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점 · 강민 — 균열·낙인 단계

출항, 광휘은신의 첫 항해

第1部 · 話 43 · 검령성 · published

海東曆: 201년 11월 14일 · 시점: 백민

천부항(天府港)의 아침은 바다보다 먼저 쇠 냄새로 열렸다. 굵은 황동 배관들이 밤새 모은 압력을 토해 내고, 벽을 타고 흐른 응결수가 검은 석재 바닥 위에 푸른 김을 피워 올렸다.

천장의 별자리 표식은 금박이 벗겨졌어도, 북두의 끝에서 동해(東海)의 물길로 이어지는 홈만은 그대로였다.

그 아래에 청룡호(靑龍號) 一號 유룡(幼龍)이 있었다. 도시를 태우는 거함이 아니라, 숨을 죽이고 적의 눈꺼풀 아래를 스치는 칼끝이었다.

“출항 준비, 마지막 확인!”

명령대에 엎드리다시피 선 단비호(段飛虎)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밤새 물 한 모금 못 마신 탓이었다.

“갑판 봉인 이상 없음. 좌현 보조 추진판 접힘 각도 정상. 우현 냉각 배관 서른일곱 도. 노심 압력은 아직 조금 높아. 형, 아니, 백민 형. 지금 숨 깊게 들이마시면 안 돼. 형 가슴 박동이 올라가면 노심도 같이 올라.”

“숨도 마음대로 못 쉬는 배라니.”

“그러게 누가 배랑 심장을 맞대래?”

백민은 피식 웃고 함교 중앙의 동조석에 손을 얹었다. 은빛 감응판 아래에서 유룡의 바닥이 낮게 떨었다. 잠에서 깬 짐승의 첫 울음 같았다.

“들려?” 비호가 속삭였다.

“들려. 기분 나쁜 소리는 아니야.”

장무겸(張武謙)은 사다리 앞에서 창 자루를 묶으며 함교 안을 둘러보았다. 싸움 전 병사들의 호흡을 세던 습관이었다.

“다들 제 위치에 섰나.”

“노심실 통로 옆이에요. 언제든 들어갈 수 있어요.” 유서란(柳瑞蘭)이 의공함을 고쳐 메자 손끝에 백광(白光)이 옅게 머물렀다.

“함미 관측창이오.” 눈을 감은 청우(淸雨)가 답했다.

“나는 협수로 수심을 다시 계산하는 중이오. 200년 전 봉인 때 남겨진 기록이라 믿을 수가 없어서.” 고륜(高崙)이 해도판에 팔을 얹었다.

“저는 첩자한테서 나온 항로도 빈칸을 어부 매듭이랑 맞춰 보고 있어요. 마을 노래에 물길 얘기가 많거든요.” 민초아(閔初娥)가 매듭 표식을 펼쳤다.

좁은 선실과 낮은 천장, 뜨거운 배관 냄새와 식은땀 냄새. 누구도 멀리 물러설 수 없는 배였다.

“숨소리 다 들리네.” 비호가 중얼거렸다.

“네 숨소리가 제일 크다.” 무겸이 받았다.

“그래도 같이 있다는 건 확실하지.”

누군가의 떨리는 숨이 곧바로 다른 사람의 귓가에 닿는 배. 그래서 오히려 함께 있다는 사실이 분명했다.

“광휘은신(光輝隱身) 기본값 읽는다.” 비호가 노트를 넘겼다. “시각 은폐 ON, 외피 반사각 조정 ON, 열 분산 절반 출력, 음향 억제 불안정, 진동 은폐 불완전. 갑문 통과 중 은신 해제 금지. 협수로에서 충돌 위험이 생기면 백민 형 명령으로 부분 해제 가능.”

“부분 해제하면 누가 볼 수 있지?” 무겸이 물었다.

“눈 좋은 놈이면, 배가 있어야 할 자리에 빛이 이상하게 접히는 걸 알아차릴 거야.”

“그 정도면 본 거다.”

비호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서 안 할 거야.”

“문이 열리면 바로 바다가 아니오.” 고륜이 해도판을 짚었다. “갑문을 나가 습지와 버려진 염전을 미끄러져 내려간 뒤, 해안 절벽을 꿰뚫은 협수로로 들어가야 하오. 그 끝에야 동해가 있소.”

검은 금속문 네 장이 겹쳐 닫혀 있었다. 문마다 청룡 비늘을 본뜬 돌기가 박혀 있고, 그 사이로 묵은 염분이 흰 꽃처럼 피어 있었다.

