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점 · 강민 — 균열·낙인 단계

청염과 해류의 교차

第1部 · 話 46 · 검령성 · published

海東曆: 201년 11월 28일 · 시점: 백민

해가 솟기 전부터 바다는 낮은 숨을 쉬었다. 유황 냄새 섞인 안개 속에서, 백민은 숙소로 내준 빈 그물 창고 문턱에 앉아 파도 소리를 듣고 있었다.

항구에 묶인 배들의 황동 등불이 물속에 잠긴 심장처럼 푸르게 떨렸다.

곁에 놓인 본국검의 코테르(機核)가 가슴속 청염기관과 같은 박자로 떨었다. 해룡성 황궁 방어전에서 붙잡은 청염심법 2경계는 아직 얇은 유리벽 같았다.

치밀었다가 물러나는 파도. 전날 신사 앞에서 맞붙은 아야네 류하(綾音流霞)의 검도 그랬다.

“잠 못 잤어?”

유서란이 약상자를 들고 나왔다. 새벽빛이 흐린데도 눈 밑 그늘부터 찾아내는 눈이었다.

“많이 잤어. 눈만 일찍 떴어.”

“그 말을 믿으라는 거야?” 서란이 그의 왼쪽 손목을 잡아 맥을 짚었다. 손끝이 닿자 청염기관이 미세하게 긴장했다. “박동이 가라앉아 있긴 해. 그런데 너무 억누르고 있어. 물을 틀어막으면 터지고, 불을 덮으면 그을음이 남아.”

“그럼 어떻게 해야 해?”

“흘려보내야지. 네가 싫어하는 말이지만.”

“내가 싫어하는 말이 너무 많아.”

“그중에 제일 싫어하는 말은 ‘기다려’고.”

백민은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검령성 이후로는 기다리면 늘 늦었어. 누가 쓰러지기 전에, 빼앗기기 전에 닿아야 했으니까.”

“바다는 기다릴 줄 알잖아. 밀려올 때랑 물러날 때를 알고.” 서란이 손목을 놓았다. “오늘은 바다 쪽 기운이 세. 네 청염도 같이 들떠 있어. 누가 일부러 자극하면 바로 올라올 거야.”

“아야네 얘기야?”

“그 아이는 일부러 자극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일부러 죽이려 하진 않을 거야.”

“내 흉터를 볼 때, 조하륜의 이름을 들을 때 눈이 흔들렸어. 뭔가 알고 있어.”

“그럼 언젠가 묻게 되겠지. 칼을 좀 내려놓은 다음에.”

멀리서 종이 울렸다.

“신사 아침 종인가?”

“아니야.” 백민이 일어섰다. “어제 의식 종은 낮고 길었어. 이건 짧고 급해. 쇠를 제대로 못 친 것처럼 반쯤 깨졌어.”

두 번째, 세 번째 종이 이어졌다. 세 번째에 창고 안쪽에서 단비호가 이불을 걷어차고 튀어나왔다.

“형! 아니, 백민 형! 저거 경보죠? 맞죠?”

“신발부터 신어라.”

장무겸은 이미 창을 들고 있었다. 청우 대사는 염주를, 고륜은 낡은 칼을 챙겼다. 어부들이 바깥길을 뛰며 외쳤다.

“벼랑길! 뒤쪽 벼랑길로 올라온다!”

적색 갑주를 갖춘 아야네가 거의 동시에 나타났다. 옆판에 밤이슬이 남아 있었고, 쌍검은 반쯤 빠져 있었다.

“해동 분들은 숙소에 계십시오.”

그 말만 남기고 그녀는 곧장 마을 뒤편으로 몸을 돌렸다.

“항구가 아닙니다.” 백민이 말했다. “소리가 뒤쪽 절벽에서 왔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녀가 뛰기 시작했다. 백민도 본국검을 집어 들고 따라붙었다. 무겸이 낮은 목소리로 일행을 나눴다.

