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섬의 검희(劍姬)
海東曆: 201년 11월 24일 · 시점: 백민
섬의 절벽과 화산암 능선은 해가 오르기 전인데도 오래 달군 쇠처럼 어둡게 붉었다. 안개에는 유황 냄새와 젖은 재 냄새가 섞여 있었다.
청룡 일호 유룡(靑龍一號 幼龍)은 검은 암초 셋이 삼각으로 솟은 그늘에서 광휘은신(光輝隱身)을 두른 채 멈춰 있었다.
“형, 섬에 오래 있으면 안 돼.”
정비실에서 올라온 단비호가 낮게 말했다.
“며칠 전 접현전 이후로 외피 감응판 두 장이 틀어졌고, 후미 배기구로 열이 가늘게 새. 정박해 있을 땐 숨길 수 있어. 근데 조류가 바뀌면 배가 조금씩 밀려서, 은신막이 암초에 긁히는 소리처럼 새어 나갈 수 있어. 그날 우리를 몰아붙인 자들이면 놓치지 않을지도 몰라.”
백민의 시선은 절벽 위 낡은 신사(神社)와 그 아래 엎드린 어촌에 가 있었다. 그리고 안개 속에서 잠깐 뒤돌아보던 한 여인의 눈.
“오래 있지 않겠다. 조하륜(趙河崙)의 흔적만 확인하고 돌아온다.”
유서란(柳瑞蘭)이 그의 옷깃을 여며 주었다. 손끝은 진맥하듯 청염기관(靑炎機關)이 있는 가슴께를 스쳤다.
“돌아온다고 말할 때는, 정말 돌아와. 섬의 공기가 이상해. 유황도 있지만, 그보다 깊은 데서 사람을 눌러 놓은 냄새가 나.”
“눌린 곳에는 대개 누르는 자가 있지.” 장무겸이 장창을 등에 걸고 거룻배로 내려섰다. “누르는 자가 있으면 창으로 들어 올릴 수도 있고.”
“나는 만 입구에 남겠소. 유룡의 은신막과 육지 쪽 기척을 함께 보지요.” 청우 대사가 갑판 난간 곁에서 황동 염주를 굴렸다. 감긴 듯한 눈이 먼 해안의 새가 날아오르는 방향까지 쫓고 있었다.
“초아 누나는 해도 다시 그리고 있어. 섬 물길이 처음 그린 거랑 또 달라졌대.” 비호가 밧줄을 풀며 덧붙였다.
백민, 서란, 무겸. 세 사람만 작은 거룻배에 올랐다.
“정말 오래 있지 마. 섬의 파도 주기가 이상해. 바닷속에 뭔가 있어. 암초인지, 고철인지, 아니면 더 오래된 건지 모르겠지만.”
“열 번째 말했다, 비호야.”
“열한 번째까지 할 거야.”
◆
거룻배는 노 소리조차 죽인 채 안개를 미끄러졌다. 백민이 물에 손을 담갔다가 뺐다.
“물은 찬데, 그 밑에 아주 낮은 열이 있어요. 섬 전체가 숨을 참고 있는 것 같아요.”
닿은 만의 검은 모래 위에는 조개껍데기보다 부러진 노와 갈고리, 칼날 조각이 더 많았다. 파도가 그것들을 끌고 갈 때마다 마른 쇳소리가 났다.
“바다가 오래된 싸움을 아직 씹고 있군.” 무겸이 칼날 조각을 발로 밀었다.
해안 뒤편 길목마다 붉은 종이를 맨 작은 돌탑이 서 있었다. 탑 아래 나무패의 이름은 파도에 닳아 거의 읽히지 않았다.
“길목마다 돌탑이야.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닳아서 거의 안 읽혀.” 서란이 속삭였다. “전사자일까, 실종자일까.”
“바다가 데려간 사람들일 수도 있고.” 백민이 발걸음을 늦추었다. “모르겠어. 그래도 남은 사람이 이름을 놓아두는 마음은 검령성이랑 닮았네.”
