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부항의 출항 준비
海東曆: 201년 11월 5일 · 시점: 백민
천부항의 새벽은 땅속에서 먼저 밝았다. 200년 동안 닫혀 있던 동력관이 마른 목을 축이는 짐승처럼 낮게 울었고, 물 빠진 도크 바닥의 균열마다 소금 결정이 오래된 상처의 실밥처럼 끼어 있었다.
닷새 전, 백민은 처음으로 자기 입으로 새 이름을 말했다. 그 이름은 선언이었고 동시에 빚이었다. 지금 그의 앞에는 중앙 도크에 잠든 청룡호(靑龍號) 일호, 유룡(幼龍)이 있었다.
“백민 형, 노심 하부 압력은 아직 불안해!”
이동 발판 위에서 단비호가 황동 연필을 문 채 소리쳤다. 귀 뒤에 꽂은 압력 청진기가 대롱거렸다.
“기본 점화는 버티는데, 광휘은신을 네 시간 이상 물리면 보조핵 가장자리부터 갈라질 거야. 항법 감응구도 비어 있어. 조류 읽는 핵이 없으니까 당장은 별빛이랑 해류 냄새랑 고륜 어르신 기억에 기대야 해.”
“냄새로 항해를 한다고?”
“그러게 말이야. 열두 명 겨우 끼어 타는 크기인데 속은 코테르 입자 회로가 핏줄처럼 깔려 있어서, 한 군데만 틀려도 배가 토해. 그래서 더 못 믿겠어. 아니, 더 무서워.”
백민은 선체 옆구리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금속 안쪽에서 얼음 밑을 흐르는 물 같은 박동이 느껴졌다. 청염이 되기 직전의 맑은 열을 얇게 흘리자, 용골 깊은 곳에서 딱, 하는 작은 응답이 올라왔다.
“서두르지 마. 200년을 잤는데 하루 이틀에 다 깨어날 리 없지. 배가 아직 자기 뼈를 찾는 중이야.”
“배가 자기 뼈를 찾는다는 말은 형만 할 수 있어.” 비호가 입을 삐죽였다. “그래도 맞는 말 같아서 더 얄미워.”
“칭찬으로 들을게.”
“칭찬 아닌데.”
그때 선체 안쪽에서 쉭, 날카로운 증기가 샜다. 압력계 바늘이 한 칸 튀었다가 두 칸 떨어졌다.
“하부 점검구야! 패킹 갈라졌어!”
백민은 이미 도크 바닥으로 뛰어내려 점검구를 열고 있었다. 낡은 패킹이 열을 못 견디고 갈라져, 그 틈에서 실처럼 가는 증기가 뿜어 나왔다. 가늘어도 맨살에 닿으면 껍질이 벗겨질 열이었다.
“새 패킹, 새 패킹…… 어디 뒀더라! 형, 잠깐만 버텨!”
“얼마나?”
“열까지만 세!”
백민은 검집 끝으로 증기를 눌렀다. 청염을 크게 쓰면 쇠가 휘고, 너무 약하면 증기가 터진다. 흐름을 자르지 않고 휘어 붙잡자 증기가 둥글게 말리며 그의 손목을 푸른 안개처럼 감쌌다.
“여섯, 일곱…… 형, 아직이야?”
“여덟까지 세다 멈추면 내 손목이 먼저 익는다.”
“그럼 천천히 셀게!”
“단비호!”
그때 도크 입구에서 약상자를 든 유서란이 뛰어 들어왔다. 소매 끝은 이미 여러 번 걷어 올린 뒤였다.
“손부터 빼. 살이 먼저 익어.”
“아직 괜찮아, 서란 누나.”
“괜찮다는 말은 진맥한 사람이 하는 거야.”
서란이 손목 위 혈자리를 눌렀다. 황금빛 기운이 짧게 스며들자 청염의 열이 한순간 누그러졌다. 그 틈에 비호가 새 패킹을 끼워 넣고 나사를 조였다.
