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섬의 첫 빛
海東曆: 201년 11월 19일 · 시점: 백민
동해는 새벽이 늦게 오는 바다였다. 하늘 끝에 빛이 스며도 수면은 한동안 밤의 색을 놓지 않았고, 잿빛 안개 아래에서는 식은 쇳가루와 소금과 오래된 화산재 냄새가 한꺼번에 올라왔다.
천부항을 떠난 지 다섯 번의 밤. 청룡 一號 유룡(幼龍)의 좁은 조타실에서 고륜이 낡은 해도 위 붉은 얼룩에 손가락을 얹었다. 물에 젖었다 마른 흔적이 수십 겹 겹친 해도였다.
“동쪽으로 7km만 더 가면 조류가 바뀌오.”
“저기가 붉은 섬(赤島)입니까?”
“예. 이름은 아름답지만, 가까이 가 보면 아름다움보다 먼저 이빨이 보일 것이오. 바다 밑 암초가 성벽처럼 둘러 있고, 화산재가 안개처럼 떠다니며, 조류는 같은 방향으로 두 번 흐르지 않소. 초행자가 대낮에 들어가도 길을 잃는 곳이오. 밤에는 말할 것도 없고.”
“초행자가 길을 잃는 건 배가 멍청해서 그렇죠.” 단비호가 푸석한 얼굴로 해도 옆에서 고개를 들었다. “유룡은 멍청하지 않습니다. 물론 함장님이 청염을 과하게 넣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요.”
“함장님?”
백민이 작게 웃었다.
“당연하죠. 이름을 바꾸셨으면 호칭도 바뀌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 입에 안 붙어서, 저도 방금 좀 닭살 돋았습니다.”
장무겸이 낮게 웃었다. 조타실의 공기가 잠깐 풀렸지만 유서란만은 웃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백민의 왼쪽 가슴께, 청염기관(靑炎機關)이 있는 자리에 가 있었다. 밤새 광휘은신(光輝隱身)을 유지한 탓에 목덜미에 옅은 푸른 열기가 남아 있었다.
“누나, 왜 그렇게 봐. 얼굴에 뭐 묻었어?”
“묻은 건 네 얼굴이 아니라 네 목덜미야. 푸른 열기 아직 안 빠졌어.” 서란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 “오늘은 더 오래 끌면 안 돼. 한 번에 세 시간 이상 은신을 유지하면 심장 박동이 두 갈래로 갈라져. 네 몸이 배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배가 네 몸을 끌고 가는 느낌이 들 거야. 그러면 누가 키를 잡고 있는지 모르게 돼.”
“유룡도 지쳤어.”
백민이 따뜻한 황동 조타륜을 쥐었다.
“벽마다 물방울이 맺히고, 냉각관 안쪽엔 서리가 생겼다 녹기를 반복해. 광휘은신은 기적이 아니라 빛이랑 증기랑 열을 억지로 풍경에 섞는 기술이니까.”
“그럼 붉은 섬 가까이에서만 은신을 풀겠습니다.”
“아니. 가까이에서는 더 조심해야 하오.” 고륜이 고개를 저었다. “저 섬은 눈으로만 지키는 곳이 아니오. 물살, 안개, 새의 이동, 암초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까지 감시자의 귀가 되오. 여기서부터는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보다, 우리가 지나간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게 중요하오.”
청우가 창밖의 안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안개가 너무 곱습니다. 자연 안개가 아닙니다. 물방울마다 쇳내가 섞여 있습니다.”
조타실이 조용해졌다. 백민은 조타륜을 타고 오는 떨림에 귀를 기울였다.
“배 밑을 두드리는 물결이 짧고 규칙적이에요. 파도는 길고 둔해야 하는데. 노 젓는 소리도 아니에요. 증기 피스톤 박자예요.”
“비호.”
“들었습니다.”
비호는 이미 바닥에 엎드려 귀를 대고 있었다. 낡은 압력계 바늘을 뜯어 만든 소형 감응판이 안개 쪽으로 가늘게 떨렸다.
