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승의 명상
海東曆: 201년 10월 17일
· 시점: 청우
폐사의 기계목어가 새벽 네 시를 알렸다.
텅 빈 법당 처마 아래 매달린 목어는 나무가 아니었다. 검게 산화된 황동 몸통 안에 작은 태엽과 추를 넣어 만든 물건으로, 한 번 감아 두면 여섯 시간 동안 일정한 간격으로 울렸다. 그러나 그날 새벽에는 누구도 태엽을 감지 않았는데 소리가 났다.
둥.
청우는 눈을 뜨지 않았다. 첫 서리가 내린 뒤 폐사는 더 고요해졌다. 황궁의 소란에서 30km 떨어진 산중, 일행은 강민의 회복과 추격 회피를 위해 이곳에 머물렀다.
“담장 밖 이상 없다.” 무너진 담장 너머에서 무겸이 고륜에게 낮게 말했다.
“동쪽 길도 조용하다. 교대하마.”
“비호야, 압력 너무 올렸어. 반만.” 부엌에서는 서란이 새 냉각통을 시험하고 있었다.
“반이면 형 등이 또 익는다니까!”
“익기 전에 내가 침을 놓을 거야. 통이 터지면 침 놓을 등도 없어. 반만.”
“……알았어, 반.” 비호가 투덜거리며 밸브를 돌렸다.
민초아는 낡은 경전 종이를 잘라 붕대 목록을 적었다. 마당에서는 강민이 검을 휘둘렀다. 청우는 눈을 감고도 소리로 알았다. 검이 나갈 때보다 돌아올 때의 마찰이 더 짧았다. 한 달 전에는 베는 힘에만 마음이 실렸지만, 지금은 거두는 동작에도 의지가 있었다.
둥. 목어가 다시 울렸고, 청우의 의식은 여러 해 전으로 내려갔다.
“자네 손은 사람보다 기계의 심장을 더 잘 듣는군.” 기계중원 병기창의 감독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젊은 청우는 승려가 아니라 코테르(機核)를 다듬는 장인이었다. 원석을 망치로 두드리면 내부 균열의 방향을 알아맞혔다.
“과찬이십니다.” 그때는 칭찬인 줄 알았다.
“이번엔 열여덟 개다. 목인 부대에 들어갈 물건이야. 진동수를 모두 같게 맞춰야 한다.”
“어디에 쓰는 겁니까?”
“국경 방어용이다. 일정이 빠듯하니 밤을 새워 주게.”
그는 의심하지 않았다. 밤을 새웠고, 마지막 기핵을 닦아 상자에 넣었다. 보름 뒤, 남쪽의 작은 마을 하나가 지도에서 사라졌다.
“공식 기록엔 반란 진압이라 적혔네.” 동료 장인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런데 돌아온 목인들 발목 봤나? 검은 진흙이랑 볏짚이 끼어 있어. 요새가 아니라 논이랑 초가를 밟고 왔다는 거지.”
“이건……” 청우는 한 목인의 손가락 관절에 감긴 작은 붉은 천 조각을 풀었다. 아이의 옷에서 뜯긴 것이었다. 그날 밤 그는 처음으로 자기가 만든 기핵의 울림을 두려워했다.
“감독님, 그 마을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마을 하나를 지워 국경 다섯 곳의 반란을 막았다. 수지가 맞는 계산이지.” 감독은 장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효율이네, 청우.”
백유강이 다정에서 했다는 말과 같은 뿌리였다. 청우는 끌을 내려놓았다.
도망치는 데 삼 년이 걸렸다. 병기창은 장인을 재산으로 여겼다.
“손가락을 부러뜨려 다시는 기핵을 못 다듬게 하라는 명이다!” 추격대가 외쳤다. 그는 싸웠고, 그 과정에서 사람을 죽였다. 병기창을 떠났는데도 손은 계속 부수는 법만 기억했다.
한 폐사에서 늙은 승려를 만났다. 승려는 그의 칼을 빼앗지 않았다.