“서란은 부상자. 비호는 수로와 그물 장치. 청우 대사는 주민들을 신사 마당으로. 나는 아래 우회로를 막겠다. 고륜 선배는 배후.”

“명령 빠른 건 마음에 드는군.” 고륜이 투덜대며 반대편 골목으로 사라졌다.

화산암을 깎은 계단식 집들 사이로 폭 1m도 안 되는 골목이 뱀처럼 휘었다.

“항구로 오면 우리가 먼저 알아챕니다.” 달리며 아야네가 말했다. “그래서 썰물 때 북쪽 절벽 밑에 붙어서 갈고리랑 흡착 발판으로 기어오른 겁니다. 보일러를 젖은 천으로 감아 소리까지 죽였습니다.”

“마을 구조를 아는 놈들이군요.”

“등에 빈 포대를 멘 걸 보세요. 배가 아니라 곳간과 사람을 털러 온 겁니다.”

첫 번째 비명이 안개를 찢었다.

돌계단 위, 노인과 아이들이 사는 낮은 집들 앞에 철가죽 가면을 쓴 해적 여섯이 올라와 있었다.

“곳간 문 열어! 지렛대 더 깊게!”

“골목 막아! 압력탄 굴려, 한 놈도 못 나오게!”

“노인네들은 빼고 곡식 자루부터 챙겨라!”

아야네가 먼저 솟구쳤다. 쌍검이 안개를 가르자 갈고리창의 가죽끈이 끊겼다.

“윽, 이 계집이……!”

“소란은 사양합니다.”

검등이 턱을 쳤다. 한 명을 쓰러뜨린 동작이 곧 다음 적의 빈틈이 되었다.

백민은 아래 그물 창고로 뛰었다. 해적 셋이 문을 부수고 젊은 어부 둘을 끌어내는 중이었다.

“살려 주십쇼! 우린 그물밖에 없소!”

“안쪽으로 물러나 계십시오!”

그는 검신에 실처럼 얇은 청염만 둘렀다. 푸른 선 하나가 검의 등뼈를 따라 맥박처럼 뛰었다.

“비켜라, 이 푸른 놈아!”

“받지 않겠습니다.”

첫 칼을 옆으로 흘리며 검등으로 손목을 비틀고 발끝으로 무릎을 찍었다.

“크윽!”

두 번째 해적이 갈고리줄을 던졌다. 줄은 어깨 위를 지나 창고 기둥에 박혔다.

“막지 말고 당겨요!” 위에서 아야네가 외쳤다.

백민이 줄을 낚아채 끌자 해적의 몸이 딸려왔다. 아야네가 난간을 밟고 내려와 그 어깨를 딛고 지나갔다.

“진로를 막지 말랬습니다.”

“방금은 막은 게 아니라 열었습니다.”

아야네의 표정이 웃음인지 짜증인지 모호했다. 계단 위에서 셋이 더 내려왔다. 하나는 등에 압력통을 멨고, 통 끝에 쇠그물이 접혀 있었다.

“저 통 끝에 접힌 거, 어망입니까?”

“매듭을 보세요. 검은 코테르 가루에 소금 결정이 붙었죠. 청염잡이 그물입니다.” 아야네가 낮게 말했다. “동해 떠돌이들이 가끔 씁니다. 불 쓰는 무인을 산 채로 팔아넘길 때.”

“……사람을 팔아넘긴다고요.”

“분노하지 마세요. 분노하면 저 그물에 먹힙니다.”

압력통이 열렸다. 쇠그물이 증기와 함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검령성의 밤, 조하륜의 그림자가 한꺼번에 치밀었다.

“젠장…….” 손등 혈관이 푸르게 물들었다. “불이 올라옵니다!”

“백민, 청염 낮춰! 그물에 닿으면 안 돼!” 멀리서 서란이 소리쳤다.

“백민.”

등 뒤에서 아야네의 숨이 들렸다. 닿지 않았지만 닿은 것처럼 가까웠다.

“바다를 보세요. 불을 키우지 말고, 빠져나갈 길을 만드세요.”

“쉽게 말씀하십니다…….”

