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점 · 강민 — 균열·낙인 단계

절벽 너머 천부항(天府港)

第1部 · 話 39 · 검령성 · published

海東曆: 201년 10월 27일

· 시점: 고륜

고륜은 바위의 흠집을 손끝으로 기억했다.

“오십 년 전, 나는 이 절벽 아래에서 봉인 부대의 후방 경계를 섰다.” 그는 암벽을 더듬으며 입을 열었다. “그때도 겨울 초입이었고, 첫눈이 내렸지. 인장공들이 암벽에 마지막 홈을 파는 동안 나는 뒤만 봤다.”

“봉인 부대가 그렇게 오래 있었어요?” 비호가 물었다.

“이백 년 전 천부항을 닫은 이들이 대를 이어 지켜 온 부대다. 그날은 그들이 마지막으로 문을 닫는 날이었다. 명령은 단순했지. 안쪽을 보지 말 것, 묻지 말 것, 누구도 통과시키지 말 것.”

“그래서요?”

“나는 명령을 잘 지켰다.” 고륜이 쓴웃음을 지었다. “너무 잘 지킨 죄로 반백 년을 살았다.”

늙어 관절이 굵어진 손이었지만, 바위의 생김새는 그대로였다. 손은 바위를 기억했지만 안쪽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절벽 아래에서 세 번째 물길이 갈라지는 곳, 검은 화강암 사이에 유난히 밝은 점 하나가 있었다. 고륜은 칼끝으로 이끼를 걷었다. 손바닥 크기의 홈이 나타났다. 백룡이 동쪽을 향해 발톱을 뻗은 모양이었다.

“여기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진품은 전하가 잃었지만, 비밀 서고에서 뜬 황동 복제 인장이 있어.” 비호가 인장을 꺼내 홈에 댔다. “크기는 맞는데…… 안 들어가. 각도가 틀려.”

고륜은 인장을 받아 90도 돌렸다. 백룡의 머리가 아래를 향하고 발톱이 바다 쪽을 가리켰다.

“봉인 부대는 왕에게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왕이 머리를 숙일 때만 열리게 만들었지.”

인장이 홈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강민, 가까이 와 봐.” 비호가 손짓했다.

강민이 다가서자 가슴에서 푸른빛이 비쳤다. 청염기관의 진동이 인장을 타고 암벽으로 흘렀다. 고륜의 손바닥 아래에서 오래된 톱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드드드.

산 전체가 낮게 떨렸다. 절벽의 푸른 선이 위아래로 뻗었고, 눈과 돌가루가 쏟아졌다. 수천 톤의 바위문이 안쪽 톱니에 끌려 천천히 갈라졌다.

“소금, 기름, 녹슨 쇠, 마른 나무…….” 서란이 밀려 나온 공기에 코를 막았다. “오래 갇혀 있던 냄새야.”

문 너머에는 계단이 아래로 이어졌다. 비호가 등불을 들고 첫발을 내디디자 고륜이 소년의 어깨를 잡았다.

“내가 먼저 간다.”

“안 무서워요?”

“무섭다.”

“그런데 왜?”

“내가 무서워해야 할 곳이니까.”

노장은 창을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벽에는 봉인 부대의 표식이 일정한 간격으로 새겨져 있었다.

“어떤 건 칼로 긁어 지웠고, 어떤 건 검게 변했네요.” 강민이 뒤에서 말했다. “피가 스며든 것처럼.”

200m쯤 내려가자 계단이 끝나고 거대한 수직 공간이 나타났다. 벽에 황동 양각으로 세 글자가 박혀 있었다. 천부항(天府港).

“등불 하나론 끝이 안 보여. 주등 밸브가 어디 있을 텐데.” 비호가 벽을 더듬어 밸브를 돌렸다. 헛돌았다. “형, 손 좀.”

강민이 손을 대어 진동을 밀자 멀리서 불이 하나 켜졌다. 이어 두 번째, 세 번째. 황동 등불들이 긴 부두를 따라 차례로 살아났다. 어둠이 밀려나며 지하 조선소의 모습이 드러났다.

