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東海)의 실마리
海東曆: 201년 11월 9일 · 천부항(天府港) 지하 선거 · 시점: 백민
절벽 속에 묻힌 항구는 밤새 잠들지 못한 짐승처럼 낮은 숨을 토해 냈다. 천장 높은 선거의 어둠 속에 황동 가스등이 줄지어 매달려 있었고, 그 불빛 아래 청룡 一號 유룡(幼龍)의 날렵한 선체가 드러나 있었다.
접힌 추진익은 아직 바닷바람을 한 번도 맞아 보지 못한 비늘처럼 닫혀 있었다. 백민은 함교 아래 점검로 난간에 손바닥을 얹었다. 손바닥 아래로 돌아오는 진동은 자기 심장의 반 박자 뒤를 따라오는, 어딘가 어린 박동이었다.
“노심 안정, 여덟 번 중 일곱 번은 정상!”
아래층 기관실에서 단비호가 소리쳤다. 사흘째 제대로 못 잔 얼굴이었지만 눈만은 불꽃을 먹은 듯 밝았다.
“한 번은?”
“한 번은 배가 성질을 부렸어. 정확히는 조류 항법 자리야. 비어 있는 자리인데도 자꾸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고 해. 이상하지? 아직 바다에 나간 적도 없는 녀석이 물 냄새를 알아.”
“조류를 읽는 코테르(機核) 자리 말이지.”
“응. 결함이라기보다…… 누가 앉아야 할 빈자리 같아. 아직 안 온 사람 자리.”
백민은 대답하기 전에 숨을 한 번 골랐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먼저 이름 붙이지 말자. 지금 필요한 건 출항이야. 갑문은 어때? 어젯밤 세 번째 시험 개방이 끝났는데.”
“끝나고도 아직 다 못 쉬었어. 사슬이 움직일 때마다 늙은 뼈 맞물리는 소리가 나. 저 소리가 안 나는 날이 오면 그게 더 무서울걸.”
◆
선거 동쪽 끝, 거대 갑문 앞에서는 고륜이 낮게 무릎을 접고 앉아 제어석의 녹슨 숫자판을 손톱으로 긁어내고 있었다. 숫자가 드러날 때마다 민초아가 기름 묻힌 천으로 닦았다.
“어르신, 이 순서를 정말 다 기억하세요?”
“봉인 부대가 남긴 암호식 밸브요. 손가락은 굽어도 순서는 안 굽었소.”
곁에서 눈을 감은 채 맨발로 바닥의 떨림을 재던 청우가 입을 열었다.
“바다 쪽에서 습한 기운이 밀려옵니다. 문이 열릴 때를 아는 모양입니다.”
“오늘 저녁 안에 첫 갑문은 완전히 열린다.” 고륜이 숫자판을 후 불었다. “문제는 두 번째 갑문이오. 첫 문이 열리면 바닷물이 안쪽으로 들어오고, 그때부터는 사슬이 물살을 먹소. 한 번 어긋나면 사람 힘으로는 못 잡아.”
“어긋나면 어떻게 되는데요?”
“그때는 사람이 아니라 바다가 순서를 정하지.”
갑문 위 보행교에서는 장무겸이 창을 어깨에 걸치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창끝 아래에는 짧은 보조날이 새로 달려 있었다.
“침투할 수 있는 통로는 일곱 곳으로 좁혀 표시해 뒀다. 나흘 전 발자국이 서쪽 창고에서 갑문실로 이어졌던 길도 그중 하나다.” 무겸이 말했다. “좁은 곳에선 창이 너무 길다. 찌르지 못하면 걸고, 휘두르지 못하면 찍어야지.”
“손목은요, 무겸 오라버니? 날 차가워지면 뻐근하다면서요.”
의무실 문턱에 선 유서란이 물었다.
“버틸 만하다.”
“그 말, 약장에 적어 둘게요. ‘버틸 만함’이라는 약은 없다고.”
서란은 초아가 밤새 이름표를 붙인 약장을 훑었다. 지혈분, 화상고, 기맥 안정침, 압력성 내상용 탕약, 코테르 열반응 억제액.
“어느 것도 충분하지 않네.”
“제가 적은 수량이 틀렸나요?”