“쉬웠으면 그물이 필요 없었겠죠. 숨부터 세요.”

소금 결정이 청염에 닿자 불꽃이 갈라졌고, 통증이 손목까지 치밀었다.

“하나, 물러남. 둘, 낮아짐.”

“그렇게, 계속!”

“셋, 흘림.”

태우는 불이 아니라 물속의 쇠를 안쪽부터 데우는 열이 매듭 사이로 번졌다.

“거기!” 아야네의 검이 가장 약한 매듭만 골라 잘랐다. “지금 빠지세요!”

청염이 밀어 올린 틈을 해류의 검이 벌렸다. 백민은 어깨를 낮춰 빠져나오며 검끝의 불로 압력통 밸브를 찔렀다.

“으아아, 뜨거, 뜨거워!”

“가만있으십시오! 압력부터 뺍니다!”

역류한 증기가 사내의 등에서 터졌다. 백민은 손잡이를 돌려 남은 압력을 바닥으로 뺐다.

“죽이지 않는군요.”

“죽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아야네의 시선이 그의 손에 머물렀다. 분노가 치밀었는데도 선을 넘지 않은 손이었다.

“곳간!”

비호의 목소리가 마을 중앙에서 날아왔다.

“형! 문 못 부수니까 장작에 기름 붓고 불 질렀어요!”

“안에 뭐가 있습니까?”

“겨울 곡물이랑 건어물 전부요.” 아야네의 목소리가 굳었다. “저게 타면 이 마을은 바다보다 굶주림에 먼저 잠깁니다.”

“비호, 수로!”

“알아요, 형! 벌써 뛰고 있어요!”

좁은 골목에서 백민의 검이 아야네의 진로를 반 뼘 막았다.

“비키세요!”

그녀는 멈추지 않고 그 검등을 밟았다. 백민이 반사적으로 검을 받쳐 올리자, 아야네는 힘을 타고 처마를 넘어 곳간 앞 해적들 위로 떨어졌다.

“그렇게 쓸 거면 미리 말하세요!”

“저도 방금 알았습니다!”

“검을 발판으로 쓰는 사람은 처음 봅니다.”

“발판이 되어 주는 검도 처음 봅니다.”

아야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숨을 뱉었다. 그 끝에 칼날처럼 짧은 웃음이 섞여 있었다. 청염기관의 박동이 한 단계 낮아졌다.

“불은 제가 끕니다!” 비호가 온천 수로의 낡은 황동 밸브를 뜯어내며 외쳤다. “근데 물이 모자라요! 위쪽 저수통 밸브에 놈들이 쇠못을 박아 놨어요!”

“비호, 물길을 왼쪽으로 돌려!”

“이음쇠가 녹슬어서 안 돌아가요!”

“내가 데우겠다. 늘어나면 쳐!”

백민은 본국검을 거꾸로 쥐고 바닥의 수로 덮개를 찍었다. 청염이 덮개 아래 낡은 이음쇠만 데웠다. 검령성 보일러실에서 밸브를 열던 감각이었다.

“붉어졌다! 늘어난다, 쳐!”

“어디를요, 형!”

“이음쇠 왼쪽, 검은 자국 난 데!”

“찾았어요! 지금!”

비호의 망치가 내려갔다. 쇠못이 튀어나가고 밸브가 열리자 온천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물 나온다! 형, 열 좀 더요, 증기로 덮게!”

“한 번만이다!”

검신의 열을 만난 물이 증기가 되어 기름불을 덮었다. 하얀 김이 곳간 앞을 삼켰다.

연기 속에서 해적 하나가 몸을 돌려 도망치려 했다. 그 앞을 무겸의 창이 막았다.

“마을 뒷길은 닫혔다. 칼 내려놓아라.”

창끝은 목이 아니라 발밑 돌바닥을 찍고 있었다. 무겸 뒤로 청우 대사가 주민들을 이끄는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눈 감지 마라, 얘들아. 대신 어른 손을 놓지 마라. 그게 사는 법이다.”