공간은 거대했지만 그 중심에 잠든 배는 뜻밖에도 작았다. 검푸른 장갑판이 용의 비늘처럼 겹쳐 있었고, 양쪽 측면에는 접힌 날개처럼 보이는 황동 추진기가 하나씩 달려 있었다. 선수에는 물살을 가르는 길쭉한 청룡 두부가 조각되어 있었다.

“길이 36m 남짓, 폭은 7m쯤.” 비호가 숨을 들이켰다. “선수에 글자가 있어. 靑龍 一號, 그 아래…… 幼龍. 유룡(幼龍)이야.”

“이백 년 동안 봉인된 소형 쾌속 은신선이군.” 고륜이 겨우 말했다.

그는 숨을 내쉬지 못했다. 기억 속 천부항은 거대한 비밀 병기를 숨긴 무덤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배는 열두 명도 채 타기 어려운 좁은 선실, 얇은 선체,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용의 형상이었다.

“작아서 더 처절하구나.” 노장이 중얼거렸다. “봉인 부대는 세계를 뒤집을 군함이 아니라, 살아남은 몇이라도 바다로 내보낼 마지막 배를 지키고 있었던 거다.”

비호는 갑판 아래 정비 골조를 올려다보다 그대로 주저앉았다. “이걸… 손으로 만들었다고?” 측면 추진기의 관, 선저의 반응로, 부두 아래 잠긴 수로를 훑는 소년의 얼굴에 감탄과 욕심과 두려움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산 안에 배가 들어 있어요.” 민초아가 서란의 소매를 잡았다. 서란도 대답하지 못했다.

“다른 병기는?” 무겸은 창을 든 채 주변을 살폈다.

“오른쪽 격납고는 비었어. 바닥에 보행 궤적 넷이랑 정비 홈만 남았고.” 비호가 고개를 저었다. “여기엔 이 배만 있다. 나머지는 설계 골조야.”

“훗날 육상 병기를 만들려고 비워 둔 자리겠지.” 고륜이 짐작했다.

강민은 유룡을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가슴과 배의 노심이 서로를 찾듯 같은 간격으로 울렸다.

쿵.

쿵.

“지하인데 숨이 하얗게 안 나오네.” 강민이 한참 뒤에야 시선을 거두었다. “암벽 안쪽 열 때문인가. 장갑판 이음새엔 머리카락 한 올 들어갈 틈도 없어요.”

“쇠사슬도 녹은 슬었지만 고리는 단단하다.” 고륜이 선체를 붙든 굵은 사슬을 짚었다. “나눠서 조사하자.”

고륜은 무겸, 청우와 함께 부두를 빙 두른 경계로를 걸었다. 천장이 낮아 무겸은 창을 어깨 높이로 눕혀 들어야 했다. 경계로 끝의 무기고는 쉽게 열렸지만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창 걸이는 줄지어 있는데 창이 없군요. 화살통 자리엔 마른 짚 부스러기뿐이고.” 무겸이 빈 걸이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병기가 이렇게 없을 수가 있습니까.”

“싸우려고 마련한 곳이 아니라, 무언가를 내보내려고 마련한 곳 같습니다.” 청우가 걸이 아래 바닥을 철장 끝으로 두드렸다.

고륜은 대답하지 않았다. 텅 빈 선반은 그가 반백 년 동안 지켜 온 ‘비밀 병기’의 모습과 맞지 않았다.

정비실에서는 비호와 초아가 녹슨 경첩과 씨름하고 있었다. 비호가 어깨로 밀고서야 문이 열렸다. 안쪽 벽에는 공구마다 번호표가 달려 있었다.

“열일곱 번 망치가 없어.” 초아가 번호표를 짚었다.

“쓰다가 두고 갔겠지. 내 걸로 쓰면 되잖아.”

“그래도 번호가 비면 마음에 걸려요.”

“너, 나보다 더 깐깐하다.”

“이 황동판 봐. 유룡 구조도랑 광휘은신(光輝隱身) 운용법이야.” 비호가 벽면을 읽었다. “빛을 굴절시키는 게 아니야. 선체 표면의 코테르 진동을 주변과 맞춰서 눈과 감응을 같이 속이는 거야.”

“그럼 진짜 안 보여?”