“아니, 정확해서 문제야. 모자란다는 게 정확히 보이잖아.” 서란이 바늘 주머니를 허리에 묶었다.
“마지막 고비에는 늘 사람이 숨어들지.” 고륜이 숫자판에서 눈을 떼지 않고 중얼거렸다. “준비가 끝나 갈 때가 제일 위험하오.”
“어르신, 그런 말은 소리 내서 하시는 게 아니에요.” 초아가 목을 움츠렸다.
땅, 땅. 기관실에서 망치 ‘땅콩’이 강판을 두 번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곧 비호가 점검로로 뛰어올라 왔다.
“형.”
장난기가 완전히 사라진 목소리였다.
“둘째 울림이 반 박자 늦게 돌아왔어. 서쪽 통로 말고, 갑문 아래쪽 배수로. 누가 있어. 너무 가볍고 일정해. 일부러 소리를 죽이는 발이야.”
“몇이야?”
“하나가 아니야. 근데 하나처럼 맞춰서 걸어.”
백민이 손짓하자 무겸이 창을 돌려 잡았다. 서란은 의무실 문을 열어 둔 채 약상자를 들었고, 민초아가 말없이 등불을 껐다. 어둠이 한 걸음 더 내려앉았다.
◆
갑문 아래 배수로에서 짧은 쇳소리가 났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이런 오래된 항구에서는 작은 쇳소리가 큰 재앙의 시작이 되곤 했다. 서쪽 보조 통로의 벽이 안쪽으로 찌그러졌다.
“팔꿈치 안쪽에 톱니날! 감응등이 세로로 세 개야!”
철판 뒤에 몸을 접고 있던 소형 자동병 하나가 기어 나왔다. 사람보다 키는 낮고 팔은 길었다.
“목인도 정규 철인도 아니다. 백유강의 사설 공방 물건이다!” 무겸이 보행교에서 외쳤다.
백민은 검을 뽑지 않고 몸을 틀었다. 톱니날이 옆구리를 스치며 난간에서 불꽃이 튀었다. 뒤꿈치로 무릎 관절을 찍자 쇠관절이 꺾이며 기체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위!”
서란의 외침과 함께 보행교에서 두 번째 자동병이 떨어졌다. 무겸의 창끝이 허공에서 그것을 받았다.
“윽, 무겁군……! 속에 납이라도 채웠나!”
창대가 휘어질 만큼 무거운 충격이었다. 무겸은 이를 악물고 몸통을 벽에 처박았다. 터진 황동관에서 증기가 뿜어졌다.
“무겸 형,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말고 앞이나 봐라!”
“갑문 축!” 고륜이 외쳤다.
셋째와 넷째는 싸우러 온 것이 아니었다. 낮은 자세로 바닥을 미끄러지듯 도르래 축을 향해 달렸다. 가슴 안쪽의 붉은 빛이 빠르게 밝아졌다.
“자폭 장치야! 노리는 건 배가 아니라 문이야!” 비호가 소리쳤다. “문만 무너지면 유룡은 다시 지하 무덤에 갇혀!”
“베지 마라, 백민! 거기서 터지면 축이 날아간다!”
“압니다!”
“여기서 베면 폭발이 곧장 축을 때려. 그러니까 베지 않는다.”
백민은 숨을 바꾸었다. 청염을 검날 끝이 아니라 검등 전체에 얇게 폈다. 베는 날이 아니라 미는 등이었다.
“비호야, 투입구!”
“열어 놨어!”
“받는다!”
뛰어오른 첫 자폭병을 검등이 받아 냈다. 청염이 폭발력을 삼키듯 푸르게 부풀더니 자동병이 옆 통로로 튕겨 나갔다.
“들어갔어, 형! 닫는다!”
폐자재 투입구 속에서 불꽃이 터지고, 천장 먼지가 눈처럼 쏟아졌다.
“둘째가 축 6미터 안이야!”
“팔을 꿰뚫었는데도 빛이 안 꺼진다!” 무겸이 창을 비틀며 외쳤다.
“기계 감응부를 기맥처럼 누를게! 숨 한 번 쉴 시간이야, 그 이상은 못 벌어!”