“칼은 그냥 차고 계시오. 대신 매일 새벽 이 목어를 고치시오.”
“금이 간 곳에 쇠못을 박으면 금방입니다.”
“못 대신 얇은 대나무를 대시오. 갈라진 곳이 더 벌어지지 않게만.”
청우는 여섯 달 동안 목어 하나를 고쳤다.
“왜 새것을 만들지 않습니까?” 그가 물었다.
노승은 웃었다. “새것을 만드는 건 네가 잘하지 않느냐. 나는 망가진 것이 소리를 되찾는 걸 보고 싶다.”
그 말이 청우의 삶을 바꾸었다. 노승은 그 뒤로도 매일 한 가지씩 망가진 물건을 내밀었다. 금이 간 밥그릇, 손잡이가 빠진 물동이, 바람에 찢어진 창호, 이가 나간 낫.
“새로 만드는 편이 빠릅니다.” 처음에 청우는 불평했다. 노승은 대답하지 않고 다음 날 더 오래된 물건을 가져왔다.
“떨어뜨려서 생긴 금과 불에 달아 생긴 금은 메우는 법이 다르군요.” 한 달이 지나자 청우가 먼저 말했다. “물동이 손잡이는 단단한 것보다 쓰는 사람 손 크기에 맞아야 하고, 낫은 날을 새로 세우기보다 남은 쇠의 방향을 읽어야 합니다. 사람도 이렇습니까?”
노승은 밥을 먹다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사람은 더 어렵다. 물건은 고쳐 달라고 말하지 않지만, 사람은 고쳐 달라고 말하면서도 손을 물 수 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먼저 왜 무는지 본다.”
“답답한 방법입니다. 병기창에선 원인을 찾으면 부품을 갈고, 버티면 힘으로 눌렀습니다.”
“그래서 그 마을이 사라졌겠지.”
어느 겨울밤, 추격대가 폐사까지 찾아왔다.
“돌아오면 죄를 묻지 않겠다.” 병기창 감독이 말했다. “대신 저 늙은 중과 마을 사람들을 넘겨라.”
청우는 칼을 들었다. 처음으로 병기창에서 배운 살법을 옛 동료에게 쓰려는 순간, 노승이 앞을 막았다.
“비켜 주십시오.” 청우가 말했다.
“죽이면 네가 다시 병기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죽이지 않으면 이분들이 죽습니다.”
“그러니 다른 길을 찾아라.”
추격대는 기다려 주지 않았다. 첫 칼이 노승의 어깨를 베었다. 청우의 분노가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목을 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칼등을 돌려 손목을 꺾었다. 둘째는 무릎을, 셋째는 쇄골 아래를 쳤다. 여섯 명을 쓰러뜨리는 동안 한 명도 죽이지 않았다.
“죽이지 않으려니 상대 몸을 더 정확히 알아야 했습니다. 제 분노도 더 오래 붙잡고 있어야 했고요.” 싸움이 끝난 뒤 청우가 숨을 몰아쉬었다. “더 어려운 길이었습니다.”
“약한 자의 길이 아니라 더 많이 책임지는 길이지.” 노승이 어깨 상처를 꿰매며 말했다. “이제 네 손이 처음으로 네 것이 되었구나.”
“칼을 버려야 합니까?”
“버리지 마라. 무디게 만들어 두어라. 꺼낼 수는 있되 쉽게 피를 보지 않도록.”
청우는 칼날을 무디게 만들어 철장 안에 숨겼다. 그 뒤 긴 세월 동안 그는 부수는 손을 비살(非殺)의 손으로 바꾸는 데 썼다. 칼목을 꺾되 뼈를 부러뜨리지 않고, 기맥을 눌러 정신을 잃게 하되 숨을 끊지 않았다.
“그것도 완전한 자비는 아니지 않습니까.” 언젠가 한 젊은 승려가 그에게 물었다. “살리려고 더 아프게 누르실 때도 있잖습니까.”
“맞습니다.” 청우는 그때 그렇게 답했다. “다만 적어도 상대가 다시 고를 시간은 남겨 둡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그 정도입니다.”