“점화되면.”

“어떻게 점화해?”

비호는 구조도 끝을 보았다. “호명 인증.”

“그게 뭐야?”

“배가 주인의 이름을 들어야 해.” 소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조선소 중앙에는 황동 제단이 있었다. 손바닥을 얹는 인장과 작은 음성관이 달려 있었고, 주변 바닥에는 일곱 개의 자리 표시가 원형으로 놓였다.

“한 명이 배를 깨우는 게 아니라, 여럿이 힘을 나눠 받는 구조야.” 비호가 말했다. “형, 손을 대 봐.”

강민이 제단 앞으로 갔다. 가슴속 청염기관이 거세게 울렸고, 잠든 등불들이 그의 박동에 맞춰 희미하게 깜빡였다. 그는 오른손을 들었다가 멈췄다. 청우도, 서란도 재촉하지 않았다. 모두가 그가 무엇 앞에서 멈췄는지 알고 있었다.

“봉인 책임자의 근무 일지다.” 고륜이 제단 아래에서 꺼낸 책의 마지막 장을 펼쳤다. 먹은 번졌지만 읽을 수 있었다. “‘우리는 이것을 무덤이라 부르기로 했다. 그러나 무덤의 다른 이름이 요람이기를.’ 그리고 한 줄 더 있다. ‘배는 혈통이 아니라 선택한 이름에 응답한다.’”

눈이 어둠에 익자 사람이 살았던 자국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벽을 따라 작은 숙소 열두 칸이 있었다.

“문마다 이름 대신 직책이 적혀 있어요.” 초아가 읽어 나갔다. “압력공, 항법공, 의공사, 취사원, 기록관……. 맨 끝방은 ‘아이들’이에요.”

초아가 문을 열었다. 안에는 낮은 침상 넷과 나무 장난감 배 하나가 있었다. 돛은 얇은 황동판이었고, 바닥에는 서툰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바다는 무섭지만 같이 가면 덜 무섭다.’” 초아는 장난감을 품에 안지 않고 제자리에 놓았다. “여기에도 아이들이 있었네요.”

고륜은 대답하지 못했다. 봉인 부대가 철수하던 날, 외부 경계에 있던 그는 안에서 누가 나왔는지 세지 않았다.

“명령서엔 기술자와 호위병 43명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그가 겨우 말했다. “아이 얘기는 없었다.”

“이것 좀 봐.” 의공실에서 서란이 접힌 천 조각을 들고 나왔다. 오래된 피가 갈색으로 변해 있었고, 한쪽에 매듭이 묶여 있었다. “출산 때 쓰는 매듭이야. 여기서 아이가 태어났어.”

“봉인 기간이 얼마나 길었지?” 무겸이 물었다.

“공식 기록은 41일이다.” 고륜이 대답했다.

서란은 천의 마모를 만져 봤다. “이건 몇 년은 쓴 거야. 약장 맨 아래 칸 약초 다발도 매듭이 아직 단단해. 누가 마지막까지 손을 놓지 않고 정리해 둔 거야.”

“그럼 41일이 아니라……” 강민이 말을 잇지 못했다.

“봉인 전부터 사람을 숨겨 살게 한 곳이었던 게다.” 고륜이 눈을 감았다. “제국이 없다고 한 작은 마을이 절벽 안에 있었던 거지. 배를 봉인한 건 이백 년 전이지만, 그 곁에서 사람이 산 시간은 오십 년 전 그날까지 이어졌다.”

비호는 선체 아래 정비구를 열었다. 매끈한 겉과 달리 안쪽은 수백 개의 작은 관과 수동 밸브로 빽빽했다.

“큰 배가 아니네.” 초아가 말했다.

비호의 눈은 오히려 더 빛났다. “그래서 좋아. 바닥이 얕고 추진익이 접혀서 좁은 수로나 얕은 해안도 빨리 다녀. 큰 배는 사람을 많이 태우지만 움직이려면 더 많은 사람과 연료가 필요해. 이건 열 명 안팎이 숨을 맞추면 움직일 수 있어.”

“열 명이 싸우면?”

“배가 중간에서 삐걱거리겠지.”

“우린 이미 자주 싸우잖아.”