“세 척…… 아니, 다섯 척입니다. 작아요, 쾌속선이에요. 피스톤 박자를 서로 다르게 맞춰서 조류 소리에 섞고 있어요. 귀로 들으면 파도처럼 들리는데, 배 밑으로는 다 보입니다.”
“해적이군.” 무겸이 청룡기창을 들었다.
“붉은 섬 외곽의 인사법이오.” 고륜이 말했다.
“몇 척이든 들어오는 순간부터 싸움이군요.” 백민이 조타륜을 고쳐 잡았다.
“인사법치고는 거칠군요.” 무겸이 창끝으로 천장을 가볍게 쳤다.
“이 바다에서는 처음 오는 자에게 이빨부터 보여 주오. 물러서는 자는 쫓고, 맞서는 자는 재 보지.”
해도 옆에서 매듭 표식을 만지던 민초아가 고개를 들었다.
“해도 위 저 붉은 점, 어부 매듭으로는 ‘돌아가라’는 뜻이에요. 이 바다 노래에는 그런 말이 많아요.”
“돌아갈 곳이 없는 자에게는 쓸모없는 노래로군요.” 청우가 낮게 말했다.
◆
“속도 내면 흔적 남고, 흔적 없애면 속도 잃고. 세상에서 제일 예민한 거북이를 타고 도망치는 기분입니다.”
비호가 투덜거리면서도 양손을 쉬지 않았다. 청염 냉각관 위에 젖은 천을 덮고, 배 밑으로 빠져나가는 열을 세 갈래로 나누었다.
“열을 한 줄로 흘리면 적이 읽고, 넓게 흩으면 바다가 삼켜요. 그래서 선미 물거품 속에 세 갈래로 나눠 뿌리는 중이에요.”
“계산은 맞겠지.” 서란이 선실 입구에서 말했다. “그런데 그 대가를 누가 치르는지는 계산했어?”
그녀 뒤로 선원 둘이 입술이 파래진 채 끌려 나왔다. 선실이 금방 싸늘해진 탓이었다. 서란은 따뜻한 약탕을 먹이며 백민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배가 살려면 사람이 먼저 살아야 해.”
“알아. 검령성에서 지키지 못한 얼굴이 너무 많았어.” 백민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바다에서는 그 수를 늘리고 싶지 않아.”
“사람이 버티지 못하면 은신도 버려야 합니다.” 서란 곁으로 다가선 청우가 그 말을 받았다.
그는 외투를 벗어 떨고 있는 선원의 어깨에 덮어 주었다.
“기계는 목표를 향해 곧게 가려 하지만, 사람은 돌아가야 살 때가 있습니다. 돌아가는 길도 길입니다.”
장무겸은 말없이 선미 밧줄을 점검하고 있었다. 밧줄 가시가 손바닥에 박혔는데도 빼지 않았다. 피 몇 방울이 바닷물에 씻겨 나갔다.
“땅에서도 피는 땅에 스며들었지. 바다에서는 흔적도 남지 않는군.”
무겸의 말에는 가끔 창룡대가 늦었던 밤의 그림자가 끼어 있었다. 백민은 묻지 않고 선미로 걸어가 밧줄 한쪽을 함께 잡았다.
“손바닥에 가시 박혔어요.”
“안다.”
“빼야죠.”
“빼면 밧줄을 놓친다. 육지 사람이 바다에서 밧줄까지 놓치면 쓸모가 없지 않느냐.”
“쓸모없는 사람은 이 배에 한 명도 없어요.”
무겸은 대꾸 대신 곁눈질하더니 반대쪽 매듭을 조였다.
“입 다물고 당겨라.”
물 위에 손톱만 한 붉은 돌가루가 떠다니기 시작했다. 파도에 밀려온 화산재였다.
“화산재야. 재라기보다 작은 유리 조각에 가까워. 상처에 들어가면 염증 생겨. 다들 손싸개 껴.” 서란이 얇은 손싸개를 나눠 주었다.
“이거 끼고 나사를 어떻게 조여요?”
“네 손이 망가지면 네가 제일 시끄러울 거잖아.”