해적이 줄어들수록 안개가 걷혔다. 신사로 오르는 붉은 기둥 아래, 닻사슬을 감은 철가면 거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기다. 어부 둘이 잡혀 있어.” 무겸이 빠르게 훑었다. “아이들은 없다. 하지만 저 뒤에 압력통이다.”

“터지면 신사 아래 계단이 통째로 무너집니다.” 아야네가 이를 물었다.

“물러서라!” 젖은 금속판을 긁는 목소리였다. “항구는 안 건드렸다. 곳간이랑 사람 몇만 데려간다. 해적끼리 일에 외지인은 안 끼는 게 섬의 법도 아니었나?”

“이 마을 사람은 해적의 물건이 아닙니다.”

“그 말은 겐조의 본대가 있을 때나 힘이 있지. 오늘은 비어 있잖아?”

겐조. 그 이름에 마을 공기가 변했다. 집들의 벽과 어부들의 눈빛, 아야네의 어깨에 보이지 않게 얹힌 이름이었다.

“입 다무십시오. 그 이름을 함부로 빌려 쓰는 자가 제일 먼저 베입니다.”

아야네가 쌍검을 낮췄다. 물러서려는 것이 아니라 더 빨리 뽑기 위한 자세였다.

“그리고 너. 푸른 불 쓰는 해동 놈.” 철가면이 백민을 보았다. “네 심장은 값이 나가겠다. 산 채로 넘기면 배 한 척은 살 수 있겠어.”

청염기관이 다시 뛰었다. 사람을 물건처럼 재는 목소리에 분노가 익숙한 길로 올라왔다. 그러나 백민은 오히려 손에서 힘을 풀었다.

“심장 값 치고는 비싸게 부르는군.”

“인질은 제가 봅니다.”

“폭발통은 제가 끊죠.”

“사슬은?”

“당신이 막지 말아야 할 제 진로입니다.”

철가면이 먼저 사슬을 던졌다. 작살 달린 사슬이 두 갈래로 날아왔다.

“목!”

“발목입니다!”

백민은 목을 노린 사슬을 옆으로 흘렸다. 아야네는 발목을 노린 사슬 위로 뛰었다. 백민이 검등을 올렸다. 이번에는 실수가 아니라 약속된 발판이었다.

“올립니다!”

“받겠습니다!”

그녀가 철가면의 머리 위를 넘으며 점화줄과 사슬 고리를 동시에 잘랐다.

“이쪽 줄은 끊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아저씨, 가만히 계세요, 매듭만 태웁니다.”

백민은 검끝의 작은 청염으로 어부들의 매듭만 태웠다. 두 번째 어부가 넘어지려 하자 어깨로 받쳤다.

“뛰지 말고 숨부터 쉬십시오.”

“뒤!”

아야네가 외치기 전에 백민은 이미 몸을 낮췄다. 철가면의 팔꿈치에서 튀어나온 숨은 칼날이 머리 위를 스쳤다.

“이놈이 어떻게 알고……!”

“흐름에 빈자리가 있었습니다.”

백민은 베지 않고 팔꿈치 관절 아래를 검등으로 쳤다. 청염이 스민 충격에 의체 관절이 굳었다.

“사슬 감습니다!”

“반대편 잡겠습니다!”

두 힘이 엇갈려 걸리자 거한의 중심이 무너졌다. 그가 무릎을 꿇으며 입 안의 증기 호각을 깨물었다.

“호각을 뱉어라!” 무겸이 외쳤다.

“이미 늦었다, 해동 놈들아. 젠장, 불씨라도 남겨라!”

날카로운 소리가 안개 속으로 퍼졌다.

벼랑 아래 남아 있던 해적 둘이 곳간 옆 그물 창고로 뛰어들었다.

“안에 마른 밧줄이 천장까지 걸려 있어요!”

“그물 창고!”

백민이 들어가려 하자 아야네가 어깨를 잡았다.

“좁습니다. 큰 검은 걸립니다.”

“그럼?”