서란의 침 세 개가 자동병의 가슴 틈에 박혔다. 붉은 빛이 아주 짧게 늦춰졌다. 청우가 합장했다가 바닥을 누르자 물웅덩이가 원형으로 떨리며 놈의 발목을 붙잡았다.
“지금입니다.”
백민의 검등이 다시 푸른 파도처럼 밀려 나갔다. 자동병은 축에 닿기 직전 보이지 않는 벽에 맞은 듯 뒤로 튕겨 나가 폭발했다.
폭발은 갑문을 비껴갔지만 압력관 세 줄을 찢어 놓았다. 고온의 증기가 통로를 순식간에 채웠다.
“초아 낭자, 숨 들이쉬지 마시오! 폐를 긁는 열이오!”
“콜록…… 어르신, 괜찮아요, 저 숨 참을 수 있어요!”
“참지 말고 물러나시오! 지금은 낭자가 증인 노릇 할 때가 아니오!”
고륜이 기침하는 민초아를 팔로 막아 세웠다. 비호는 자기 몸보다 큰 공구가방을 끌고 나와 바닥에 엎드렸다.
“왼쪽 둘째 관은 버려! 오른쪽 아래 관을 막아야 해!”
“너는 뒤로 가!”
“뒤로 가면 배가 뒤로 가! 형, 나 믿어!”
백민은 더 말하지 않았다. 믿는다는 말은 때로 붙잡지 않는 것이다. 그는 비호 앞에 몸을 세워 날아드는 철편을 막았다. 뜨거운 관에 닿은 소년의 손이 하얗게 달아올랐다.
“손 내밀어.” 서란이 이를 악물고 손등에 냉각 침을 찔렀다. “통증을 죽이는 침이 아니야. 손이 움직일 시간만 조금 벌어 주는 거야. 빨리!”
비호가 죔쇠를 세 번 돌렸다. 증기의 방향이 바뀌었다.
“됐어! 이제 축 쪽으로 압력 안 밀어!”
그러다 비호가 다시 바닥에 귀를 댔다.
“잠깐. 사람 심장도 아니고 자동병 관절도 아닌 박자가 하나 더 있어.”
◆
진짜는 자동병 뒤에 있지 않았다. 배수로 아래 물이 반쯤 찬 암거를 따라 제어석 뒤로 접근하는 자가 있었다.
“밑이야! 제어석 밑!”
방수포가 벗겨지며 몸이 솟구쳤다. 갈고리 발이 벽을 찍었다.
“다리가…… 무릎 아래가 황동 갈고리예요!” 민초아가 외쳤다.
“입에 문 관 봐! 저 휘파람이야! 자동병들이 명령이 아니라 저 진동을 따라 움직인 거야! 전부 미끼였어!”
얇은 절단선이 고륜의 목을 향해 날았다.
“어르신, 피하십시오!”
“밸브를 놓으면 문이 틀어진다!”
노장은 마지막 잠금 밸브에서 왼손을 떼지 않았다. 대신 보행교에서 무겸이 뛰어내렸다.
“어르신 목은 제가 지킵니다!”
창대가 절단선을 감아채자 불꽃이 튀며 선이 끔찍하게 울었다.
“비켜 서라, 이건 베이는 선이 아니라 썰리는 선이다!”
무겸이 몸을 회전시켜 방향을 틀자 선이 옆 돌기둥을 베고 지나갔고, 돌가루가 비처럼 떨어졌다.
백민은 검을 짧게 잡고 파고들었다. 첩자는 갈고리 발로 벽과 바닥을 번갈아 찍으며 시야 바깥을 오갔다.
“빠르다. 한쪽 다리를 잃은 사람의 움직임이 아니야.”
“잃은 걸 무기로 만든 놈이다. 얕보면 목이 달아난다!”
“좁은 데선 본국검 실린더를 다 못 울린다. 발을 짧게 써라!” 무겸이 외쳤다.
“백유강이 보냈나.”
가면의 벌어진 입이 웃는 듯 보였다. 웃음소리는 피리관 옆 작은 구멍에서 새어 나왔다.
“보냈다? 아니. 나는 초대받았지.”
“무슨 뜻이냐.”
“깨어난 것은 언젠가 회수된다. 태사령께서는 늘 그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문을 열어 주기를 기다렸을 뿐이야.”