“열어라.”

쇠못이 빠지고 가운데 잠금축이 돌았다. 200년 동안 움직이지 않았던 균형추가 내려가자 항구 전체가 깊은 배 속처럼 울렸다.

“새들 봐! 아무것도 없는 데서 튕겨 나가!” 비호가 외쳤다. “먼지도 외피를 피해서 흘러. 우리, 지금 안 보이는 거야!”

돌벽 틈에서 날아오른 새들이 눈앞의 빈 공간에 부딪히듯 방향을 틀었다.

“우리는 바람이 됐네요.” 민초아가 작게 숨을 삼켰다.

“바람은 흔적을 남기지 않소.” 청우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우리는 아직 흔적을 남기오. 그러니 바람이 되려면, 먼저 숨소리부터 줄여야 하오.”

함교 안에 웃음이 아주 짧게 스쳤다.

“짧아도 필요한 웃음이네요.” 서란이 낮게 말했다.

앞유리 너머로 절벽과, 멀리 검령성이 있을 방향의 산맥이 겹쳐 보였다. 무너진 도장. 설무진(雪武陳)의 마지막 눈빛. 밤마다 콧등의 흉터 속에서 되살아나는 푸른 불꽃.

“남쪽이냐.” 무겸이 낮게 물었다.

“네. 인사를 해야 하는데, 손이 묶여서요.”

“가는 길에 하면 된다. 돌아올 때 해도 되고.”

백민은 대신 숨을 고르게 내쉬었다. 노심이 그 숨을 따라 조금 낮아졌다.

“간다.”

“아직 바닥 진동밖에 안 바뀌었는데…… 벌써 움직이는 거예요?” 민초아가 앞유리를 보았다.

유룡은 선저 밑의 저압 수막과 청염 추진을 번갈아 쓰며 습지 위를 미끄러졌다.

“바퀴가 없는데 흙을 안 긁네요.” 민초아가 앞유리에 이마를 댔다. “갈대만 한쪽으로 누워요. 들쥐들이 굴에서 튀어나와서 길을 잃었고…… 저기 농가 아이가 새 떼를 가리키는데, 어머니가 문을 닫아요.”

“바람이 세다고 생각했겠지. 그게 은신이다.” 무겸이 말했다.

동조가 깊어지면서 선체의 무게가 백민의 어깨로 쏟아졌다. 추진판이 펴질 때마다 양팔이 떨렸고, 왼쪽 가슴 안쪽에서 낯익은 열이 올라왔다.

“윽……”

“방금 소리 냈지.” 서란이 노심실 쪽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통증?”

“견딜 만해.”

“견딜 만하다는 말은 의공사에게 아무 쓸모가 없어. 숫자로.”

“열 중 넷.”

“거짓말이면 다섯이고, 진짜면 셋이네.”

“셋 반.”

“그 정도로 계속. 넷을 넘으면 바로 말해. 참는 건 칭찬받을 일이 아니니까.”

“넷 넘으면 말하라는 건 약사 누나 방식이고, 정비사 방식은 셋 반부터 강제로 출력 낮추는 거야.” 비호가 명령대 밑에서 투덜거렸다. “백민 형, 내 말 안 들으면 노심실 문 잠가 버릴 거야.”

“그 문은 안쪽에서 잠기는 게 아니잖아.”

“오늘 아침에 바꿨어.”

“잘했다.” 무겸이 낮게 웃었다.

◆

습지 끝에서 절벽 두 줄기가 바다를 향해 뻗어 있었다. 검은 바위가 벌린 입 같은 협수로였다. 고륜의 얼굴이 굳었다.

“가장 좁은 곳 폭 육십팔 미터. 유룡 외피 폭은 추진판 접은 상태에서 일곱 미터. 수치로는 충분하오.” 고륜이 해도판을 두드렸다. “문제는 바닥이오. 200년 동안 수심이 얼마나 변했는지 모르오. 썰물까지 두 시간 남짓, 그 안에 못 들어가면 물길이 배 밑을 긁을 거요.”

“이 매듭은 ‘밑돌이 운다’는 뜻이에요.” 민초아가 어부 매듭 하나를 들었다. “어부들이 배를 들이지 않는 물길이요. 바닥에 둥근 돌이 깔려 있어서 해류가 빠질 때 북처럼 울어요. 노랫말에 ‘북이 세 번 울면 용도 배를 접는다’고 했어요.”