“마지막 반 바퀴…… 됐다! 바늘 내려온다, 내려온다!”
증기 실이 끊겼다. 비호는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고, 서란은 백민의 손목에 흰 천을 감았다. 매듭을 일부러 세게 묶었다.
“아야.”
“아프라고 묶은 거야. 배가 아픈 것과 네가 아픈 것을 같은 일로 착각하지 마.”
백민은 바로 반박하지 못했다.
“……요즘 자꾸 그래. 노심이 떨리면 내 가슴이 떨리고, 압력이 밀리면 내 숨이 먼저 막혀.”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서란이 매듭을 한 번 더 당겼다. “배가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질수록, 네 몸을 배 부품처럼 써도 된다고 생각하게 돼. 아프지? 아직 몸이 따로 있다는 뜻이야.”
서란이 비호를 돌아보았다.
“기록해 둬. 하부 패킹 3번, 청염 반응 시 열을 못 버팀. 대체재는 세 겹 이상. 백민 손목은 열상 1단계. 오늘 밤 청염 과출력 금지.”
“과출력 금지라고 적어도 형이 지킬까?”
“못 지키면 내가 침으로 재울 거야.”
“그건 지킬 것 같다.”
“둘 다 너무하네.” 백민이 붕대 감긴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너무한 건 증기 나오는 데 손목부터 들이민 사람이지.” 서란이 약상자를 닫았다. “이 항구는 200년 동안 잠든 척하면서 고장을 하나씩 숨겨 놨어. 손댈 때마다 하나씩 입을 열 거야. 그때마다 네 손목을 내줄 순 없어.”
◆
오전 내내 고륜은 갑문실에 있었다. 녹이 낀 수동 조작대 앞에서 손잡이를 하나씩 짚는 노인의 등 뒤에서, 장무겸은 창대를 기둥처럼 세운 채 벽에 등을 붙이고 있었다.
“철문 두 장 여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립니까?” 백민이 물었다.
“겉으로는 두 장이지. 속에는 절벽 안쪽으로 파고든 보조 문이 여섯, 수압 고정축이 스물넷, 도크 바닥을 떠받치는 역류 방지판까지 한 몸으로 묶여 있네.”
“한 몸이면, 하나가 틀리면 전부 틀리겠군요.”
“한 번 잘못 열면 바다가 항구를 삼키고, 한 번 잘못 닫으면 선체가 안에서 으스러지지.” 고륜이 손잡이를 쓰다듬었다. “옛날에는 손잡이마다 담당자가 있었다. 열두 명이 숨을 맞춰 움직여야 했어. 누구 하나라도 겁을 먹으면 문은 삐뚤어졌고, 삐뚤어진 문은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다. 그냥 눌러 죽일 뿐이지.”
“담당자가 열두 명이었다면 지금은 부족합니다.” 무겸이 말했다.
“부족하지. 그래서 네 창이 필요하고, 아이의 손이 필요하고, 저 소년의 심장이 필요하다. 그리고 내가 기억을 틀리면 모두 죽는다.”
담담한 말이 갑문실의 공기를 눌렀다. 백민은 고륜의 옆얼굴을 보았다. 문이 닫히는 것을 보고 문 너머에 남는 사람들을 보고도 살아남은 사람의 표정이었다. 설무진의 마지막 밤에서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어르신, 틀리실 일은 없을 겁니다.”
“위로는 됐네. 틀리면 네가 알려 주게. 문이 먼저 알려 주기 전에.”
◆
오후의 갑문 예비시험은 정식 개방이 아니었다. 굳은 축을 깨우는 짧은 움직임일 뿐이었다.
“신호 갑니다! 하나, 둘, 당겨요, 어르신!”
명령대에서 비호가 손을 내리자 고륜이 첫 손잡이를 당겼다. 절벽 전체가 이를 가는 소리를 냈다. 보조 문 안쪽의 검은 물이 쇠 썩은 냄새를 끌고 배수로로 쏟아졌다.