몇 년 뒤 노승이 세상을 떠나자, 썩은 목어의 나무 몸통에 황동판을 대고 태엽을 넣어 다시 만들었다. 울림은 예전보다 맑지 않았지만, 금이 간 몸이 계속 소리를 낸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는 목어 안쪽에 작은 문장을 새겼다.
‘멈추지 않는 것이 회복은 아니다. 다시 자기 소리를 내는 것이 회복이다.’
‘저 아이에게도 이 말을 해 주고 싶군.’ 청우는 마당의 검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소년은 계속 싸우고 앞으로 나아가면 살아 있는 것이라 믿었다.
처음 만난 날, 강민은 자기보다 큰 기계문을 혼자 밀려다 청염을 끌어올렸고, 문은 열렸지만 손바닥이 찢어졌다.
“왜 사람을 부르지 않으셨습니까?” 청우가 손을 치료하며 물었었다.
“제가 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동료를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기 문제로 다른 사람이 다치는 것을 견디지 못해서였다. 선한 마음이지만 오래 두면 독이 될 수 있었다. 혼자 책임지려는 사람은 언젠가 다른 이가 선택할 권리까지 빼앗는다. 황궁 방어전 뒤 서란과 비호가 함께 열을 잡고, 강민이 불평하면서도 그 손들을 받아들였을 때 청우는 안도했다.
명상 속에서 백유강의 얼굴도 떠올랐다. 젊은 시절 병기창에서 멀리 본 그는 왼팔을 잃기 전이었고, 연구자들의 안전 장구를 직접 점검하며 위험한 실험을 중단시키고 다친 장인에게 자기 마차를 내주던 사람이었다.
‘한 번의 큰 타락이 아니었겠지.’ 청우는 짐작했다. ‘사람을 살리려고 효율을 찾고, 효율을 지키려고 한 명을 버리고, 그 죄를 견디려고 더 큰 결과를 만들려 했을 것이다. 끝에는 결과가 사람보다 중요해졌고.’
강민도 같은 길에 설 수 있었다. 힘이 커질수록 구해야 할 사람이 늘고, 모두를 구하지 못하는 순간이 온다. 청우는 그래서 이름보다 실패를 받아들이는 법을 먼저 가르치고 싶었다.
마당에서 강민의 검이 한 번 크게 바닥을 긁었다. 수련 동작이 어긋난 소리였다. 잠시 뒤 같은 초식을 다시 시작하는 소리가 났다. 소년은 실패를 숨기지 않고 반복했다. 청우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법당 밖에서 다른 발소리가 들렸다. 민초아가 문틈으로 안을 보며 서성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청우가 눈을 뜨지 않은 채 말했다.
초아가 놀라 숨을 삼켰다. “안 주무셨어요?”
“명상 중이었습니다.”
“그게 자는 거랑 뭐가 달라요?”
“저도 가끔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아이가 법당 안으로 들어왔다. 손에는 낡은 붕대 목록과 작은 호신봉이 있었다.
“대사님은 사람 안 죽인다면서요.”
“가능하면 그렇습니다.”
“나쁜 사람도요?”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죽이면, 누가 나쁜지 판단하는 사람이 너무 큰 힘을 갖게 됩니다.”
“우리 마을 사람들 데려간 사람은 나빠요.”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살려요?”
“다시 해치지 못하게 막고, 죄를 밝히고, 피해를 갚게 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죽이는 기쁨을 정의라고 부르지는 않으려 합니다.”
초아는 호신봉을 내려다봤다. “저는 그 사람들 아프게 하고 싶어요.”
“그 마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사님이 그런 말 해도 돼요?”
“분노가 있다는 것과 분노에게 선택을 맡기는 것은 다릅니다.”
아이는 한참 생각했다. “강민도 그래서 그 갈고리 손을 안 죽였어요?”
“아마 본인도 아직 답을 찾는 중일 것입니다.”
“다들 모르는 게 많네요.”