“용도 배를 접는다라. 좋은 말은 아니군.” 무겸이 말했다.

“그래도 노래가 남았다는 건, 누군가는 지나갔다는 뜻이기도 해요.” 초아가 작게 덧붙였다. “살아서요.”

그때 청우가 눈을 떴다.

“앞쪽에 쇠 냄새가 섞였소. 바닷물과 녹, 그리고 기계중원의 흑유 냄새.”

“저도 들립니다.” 백민이 말했다. “바퀴와 피스톤이 물 위에서 억지로 박자를 맞추는 소리. 기계중원 초계선이에요. 셋…… 아니, 넷. 둘은 정박했고, 둘은 물길을 가로질러 순찰 중입니다.”

“봉쇄선이오.” 고륜이 해도판의 추를 옮겼다. “조하륜의 흔적을 쫓는 우리보다, 우리 출항을 기다리던 자가 더 빨랐군.”

“첩자가 하나만 있었던 게 아니네.” 비호가 이를 갈았다.

“지금 싸우면 해안 마을까지 말려들어.” 서란이 의공함 끈을 조였다. “신호탄 하나면 해룡성 쪽까지 움직일 거야.”

“광휘은신 유지.”

비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 상태로 들어가면 바닥 돌을 못 봐! 외피 반사 때문에 앞쪽 수면이 뒤틀려 보인다고.”

“눈으로 보지 않는다.”

“그럼 뭘로 봐?”

백민은 손바닥을 감응판에 더 깊게 눌렀다. 청염이 얇게 풀려 선체 바닥으로 내려갔다.

“배가 먼저 듣게 한다.”

유룡이 대답했다. 아주 낮은 울림이 선저 밑으로 퍼졌다가 물과 돌에 닿아 되돌아왔다.

“왼쪽 아래 깊은 홈. 오른쪽 앞 암초. 중앙은 물살이 빨라.” 백민이 눈을 반쯤 감고 읊었다.

“그게 다 들린다고?” 비호가 되물었다.

“손목을 짚으면 맥이 뼈와 살 사이의 길을 알려 주잖아. 바다도 배 밑의 길을 진동으로 알려 줘.”

“사람 맥 짚는 거랑 똑같이 말하지 마. 의공사 앞에서.” 서란이 말하면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좌현 추진판 다섯 도 접어.”

“다섯 도?”

“지금.”

비호가 이를 악물고 접점을 돌렸다. 유룡의 왼쪽이 살짝 가라앉았다가 곧 균형을 잡았다.

“들어간다! 첫 물살 온다, 다들 잡아!”

보이지 않는 배가 바위 사이로 들어서자 절벽 아래 물새들이 한꺼번에 날아올랐다.

“초계선 좌현, 신호등 올립니다!” 민초아가 외쳤다.

붉은 등 하나가 올라가고, 청동 나팔 소리가 바다 위로 퍼졌다. 이어 줄 달린 쇠창 같은 것이 날아와 물 위에 박혔다.

“감응추야! 끝에 코테르(機核) 조각이 박혔어. 가라앉으면서 주변 진동을 긁어모아!” 비호가 소리쳤다. “시각 은폐로는 못 속여!”

“무겸 형.”

“이미 올라갑니다.”

무겸은 난간에 한 손을 짚고 바깥으로 몸을 낮췄다. 두 번째 감응추가 날아오는 순간 장창이 반원을 그렸다. 금속음이 협수로 벽에 부딪혀 세 번 되돌아왔다.

“들켰다.” 고륜이 말했다.

“아직 위치는 모릅니다. 소리만 들었어요.” 백민이 이를 악물었다.

초계선들이 움직였다. 하나는 입구를 막았고, 다른 하나는 바깥 해류를 타고 옆으로 붙었다.

“포구는 안 여는군.” 고륜이 중얼거렸다. “협수로 안에서 쏘면 저들 머리 위로 바위가 쏟아지니.”

“대신 저거야!” 비호가 앞유리를 가리켰다. “고압 증기로 쇠구슬을 뿌려. 물에 반쯤 잠겨서 돌다가, 안 보이는 선체에 닿으면 튕겨 오르면서 위치를 알려!”

“우현 삼십 미터 앞, 감응구슬!” 민초아가 외쳤다.

“피하면 암초.” 비호가 말했다.

“부수면 소리.” 서란이 덧붙였다.

백민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가슴 통증이 넷에 가까웠다.

“멈춘다.”