등잔을 든 민초아가 배수로 옆에서 물 색을 살피다 고개를 들었다.
“서쪽 배수로에 기름막이 있어요. 오래된 기름이 아니라 새 기름 같아요. 냄새가 덜 죽었어요.”
“새 기름?” 비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누가 다녀갔다는 뜻이냐.” 무겸이 창을 바로 세웠다.
“아직 몰라요. 그런데 항구 자체에서 나온 거라면 녹이랑 섞여서 검게 죽어야 하는데, 이건 무지갯빛이 그대로예요.”
백민은 배수로로 내려가 손끝으로 기름막을 찍어 코에 댔다. 희미한 향이 남았다.
“최근에 바른 윤활유야. 이 냄새…… 황실 내성에서 쓰는 정제유야. 해룡성 회랑의 문들이 늘 이 냄새를 풍겼어. 비싸고 차갑고, 사람보다 기계를 먼저 믿는 냄새.”
“그럼 내성 사람이 여기 있다는 거냐?” 무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직 단정하지 마십시오.” 어느새 배수로 난간에 선 청우가 말했다. “의심은 칼과 같아서, 빼는 순간 손잡이도 피를 묻힙니다.”
“그럼 칼집째로 맞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칼을 빼되, 베기 전에 누구의 목인지 확인하라는 말입니다.”
“초아, 그 기름 병에 담아서 이름표 붙여 둬.” 백민이 말했다.
“네. 어느 배수로, 몇 시, 누가 처음 봤는지까지 적어 둘게요.”
백민은 천장의 크레인 그림자를 올려다보았다. 천부항은 넓었고, 이곳에 있는 사람이 그들뿐인 것도 아니었다.
“항구엔 우리만 있는 게 아니에요. 봉인을 푸느라 고용한 인부들이 외곽 창고를 오가고, 어르신의 옛 연락선을 따라 들어온 문지기들도 있어요. 모두를 의심하면 배는 떠나기 전에 무너지고, 아무도 의심하지 않으면 떠난 뒤에 가라앉겠죠.”
“그 두 극단 사이에 서는 게 책임자의 일입니다.” 청우가 짧게 답했다.
“검을 뽑는 것보다 아직 뽑지 않는 게 어렵네요.”
“이제 알았나.”
◆
시험은 계속되었다. 첫 번째 축은 절반만 깨어났고, 두 번째 축은 움직이는 대신 굵은 녹가루만 토했다. 고륜은 조작대 밑으로 몸을 숙여 손바닥 하나 겨우 들어갈 틈에 팔을 밀어 넣었다.
“여기 숨은 보조 밸브가 있었군. 가만, 가만……”
쇠모서리에 손등이 긁혀 피가 났다. 서란이 다가가려 하자 고륜이 고개를 저었다.
“어르신, 손.”
“이 피는 약이 필요 없는 피요. 문에게 내가 아직 살아 있다고 알려 주는 정도면 충분하오.”
밸브가 돌았다. 갑문 안쪽에서 쇳물이 터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나더니 두 번째 축이 움직였고, 절벽 바깥에서 바닷바람 한 줄기가 밀려 들어왔다.
“어, 바람이다!” 비호가 코를 벌름거렸다. “진짜 바람이야. 이 안에서 바람 맞아 본 게 대체 며칠 만이야?”
“쉿, 등잔 꺼져.” 민초아가 두 손으로 등잔을 감쌌다. “……바다 냄새예요. 젖은 바위 냄새도 나고, 아직 보지 못한 섬 냄새도 나요.”
늘 고여 있던 항구 안의 공기에 처음으로 먼 바다가 섞여 들었다.
유룡의 뱃머리 아래 청룡 문양이 희미하게 빛났다가 꺼졌다. 이어서 경고 종이 딱 한 번, 낮고 짧게 울렸다.