“당신은 문을 막아요. 못 나오게.”

그녀가 몸을 낮춰 미끄러져 들어갔다. 안에서 쌍검이 밧줄 사이를 스치는 소리와 나무 상자 넘어지는 소리, 욕설이 뒤엉켰다.

“이 계집이!”

“어딜 봅니까, 여깁니다.”

백민은 문 앞에 검을 가로로 세웠다. 또 기다림이었다. 그러나 이번 기다림은 늦음이 아니라 맡기는 일이었다.

뒤쪽 판자가 터지며 해적 하나가 튀어나왔다.

“비켜라!”

“여기는 못 지나갑니다.”

발목을 걸어 넘어뜨리자, 안쪽에서 아야네가 다른 하나를 그물 더미로 몰아냈다.

“지금 덮으세요!”

백민이 큰 어망을 통째로 끌어당겨 둘을 한꺼번에 덮었다.

“형, 둘 다 들어갔어요? 그럼 윈치 돌립니다!”

“살살 당겨! 사람 찢어지면 정비비 더 든다고!”

“누가 정비비를 냅니까?”

“저 사람들이요!”

너무 당당한 대답에 무겸이 전투 중인데도 짧게 웃었다. 아야네가 기름 묻은 갑주로 창고에서 걸어 나왔다.

“다친 곳은?”

“없습니다.”

“숨은 조금 가쁜데요. 머리카락도 뺨에 붙었고.”

“당신도 그렇습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 청염기관은 뜨거웠지만 폭주하지 않았다. 불을 쥔 채로 멈춰 있었다.

“어부 팔은 깊지 않아.” 서란이 붕대를 감으며 말했다. “그리고 너, 이리 와 봐. 오늘은 박동이 안 넘쳤네.”

“넘칠 뻔했어.”

“뻔한 거랑 넘친 건 달라. 그물 앞에서 언제 멈췄어?”

“……하나, 둘, 셋 세다가.”

“그걸 계속해. 나중에 칭찬은 해 줄게.”

“고륜 선배, 위는 어떻습니까?”

고륜이 입가에 짠 바람을 묻힌 채 벼랑 끝에서 돌아왔다.

“배는 이미 빠졌군. 두 척. 노 젓는 속도로 봐선 먼바다까지는 못 가겠지만, 지금 쫓을 배도 없다.”

“철가면은 신사 앞 돌기둥에 묶어 두세요.” 아야네가 말했다. “추격하지 않습니다. 먼저 마을을 정리합니다. 다친 사람부터, 그다음 곳간 문. 신사 마당에 아직 떨고 계신 어르신들도 모셔 오세요.”

“알겠소, 아가씨.” 어부들이 고개를 숙였다.

“묶는 건 내가 하지.” 무겸이 거한의 사슬을 걷어 올렸다. “매듭은 비호보다 내가 낫다.”

“들었어요, 형!”

“섬 무녀라더니, 마을 사정을 손바닥처럼 아는군.” 무겸이 나직이 말했다.

“묶여 있는 거겠지요.” 백민이 답했다. “외로움보다 책임에.”

해가 뜨자 화산암 절벽이 검붉게 빛났다. 주민들은 무너진 물건보다 살아남은 사람을 먼저 셌다.

“다 있소? 윗집 막내는?”

“여기 있어요! 신사 마당에 숨어 있었어요!”

노인 하나가 온천물에 데운 쓴 술병을 들고 와 두 사람 앞에 잔을 내밀었다.

“둘 다 마셔. 손 떨리는 거 숨기지 말고.”

“쓰군요.” 백민이 한 모금 삼키고 말했다.

“쓴 건 약이라서 그렇다. 다 마셔.”

“전투 뒤에 손님에게 술을 권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손님이 아니라 방금 우리 곳간 지킨 검객이지. 너도 마셔라. 어릴 때부터 너는 다친 데 없어도 꼭 손끝이 식더라.”

“어르신, 그런 얘기는…….”

“왜, 맞는 말이지. 저 손 봐라, 지금도 차다.”