“그러니까 출항 전에 규칙부터 정해야 해.” 비호는 선실 벽에 숯으로 목록을 썼다. “밸브를 함부로 돌리지 말 것. 의공실 약병을 부품통으로 쓰지 말 것. 배 안에서 창 휘두르지 말 것.”

무겸이 헛기침했다. “마지막은 나를 겨냥한 것이냐?”

“형님 말고 누가 배 안에서 창을 휘둘러.”

“나는 좁은 곳에서는 짧게 잡는다.”

“그래도 안 돼.”

“이곳 마지막 사람들도 이런 말을 했겠지.” 고륜이 그들의 말다툼을 들으며 중얼거렸다. 관을 누가 고쳤는지, 배급 죽에 소금이 왜 모자라는지, 아이들이 선실에서 뛰어도 되는지. 역사는 봉인과 혈통만 기록했지만 사람들은 그런 사소한 문제로 하루를 견뎠다.

취사실의 화덕에는 검게 탄 냄비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곡물이 돌처럼 굳어 붙었어요.” 초아가 뚜껑을 열었다. “탁자에 숟가락 아홉 개는 가지런한데, 열 번째만 바닥에 떨어졌어요.”

청우가 그것을 주워 닦았다. “급히 떠난 것이 아니라, 떠나라는 명령을 받은 듯합니다.”

고륜은 벽의 날짜 표시를 보았다. 손가락이 마지막 줄에서 멈췄다.

“봉인 당일이 아니다. 그 사흘 뒤까지 이어져 있어.”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바깥에선 문이 닫혔다고 보고했는데, 안쪽 사람들은 사흘을 더 살았다.”

“문을 누가 열어 줬습니까?” 강민이 물었다.

고륜의 입이 말랐다. “열어 주지 않았다.”

“그럼 이 사람들은?”

“기록상으로는 모두 다른 항구로 이송됐다.”

“직접 봤습니까?”

“나는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 말이 조선소에 무겁게 떨어졌다.

“늘 명령 때문에 몰랐다고 나를 변호했다.” 고륜이 취사실 문턱에 주저앉았다. 무릎이 갑자기 힘을 잃었다. “하지만 알려 하지 않은 것도 선택이었다. 문 안에서 사흘 동안 누가 두드렸을지 모른다. 나는 밖에서 그 소리를 바람이라 여겼을지도 모르고.”

강민은 아무 말 없이 곁에 앉았다.

“나를 용서하지 마라.” 고륜이 말했다.

“제가 용서할 일이 아닙니다.”

“그럼 누가 용서하지?”

강민은 아이들 방 쪽을 보았다. “살아남은 사람이 있으면 그들이 정하겠죠. 없으면 우리가 한 일을 기록해야 하고요.”

“기록하면 달라지는 게 있나?”

“다음 사람이 등을 돌리기 어려워집니다.”

고륜은 그 말을 오래 품었다. 그는 근무 일지의 빈 뒷장을 펼쳤다. 손이 떨려 첫 획이 비뚤어졌다.

‘해동력 201년 10월 27일. 천부항 내부에서 공식 명부에 없는 생활 구역과 아이들의 방을 확인했다. 봉인 당시 외부 경계를 맡았던 고륜은 이를 보지 못했고, 보려 하지 않았다.’

“변명은 안 쓰세요?” 초아가 옆에 앉아 물었다.

“안 쓴다.”

“그럼 저도 하나 덧붙일게요.” 아이가 아이들 방에서 본 문장을 옮겨 적었다. 기록관의 글과 아이의 글이 같은 장부에 놓였다.

오후에는 해수문과 수로를 확인했다.

“바다 쪽 수로는 세 겹 격벽으로 막혔어. 첫 번째 격벽 뒤에선 아직 바닷물이 밀고 있고.” 비호가 관에 귀를 댔다. “파도 소리가 들려. 고인 물부터 빼야 하는데…… 펌프 손잡이가 꿈쩍도 안 해.”

“같이 밀자.” 무겸과 강민이 손잡이에 매달렸다. 쇠가 비명을 질렀고, 세 번째 시도에서 겨우 내려갔다. 배수구로 검은 물이 흘렀고, 썩은 기름 냄새가 조선소를 채웠다.