“여기서?”

“셋을 세고 노심을 숨겨. 비호, 추진 끊어. 청우 대사, 선체 안의 호흡을 눌러 주십시오. 서란 누나, 노심실 열을 잡아 줘.”

“들어갈게. 열은 내가 누른다.”

서란이 노심실 문을 열자 뜨거운 김이 통로로 밀려 나왔다.

“열 올라온다. 조금만 눌러 줄게. 숨 쉬지 마, 비호.”

“안 쉬어!”

그녀의 손끝에서 백광이 실처럼 풀려 거칠게 뛰던 청염의 표면을 눌렀다. 청우는 주문 없이 합장했다. 젖은 종이가 불꽃 위를 덮는 듯한 고요가 선체에 퍼졌다.

“셋.”

유룡이 멈췄다. 모든 톱니가 자기 소리를 삼켰다. 백민은 자기 심장까지 멈춰야 할 것 같았다. 쇠구슬 하나가 유리 바로 앞을 스쳐 지나가자, 안쪽에 작은 물방울이 맺혔다.

“……안 닿았어.” 비호가 숨만으로 말했다.

그 40초가 40분처럼 길었다.

“나팔 소리가 바뀌었소. 우리가 사라졌다고 여기는 모양이오.” 고륜이 속삭였다.

“입구를 막던 배가 안으로 들어와요.” 백민이 눈을 감았다. “저 무게가 해류를 누르면…… 가운데에 빈 흐름이 생겨요. 아주 짧게.”

“그 길로?”

“지금.”

비호는 더 묻지 않았다. 접점을 쓸자 유룡은 멈춘 자리에서 소리 없이 옆으로 미끄러졌다.

“……물고기야. 우리 지금 물고기야.” 비호가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조용히.”

보이지 않는 선체가 초계선의 그림자 아래를 스쳤다. 선원 하나가 이상한 바람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지만, 그가 본 것은 갑자기 넘어진 물통뿐이었다.

“어이, 물통 또 쓰러졌다. 귀신 들렸나?”

“바다에서 귀신 얘기 하지 마라, 이 자식아.”

초계선 쪽에서 투덜대는 소리가 바람에 실려 건너왔다.

◆

그리고 밑돌이 울었다.

둥. 이어 두 번째 소리. 둥.

“수심 급락! 오른쪽 아래, 선저랑 바닥 사이 넷, 아니 셋 미터!”

“추진판 접어!”

“접으면 조향을 잃어!”

“접어!”

유룡이 급격히 기울었다.

“붙잡아요! 서란 누나, 벽!”

“잡았어! 아니, 미끄러졌어!”

“난간 찍었다! 나는 신경 쓰지 마라!” 갑판에서 무겸이 외쳤다.

백민은 단전의 청염을 선저로 밀어 넣었다.

“직접 밀면 폭주해. 태우면 들켜. 그러니까 불꽃이 아니라…… 막으로!”

얇게 편 청염에 팽창한 물이 유룡의 배를 손바닥만큼 들어 올렸다.

그 손바닥만큼이 살렸다.

선저가 암석 꼭대기를 긁었다. 끔찍한 소리와 함께 은신 외피가 한 줄로 찢어지며 푸른 빛이 번쩍였다.

“저들이 봤소!” 고륜이 외쳤다. “형체는 아니어도, 허공에 뜬 푸른 상처는 봤을 거요!”

“외피 손상! 우현 하부, 일곱 장 중 두 장 불안정! 형, 더 밀면 은신 깨져!”

“깨지지 않게 해.”

“말은 쉽지!”

비호가 명령대 밑 배관 사이로 기어 들어갔다.

“이거 우회시키면…… 아 뜨거! 아니야, 괜찮아! 아직 손 움직여!”

쇠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비호가 떠든다는 건 아직 손이 움직인다는 뜻이었다. 백민은 그 소리가 오히려 안심되었다.

“감응추 셋, 다시 온다!” 무겸이 갑판에서 외쳤다.

둘은 쳐 냈지만 하나가 찢어진 외피 쪽으로 날아들었다.

“저게 박히면 철줄로 위치가 고정돼! 양쪽에서 포위당한다!” 고륜이 외쳤다.

백민은 손을 뗄 수 없었다. 비호는 배 밑에, 서란은 노심실에 있었다.

“제가 할게요!”

민초아가 해도판 옆에 묶어 둔 낡은 닻줄을 풀었다.