위쪽 벼랑에는 붉은 새끼줄을 두른 신사가 있었다.
“저기 앞마당 좀 봐라.” 무겸이 벼랑을 올려다보았다. “등롱은 꺼진 지 오래인데, 마당은 매일 쓸었어. 화산재가 한쪽으로 정돈돼 있고, 부적이 바람에 안 찢기게 간격까지 맞춰 놨다. 누가 지키고 있군.”
“지키는 사람이 있다는 건, 지킬 게 있다는 거네요.”
“혹은 감시받을 게 있거나.”
신사 아래 어촌은 활기가 없었다.
“아이들이 안 뛰어요.” 서란이 낮게 말했다. “골목에 아이들이 있는데, 아무도 안 뛰어.”
“뛰면 눈에 띄니까.” 무겸이 부두 끝을 턱짓했다. “저놈들 때문이다.”
부두 끝에 검은 비단 외투의 감시병 셋이 서 있었다. 한 명의 오른팔은 관절마다 코테르(機核) 알이 박힌 쇠였다.
“무라사메 겐조(村雨玄三)의 표식입니다.” 서란이 속삭였다. “그때 포로가 떨어뜨린 검집 끝 문양이에요. 회오리 속의 검. 여기에도 있어요.”
“해적보다 군졸에 가까운 놈들이다.” 무겸이 낮게 말했다. “허리에 동해식 굽은 검을 찼지만 걸음이 병사 걸음이야.”
골목 저쪽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세금은 어제도 냈습니다.” 늙은 어부의 목소리가 떨렸다. “오늘 잡은 건 아이들 먹일 양식뿐입니다.”
쇠팔이 바구니를 걷어찼다. 물고기가 검은 진흙 위로 튀었다. 달려들려는 아이의 입을 어머니가 틀어막고 끌어안았다.
“겐조 님의 바다가 너희에게 숨을 허락한다. 숨값을 내라.”
감시병은 웃지도 않고 칼집 끝으로 어부의 가슴을 밀었다. 무겸의 손이 창 자루로 갔다.
“형, 아직.” 백민이 아주 작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 창을 꺼내면 마을 전체가 겐조의 감시망에 걸려요.”
“그렇다고 모른 척 지나갈 테냐.”
“아니요.”
청염기관이 판단을 재촉하듯 박동했다. 분노가 아니라 재촉이었다. 그가 한 걸음 내디디려는 순간, 바람이 바뀌었다.
◆
골목 끝에서 붉은 천 한 조각이 먼저 나타났다. 이어 붉은 갑주의 어깨가 안개를 밀고 나왔다. 며칠 전 해상의 그 그림자였다.
“어려요……” 서란이 속삭였다. “우리랑 크게 다르지 않은 나이야.”
“나이에 비해 걸음이 무겁군.” 무겸이 낮게 대꾸했다. “허리에 장검과 단검 하나씩이다. 갑주는 급소만 덮었고. 오래 싸워 본 사람의 차림이야.”
감시병 셋이 동시에 몸을 굳혔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품에서 눈만 내밀었다.
“오늘은 신사에 바칠 물고기를 거두는 날입니다. 그 바구니는 신사의 것입니다.”
“검희께서 신사 물고기까지 직접 세십니까?”
“제가 세지 않으면 누가 훔쳐 가니까요.”
낮은 말이 칼보다 날카로웠다. 감시병 하나가 비웃으며 손을 뻗었다.
“겐조 님께서도 그 말씀이 마음에 드실지—”
차앙.
긴 검이 검집에서 완전히 빠져나오는 것을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쇠팔 손가락 마디에 박힌 코테르 알 하나가 정확히 갈라져 바닥에 떨어졌다.
“사람은 안 베고 힘의 근거만 잘랐어.” 서란이 숨을 삼켰다.
“저게 사람 베는 것보다 더 큰 모욕이다.” 무겸이 중얼거렸다.