“이 상태로 문을 열면 물이 먼저 들어올 거야.” 비호가 말했다. “배가 깨어나도 출항은 못 해.”

“그럼 무엇부터 해야 하지?”

“심장부터. 배가 자기 힘으로 압력을 버텨야 해. 그다음 수로.” 비호가 노심실 문에 도구를 댔다. 순간 선체 전체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그는 즉시 손을 뗐다. “제단이 이름을 안 받으면 안쪽 잠금도 안 풀려. 억지로 열면 노심이 닫혀 버릴 수도 있어.”

그들은 결국 제단 앞에 다시 모였다.

“‘피는 문을 찾고, 이름은 배를 고른다.’” 서란이 제단에 새겨진 두 줄을 읽었다. “혈통으로 위치는 찾아도, 배를 움직이는 건 혈통만으론 안 된다는 뜻이네.”

“봉인자들은 마지막에라도 피만으로 움직이지 않게 만들었군.” 무겸이 말했다.

“처음부터 그랬다면 더 많은 사람이 살았을 것이다.” 고륜이 대답했다. 그래도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백유강이 아무리 피를 앞세워도, 선택하지 않은 이름까지 빼앗을 수는 없었다.

“선체 아래에서 이것도 나왔어. 승선 규칙이래.” 비호가 작은 황동패를 가져왔다. “‘한 사람의 명령으로 출항하지 않는다. 노심, 항법, 의공, 갑판의 네 자리가 동의해야 한다.’ 배도 독재자를 싫어하네.”

청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배입니다.”

강민은 웃지 못했다. 제단 앞에 설 때마다 어깨가 굳었다.

‘지금 당장 손을 올리라고 명령하고 싶군.’ 고륜은 그 충동을 느꼈다. 바깥에는 추격자가 있고, 수로는 썩어 가며, 항구의 위치도 언젠가 들킬 것이다. ‘오십 년 전 나는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질문을 막았다. 이번엔 모자라도 기다린다.’

강민의 손이 떨렸다. 백씨의 피, 설무진의 속죄, 운하의 행적, 백유강의 회수 명령, 청우의 침묵. 그동안 쌓인 단서들이 이곳으로 모였지만 제단은 답을 주지 않았다. 이름을 말하라고 요구할 뿐이었다. 떠오르려는 이름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이름을 혀 위에 올리지 않았다.

강민은 손을 내렸다. “오늘은 못 하겠습니다.”

비호가 입을 열려다 닫았다.

서란이 먼저 말했다. “그럼 오늘은 안 하면 돼.”

“시간이 없을 수도 있어.”

“네 이름인데 왜 남의 시간이 먼저야?”

강민은 그녀를 보았다. “누나.”

“하룻밤이든 며칠이든 네가 정해.”

무겸도 창을 내려놓았다. “우리는 문 앞을 지킨다.”

청우가 합장했다. “기다리겠습니다.”

고륜은 제단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이번에는 명령으로 누군가를 밀어 넣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저녁은 취사실의 낡은 탁자에서 먹었다. 가져온 보리와 말린 고기에 초아가 산에서 주운 마른 버섯을 넣었다.

“싱겁네.” 비호가 말했다.

“불평하면 네 그릇은 내가 먹는다.” 서란이 받아쳤다.

“오십 년 전 마지막 식사가 붙은 냄비 옆에서 따뜻한 걸 먹으니 이상한 기분이다.” 무겸이 말했다.

고륜은 첫 그릇을 비운 뒤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내일 아침, 바깥으로 나가 봉인대의 옛 표식을 모두 지우겠다.”

“왜 지웁니까?” 무겸이 물었다.

“조하륜이 따라오면 같은 길을 쓸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다시 문을 닫게 되더라도, 다음 사람은 내 명령의 흔적이 아니라 자기 판단으로 길을 찾아야 한다.”

강민은 고개를 저었다. “전부 지우면 여기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도 사라집니다.”

초아가 기록 묶음을 들어 보였다. “길잡이 표식과 생활 기록을 나눠요. 적이 이용할 표식은 지우고, 사람들 이름은 옮겨 적어요.”