“그래서 함께 다닙니다. 모르는 것을 혼자 짊어지지 않으려고요.”
초아는 조금 웃었다. 나가기 전 목어를 손가락으로 건드리자 황동 몸통이 낮게 울렸다.
“이건 망가졌는데 왜 안 버려요?”
“망가진 뒤에 얻은 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초아는 자기 뺨의 화상 자국을 잠깐 만지고는 아무 말 없이 나갔다. 강민의 흉터도, 초아의 화상도, 자기 손에 남은 병기창의 굳은살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흔적이 앞으로 어떤 선택을 부르는가였다.
강민을 처음 보았을 때, 청우는 그 아이의 가슴에서 자신이 만든 옛 기핵과 비슷한 울림을 들었다. 청염기관은 분노를 먹고 힘을 내며 주인의 감정에 따라 진동이 달라졌다. 그러나 그 힘보다 두려운 것은 이름이었다. 병기창에서 죄를 견디지 못한 장인들은 번호가 되었고, 명령을 의심한 병사들은 계급 뒤에 숨었다. 자기 이름을 버리면 책임도 함께 버릴 수 있다고 믿었다.
‘저 아이는 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청우는 생각했다. 평범한 이름으로 살아왔으나, 그 아래 숨은 혈통과 죄가 계속 밀려왔다. 설무진의 죽음, 백씨 가문의 실험, 백유강과의 피, 운하라는 이름. 조각은 하나씩 모였지만, 가장 중요한 한 조각은 아직 문 너머에 있었다.
청우는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오래전 봉인 문서에서 보았다. 백씨 가문의 마지막 아이에게 붙이려던 이름. 권력의 백(白)이 아니라 죄를 밝히는 흰빛, 왕족의 민이 아니라 백성의 민을 뜻하는 이름이었다.
‘지금 알려 주면 방황이 줄어들 수도 있다. 서란과 비호가 곁에 있고, 무겸과 고륜이 지킬 수 있는 이 산중에서.’ 그러나 청우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것은 자비의 얼굴을 한 오만이다. 남이 붙여 준 이름은 또 하나의 명령이 된다.’
설무진이 숨겼고, 백유강이 회수하려 하며, 조하륜이 발화 순간을 노리는 이름이라면 더더욱 본인이 골라야 했다. 청우가 먼저 불러 버리는 순간, 강민은 스승과 가문과 적의 기대에 밀려 답하게 될 것이다.
‘이름은 알려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딛고 서는 땅이다.’
둥. 기계목어가 세 번째 울렸다. 이번에는 울림 안에 다른 소리가 섞였다. 황동 몸통 깊은 곳에서 작은 판이 움직이는 소리였다. 청우는 눈을 떴다.
법당 문틈으로 아침빛이 들어왔다. 목어 몸통 한쪽에, 먼지에 가려 이제껏 보이지 않던 오래된 백룡문이 새겨져 있었다. 청우가 손바닥을 대자 기핵이 반응해 작은 서랍이 열렸다. 안에는 손가락 길이의 황동편과 낡은 염주 한 알이 들어 있었다. 황동편 앞면에는 봉인 부대의 표식, 뒷면에는 짧은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이름을 먼저 부르는 자가 문을 소유한다.’
‘천부항의 봉인은 혈통만 확인하는 게 아니었군. 누가, 어떤 뜻으로 이름을 부르는지까지 가려낸다.’ 청우의 눈빛이 굳었다. ‘백유강이나 조하륜이 이름을 강요하면 문은 그들의 소유를 인정할 수도 있다. 저 아이가 스스로 불러야 한다. 그것이 다섯 번째 단서다.’
법당 밖에서 검 소리가 멎었다. 강민이 문 앞에 섰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붙어 있었다.
“대사님.”
“들어오십시오.”
강민은 목어 아래의 열린 서랍을 보았다. 청우는 황동편을 소매 안으로 넣지 않았다. 숨기려는 행동이 오히려 의심을 부를 수 있었다.
“이게 뭡니까?”