“신사 앞에서 검을 뽑게 하지 마세요. 오늘은 아직 제사 전입니다.”
감시병들이 눈빛을 주고받더니 욕을 삼키고 물러섰다.
“고, 고맙습니다, 검희님……” 늙은 어부가 바구니를 끌어안고 허리를 숙였다.
“인사는 신사에서 하세요. 여기서는 말을 줄이시고요.” 아야네가 낮게 답했다. “귀가 많습니다.”
쇠팔을 가진 자가 지나치며 백민 일행에게 짧게 시선을 던졌다.
“저 눈, 계산하는 눈이야.” 서란이 속삭였다. “우릴 센 거야.”
“셌으면 보고가 가겠군.” 무겸이 낮게 받았다.
여인이 그제야 백민을 보았다. 청회색 빛이 도는, 슬픔을 감추려고 스스로를 얼린 사람의 눈이었다.
“해동의 검.”
“…….”
“그리고 푸른 불.”
백민은 손을 검자루에서 떼지 않은 채 물었다.
“나를 알고 있습니까?”
“당신을 아는 건 아니에요.” 여인이 계단 아래로 내려왔다. “다만 그런 불은 이 섬에 있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싸우러 온 것이 아닙니다. 조하륜이라는 자의 흔적을—”
서란이 나서려는 순간 짧은 검이 반 치쯤 뽑혔다. 말보다 빠른 경고였다.
“이 섬에서 먼저 묻는 쪽은 저입니다.”
“예의가 박하군.” 무겸의 눈썹이 꿈틀했다.
“예의를 나누기엔 이 섬의 무덤이 너무 많습니다. 외지인은 언제나 뭔가를 찾으러 옵니다. 보물, 항로, 봉인, 사람. 그리고 찾은 뒤에는 이 섬에 남은 것들을 가져가죠.”
원망이라기보다 기억이 묻은 말끝이었다. 백민은 천천히 양손을 보이며 한 걸음 물러섰다.
“우리가 찾는 건 사람 하나입니다. 조하륜. 해동제국에서 도망쳐 이 바다로 들어온 자입니다. 그가 무라사메 겐조와 거래했다는 단서를 따라왔습니다.”
여인의 시선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몰라서가 아니라 너무 잘 알아서 생기는 균열이었다.
“그 이름을 어디서 들었죠?”
“해동에서. 그리고 죽은 사람들의 입에서.”
여인의 손가락이 검자루를 조였다.
“죽은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지만, 살아남은 자들은 죽은 사람의 이름으로 거짓말을 하기도 합니다.”
백민은 반박하지 못했다. 그 또한 죽은 자들의 이름을 품고 여기까지 온 살아남은 자였다.
“……그건 맞는 말입니다.”
“인정하는군요.”
“거짓말은 아니니까요.”
“그럼 검으로 확인합시다.”
“백민아.” 서란이 낮게 불렀다. “말로 할 수 있어. 굳이 안 해도 돼.”
“이 사람은 말로 안 끝나, 누나. 검으로 묻는 쪽이야.”
그 이름에 여인의 눈빛이 다시 흔들렸다. 조하륜 때와는 다른 방식이었다. ‘백’이라는 성에 닿은 듯한 반응이었다.
본국검이 천천히 뽑혔다. 이 섬은 화약고였다. 백민은 청염을 검끝에 가늘게 맺었다가 가라앉혔다.
“이름을 묻고 싶습니다.”
“아야네 류하(綾音流霞). 이 섬에서는 검희(劍姬)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습니다.”
“검희라면, 이 섬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아야네는 대답 대신 발끝으로 검은 모래를 밀었다. 모래가 파도처럼 낮게 흐르며 원을 그렸다.
“조심해라.” 무겸이 낮게 말했다. “물이 들고 나며 단단한 층과 무른 층을 번갈아 남긴 땅이다. 발을 잘못 디디면 발목이 먹히고, 제대로 디디면 돌바닥보다 단단하지. 저 여자에게 여긴 마당이 아니라 진(陣)이다.”