결국 모두가 손싸개를 꼈다. 고륜은 해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붉은 섬의 금기를 일러 주었다.
“북쪽 절벽에는 먼저 닿지 말 것. 바닷새가 한꺼번에 날아오르면 물 아래를 볼 것. 붉은 안개 속 등불 하나는 따라가지 말 것. 그리고 무엇보다, 섬에서 먼저 검을 뽑는 자를 믿지 말 것.”
“그럼 검을 늦게 뽑는 자는 믿어도 됩니까?”
“그건 더 위험하오. 늦게 뽑는 검은 이미 벨 곳을 정한 검이니까.”
그 말이 끝났을 때 물결이 바뀌었다.
“세 번 짧고, 한 번 길어요.” 비호의 감응판이 떨렸다. “바다 밑에서 누가 문을 두드리는 것 같아요.”
“섬은 아직 안 보이는데, 섬의 손은 벌써 닿았군요.” 청우가 말했다.
◆
백민은 갑판으로 나갔다. 젖은 갑판에 밤의 물기가 남아 있었고, 안개는 그들을 감추면서 동시에 가두고 있었다.
“전방 200m! 뱃머리에 검은 천, 옆구리엔 갈고리 발사관이 줄줄이야. 굴뚝 연기도 없이 흰 증기만 낮게 흘려!” 무겸이 외쳤다.
“광휘은신 유지. 전면 전투로 가지 않는다. 우리 배의 정체를 드러내면 안 된다. 갈고리는 끊고, 선체 접근은 막아. 사람을 베는 건 마지막이다.”
“발사구 열게요!” 비호가 갑판 아래로 뛰어 내려갔고, 고륜은 해도 대신 짧은 곡도를 들었다. 서란이 약낭을 허리에 묶었다.
“온다!”
첫 갈고리가 안개를 뚫고 좌현 난간을 노렸다. 백민은 본국검을 뽑지 않고 손바닥으로 청염을 실처럼 밀어 궤도를 틀었다.
“무겸 형, 이음쇠!”
“보인다!”
갈고리가 난간을 스치고 바다에 박히자 창끝이 쇠사슬 이음쇠를 찍었다. 황동 불꽃이 튀었다.
“하나 끊었다!”
“두 번째, 세 번째 동시에 옵니다!”
이번에는 사람이 함께 왔다.
“사슬 타고 둘이 온다! 턱 밑에 호흡관, 오른눈은 유리 렌즈야!”
해적들은 함성도 없이 기계처럼 숨을 내뿜으며 갑판으로 떨어졌다.
“내가 앞을 맡습니다!”
백민이 본국검을 뽑았다. 첫 해적의 단검이 목을 향해 들어왔으나 검등이 손목을 눌러 궤도를 틀었고, 이어진 손날이 호흡관을 쳤다. 관이 찌그러지며 해적의 몸이 꺾였다.
“컥……!”
해적의 입에서 처음으로 사람 같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무릎 아래 피스톤이다! 튀어 오른다!”
두 번째 해적이 사람의 보폭이 아니라 기계의 반동으로 뛰었다.
“발목은 제가 잡겠습니다.”
청우의 염주가 발목 관절을 감았다. 무겸의 창대가 옆구리를 밀어 난간 쪽으로 돌렸다.
“이대로 바다에 떨어지면 물귀신이 될 놈이다. 죽이지 말고 눌러라!”
그러나 해적은 물러서지 않았다. 제 호흡관을 뜯어내고 피 섞인 증기를 뿜으며 다시 달려들었다.
“엎드려요!”
비호의 외침과 함께 작은 나사폭약이 터졌다. 폭발은 크지 않았지만 정확했다. 충격파가 해적의 무릎 피스톤만 찢었다. 무겸이 창대로 해적을 눌러 움직임을 봉했다.
“사람을 안 죽이는 폭발도 고급 기술입니다!” 비호가 갑판 아래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자랑은 나중에 해!”
서란은 이미 쓰러진 첫 해적의 찌그러진 호흡관을 풀어 숨길을 열고 있었다.