“봉인 부대의 물건입니다.”
“제 것과 관련 있습니까?”
“있습니다.”
강민이 그의 얼굴을 오래 살폈다. “대사님은 제 이름을 알고 계십니까?”
분노도 재촉도 없는 조용한 질문이었다. 그래서 더 무거웠다. 청우는 합장했다.
“알고 있습니다.”
강민의 손가락이 검집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왜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제가 부르면 제 이름이 됩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모르셔도 됩니다. 다만 누군가 그 이름을 대신 정해 주려 할 때, 그 사람의 뜻이 아니라 본인의 뜻을 먼저 보십시오.”
강민의 눈에 서운함이 지나갔다. 청우는 그 감정을 피하지 않았다.
“저를 못 믿으시는 겁니까?”
“반대입니다. 스스로 부를 수 있다고 믿습니다.”
밖에서 비호가 냉각통을 두드리는 소리, 서란이 초아에게 붕대 매듭을 가르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요?”
“버리셔도 됩니다.”
“가문의 이름인데도?”
“사람이 이름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이름이 사람을 담기 위해 존재합니다.”
강민은 그제야 아주 작게 웃었다. “대사님은 어려운 말을 존댓말로 하셔서 더 어렵습니다.”
“죄송합니다.”
“사과까지 존댓말이네요.”
“그것은 고치기 어렵습니다.”
짧은 웃음이 지나갔다.
정오 무렵, 무겸이 법당 처마 아래로 왔다. 창날에 맺힌 서리를 천으로 닦으면서도 눈은 마당의 강민을 향해 있었다.
“대사님, 저 녀석이 쉬는 법을 배우긴 하겠습니까?”
청우는 찻물을 따랐다. “배우지 않으면 몸이 먼저 가르칠 것입니다.”
“그 수업료가 너무 비싸서 문제지요.”
무겸은 찻잔을 들지 않았다. 황궁 방어전에서 창대를 너무 오래 쥔 탓에 손바닥의 굳은살이 갈라져 피가 배어 있었다.
“약을 드리겠습니다.”
“서란이 보면 또 혼납니다.”
“숨기시면 더 혼나실 것입니다.”
“대사님까지 그러십니까.”
“저는 사실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무겸은 결국 손을 내밀었다. 청우는 승복 안쪽의 작은 약통을 꺼내 상처에 발랐다.
“견디는 것과 돌보지 않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청우가 덧붙였다.
“저 아이의 피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계셨습니까?” 무겸이 물었다.
“전부는 몰랐습니다.”
“그럼 일부는.”
“예.”
“왜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청우는 약통 뚜껑을 닫았다. “제가 들은 것은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이름을 둘러싼 사람들의 욕망이었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전했다면 강민은 자신보다 먼저 타인의 기대를 짊어졌을 것입니다.”
“지금도 짊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내려놓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무겸은 마당을 보았다. 강민이 비호에게 냉각통의 끈을 조정받고 있었고, 서란은 둘을 번갈아 꾸짖었으며, 민초아는 그 모습을 종이에 옮겼다. 서로를 귀찮게 하는 평범한 가족에 가까웠다.
“그 장면을 지키는 것이 제 창의 몫이겠군요.”
“예. 다만 오라버니께서도 그 장면 안에 계십니다.”
무겸이 눈썹을 올렸다. “서란이 부르는 호칭을 대사님이 쓰시면 이상합니다.”
청우는 잠시 생각했다. “실수했습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웃었다.
오후에는 기계목어를 분해했다. 비호가 황동 몸통을 열자 예상보다 많은 부품이 쏟아졌다.
“시각 알리는 장치면 태엽 하나에 추 하나면 되는데, 공명판이 열두 장이야. 방향 바꾸는 톱니도 있고.” 비호가 공명판을 햇빛에 비췄다. “이것 봐. 판마다 홈 깊이가 달라. 순서대로 울리면 방향이 돼. 누가 소리 내는 물건 안에 좌표를 숨겼어.”