◆
첫 합은 경고 없이 왔다.
긴 검이 정면으로 내려오는 듯하다가 닿기 직전 물살처럼 휘어 왼쪽 어깨를 스쳤다.
“윽!”
동시에 아야네의 발이 모래를 밀어 백민의 오른발 아래를 무르게 만들었다. 흔들린 균형을 짧은 검이 노렸다.
“물러나지 마! 물러나면 모래가 삼킨다!” 무겸이 외쳤다.
백민은 청염의 박동을 발바닥까지 내려 무너지는 축을 붙잡고, 검등으로 짧은 검을 밀어냈다.
차앙!
푸른 빛과 맑은 쇳소리가 동시에 튀었다.
“힘으로 안 받아.” 서란이 중얼거렸다. “닿는 순간 빠져나가고 있어. 막히면 바로 버리고 빈 데로 흘러. 바위틈으로 스며드는 파도처럼.”
“막은 게 아니라 비껴낸 거다.” 무겸이 이를 물었다. “저 검은 막히질 않아.”
“그러면 쫓으면 안 되겠네요.” 백민이 숨을 돌렸다.
“물러나지 않는군요.” 아야네의 검이 물러서며 낮게 휘었다.
“물러나면 모래가 삼킨다고 들었습니다.”
“들은 것만 믿으면 오래 못 삽니다.”
둘째 합에서 백민은 검끝을 쫓지 않고 발을 보았다. 모래를 미는 엄지발가락의 각도, 발목이 꺾이기 직전 갑주의 작은 흔들림.
“발을 봐라, 백민! 검은 미끼다!” 무겸이 외쳤다.
“보고 있어요!”
물에도 길이 있었다. 밀려드는 곳과 빠져나가는 곳.
백민이 반보 앞으로 들어갔다.
“들어갔군.” 무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대부분은 그 검을 보고 물러나다 당했을 거다. 물살이 거셀수록 중심은 짧게 빈다.”
“베지 않고 돌려요. 길을 막는 게 아니라 길을 비틀어서……”
본국검이 낮게 솟으며 청염이 검등을 따라 번졌다. 이번에는 아야네의 검이 완전히 빠져나가지 못했다. 실린더의 떨림이 작은 원을 만들어 그녀의 검로를 반 치 밀어냈다.
“……이 정도로 읽다니.” 아야네의 눈빛이 처음으로 변했다.
그녀는 짧은 검을 던지듯 놓았다가 손목으로 다시 잡았다.
“눈속임이야! 백민아, 모래!”
서란의 외침과 함께 아야네의 무릎이 모래를 찼다. 검은 모래가 안개처럼 일어났고, 그 속에서 긴 검이 목선으로 들어왔다.
“눈을 감았군요?”
“귀를 열었습니다.”
박동을 귀 안쪽까지 낮추자 모래 소리, 파도, 서란의 짧은 숨이 하나씩 갈라졌다. 그 사이로 단단한 모래층을 딛는 아야네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는 본국검을 비스듬히 눕혔다.
차아앙!
긴 검이 검등을 타고 흘렀고, 백민은 그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함께 돌았다. 두 사람의 몸이 스칠 만큼 가까워졌다.
“…….”
“…….”
그 순간 아야네의 눈이 보였다. 죽이려는 눈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자기 안쪽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눈이었다.
“……당신은 누구를 막고 있습니까.” 백민이 거의 숨소리로 물었다.
아야네의 눈이 흔들렸다. 백민의 손목이 아주 짧게 멈췄다. 검객에게는 치명적인 틈이었다.
“지금이다!” 무겸이 저도 모르게 외쳤다.
짧은 검의 끝이 그의 옷깃을 스쳐 갈랐다. 보호판이 푸르게 반짝였고 아야네의 눈이 그 빛에 멎었다. 같은 순간 본국검도 그녀의 어깨 갑주 끈에 닿아 있었다. 그는 끈을 자르지 않았다.