아야네가 드물게 말문을 잃었다. 백민은 잔을 받았다. 술은 약처럼 쓰고 끝에 유황이 남았지만 굳은 몸이 풀렸다.

“자, 생선도 먹어라. 온천 돌판에 구운 거다.”

“이거 진짜 맛있는데요? 껍질은 바삭하고 속은 짜고! 우리 배 주방에도 돌판 하나 달면 안 됩니까?”

“비호야, 배에 온천을 달 생각은 하지 마.” 서란이 즉시 받았다.

“누나, 기술적으로는 가능해요.”

“그 말이 제일 무섭다.”

웃음이 흘렀다. 웃다가 우는 이도, 울다가 웃는 이도 있었다.

“먹어, 해동 총각. 마른 얼굴로는 다음 싸움 못 해.”

“……잘 먹겠습니다.”

백민은 생선살을 조금 떼어 입에 넣었다. 검령성의 식탁이 떠올랐다. 낯선 섬이 그 빈자리에 새 의자를 놓고 있었다.

아이들이 백민의 콧등 흉터를 보고 몰려왔다. 셋이 곧 여섯이 되었다.

“그거 칼자국이에요?”

“아저씨, 아파요?”

“만져 봐도 돼요?”

이하겸의 칼날과 피의 밤이 겹친 흉터였다. 아이에게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만지면 안 된다. 넘어져서 생긴 거다.”

“형, 그걸 누가 믿어요?” 비호가 물을 뿜을 뻔했다.

“거짓말이다. 넘어져서 콧등에 그렇게 나요?”

“다들 집으로 돌아가세요.” 아야네가 막아섰다. “흉터 구경은 장난감 구경이 아닙니다.”

“아야네 누나는 봐도 되잖아요.”

“나는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럼 저 사람도 지키는 사람이에요?”

대답이 아주 잠깐 늦었다. 그녀는 아직 그를 동료라 부르지 않았고, 적이라 부르지도 않았다.

“……오늘은 그랬습니다.”

아이들이 와르르 흩어졌다.

“오늘은, 이군요.”

“내일은 모릅니다.”

“그래도 오늘은 알았습니다. 당신이 이 섬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

“함부로 말하는군요.”

“틀렸습니까?”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대답하신 걸로 알겠습니다.”

아야네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너무 정확한 곳을 건드렸을 때의 방어였다. 먼바다에는 달아난 배 두 척이 점처럼 남아 있었다.

“싫어할 수 있었으면 편했겠죠. 싫어하면 떠나면 되고, 미워하면 베면 됩니다. 그런데 어떤 것들은 싫어할 수도, 떠날 수도, 벨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지키는 겁니다.”

“당신의 검은 물 같습니다.” 백민이 말했다. “처음엔 흐르고 빠져나가는 검으로만 보였는데, 오늘 보니 물은 길을 막는 것을 오래 깎기도 하더군요.”

그녀는 대답 없이 쌍검 손잡이의 기름을 닦았다. 손끝이 조금 떨렸다.

“……당신은 불 같습니다.”

“그 말은 자주 들었습니다. 대개 좋지 않은 뜻으로.”

“좋은 뜻으로 한 말 아닙니다.”

“역시.”

“하지만 오늘의 불은 마을을 태우지 않았습니다.”

칭찬이라기엔 차갑고 판결이라기엔 부드러운 말이었다. 백민은 가라앉은 손등 혈관을 내려다보았다.

“분노를 삼킨 건 아닙니다. 쥔 채로 방향만 바꿨습니다.”

“그게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봤습니다.”

점심 무렵, 아야네는 붙잡은 자들을 신사 뒤 창고에 가두게 했다.

“무기는 한곳에 모으겠다.” 무겸이 말했다.

“심문은 오후에 합니다. 마을 어른들도 같이.” 아야네가 짧게 답했다. “누가 길을 열어 줬는지 알아야 하니까요.”

“입이 쉽게 열릴까.”

“열리게 만드는 건 제 몫입니다.”