“그렇게 하자.” 고륜이 아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군령은 늘 지우거나 남기는 두 선택만 내밀었지만, 기록하는 사람은 다른 방법을 찾았다.

“나는 무너진 경계문을 세우지.” 무겸이 일어섰다.

“통풍구 먼지를 털어 불길이 번지지 않게 하겠습니다.” 청우가 이었다.

“의공실 약 분류할게. 빈 병도 씻고.” 서란이 소매를 걷었다.

“나는 유룡 밑에서 관 번호 매긴다!”

“그 번호는 제가 설계도에 옮길게요.” 초아가 따라붙었다.

강민은 아이들 방의 장난감 배를 고쳤다. 돛을 잡아 주던 작은 못이 빠져 있었다. 그는 본국검 손잡이 안의 여분 나사를 깎아 끼웠다. 황동 돛이 똑바로 섰다.

“그건 출항 준비야?” 서란이 문밖에서 물었다.

“아니. 돌아올 자리 준비.”

“좋은 순서네.”

오십 년 만에 조선소 안에 모닥불이 피어올랐다. 연기는 높은 천장으로 곧게 올라갔고, 유룡의 검푸른 선체가 불빛을 받아 어렴풋이 빛났다. 비호는 관 번호를 매기다 배 아래에서 그대로 잠들었고, 초아는 정비복을 덮고 그 옆에 누웠다. 서란은 강민이 제단 앞에 홀로 서 있다가 돌아서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고륜은 경계로에 앉아 근무 일지를 다시 읽었다. ‘무덤과 요람. 나는 반백 년 동안 어느 쪽을 지켜 온 걸까.’

밤이 깊어도 제단 앞에는 누구도 가지 않았다. 고륜은 그 침묵이 자신이 평생 들은 어떤 명령보다 강하다고 느꼈다.

경계 교대 전, 그는 혼자 봉인문 입구까지 올라갔다. 절벽 밖에는 눈이 다시 내리고 있었다. 산등성이 아래에서 아주 작은 불빛 셋이 움직였다가 사라졌다.

‘말하면 저 아이를 재촉하는 칼이 될지도 모른다.’ 그는 망설였다. ‘하지만 숨기는 것 역시 선택을 빼앗는 일이다.’

고륜은 돌아와 모두를 깨웠다. “불빛 셋, 북쪽 능선 아래. 추격자들이 이틀 거리 안까지 들어왔다. 빠르면 내일 밤, 늦어도 이틀 뒤에는 절벽을 찾는다.”

무겸이 창을 들었다. “내일 입구를 막을 준비를 하겠습니다.”

비호가 선체 아래에서 나왔다. “유룡을 억지로 깨우는 건 안 돼. 노심 잠금이 닫히면 영영 못 열 수도 있어.”

서란은 강민을 보지 않고 말했다. “그러니까 더더욱 아무도 이름을 재촉하지 마.”

초아가 기록지를 접었다. “저들은 문을 찾으러 오지만, 여기 사람들 이야기는 몰라요. 우리가 먼저 기억하면 저들이 이곳을 차지해도 전부 빼앗지는 못해요.”

“네 방향에 종을 달겠습니다. 싸움이 시작되면 안쪽에서도 어느 쪽에서 오는지 알 수 있도록.” 청우가 말했다.

고륜은 동료들의 얼굴을 차례로 보았다. 자신의 침묵이 더는 사람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위험도, 죄도, 시간도 함께 나눠야 했다.

강민은 모두의 말을 들은 뒤 제단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내일까지 답을 못 해도 괜찮습니까?”

“괜찮다.” 고륜이 먼저 말했다.

“적이 와도요?”

“그때는 우리가 시간을 산다. 사람 값으로 계산하지 않고, 우리가 선택한 몫으로.”

말하고 나서야 고륜은 폐염전 창고에서 들은 소년의 말을 자신이 되돌려 주고 있음을 깨달았다. 사람을 수단으로 쓰지 않는다는 약속은 평화로운 때보다 시간이 모자랄 때 지키기 어려웠다. 강민은 깊이 고개를 숙이고, 대답 대신 모닥불에 장작 하나를 더 넣었다. 불빛이 유룡의 선수와 아이들 방 문을 함께 비췄다.

