 손바닥 상처에는 새살이 올라왔고, 고륜은 부러진 창대를 갈아 끼웠다. 두 사람은 저녁마다 마당에서 창을 맞댔다. 처음에는 서로의 초식을 점검하기 위해서였으나, 어느 날부터는 끝나고 말없이 술잔도 나눴다.
민초아는 서란 곁에서 붕대 감는 법을 배웠다. 처음에는 너무 세게 조여 환자가 손가락을 움직이지 못했고, 다음에는 헐겁게 묶어 금세 풀렸다. 일곱 번째에야 알맞은 힘을 찾았다.
“사람마다 다 달라요.” 초아가 투덜거렸다.
“그래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느껴야 해.”
“기계는 나사 크기만 맞으면 되는데.”
비호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기계도 다 달라. 누가 얼마나 함부로 썼는지에 따라.”
“넌 왜 맨날 아는 척해?”
“아는 게 많으니까.”
초아가 붕대 뭉치를 던졌고 비호가 피했다. 서란은 두 아이를 나무라면서도 웃었다.
첫 서리가 내린 것은 엿새째 아침이었다. 마당의 돌바닥이 희게 얼었고, 부서진 회랑 지붕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작은 고드름이 생겼다. 서란은 우물에서 찬물을 길어 오다 비호와 마주쳤다. 소년은 냉각통의 새 관을 씻고 있었다.
“동해로 가기 전에 해 둘 일이—”
둘이 동시에 말하고 멈췄다.
비호가 먼저 웃었다. “누나부터.”
“네가 해.”
“난 양보했어.”
“그럼 내가 한다. 냉각통을 하나 더 만들어야 해.”
“나도 그 말 하려 했는데.”
“거짓말.”
“진짜야. 황궁 주방의 압력솥을 훔치면—”
“훔치지 마.”
“빌리면.”
“돌려줄 수 있게 뜯어.”
둘은 우물가에 쪼그려 앉아 새 냉각통 구조를 그렸다. 서란은 사람의 기맥 위치를, 비호는 관과 밸브 위치를 표시했다. 서로 쓰는 말이 달라 처음에는 선이 자꾸 엇갈렸다. 그러나 한 시간쯤 지나자 사람과 기계를 잇는 모양이 나타났다.
정오 무렵 강민이 마침내 혼자 걸어 나왔다. 얼굴은 창백했고 걸음도 느렸지만 눈은 맑았다. 그는 마당에서 두 사람이 그린 도면을 내려다보았다.
“뭐 만들어?”
서란과 비호가 동시에 종이를 가렸다.
강민의 눈썹이 올라갔다.
“왜 숨겨?”
“안 숨겼어.” 서란이 말했다.
“누나 손부터 보여 줘.”
서란이 반사적으로 손을 뒤로 감췄다. 비호가 한숨을 쉬었다.
“말하기로 했잖아.”
“비호야.”
강민이 두 사람 사이를 보았다. “무슨 일이야?”
서란은 결국 손을 내밀었다. 백동 씌우개 아래로 화상 자국이 보였다. 강민의 얼굴이 굳었다.
“나 때문에?”
“너 때문만은 아니야. 내가 무리한 거야.”
“둘 다 같은 말이잖아.”
“그러니까 이제 다른 방법을 찾는 중이야.”
비호가 도면을 펼쳤다. 빙륜 냉각 코테르와 동쪽 좌표, 조하륜의 지워진 서명까지 모두 보여 주었다. 강민은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왜 바로 말 안 했어?”
“깨어나지도 않았잖아.” 비호가 답했다.
“깨어난 뒤에도 하루 지났어.”
“형이 당장 뛰쳐나갈까 봐.”
강민은 반박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실제로 그랬을 것이다.
서란이 그의 앞에 섰다. “강민아, 네 힘이 커지는 속도를 우리가 못 따라가고 있어. 2경계를 한 번 더 그렇게 쓰면 내가 못 잡을 수도 있어.”
“그럼 안 쓰면 돼.”
“필요할 때 안 쓸 수 있어?”
강민은 대답하지 못했다.
황궁 회랑에서 목인 셋이 백도윤과 동료들을 향해 달려오던 순간을 떠올렸다. 같은 상황이 다시 오면 또 쓸 것이다.
“그래서 빙륜을 찾아야 해.” 서란이 말했다. “네 힘을 막으려는 게 아니라, 네가 쓰고도 돌아오게 하려고.”
강민은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굳은살과 화상 자국이 손바닥에 닿았다.
“미안해.”
“미안하다고 끝내면 다음에도 똑같이 할 거잖아.”
“그럼 어떻게 해야 해?”