다정에서 들었던 백유강의 마지막 인사가 떠올랐다. 축하한다, 기다리겠다. 전함을 두려워하는 자가 아니라 주인을 자처하는 자의 말이었다.
“형, 이놈 시간 끌어!” 비호가 외쳤다. “계속 우리 움직임만 보고 있어!”
“알아. 갑문은 실패해도 되는 임무야. 성공하면 유룡을 가두고, 실패하면 우리 동선이랑 반응 속도, 방어 습관을 가져가겠지.”
“어느 쪽이든 백유강에겐 정보가 남는다는 말이로군. 이기든 지든 저놈 주인은 손해 볼 게 없다.” 무겸이 창을 고쳐 잡았다.
“그러니까 싸움의 방식을 바꿔야 해요.”
백민은 일부러 한 걸음 물러났다.
“물러서는 거냐?” 가면 속에서 비웃음이 흘렀다.
“아니. 바닥을 빌리는 거야.”
절단선이 낮게 날아와 발목을 노리는 순간, 그는 피하지 않고 검끝을 바닥에 박았다. 청염이 강판 아래로 스며들어 진동을 거꾸로 밀어 올렸다. 갈고리 끝이 미끄러졌다.
“뭐……!”
“지금이다, 눌러라!”
무겸의 창대가 첩자의 어깨를 벽에 눌렀고, 청우의 염주가 절단선 장치를 감았다.
“관절 윗부분! 피랑 기계가 맞붙은 자리!”
서란의 침이 접합부에 꽂히자 첩자의 몸이 굳었다. 본국검 등면이 그의 가슴을 바닥으로 찍어 눌렀다. 피리관이 입에서 떨어졌다.
자동병들의 감응등이 동시에 꺼졌다.
◆
전투가 끝난 뒤에도 천부항은 한동안 전투를 계속했다. 찢어진 압력관은 신음했고 갑문 축은 불규칙하게 떨렸다.
“형, 방금 바닥 울린 거 뭐야? 갈고리가 미끄러졌잖아. 내 망치는 되돌아오는 소리를 듣는 건데, 형 청염은 되돌아오는 길을 바꿨어.”
“나중에 수첩에 적어. 지금은 축부터. 충격 먹어서 불규칙하게 떨고 있어.”
“축은 내가 잡을게. 손은 괜찮아.”
“괜찮다는 말은 진맥한 사람이 하는 거라고 몇 번을 말해.” 서란이 잔소리를 쏟아내면서도 손은 쉬지 않았다.
청우는 터진 자동병 잔해 앞에서 짧은 독경을 올렸다.
“스님, 그건 기계예요.” 민초아가 젖은 수건을 든 채 물었다.
“누군가의 욕망에 끌려 움직인 물건에게도, 줄 수 있는 예는 있습니다.”
백민은 포박된 첩자 앞에 쪼그려 앉아 가면을 벗겼다. 생각보다 젊은 얼굴이었다.
“뺨에 화상이 오래됐네요. 왼쪽 눈 밑에는…… 낙인?”
“백유강 공방 표식이다.” 무겸이 말했다.
“가문 표식이 아니라 소유 표식이네요. 사람을 도구로 쓰는 자들은 왜 도구에까지 자기 이름을 새길까요.”
백민의 목소리에는 증오보다 피곤함이 먼저 묻어났다.
“검령성의 목인 병단도, 황궁 서고의 기록도, 지금 눈앞의 이 사람도…… 같은 손이 모양만 다른 사슬을 만들고 있었군요.”
“그래서 끊어야 하는 것이다.” 무겸이 낮게 답했다.
“조하륜은 어디 있나.”
첩자가 피를 삼키고 웃었다.
“이미 바다를 건넜다.”
“어느 바다.”
“동해. 붉은 화산재가 물 위에 뜨는 곳. 검을 쓰는 무녀들이 죽은 자의 이름을 노래한다는 섬.”
고륜의 얼굴이 굳었다. 민초아가 숨을 멈추었다.
“용진도 어부들이 화롯가에서 하던 얘기예요.” 초아가 속삭였다. “동해열도(東海列島) 바깥쪽 붉은 섬(赤島). 검은 밤에도 바다가 붉게 보이고, 해적과 무녀의 경계가 희미하다는……”
“그때는 먼 이야기였지.” 고륜이 중얼거렸다.