경계로 바닥에는 오십 년 전 그가 칼집으로 긁어 둔 표시가 남아 있었다.

“세로선 하나는 이상 없음, 두 줄은 외부 접근.” 담요를 들고 따라온 초아에게 고륜이 설명했다. “가로선은 내부 소리 확인 금지다.”

“그거 지워요.”

“그러마.” 고륜은 가로선을 칼끝으로 지우고 옆에 새 표시를 남겼다. 문 안과 밖의 소리를 모두 들을 것. 명령보다 사람의 목소리를 먼저 확인할 것.

“추워 보여요.” 초아가 담요를 내밀었다.

“경계 중에는 괜찮다.”

“괜찮다는 말, 다들 너무 많이 해요.”

노장은 담요를 받아 어깨에 둘렀다. “고맙다.”

“그 말이 더 좋아요.”

초아는 경계로 옆에 앉아 바깥 소리를 함께 들었다. 절벽 밖에서는 눈이 쌓이는 소리, 안쪽에서는 잠결에 공구를 더듬는 비호의 손소리와 누군가의 낮은 기침이 들렸다.

“살아 있는 사람 소리는 생각보다 작구나.” 고륜이 중얼거렸다. “그래서 더 가까이 들어야 하는 거였어. 혼자 지키는 게 책임인 줄 알았는데, 둘이 들으니 놓치는 소리가 적다.”

“그러니까 다음엔 저도 깨우세요.” 초아가 말했다. 두 사람은 봉인 일지의 빠진 이름을 하나씩 대조했다.

“이름을 못 찾은 사람은 뭐라고 적어요?”

“한 일을 적자. 장난감 배를 만든 사람, 출산 매듭을 묶은 의공사, 열 번째 숟가락을 떨어뜨린 사람.”

“이름이 없어도 사람이 남네요.”

“그래. 이름을 못 찾아도 삶의 자국은 남길 수 있다. 그것까지 지우면 나는 두 번 등을 돌리는 셈이지.”

“어르신, 입구 그물 매듭 다 조였습니다.” 무겸이 다가왔다. 입구에는 소리만 내는 금속편과 침입자의 발을 묶는 그물로 이중 경계선이 쳐져 있었다. “다만 적이 많으면 이걸로는 못 막습니다.”

“안다.”

“그래도 합니까?”

“옛 봉인대는 비밀을 위해 접근자를 모두 없애라는 명을 받았다. 같은 절벽이라도 규칙은 바뀔 수 있다.” 고륜이 일지에 그 선택을 적었다. “포로가 생기면 조하륜이 어디까지 아는지 물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 여길 지키는 첫 행동을 학살로 시작하고 싶지 않다. 필요하면 싸우되, 처음부터 죽일 이유를 만들지는 말자.”

무겸은 말없이 매듭 하나를 더했다.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산등성이의 불빛 하나가 더 가까워졌다.

“무겸, 일어나라. 하나가 더 붙었다.” 이번에는 위험을 혼자 품지 않았다.

그때 유룡 선체에서 한 번 낮은 울림이 났다.

“배가 울었어요.” 초아가 속삭였다.

“오래된 기계가 식으며 내는 소리일 수도 있다.” 고륜은 의미를 덧씌우지 않았다. 사람을 몰아붙이는 해석도 과거 봉인자들의 잘못이었다. 그는 들은 그대로만 적었다. ‘자정 직전 선체 내부에서 한 차례 울림. 원인 미확인.’

산 밖의 적보다 조선소 안의 침묵이 더 크게 들리는 밤이었다.

자정이 지나자 조선소의 모든 등불이 꺼졌다. 모닥불만 남은 어둠 속에서 황동 제단이 스스로 밝아졌다. 음성관에서 갈라진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개문 혈통 확인.”

강민은 움직이지 않았다.

“청염 공명 확인.”

유룡의 선수에 달린 푸른 눈 하나가 희미하게 열렸다.

마지막 문장이 조선소 전체에 울렸다.

“승선자의 이름을 말하라.”

— 話 39 終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