“우리한테 말해. 몸이 얼마나 뜨거운지, 어디가 아픈지. 혼자 참지 말고.”
비호도 끼어들었다. “그리고 내가 만든 거 함부로 부수지 마.”
“그건 네가 너무 약하게—”
“봤지? 또 남 탓.”
세 사람 사이에 오래간만의 웃음이 흘렀다.
점심이 지나자 강민은 처음으로 침상 밖에 앉았다. 일어나려다 벽을 짚었고, 서란의 눈이 매섭게 가늘어졌다.
“누가 걸으래?”
“다리가 있는지 확인하려고.”
“붙어 있으니까 누워.”
“누나는 환자한테 말이 너무 거칠어.”
“말을 부드럽게 하면 네가 얌전히 누워 있어?”
강민은 순순히 다시 앉았다. 비호가 웃다가 서란에게 쳐다보이자 입을 다물었다.
오후에는 세 사람이 황궁 지하의 낡은 냉각실로 내려갔다. 목인의 가슴에서 나온 금속판과 종의 진동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백도윤은 근위병을 붙여 주려 했지만, 서란은 사람이 많으면 추적자에게 흔적만 남긴다며 거절했다. 지하 계단은 전투 때 무너진 돌가루로 미끄러웠고, 벽의 관들은 수십 년 동안 쓰이지 않아 녹이 두껍게 앉아 있었다.
비호는 걸음을 멈출 때마다 관에 귀를 댔다. 대부분은 죽은 금속처럼 조용했다. 그런데 지하 세 번째 층에 이르자 일정한 간격의 떨림이 손바닥에 잡혔다.
“여기에도 동쪽에서 오는 압력이 있어.”
“산맥이 한참 멀리 있는데?” 강민이 물었다.
“물길로 이어졌으면 가능해. 오래된 냉각수로가 땅속을 따라 남아 있을지도 몰라.”
서란은 벽에 남은 표식을 닦았다. 얼음꽃과 바퀴를 겹친 문양이었다. 의공원 기록에서 본 적이 있었다. 고열 코테르를 안정시키는 ‘빙륜’ 계통의 표식이었다.
“이건 냉각 장치만 뜻하는 게 아니야. 열을 없애는 게 아니라 다른 곳으로 옮기는 방식이야.”
강민이 가슴을 눌렀다. “내 열도 옮길 수 있어?”
“이론상은. 하지만 네 몸에서 꺼낸 열을 어디로 보내는지 알아야 해. 잘못하면 다른 사람이 대신 타.”
그 말에 비호가 표정을 굳혔다. 소년은 자신이 만들 냉각통이 형의 열을 단순히 물과 금속에 흩어 놓는 줄 알았다. 그러나 더 큰 장치에서는 열도 빚처럼 누군가에게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럼 사람 없는 데로 보내면 되잖아.”
“그래서 좌표가 필요해.” 서란이 대답했다. “천부항이 숨겨 둔 건 배만이 아닐 수 있어.”
냉각실 가장 안쪽에는 오래된 의공대가 남아 있었다. 서랍을 열자 검게 삭은 침과 깨진 유리관, 얼어붙은 약병이 나왔다. 강민은 벽에 긁힌 손톱 자국을 보았다. 누군가 안에서 문을 열어 달라고 두드린 듯 세 줄씩 반복돼 있었다.
서란은 그 흔적 앞에 오래 서 있었다. “사람을 살리려고 만든 곳이 사람을 가둔 적도 있었어.”
“백씨가 한 일이야?”
“아직 몰라.”
“모른다고 말해 줘서 고마워.”
서란이 그를 보았다.
“다들 내 피를 보면 답을 아는 것처럼 말하거든.”
“나는 네 피보다 네 맥을 더 오래 봤어. 네가 어떤 사람인지는 피가 아니라 네가 아픈 걸 숨기는 방식이 더 잘 말해 줘.”
“그건 좋은 뜻이야?”
“아니. 아주 나쁜 습관이라는 뜻이야.”
비호가 웃었다. 어둡던 냉각실에 사람 목소리가 울렸다.
그들은 벽의 표식과 관 배치를 베껴 그렸다. 비호는 관 하나에서 손톱만 한 얼음 조각을 떼어 병에 넣었다. 지하실 온도는 13℃였는데도 얼음은 녹지 않았다. 서란이 손가락을 가까이 대자 조각 안에서 푸른 실선이 움직였다. 강민의 청염기관이 반응하듯 빛이 따라왔다.
“이게 우리를 부르는 건지, 유인하는 건지 아직 몰라.” 무겸이 계단 위에서 말했다. 그는 세 사람을 데리러 내려온 참이었다.
강민이 얼음병을 들었다. “둘 다일 수도 있죠.”
“그럼 가겠느냐?”