“광휘은신 회로가 반응했어!” 비호가 명령대로 달려갔다. “바람이 아니라 염분? 습도? 잠깐, 이건 바다 쪽 진동수야. 형, 손 대지 마. 이번엔 내가 읽어 볼게.”
소년은 발판에 올라 회로판에 얼굴을 바짝 붙였다. 작은 손가락이 황동 눈금 사이를 빠르게 오갔다.
“광휘은신은 그냥 안 보이게 하는 장치가 아니야. 주변 빛이랑 증기, 물기, 그림자의 흐름을 읽어서 선체 겉면 잔영을 바꾸는 진법이거든. 땅속 도크에선 절반밖에 시험을 못 하고, 바다 위에선 한순간 오차로 배 전체가 드러날 수도 있어.”
“무섭다는 말을 그렇게 신나게 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
“무서운데 재밌어, 형. 둘 다 진짜야.”
두려움과 즐거움이 같은 눈빛 안에서 부딪히고 있었다. 검령성 뒤뜰에서 망치 ‘땅콩’을 휘두르던 아이의 손에는 이제 어른의 무게가 걸려 있었다.
“네 시간. 지금 상태로는 광휘은신을 네 시간 이상 유지하면 안 돼. 바다 위 습도가 높으면 더 줄 수도 있고. 형 청염으로 밀어붙이면 버티긴 하겠지만, 그건 안 돼. 서란 누나 말대로 형 몸을 부품으로 쓰는 방식은 오래 못 가.”
“좋아. 오늘 제일 똑똑한 말이네.” 서란이 드물게 만족한 얼굴을 했다.
“평소에도 똑똑했거든요.”
“평소에는 시끄러웠지.”
청우가 낮게 웃었다. 이제 모두가 그를 백민이라 불렀다. 처음엔 어색했던 이름이 하루하루 지나며 명령어가 아니라 약속처럼 들려왔다.
◆
저녁 무렵 첫 예비시험은 절반의 성공으로 끝났다. 죽은 축 셋 중 둘이 움직였고, 광휘은신 회로는 바다 공기에 반응했다. 그러나 패킹은 교체가 필요했고, 서쪽 배수로의 새 기름은 설명되지 않았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같은 줄에 있으면 정비공은 잠을 못 자.” 비호가 표를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검사도 마찬가지다. 문이 열렸다는 사실보다, 누가 그 문을 보았는지가 더 중요할 때가 있지.” 무겸이 말했다.
백민은 표 옆에 적힌 물자 명단을 펼쳤다.
“식량이 절약하면 열흘, 넉넉히 먹으면 엿새네.”
“물은 응축 장치가 살아나면 보충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응축판의 절반이 아직 녹을 못 벗겼어요.” 민초아가 명단을 짚었다.
“약재는 화상이랑 절단상엔 넉넉해. 냉성 약초는 끝까지 모자랄 거야.” 서란이 말했다.
“탄환이랑 폭약나사도 많지 않아.” 비호가 덧붙였다. “대신 밧줄, 갈고리, 접이식 도르래, 밀랍 방수포는 창고에 산처럼 쌓였어.”
“큰 싸움은 칼로 버티지만 먼 길은 그런 작은 물건들이 버틴다.” 무겸이 말했다.
“작은 물건이 먼 길을 버틴다는 건, 검령성을 떠난 뒤에야 알았어요.” 백민은 명단을 넘겼다.
빈칸마다 소금이 어느 인부 손에서 왔는지, 말린 콩이 어느 창고에서 나왔는지, 마지막으로 물통을 씻은 사람이 누구인지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렇게까지 자세히 써?” 비호가 투덜거렸다.
“언젠가 문제가 생기면, 누가 잘못했는지보다 어디서부터 어긋났는지를 알아야 해요.” 초아가 말했다.
증인은 지난 일을 말하는 사람만이 아니었다. 앞으로 무너질 일을 미리 붙잡는 사람도 증인이었다.
무겸은 외곽 창고 입구마다 얇은 분필 선을 긋고 있었다. 벌집 같은 창고 문마다 오래된 번호와 지워진 문양이 남아 있었다.