비호는 청염잡이 그물 매듭 하나를 뜯어 눈을 반짝였다.

“와, 형, 이것 좀 봐요. 이거 구조가 정교해요. 소금 결정으로 열을 튕기고 코테르 가루로 불꽃 방향을 흩트리는데…… 형, 거꾸로 쓰면 냉각 장치에 도움이 되겠어요.”

서란이 그의 뒤통수를 가볍게 쳤다. “사람 잡으려고 만든 걸 사람 살리는 데 쓰려면, 먼저 씻고 기록하고 세 번 생각해.”

“네. 씻고 기록하고 세 번 생각. 그다음 분해.”

“네 번째가 너무 빠르다.”

“누나, 분해 안 하면 기록할 게 없잖아요.”

“해악의 도구도 손을 바꾸면 약재가 될 수 있지요.” 청우 대사가 낮게 웃었다. “다만 손이 먼저 깨끗해야 합니다.”

아야네가 그 말에 잠시 시선을 내렸다.

해가 머리 위로 오르자 그녀가 백민을 벼랑길로 불렀다. 부러진 갈고리창이 계단에 뒹굴었다. 백민은 그녀가 밟았던 검등의 흠집을 엄지로 쓸었다.

“검에 상처 냈군요.”

“발판으로 쓰인 검치고는 멀쩡합니다.”

“그럼 다음에도 쓸 수 있겠네요.”

“발판값은 받겠습니다.”

“해적섬에서 값을 부르다니, 배우는 게 빠르군요.”

“다음에도 같이 싸울 일이 있습니까?”

“이 섬에서는 늘 있습니다.” 그녀가 바다를 보며 말했다. “오늘 온 자들은 겐조의 본대가 아닌 떠돌이입니다. 그런데 떠돌이가 빈틈을 알았다는 건, 알려 준 눈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우리 쪽이든, 저쪽이든.”

“당신은 의심받습니까?”

“늘요.”

오래된 피로가 묻은 대답이었다. 백민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벼랑 아래 파도를 내려다보았다.

“아침엔 이 바다가 낯선 경계였는데, 지금은 싸움의 호흡처럼 들립니다.”

“그게 이 섬이 사람을 붙잡는 방식입니다.”

아야네가 등을 돌렸다.

“다음에는…… 진로를 막지 마세요.”

목소리가 낮았다. 백민이 대답하려는 순간, 그녀가 덧붙였다.

“등은, 맡길 테니까.”

동료라는 말도, 믿는다는 말도 아니었다. 그러나 등을 맡긴다는 건 칼끝을 겨누는 것보다 어려운 약속이었다.

“그럼 다음에는 제가 먼저 묻겠습니다. 어느 방향으로 열면 됩니까.”

“열리는 쪽이라면 제가 알려 드리죠.”

아야네가 숨기지 못한 웃음을 짓고는 곧바로 지우며 계단을 내려갔다. 청염과 해류가 처음으로 같은 방향을 향한 날이었다.

그때 바람이 바뀌었다. 신사에서 날아온 검은 종이 한 장이 백민의 발치에 떨어졌다. 글자는 없고, 마르지 않은 검은 파도 낙인만 손끝에 묻어났다.

계단 아래 아야네가 멈춰 서 있었다. 그녀도 같은 낙인의 종이를 쥐고 있었다. 백민이 다가서자 그녀는 그것을 재빨리 소매에 감췄다.

“아야네.”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바닷바람에 소매 끝이 흔들리며 접힌 종이의 귀퉁이가 드러났다. 백민은 거기 적힌 두 글자만 보았다.

法道. 법도.

아야네는 아무 말 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손끝의 낙인 위로 청염이 일렁였지만 종이는 타지 않았다.

“법도…….” 백민이 낮게 되뇌었다. 자신이 지킨 마을보다 더 큰 그물이 붉은 섬 전체에 쳐져 있었다. 그 첫 매듭은 아야네가 등 뒤로 숨긴 소매 안에서 조용히 조여들고 있었다.

— 話 46 終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