무겸이 첩자의 젖은 방수포 안쪽에서 기름종이 꾸러미를 꺼냈다.
“항로도 한 장, 그리고 금속 패. 조하륜의 이름은 없다. 대신 흑영이 쓰던 검은 바늘 문양이 있고, 동해 쪽으로 점선이 이어진다. 끝에 붉은 잉크로 작게……” 무겸이 글자를 읽었다. “적도(赤島).”
비호가 항로도를 바닥에 펼쳤다. 가스등이 흔들리자 기름 먹인 종이 위의 선들이 물살처럼 번졌다. 소년의 손가락이 물길을 세 번 훑었다.
“해류, 암초, 기계중원 초계선이 도는 물길, 해적 등불 자리까지 다 있어. 조류 항법구 없이 가면 오래 걸리지만, 이 지도를 쓰면…… 아니, 이 지도만 믿으면 죽어. 너무 친절해. 위험한 길이 빠져 있어.”
“함정이겠지.” 고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함정이라는 걸 알고 보는 지도는 길이 되기도 하오.”
“함정이라면 이 지도를 왜 첩자 품에 넣어 뒀는지부터 따져야 합니다.” 무겸이 말했다.
“우리가 읽으라고요. 읽고 이 길로 오라고.”
“그렇다면 가지 않는 쪽이 낫지 않겠냐.”
“조하륜이 저 너머에 있어요. 가지 않을 수가 없죠.”
닫힌 첫 문 너머에서 바닷물이 낮게 밀려왔다 빠지며 철문을 아주 작게 두드렸다. 바다는 기다리지 않는다. 사람만 망설인다.
“죽일 거야?”
민초아가 포박된 첩자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이자는 태사령의 칼끝이지, 칼을 쥔 손은 아니야. 칼끝을 부러뜨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백민이 말했다. “살려 보낸다.”
“갑문을 무너뜨리려던 자다. 우리를 죽일 수도 있었고.” 무겸이 낮게 말했다.
“알아요, 형. 그래도 칼을 쥔 손을 잡으려면 칼끝만 꺾어서는 안 돼요. 검령성 이후로 죽일 수 있는 사람과 죽여야 하는 사람을 구분하려고 애써 왔어요.”
무겸은 더 반대하지 않고 창대를 고쳐 쥐었다. 고륜이 빵과 말린 고기, 물주머니를 가져왔다.
“먹고 가시오. 길이 멀 테니.”
첩자는 그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독 같은 건 없소. 있었다면 벌써 낭자가 이름표를 붙였겠지.”
“붙였을 거예요.” 민초아가 진지하게 답했다.
“살려 보내면 저쪽은 우리를 더 잘 알게 될 거야.” 서란이 첩자의 상처를 최소한으로 묶으며 말했다. “그래도 괜찮아?”
“이미 오늘 싸움으로 충분히 봤을 거야. 우리가 어떻게 막고 어디로 움직이는지. 대신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도 같이 가져가게 해야지.”
백민이 첩자 앞에 섰다. 포박은 풀지 않았다.
“돌아가 전해라. 회수하러 오는 날, 이 배는 물건이 아니라 사람들로 차 있을 거라고. 그리고 사람은 창고에 넣어 두었다가 꺼내 쓰는 물건이 아니라고.”
첩자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고개를 숙였다. 굴복인지 조롱인지, 살아남은 자의 계산인지 알 수 없었다.
“가자.”
청우와 무겸이 그를 폐기지 바깥 길목까지 끌고 갔다.
“한 번 돌아보더군요.” 돌아온 청우가 말했다.
“봤어요. 적의 얼굴이었지만, 두려워하고 있었어요. 태사령에게 돌아가는 자의 두려움.”
◆
해가 기울 무렵, 첫 갑문 안쪽으로 검푸른 물이 얇게 스며들었다.
“형, 봐. 배 밑에 물그림자 생겼어.” 비호가 붕대 감긴 손으로 도크 바닥을 가리켰다.
“물이 벌써 배 모양을 기억하기 시작했네.”
“그럼 배도 물 모양을 기억해야지. 이제 진짜 나갈 때가 된 거야.”