“줄 끝에 납추가 있어요! 끊는 건 못 해요, 방향만 틀 수 있어요!”

“초아 낭자, 위험하오!”

“그물 던지는 건 우리 마을 애들이 다 해요!”

어부가 그물을 던지듯 손목을 비틀자 납추가 환기구 밖으로 날아가 감응추의 철줄에 감겼다. 끊지는 못했지만 방향은 틀었다.

“감겼어요! 지금 끊어요!”

무겸의 창이 내려와 철줄을 끊었다. 반동에 넘어질 뻔한 초아의 등을 어느새 청우가 받치고 있었다.

“노랫말도 쓸모가 있네요.” 초아가 숨을 헐떡이며 웃었다.

“아주 많소.”

세 번째 울림 전에 빠져나가야 했다. 간격은 점점 짧아졌고, 통증은 이제 넷을 넘었다.

“백민!” 노심실에서 서란이 불렀다.

“알고 있어.”

“알면 줄여.”

“지금 줄이면 박혀.”

“그럼 다치지 말고 해.”

이상한 명령이었다. 불가능해 보였지만, 그래서 더 사람의 말 같았다.

“다치지 말고…… 라.”

백민은 청염을 더 내리지 않았다. 대신 지금까지 끌던 배를 따라가기로 했다. 유룡이 듣는 바다의 맥을, 이번에는 자신이 뒤따랐다.

그 순간 선체가 먼저 미세하게 방향을 틀었다.

“형! 방금 배가 먼저 움직였어!”

“봤다.”

“봤다는 말로 끝낼 일이 아니야! 얘, 지금 형 말 듣기 전에 생각했어!”

“200년 전 항해의 기억이오.” 고륜이 낮게 말했다. “봉인한 이들의 손길, 이름 없는 조선공들의 마지막 조정. 사람의 손과 두려움이 오래 쌓인 기계는 어느 순간 물건으로만 남지 않소.”

둥.

세 번째 밑돌 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유룡은 이미 그 자리를 벗어나 있었다.

◆

절벽이 양쪽으로 물러나고 눈앞에 회색 바다가 열렸다. 고륜이 해도판의 추를 동쪽으로 밀었다.

“동해 진입.”

보고였지만, 모두에게 선언처럼 들렸다.

“신호탄이에요! 초계선이 붉은 불꽃을 쐈어요!” 민초아가 외쳤다.

“쏴 봐야 늦었소. 우리는 이미 물 위에서 지워졌으니.”

“찢어진 회로 우회시켰어!” 비호가 외쳤다. “우현 하부는 빛을 다 못 먹어서 푸른 금이 조금 생기는데, 멀리서 보면 파도 반짝임이랑 구별 못 해!”

“놓쳤다! 또 놓쳤다는 신호야!” 민초아가 나팔 소리를 듣고 외쳤다.

“그럼 이쪽은 성공이네.”

유룡은 해류를 타고 초계선 사이를 빠져나갔다. 나팔과 쇠구슬은 보이지 않는 상대의 그림자만 더듬었다.

동조석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백민의 손목을 서란이 잡았다. 맥을 짚던 손끝이 잠깐 굳었다.

“넷 반.”

“셋 반이라고 하면 안 믿겠지.”

“말장난할 힘이 있으면 괜찮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싶지만, 오늘은 아니야. 팔 줘. 숨은 코로 길게.”

“……응.”

“아프면 아프다고 해.”

“아파요.”

“그래. 그렇게 말하는 거야.”

은침이 팔목 안쪽 혈자리에 놓였다. 따끔한 감각과 함께 백광이 들어왔다. 백민은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얕게 숨 쉬고 있었는지 알았다.

비호가 검댕투성이로 기어 나왔다. 머리카락 끝이 그을려 있었다.

“표준 순서 수정.”

“지금?” 무겸이 어이없다는 듯 보았다.

“지금 안 적으면 까먹어.” 비호가 노트를 끌어당겼다. “광휘은신은 눈만 속이는 게 아니다. 눈, 열, 소리, 진동을 따로 본다. 협수로에서는 시각 은폐보다 진동 억제가 우선. 밑돌 울림 지역에서는 선저 청염막을 얇게 펴되, 절대 불꽃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리고 백민 형 통증이 넷을 넘으면 강제 출력 제한.”

“그건 빼.”

“싫어.”

“비호야.”

“싫어, 싫다고!”

“선장이 누구지?”

“오늘 보니까 배가 선장보다 먼저 생각하던데?”