“형, 왜 그렇게까지 해요?”
“선이 흐트러지면 누군가 드나든 거다. 검령성의 밤에도 문은 있었다. 열어 둔 문이 있었고, 닫았어야 할 문이 있었지. 나는 이제 문을 믿지 않는다.”
“형 탓이 아니었어요.”
“탓하는 게 아니다. 맹세다.” 무겸이 문틈의 먼지를 가리켰다. “봐라. 손잡이 윤기, 바닥의 녹가루, 원래 자리에서 손가락 두 마디쯤 밀려난 밧줄. 싸움은 칼이 부딪힌 뒤에 시작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이 큰 피를 부른다.”
백민은 그날 처음으로 싸움이 시작되기 전의 싸움을 배웠다.
선미 갑판에서는 청우가 녹슨 못과 구리선, 물 한 사발과 소금 한 줌으로 감응진을 놓고 있었다.
“살기를 품고 선체에 다가오면 물결이 먼저 떨립니다.”
“그 정도면 압력계로도 할 수 있는데.” 비호가 중얼거렸다.
“압력계는 압력을 읽고, 물은 마음의 걸음을 읽습니다. 비호 님이 압력계를 믿듯이, 소승은 물을 믿습니다.”
비호는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사발을 들여다보았다. 서로 다른 믿음이 한 배 위에 놓이는 광경이 백민에게는 이상하게 든든했다.
◆
해질 무렵, 고륜이 백민을 갑문실 위 전망 통로로 불렀다. 중앙 도크의 유룡과 닫힌 갑문, 그 너머 얇게 보이는 바다의 어둠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이 항구는 배를 숨기기 위해 만든 곳이 아니네. 마지막까지 사람을 내보내기 위해 만든 곳이지. 봉인의 문이자 탈출의 문.”
“그래서 위험하다는 말씀입니까?”
“문은 닫는 자의 마음보다 여는 자의 욕망을 더 잘 기억하거든.”
“그럼 이 문을 여는 순간, 다른 누군가도 같은 길로 들어올 수 있다는 뜻이네요.”
“문은 언제나 양쪽으로 열리지. 그걸 잊지 않는 자만이 문지기가 될 수 있네.”
고륜이 내려간 뒤, 백민은 홀로 유룡 안쪽으로 들어갔다. 선실은 아직 정리 중이었다. 벽에는 접이식 침상이 붙어 있었고, 함교의 조종대와 항법대와 광휘은신 제어대는 서로 등을 맞댈 만큼 가까웠다.
“한 사람이 실수하면 옆 사람 팔꿈치가 바로 부딪히겠네.” 백민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여기 다 같이 타면 누가 코를 골아도 다 알겠어.”
큰 나라를 짊어진다는 말보다, 이 좁은 배 안에서 사람들의 잠자리를 지킨다는 일이 더 실감 났다.
가장 깊은 곳에 반신형 조종갑주가 있었다. 가슴 안쪽에는 이름을 새기는 은판 다섯 장이 비어 있었다. 백민은 첫 번째 은판에 손바닥을 덮었다. 아직 아무도 잃지 않았는데도 가슴이 무거웠다.
지금은 이름을 새길 때가 아니라 이름을 지킬 때다. 그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다.
“형.”
비호가 선실 입구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밥 먹어. 민초아 누나랑 서란 누나가 식탁 차렸어. 고륜 어르신이 그러는데, 밥 식으면 갑문보다 무서운 게 여자 둘이래.”
“단비호.”
멀리서 서란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비호가 즉시 입을 다물었다.
격납고 동쪽 벽 아래 널판 위에 말린 생선과 보리밥, 뜨거운 국, 절인 무, 누군가 어렵게 구해 온 작은 귤 몇 개가 올라와 있었다. 머리 위로 녹슨 크레인이 그림자를 드리웠지만, 식탁 둘레에서는 이상하게 집 냄새가 났다. 천부항의 첫 식탁이었다.