“출항은 닷새 뒤다.” 백민이 말했다. “갑문 두 번째 잠금, 외피 염분 적응, 광휘은신 지속 시험, 부상자 회복. 그다음은 동해야. 조하륜, 그리고 붉은 섬.”
“부상자 회복이면 형 손목이랑 내 손이랑 무겸 형 손목까지 다 들어가는 거지? 그럼 회복 목록이 정비 목록보다 길겠다.”
붕대 감은 손을 흔드는 비호를 서란이 한 대 칠 듯 노려보다가 조용히 웃었다.
“민초아, 들은 소문은 전부 적어 둬.”
“벌써 적었어요. 검을 쓰는 무녀, 붉은 화산재, 해적의 등불, 죽은 자의 이름을 노래하는 바람.”
“동해까지는 조류 항법구 없이 별빛이랑 해류 냄새로 가야 해요.” 백민이 고륜을 돌아보았다. “어르신 기억이 우리 항법구예요.”
“늙은 기억에 목숨을 걸겠다니 겁도 없군.”
고륜이 닫힌 철문 너머의 물소리를 들었다.
밤의 널판 식탁은 전날보다 조용했다. 음식도 웃음도 적었지만 아무도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바다 앞에서 처음 올릴 의식은 짧게 하겠습니다. 물에게 길을 묻고, 먼저 간 이들에게 인사하는 정도면 됩니다.”
“경계는 오늘 밤 둘씩 돈다. 어르신은 내일 새벽조입니다.” 무겸이 순번표를 내밀었다.
“늙은이를 새벽조에 넣다니, 마음에 드는 배려로군.”
“밥 먹을 때 칭찬하지 마세요, 어르신. 무겸 형 귀 빨개져요.”
“단비호.”
청우가 설명하는 사이 비호가 꾸벅 졸았다. 국그릇으로 떨어지기 직전의 머리를 서란이 손바닥으로 받아 냈다.
“국에 코 박고 자면 내일 아침까지 국물 냄새 나.”
“……안 잤어. 눈 감고 듣는 중이야.”
“그래, 코 박고 듣는 중이었겠지.”
민초아가 작게 웃었다. 오늘의 모든 폭발음보다 오래 남는 소리였다.
늦은 밤, 백민은 여섯 명이 지나가면 어깨가 닿는 좁은 복도를 걸었다. 큰 배를 상상한 사람이라면 실망했을 좁음이었지만, 서로의 숨소리가 닿는 배가 그는 마음에 들었다.
기관실에는 비호가 연필을 쥔 채 잠들어 있었다. 펼쳐진 수첩에 자폭까지 걸린 시간, 휘파람 진동수, 검등의 각도가 눈금으로 적혀 있었다.
“피랑 불로 겪은 싸움이 이 아이 손에선 도면이 되는구나.”
덮으면 기록이 번질 것 같아, 백민은 수첩 대신 소년의 어깨에 작업복을 덮어 주었다.
“형은 안 자?” 잠결에 비호가 웅얼거렸다.
“조금만 더 보고. 너는 자. 내일 축 다시 잡아야 하잖아.”
“응…… 형도 몸을 부품으로 쓰지 마. 서란 누나가 그랬어.”
의무실에서는 서란이 빈 침상 세 개에 붕대를 미리 놓고 있었다. 들어가서 괜찮으냐고 물으면 그녀는 괜찮지 않은 것을 괜찮다고 할 것이다. 백민은 문틀을 두 번 두드렸다.
“묻지 마. 물으면 괜찮다고 대답해야 하니까.” 서란이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안 물었어, 누나.”
“그래. 그럼 두드린 걸로 인사받은 걸로 할게. 너도 자.”
두 사람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 짧은 인사가 긴 항해의 첫 규칙이 되었다.
자정 무렵, 함교에서 항로도를 접으려던 백민의 눈에 바닥의 황동 부품 하나가 들어왔다. 첩자의 피리관인 줄 알았던 것이었다.
딸깍. 딸깍. 딸깍.
누군가 멀리서 손톱으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 같았다. 황동 껍질 안쪽에서 푸른 불씨가 켜지고, 갈라진 구멍 사이로 조금 늦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었다.”
백민의 손끝이 검자루를 움켜쥐었다. 갑문 너머의 바다가, 이번에는 세 번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