“누나, 그 사람 방금까지 우릴 죽이려고……”
“그래서? 숨 막히는 사람 앞에서 이유 따지는 건 의공사 일이 아니야.”
백민은 이를 악물었다. 배를 지키는 일과 사람을 지키는 일이 언제나 같은 방향은 아니었다.
“다섯 척 다 우릴 못 보고 있소. 그런데 흔적을 읽는군.” 고륜이 눈을 좁혔다. “밀린 물살, 발사구 금속음, 쇠사슬 불꽃. 그걸 다 합쳐 위치를 재고 있소.”
“우연히 지나가는 약탈자가 아니에요.” 백민이 말했다. “붉은 섬 바깥문을 맡은 사냥꾼들입니다.”
그때 네 번째 쾌속선이 방향을 틀었다. 옆구리가 열리며 작은 갈고리가 수십 개 달린 철망이 튀어나왔다. 전투의 열 때문에 좌현 윤곽이 잠깐 흔들린 바로 그 자리를 향해서였다.
“좌현 냉각 부족! 열이 새요!”
“백민, 조타륜으로…….”
“시간 없어, 누나. 오래 끌면 배가 날 끌고 간다고 했지. 지금은 내가 배를 끌어야 해.”
백민은 본국검을 낮게 쥐고 단전의 기운을 칼이 아니라 발바닥으로 흘렸다. 유룡이 움찔했다. 갑판의 황동못들이 푸른 점처럼 빛났다.
“열 새는 게 줄고 있어요! 형…… 함장님, 그대로 쭉!” 비호가 선실에서 소리쳤다.
“백민, 심장! 박자 두 갈래로 갈라지면 바로 손 떼!”
“아직 한 갈래야!”
새어 나가는 열을 손끝으로 틀어쥐듯 당기자 좌현 윤곽이 다시 안개 속으로 가라앉았다. 철망은 목표를 잃고 허공을 찢었다.
그러나 끝 갈고리 하나가 난간을 물었다. 쾌속선이 급가속하자 유룡이 옆으로 끌려갔다. 선실 안쪽에서 금속이 비명을 질렀다.
“냉각관 닫아! 어르신, 이 쇠사슬 뭡니까!”
“혈열 계열은 아니오.” 고륜이 눈을 좁혔다. “그러나 사람 손으로 만든 쇠가 아니오. 해역의 코테르가 섞였소. 검은 코팅 아래서 열이 살아 움직이지 않소?”
“청염으로 자르면 끊을 수 있어요.” 백민이 본국검을 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안개 속에 등대를 켜는 셈이에요. 붉은 섬의 모든 눈이 이 배를 보겠죠.”
그 망설임의 찰나, 안개 너머에서 다른 빛이 날아왔다.
처음에는 새벽빛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빛은 곧 직선이 아니라 곡선으로 휘어졌다. 너무 빠르고, 너무 조용했다. 칼날이 공기를 베는 소리가 뒤늦게 들렸다.
“저 빛…… 어디서 온 거요!” 고륜이 외쳤다.
젖은 달빛 같은 검광이 쇠사슬을 스쳤다. 단 한 번이었다. 검은 쇠사슬은 소리 없이 갈라졌고, 단면에서 붉은 불씨가 흩어졌다.
“뭐야, 방금? 새벽빛인 줄 알았는데…… 휘어졌어!” 비호가 외쳤다.
유룡이 자유를 되찾았다.
◆
“여섯 번째 배요! 붉은 천 감은 돛대!” 비호가 가리켰다.
“고물에 한 여인이 서 있소. 얼굴은 안 보이나, 몸이 한 치도 흔들리지 않는군.” 고륜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해적선이 저 배 앞에서는 얼어붙네.” 비호가 중얼거렸다.
바람 위에 걸친 얇은 그림자 같은 배가 해적선 사이를 가로지르자 해적들이 물러섰다. 늦게 반응해 갈고리를 다시 장전하던 한 척의 발사관이 여인의 검 한 번에 반으로 갈라졌다.