“문을 지키다 문 안에 묻힌 자들에게.” 고륜이 첫 잔을 바닥에 부었다.
“검령성에.” 무겸이 두 번째 잔을 남쪽으로 들었다.
“살아 있는 자들이 죽은 자의 몫까지 바르게 쓰기를.” 청우는 잔 대신 두 손을 모았다.
비호가 네 번째 잔을 들고 한참 망설였다.
“안 터지는 노심을 위하여.”
그제야 모두가 웃었다.
“초아 누나는? 누나도 한마디 해야지.” 비호가 귤을 반으로 쪼개 한쪽을 내밀었다. “자, 반쪽.”
“정비공이 귤을 나눠 줘요?”
“내 몫은 벌써 먹었어. 그러니까 이건 덤이야.”
초아가 귤 반쪽과 잔을 번갈아 내려다보다 조용히 말했다.
“저는…… 오늘 웃은 얼굴들을 기억해 둘게요. 그것도 기록이니까.”
“50년 전 봉인 부대의 첫 점검 때 말이다, 어떤 신참이 긴장한 나머지 자기 신발을 바다에 던졌지.” 고륜이 말했다.
“그게 왜 웃긴데요?”
“그 신참이 나였다.”
비호가 국을 뿜을 뻔했다. 서란은 웃으면서도 백민의 붕대를 한 번 더 확인했다.
“손목은?”
“괜찮…… 아니, 아직 좀 따끔해.”
“그래. 그렇게 말하는 거야. 그래야 내가 뭘 할지 알지.”
무겸은 입구 쪽 그림자가 길어질 때마다 자연스럽게 창에 손을 얹었다. 청우는 등잔불이 흔들리는 방향으로 바람길을 짚었다. 모두 쉬는 듯했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항구를 지키고 있었다.
◆
밤이 깊자 비호가 마지막 순찰을 자청했다.
“형은 쉬어. 내가 안 보면 잠이 더 안 와.”
“혼자 괜찮겠어?”
“서쪽 통로 한 바퀴 돌고 올 거야. 금방.”
“등잔 가져가. 중간에 꺼지면 소리 질러.”
“나 소리 잘 질러!”
소년의 발소리가 서쪽으로 멀어졌다. 백민은 유룡의 선체에 등을 기댔다. 배의 박동은 낮보다 안정되어 있었다. 그때 마른 먼지 위를 누군가 조심스럽게 밟는 소리가 통로 저편에서 들렸다. 선체의 박동이 조금 늦었다. 마치 배가 먼저 들은 듯했다.
“형.”
어둠 속에서 비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장난기가 완전히 사라진 목소리였다.
백민이 검집을 쥐고 서쪽 통로로 달려가자, 비호가 배수로 옆에 웅크리고 있었다. 등잔빛 아래 먼지 위로 발자국이 이어져 있었다.
“한 사람이야. 가볍고 빠르고, 발끝을 안쪽으로 접어 디디고. 우리 중엔 이렇게 걷는 사람 없어.”
“어디서 시작됐어?”
“서쪽 창고. 갑문실 쪽으로 이어졌어.”
“등잔 낮춰. 발자국 흐트러지지 않게.”
“알아, 형. 나도 이 정도는 알아.” 비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백민은 발자국 옆에서 얇은 침 같은 금속 조각을 주워 들었다. 끝에 청색 밀랍이 조금 묻어 있었다.
“청색 밀랍. 황실 내성의 문서 봉인에 쓰는 색이야. 낮에 맡은 정제유 냄새랑 같은 데서 온 거다.”
비호가 침을 삼켰다.
“형, 이거…… 누가 우리보다 먼저 갑문실에 들어갔어.”
그 순간, 잠겨 있어야 할 수압 고정축 하나가 스스로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끼이이익. 아주 느리게, 아주 확실하게.
그리고 천부항의 거대한 문이, 안쪽에서 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