함교에 웃음이 퍼졌다. 살아남은 뒤에야 나오는 웃음이었다.

“잠시 바람을 쐬고 오겠소.” 고륜이 해도판에서 손을 뗐다. “군례를 올릴 데가 있어서.”

“누구에게요, 어르신?”

“이 어린 것에게.”

고륜은 갑판으로 나가 동쪽을 향해 군례를 올렸다. 첫 항해를 견뎌 낸 어린 배에게 바치는 군례였다.

동해의 바람은 옷깃 안으로 곧장 소금을 밀어 넣었다. 갑판에 올라온 백민이 난간에 손을 얹자, 아직 뜨거운 금속 아래에서 박동이 느껴졌다.

“내 심장이랑 같은 박자인데, 조금 달라. 그 차이가 좋아. 완전히 같지 않으니까 동료지. 명령만 듣는 도구가 아니라.”

“살아 있는 것 같지요?” 민초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살아 있다고 말하면, 이 배를 만든 사람들이 좋아할까.”

“그들은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오.” 청우가 갑판 뒤쪽에서 대답했다. “살아 있게 만들려고 만든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이 죽지 않게 만들려고 만들었다고.”

“그 말이 더 맞소.” 고륜의 눈가가 젖어 있었다.

서란이 백민의 손바닥을 펴 보였다. 감응판에 닿았던 자리에 데인 듯한 푸른 선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약을 발랐다.

“다음부터는 혼자 다 짊어지지 마.”

“혼자 한 게 아니야.”

“그러니까 더더욱.”

갑판 아래에서 비호가 정비 노트를 읽으며 유룡에게 잔소리하는 소리가 올라왔다.

“너, 앞으로 내 말 먼저 듣고 움직여, 알았지? 형 말은 그다음이야. 방금처럼 먼저 생각하다 사고 치면 나 진짜 노심실 문 잠글 거야!”

“배한테 협박하는 거냐.” 무겸이 창 자루로 배관을 받쳐 주며 중얼거렸다.

“누가 듣고, 누가 숨을 줄이고, 누가 열을 잡는지. 네가 언제 물러서야 하는지까지.” 서란이 말했다. “오늘 다 같이 배운 거야.”

“은신은 혼자 숨어드는 기술이 아니었네. 함께 흔적을 줄이는 약속이었어.”

그때 함미 관측창 쪽에서 짧은 종소리가 났다.

“내가 울린 거 아닌데?” 비호가 고개를 들었다.

두 번째 종소리.

“초계선 나팔이 아니오.” 고륜이 해도판에서 고개를 들었다.

“우리 경보도 아니야. 노심 쪽은 조용해.” 비호가 압력계를 확인했다.

바다 쪽에서 온 소리였다. 지나온 물길 한가운데, 붉은 칠이 벗겨진 나무 부표에 매달린 청동 방울이 흔들렸다.

딸랑.

“동해 어부 부표예요.” 민초아가 얼굴을 굳혔다. “그런데 저 매듭은……”

“천 조각이 매달려 있소. 글자가……” 청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부표 아래에서 떠오른 붉은 천에 검은 먹으로 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

赤(붉을 적).

“저게 왜 우리 뒤에 있어? 우리가 지나간 뒤에 떠오른 거야?” 비호가 마른침을 삼켰다.

백민은 대답하지 않고 동쪽 수평선을 보았다. 아직 섬은 보이지 않았다.

“바람 끝에 재 냄새가 섞여 있어. 검령성의 재랑은 달라. 불탄 집 냄새가 아니라, 아직 꺼지지 않은 산의 냄새.”

수평선 아래 어딘가에서 붉은 섬이 숨을 쉬고 있었다.

그리고 네 번째 종소리가 울렸다. 이번에는 유룡 안쪽에서였다.

“해도판이……!” 민초아가 입을 막았다.

“누가 만졌어?” 비호가 속삭였다.

“아무도요. 저는 손도 안 댔어요.”

붉은 섬으로 향하는 먹선이, 종이 밑에서 누군가 붉은 물을 밀어 올리듯 저절로 젖어 번졌다. 모두가 숨을 멈춘 사이 젖은 선 끝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떠올랐다.

보인다.

백민은 다시 동조석에 손을 얹었다. 유룡의 박동이 낮아져 있었다. 두려워서가 아니라, 사냥감을 앞에 둔 짐승처럼.

보이지 않는 배를,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이미 보고 있었다.

— 話 43 終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