“사람은 안 베었다.” 무겸이 낮게 말했다. “죽일 수 있는데 안 죽였다. 필요한 것만 베었어. 그래서 더 무섭군.”
백민은 숨을 잊었다.
“저 검, 어디서 본 적 있어요?” 그가 무겸에게 물었다.
“없다. 하지만 어떤 검인지는 안다.” 무겸이 대답했다. “설무진 사부님의 검은 무게를 말했고, 내 창은 버팀을 말한다. 이하겸의 칼은 원한을 말했지.”
“저 검은요?”
“상처를 감추는 법을 아는 검이다.”
오래전 잃어버린 문장 하나를 다른 사람이 다른 필체로 쓰는 것을 보는 기분이었다.
“저 검……” 청우가 중얼거렸다. “살검(殺劍)이면서도 살검이 아닙니다.”
“살검이 아니면 무엇이오?”
“아직 이름을 못 얻은 검입니다. 이름을 얻기 전에 지켜야 할 것부터 얻은 검이지요.”
“해적의 검이 아니오.” 고륜이 대답했다.
해적 소함대가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듯 조용히 물러났다. 그러나 마지막 배가 뒤로 빠지며 선미의 작은 발사관을 열었다. 검은 원통 하나가 유룡의 갑판을 향해 날아왔다.
“위에!”
백민이 본국검을 치켜들기 전에 여인의 검광이 먼저 움직였다. 원통이 공중에서 반으로 갈라져 바다에 떨어졌다. 물속에서 둔탁한 폭음이 울리고 검은 기름막이 퍼졌다.
“저건…… 배를 잡는 폭약이 아니라 배 속 사람을 익히는 폭약이에요.” 비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갑판에서 터졌으면 냉각관 절반이 찢겼을 거고, 선실 안은 솥이 됐을 거예요.”
서란의 눈매가 차가워졌다. 무겸은 창대를 너무 세게 쥐어 손등 힘줄이 올라왔다.
“저런 걸 배에 쏘는 놈들이 사람이냐.”
“사람이니까 더 무서운 거예요.” 서란이 낮게 받았다.
“쫓을까?”
“아니.” 백민이 바다 위로 퍼지는 검은 기름을 보았다. 분노보다 먼저 계산이 왔다. “유룡을 숨긴다. 부상자부터 묶어. 쫓는 건 지금이 아니다.”
“하지만…… 저놈들, 일부러 우리를 시험한 거예요.”
“안다. 그래서 더 쫓지 않는다. 시험지를 낸 자가 어딘가에서 채점하고 있을 테니까.”
묶인 해적 하나가 갑판에 누워 거친 숨을 뱉었다. 유리 렌즈 안쪽에서 작은 톱니가 헛돌았다.
“렌즈에 녹이 꼈네. 가만있어.”
서란이 가장자리를 닦아 내자 남은 눈이 잠깐 사람의 눈으로 돌아왔다. 그는 붉은 섬 쪽을 보며 입술만 달싹였다.
“뭐라는 거야?”
“‘돌아가.’” 백민이 입 모양을 읽었다. “그 한마디야.”
“모두 같은 표식을 하고 있습니다.” 청우가 해적들의 목 뒤를 살폈다. “파도처럼 휜 선 세 개, 그 선을 꿰뚫은 작은 검. 새긴 지 얼마 안 됐습니다. 잉크 자리가 아직 붉습니다.”
“자발적인 충성이라기보다는 낙인에 가깝소.” 고륜이 말했다. “섬 안쪽의 힘이 바깥 해적들을 줄로 묶고 있군.”
평소라면 나사폭약 자랑을 열 줄은 떠들었을 비호가 입을 다문 채 공구가방 끈만 만지작거렸다.
“비호야.”
“……사람을 솥처럼 익히려는 물건이었어요. 그 생각이 자꾸 나요.”
“묶되 숨길은 막지 마라.” 백민이 말했다. “우리가 이 바다에 들어온 이유가 사람을 더 만들기 위해서라면, 저들도 아직 사람이다.”