두 사람은 동시에 멈추었다. 파도 소리만 남았다.
“오라버니, 왜 안 끼어들었어요? 방금 틈이 있었잖아요.” 서란이 창백한 얼굴로 따졌다.
“밀려서가 아니다.” 무겸의 눈은 드물게 진지했다. “이건 힘겨루기가 아니라 문답이었다. 검으로 던진 질문에 검으로 답하는 자리. 끼어들면 답이 틀어진다.”
아야네가 먼저 검을 거두었다.
“왜 자르지 않았죠?”
“당신도 찌르지 않았습니다.”
“찔렀다면?”
“막았을 겁니다.”
“거짓말이군요.”
“조금은.”
아야네의 입가에 웃음이라 부르기엔 너무 짧은 균열이 스쳤다. 그녀는 곧 표정을 거두고 검을 완전히 검집에 넣었다.
“당신의 검은 이 섬을 빼앗으러 온 검이 아니군요.”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습니다.”
“말은 누구나 합니다. 검은 숨긴 것을 덜 숨기죠.”
백민은 그 말을 곱씹었다. 그는 그녀의 검에서 외로움을 보았다. 그녀는 그의 검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너무 이른 질문은 걸쇠를 부순다.
◆
아야네가 신사 계단 쪽을 돌아보자 붉은 끈을 맨 어린 무녀 둘이 겁먹은 얼굴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져가렴. 한 마리도 흘리지 말고.”
아이들이 어부의 바구니를 주워 신사로 옮겼다.
“제사상에 올라간 물고기는 결국 마을 사람들 저녁이 되겠군요.” 백민이 말했다.
“겐조 눈앞에서 빼앗긴 걸 돌려주는 방법은 그것뿐이니까요.”
“검희라는 이름은 겐조가 붙인 겁니까?”
“섬 사람들이 먼저 불렀고, 겐조가 이용했죠.” 아야네는 담담했다. “사람들이 누군가를 믿고 싶어 할 때, 지배자는 그 믿음에 이름을 붙입니다. 이름을 붙이면 부르기 쉽고, 부르기 쉬우면 감시하기 쉽거든요.”
“그래도 당신은 이곳에 남았습니다.”
“떠날 배가 없어서 남은 사람도 있고, 떠날 수 있는데도 남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녀의 시선이 바다로 향했다. “저는 후자이길 바랐지만, 어떤 날에는 전자인 것 같기도 해요.”
“조하륜은 이 섬에 있습니까?” 서란이 조용히 물었다.
“있었어요.”
“지금은?”
“겐조의 안쪽으로 들어간 외지인은, 섬 사람도 함부로 볼 수 없습니다. 그자는 검을 들지 않고도 사람들을 가르는 법을 알더군요. 겐조는 그런 자를 좋아합니다.”
“그놈다운 방식이군.” 무겸이 이를 갈았다.
아야네가 무겸을 잠깐 보았다.
“당신들은 그자를 죽이러 왔나요?”
백민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 죽이러 왔다고 하면 너무 쉽고, 살려 둘 생각이라고 하면 거짓이었다.
“끝내러 왔습니다. 어떤 방식이 될지는 그자가 정할 겁니다. 도망치면 쫓을 것이고, 칼을 들면 맞받을 것이고, 사람을 방패로 세우면 먼저 그 방패를 내려놓게 만들 겁니다.”
“죽이겠다는 말보다 까다롭군요.”
“쉽게 말하면 쉬운 사람이 되어 버리니까요.”
이번에는 아야네가 분명히 웃었다. 아주 희미했지만, 찬물 한 방울이 손목 안쪽에 떨어지는 것처럼 오래 남을 웃음이었다.
그때 부두 쪽에서 종이 한 번 낮게 울렸다. 아야네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문 닫아요! 아이들 안으로!”
어부들이 소리를 죽여 서로를 부르며 가게 문을 닫았고, 아이들이 신사 계단 아래로 뛰어들었다.