“가야죠. 다만 이번에는 문이 원하는 대로만 들어가지는 않을 거예요.”
서란은 그 대답을 듣고도 안심하지 않았다. 선택이 단단해질수록 그 선택을 막기 어려워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강민을 설득하는 대신, 끝까지 돌아오게 할 방법을 찾기로 했다.
그날 밤, 비호는 새 냉각통을 강민 침상 아래 시험 설치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아 압력은 낮게 걸었다. 서란은 강민의 맥을 확인한 뒤 침 세 자루를 뽑았다.
“오늘은 열 괜찮아.”
강민이 그녀의 손을 보며 물었다. “누나, 왜 네 손에서 겨울 냄새가 나?”
서란은 잠깐 멈췄다.
“약 냄새겠지.”
거짓말은 서툴렀다.
강민은 더 묻지 않고 눈을 감았다. 숨이 고르게 바뀔 때까지 서란은 곁에 앉아 있었다. 비호는 바닥에서 도면을 정리했다.
자정이 가까워졌을 무렵, 침상 아래 냉각관이 갑자기 떨렸다.
비호가 고개를 숙였다. 관 표면에 하얀 성에가 번지고 있었다. 방 안은 따뜻했고 압력도 낮았는데, 얼음은 한 방향으로 길게 자라났다.
비호는 반사적으로 냉각통의 밸브를 잠갔다. 그러나 성에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관 안쪽의 흐름과 반대로 번졌다. 소년은 귀를 대고 진동을 셌다. 세 번의 두드림 뒤에는 긴 침묵, 다시 두 번의 약한 마찰음이 이어졌다.
“누가 보내는 신호 같아.”
서란은 강민을 깨우지 않은 채 손목의 맥을 잡았다. 심장 박동은 평온했지만 청염기관만 다른 박자로 떨렸다. 마치 몸이 잠든 동안 가슴속 기관이 먼 곳과 대화하는 듯했다.
“답하지 마.” 그녀가 말했다.
“어떻게?”
“관을 두드리지도 말고, 압력을 바꾸지도 마. 상대가 무엇인지 알기 전에는 우리가 들었다는 사실도 알려 주지 마.”
비호는 공구를 내려놓았다. 호기심 때문에 손끝이 근질거렸지만 이번에는 참았다. 그는 관 옆 바닥에 종이를 놓고 소리의 간격만 기록했다. 강민이 혼자 아픔을 숨기지 않기로 했듯, 자신도 혼자 장치와 대화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성에는 글자 모양을 만들었다.
天府港.
천부항.
서란과 비호가 동시에 강민을 돌아보았다.
성에의 마지막 획이 완성되자 얼음병 안에 보관해 둔 조각도 동시에 갈라졌다. 두 조각의 금은 같은 방향을 가리켰다. 비호는 종이에 그 각도를 옮겼다. 황궁 지하 냉각실에서 베낀 관 배치와 겹치자 산맥 안쪽으로 이어지는 한 줄이 나타났다.
“이건 글자가 아니라 길이야.”
서란은 지도 위의 선을 보며 입술을 다물었다. 강민의 몸속 기관이 위치를 가리키는 나침반이 된다면,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반응은 더 세질 것이다. 그가 문을 찾는 동안 문도 그의 심장을 더 세게 잡아당길 수 있었다.
“비호야, 새 냉각통을 하나 더 만들어.”
“하나는 등, 하나는 가슴?”
“아니. 하나는 예비야. 이번에는 고장 난 뒤에 생각하지 않을 거야.”
서란은 남은 백동침의 수를 세고, 비호는 쓸 수 있는 압력통을 분류했다. 둘 다 부족했다. 그래서 필요한 물건보다 버릴 수 없는 물건부터 적었다. 침 세 묶음, 예비 관 두 줄, 해독약, 소금, 깨끗한 물. 마지막 칸에는 비호가 장난처럼 ‘형의 고집을 묶을 밧줄’이라고 썼다. 서란은 지우지 않았다.
소년은 즉시 도면을 펼쳤다. 둘은 잠든 사람 곁에서 소리를 죽여 공구와 침을 나눴다. 선택은 이미 시작됐고, 그 선택을 살아서 끝내게 하는 것이 두 사람의 몫이었다.
잠든 그의 가슴에서 푸른 빛이 한 번 번쩍였다. 비호는 소리의 간격을 마지막 줄에 적었다. 서란은 잠든 강민의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렸다. 둘은 서로를 보며 같은 결론을 내렸다. 다음날 아침에는 숨김없이 모두에게 말한다. 문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는 사실까지 포함해서.
그리고 냉각관 안쪽에서, 얼음이 아니라 누군가 손톱으로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세 번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