무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서란이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승리 선언이 아니라, 유룡의 첫 해상전을 어떻게 기억할지 정하는 작은 규칙이었다.
◆
그때 안개가 갈라졌다. 붉은 섬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햇빛 때문만이 아니야. 절벽 자체가 피랑 녹 섞인 색이야.” 비호가 숨을 들이켰다. “바위 틈마다 증기가 솟고…… 저 산등성이, 신전 같은 거 부서진 거 맞지?”
“아름답지만 안쪽에 날이 있소. 검집에 숨은 칼날처럼.” 고륜이 말했다.
여인의 배는 그 붉은 첫 빛 앞에 멈춰 있었다. 젖은 석류 껍질 같은 옷자락, 허리의 가늘고 긴 검집.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적의를 재는 눈이 아니었다. 오래 버틴 사람의 피로와 누군가를 끝까지 지켜 본 사람의 차가운 결심이 담긴 눈이었다. 검령성의 재, 백민이라는 이름의 무게, 아직 그 자신도 다 알지 못하는 청염의 어둠까지 하나씩 세어 보는 듯했다.
청염기관이 한 번 뛰었다. 분노도 폭주도 아니었다. 아주 오래 닫혀 있던 문 앞에 누군가 손가락을 댄 듯한 정적이었다.
“저 눈은 너를 알고 있는 눈이다.” 무겸이 낮게 말했다.
“저는 모르는 사람이에요.”
“모르는 건 너고, 저쪽은 다를 수 있다는 얘기다.”
“괜찮아?” 서란이 뒤에서 그의 팔을 잡았다.
“모르겠어.” 백민은 솔직히 말했다. “아픈 건 아닌데…… 이상해.”
여인의 배가 서서히 물러났다.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길을 남기는 것 같았다.
“도망치는 게 아니에요.” 청우가 말했다. “길을 남기고 있습니다. 가장 위험한 암초 사이로 물길 하나가 열렸다 닫혔어요.”
“해적의 검이 아니라는 대사의 말이 맞소.” 고륜이 백민 곁에 섰다. “무언가를 지키는 검이지. 문제는, 무엇을 지키는가요.”
백민은 대답하지 못했다. 손에는 본국검의 온기가 남아 있었지만, 마음속에는 다른 검의 잔상이 남아 있었다. 사람을 벨 수 있으면서도 필요한 것만 베어 길을 닫고 여는 검.
“형…… 아니, 함장님. 이거 보세요.”
비호가 난간 아래 젖은 목재 사이를 가리켰다. 손가락 두 마디만 한 검은 대나무 칼집 조각이 꽂혀 있었다. 끝에 붉은 실이 묶여 있었다.
“원통 벨 때 같이 날아온 것 같아요. 붉은 실은 젖었는데도 색이 선명하고요. 제가 집을…….”
“내가 볼게.”
백민이 집어 들자 코테르도 청염도 아닌, 사람의 검이 오래 품었던 호흡 같은 떨림이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안쪽에는 칼끝으로 새긴 가늘고 깊은 글자가 있었다.
상륙하지 마라.
그 아래 한 줄이 더 있었다.
그래도 오겠다면, 군사를 두고 검만 들고 와라.
“군사를 두고…… 검만.” 서란이 낮게 되뇌었다.
“함정입니까?” 비호가 속삭였다.
“모르겠다. 하지만 경고는 아니야.” 백민이 조각을 쥐었다. “누군가 우리가 올 걸 알고 쓴 글이야.”
“군사를 두고 오라는 건, 군사가 없으면 받아 주겠다는 말로도 들리오.” 고륜이 수염을 쓸었다.
“받아 준 뒤에 무엇을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청우가 담담히 받았다.
바닷바람이 멎었다. 날카로운 끝이 살을 찔러 피 한 방울이 붉은 실 위로 번졌다.
그 순간, 섬 쪽에서 북소리가 한 번 울렸다.
둥.
유룡의 선체가 그 소리에 맞춰 낮게 떨었다.
그리고 안개 속에서, 누군가의 검집이 닫히는 소리가 분명히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