“골목 끝!” 무겸이 창을 빼 들었다. “검은 외투 둘이 기계 비둘기를 날린다. 날개가 황동판이고, 배 밑에 붉은 봉인이 붙었다. 보고가 나간 거다. 막을까?”
“늦었어요. 저건 겐조의 북쪽 망루로 가요. 잡아도 이미 울림이 갔을 거예요.”
“그럼 우리 위치가 드러났군요.” 서란이 말했다.
“당신들만이 아니에요.” 아야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제가 외지인과 검을 맞대고도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도 함께 갔겠죠.”
“그럼 당신이 위험해지잖아요.”
“이미 그랬어요. 오늘 하나 더 얹었을 뿐이에요.”
그 말의 무게를 백민은 즉시 이해했다. 겐조의 감시 아래서 그를 죽이지 않은 것은 작은 자비가 아니라 정치적 신호였다.
아야네가 계단 쪽으로 걷다가 멈췄다.
“오늘 해가 지면 신사 뒤편 북문으로 오세요. 혼자.”
“안 됩니다.” 서란이 즉시 말했다.
“함정일 수도 있다.” 무겸이 창끝을 낮추지 않았다.
“함정일 수도 있죠. 하지만 조하륜의 이름을 이 섬에서 더 듣고 싶다면, 겐조의 귀가 닿지 않는 곳으로 와야 합니다. 당신들이 모두 움직이면 귀도 따라옵니다.”
“혼자 오면 당신은 무엇을 줍니까?”
“…….”
아야네는 허리의 붉은 댕기 끝에서 작은 매듭 하나를 풀어 던졌다. 매듭 속의 어두운 금속 조각 표면에 아주 작은 백룡문(白龍紋)이 긁혀 있었다.
“조하륜이 겐조에게 넘긴 상자의 모서리에서 떨어진 겁니다. 당신이 정말 해동에서 왔다면, 그 문양을 모를 수 없겠죠.”
“황궁 서고 봉인 장치의 합금이에요.” 백민의 손바닥 안에서 청염기관이 낮게 반응했다. “이 백룡문은…….”
“서고에서 본 그 문양이냐.” 무겸이 물었다.
“네. 조하륜의 흔적이면서…… 백씨의 오래된 죄와 이어진 문이에요.”
“왜 나에게 줍니까?”
아야네의 시선이 백민의 콧등 흉터에 머물렀다가 가슴께의 푸른 빛이 숨은 자리로 내려갔다.
“당신의 검에서 가져가는 사람의 냄새보다 잃은 사람의 냄새가 더 강했으니까요.”
칭찬도 동정도 아닌 판정이었다. 백민은 잠시 말을 잃었다.
“…….”
“틀렸습니까?”
“아니요. 맞아서 대답을 못 하는 겁니다.”
계단을 오르던 아야네가 마지막으로 멈춰 섰다.
“그리고 백민.”
그녀가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오래전부터 입술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름처럼 들렸다.
“다음에 검을 맞대면, 망설이지 마세요. 저는 망설이는 사람의 마음을 벱니다.”
대답하려는 순간 두 번째 종소리가 다급하게 울렸다. 이번에는 섬 뒤편 붉은 절벽 위쪽이었다.
“북쪽 해안에 검은 연기!” 무겸이 외쳤다. “세 줄기다!”
바람을 타고 비명인지 함성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밀려왔다.
“북쪽 벼랑길.” 아야네의 얼굴이 굳었다.
무겸이 창을 고쳐 쥐었고, 서란은 이미 약낭을 열고 있었다. 백민은 백룡문 조각을 품에 넣고 본국검을 다시 들었다.
“해동의 검.”
“말하십시오.”
아야네의 눈빛이 파도처럼 번뜩였다.
“이번에는 제 뒤가 아니라, 제 옆을 따라오세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북쪽 절벽 너머에서 불화살 하나가 안개를 찢고 솟구쳤다. 붉은 섬의 첫 햇빛보다 먼저, 전쟁의 불빛이 신사의 처마를 핥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