고륜이 곁에 앉았다. “봉인 부대는 말을 믿지 않았다. 잡힌 사람은 암호를 불 수 있으니까. 그래서 노래, 종소리, 염주처럼 일상에 섞이는 것에 길을 나눠 숨겼다.”
민초아가 물었다. “그럼 이 절도 봉인 부대가 만든 거예요?”
“절은 훨씬 오래됐다. 그들이 빌려 쓴 것이지.”
“주인 허락 없이요?”
고륜은 대답하지 못했다. 청우가 대신 말했다. “아마도 그랬을 것입니다. 좋은 목적은 남의 것을 함부로 써도 된다는 허락이 되지 않습니다.”
초아는 종이에 그 문장을 적었다. “나중에 돌려줘야겠네요.”
“무엇을 말입니까?”
“이 절이 기억해야 할 이야기를요. 숨긴 사람들이 아니라 여기 살았던 사람들 이야기까지.”
청우는 증언을 빼앗겼던 아이가 이제 기록을 돌려주려 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합장했다. “그 일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비호는 공명판을 순서대로 두드렸다. 맑고 탁한 열두 음이 법당 안을 돌았다.
“군가 박자를 얹어 봐라.” 고륜이 손바닥으로 박자를 쳤다. “네 음은 동쪽, 세 음은 위, 두 음은 물길, 마지막 세 음은 ‘안쪽’이다.”
“절벽 안.” 비호가 중얼거리다 머리를 쥐어뜯었다. “근데 아직 800m 어긋나. 지도에선 손톱만큼인데 산에선 완전히 다른 골짜기라고. 왜 마지막 점만 안 맞지?”
청우는 목어 안쪽 바닥에 남은 둥근 자국을 보았다. 부품 하나가 빠진 자리였다. 크기는 염주알과 같았다.
스무 해 전, 스승은 임종을 앞두고 염주 한 줄을 건넸다.
“마지막 알은 네가 길을 열 때 쓰지 말고, 누군가가 자기 길을 고를 때 건네라.”
당시 청우는 그 말을 수행의 비유로 이해했다. 그러나 염주알마다 미세한 금속심이 박혀 있었고, 마지막 알만 유난히 무거웠다.
‘스승님이 지켜 달라던 비밀과, 동료들에게 진실을 말해야 할 책임.’ 청우는 둘 중 하나를 버리는 대신 비밀의 목적을 다시 물었다. ‘사람을 지키려던 침묵이 이제 사람을 위험하게 한다면, 같은 침묵을 이어 가는 것은 충성이 아니라 게으름이다.’
그는 승복 안에서 염주를 꺼냈다. 열여덟 알 가운데 하나의 색이 아주 조금 달랐다.
“대사님?” 비호가 불렀다.
“아직 확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청우는 바로 건네지 않았다. 좌표가 맞는다는 이유만으로 길을 열면, 자신도 과거의 봉인자들과 다르지 않았다. 먼저 강민이 그 길을 원하는지 물어야 했다.
해 질 무렵, 그는 마당의 소년을 법당으로 불렀다.
“동쪽의 문이 열리면, 무엇을 찾고 싶으십니까?”
강민은 오래 생각했다. “무기라면 사람들이 먼저 노릴 겁니다. 가문의 증거라면 저를 가두는 데 쓸 거고요.”
“그래서 두려우십니까?”
“네.”
“그래도 가시겠습니까?”
“제가 안 가면 다른 사람이 문을 열 겁니다. 그 사람이 조하륜이면 더 무섭습니다.”
청우는 그 답에서 영웅의 허세보다 두려움을 인정하는 힘을 보았다.
“그렇다면 한 가지를 기억해 주십시오. 문이 당신을 선택했다고 말해도, 당신에게는 문을 거절할 권리가 있습니다.”
“문 앞까지 가고도요?”
“예. 돌아서는 것도 선택입니다. 그리고 숨 쉬는 법을 하나 알려 드리겠습니다. 넷을 세며 들이쉬고, 여섯을 세며 내쉬는 동안 아픈 곳에 마음속으로 이름을 붙이십시오. 없애려 하지 말고 위치와 크기만 확인하는 겁니다.”
“아픈 곳을 바라보면 더 아프지 않습니까?” 강민이 물었다.
“처음에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보지 않는다고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수행자는 고통을 넘어서야 한다고 배운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가르치는 종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고통을 정확히 말하는 쪽이 더 어려운 수행이라 생각합니다. 아픔을 숨기면 강해 보일 수는 있어도, 곁의 사람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지 못합니다.”
“서란 누나가 들으면 좋아하겠네요. 맨날 아픈 데 숨긴다고 혼나거든요.” 강민이 쓴웃음을 지었다. “비밀도 같겠네요.”
“예. 그래서 오늘은 오래 숨긴 것을 내려놓으려 합니다.” 청우는 승복 안의 염주를 만졌다. 마지막 알의 차가운 무게가 손끝에 닿았다.
강민은 고개를 끄덕이고 법당을 나서려 했다.
“오늘은 검을 거두는 소리가 좋았습니다.” 청우가 불렀다.
소년이 돌아보았다. “베는 소리는요?”
“조금 급했습니다.”
“내일 다시 해 보겠습니다.”
청우는 열린 서랍의 염주 한 알을 집었다. 표면에는 아주 작은 홈이 있었다. 황동편을 겹치자 홈들이 동쪽 산맥을 가리켰다. 천부항 좌표의 마지막 어긋남을 보정하는 표식이었다. 그는 그것을 지도 위에 놓기 전에 고륜에게 먼저 건넸다.
노장은 표면의 홈을 보고 숨을 삼켰다. “봉인대장이 지니던 보정핵이다.”
“스승님께서는 출처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말하면 대사님까지 쫓겼을 테지.” 고륜은 염주알을 돌려 보다가 청우의 손바닥에 돌려놓았다. “이걸 숨긴 사람이 선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한 사람의 군령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판단이 모여야 길이 열리게 했군.”
“칼이 사람을 죽였어도 다시 사람을 지키는 데 쓸 수 있듯, 숨김의 도구도 진실을 드러내는 열쇠가 될 수 있겠지요.” 청우가 염주알을 쥐었다. “이번에는 지키려고가 아니라, 모두 앞에 내려놓으려고 가져가겠습니다.”
법당 문턱을 넘자 햇빛이 염주의 금속심에 닿았다. 아주 가느다란 푸른 선이 정비실 방향으로 뻗었다.
“빛이 길을 가리키는군.” 고륜이 중얼거렸다.
“한 사람의 혈통만 향하는 길은 아닌 듯합니다.” 청우가 답했다. “지도를 읽는 비호 님의 눈, 과거를 기억하는 어르신의 증언, 위험을 막을 무겸 님의 창, 돌아오게 할 서란 님의 손까지 모두 있어야 걸을 수 있는 길입니다. 스승님 말씀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길은 열쇠 하나가 아니라 함께 걷는 사람들로 완성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마당에서 비호의 고함이 터졌다.
“찾았어!”
모두가 정비실로 달려갔다. 비호는 황궁 도면, 조하륜의 금속판, 백도윤의 옥반지 인장 사본을 바닥에 펼쳐 놓고 있었다.
“세 장 겹치면 다 맞는데, 마지막 점 하나 때문에 며칠째 막혔잖아!”
청우가 염주를 올려놓았다. 구멍과 선이 정확히 이어졌다. 등불을 아래에서 비추자 종이 위에 절벽 모양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겉으로는 막힌 산벽이지만, 안쪽에는 거대한 빈 공간과 수로가 있었다.
“천부항은 절벽 앞이 아니야.” 비호의 얼굴이 흥분으로 붉어졌다.
강민이 그림자를 내려다보았다.
“절벽 안이야.” 비호가 손가락으로 암벽 중심을 찍었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멀리 동쪽 산맥에서 낮은 굉음이 들려왔다. 땅이 한 번 흔들렸고, 폐사의 기계목어가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네 번째로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