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점 · 강민 — 균열·낙인 단계

해적섬의 법도(法道)

第1部 · 話 47 · 검령성 · published

海東曆: 201년 12월 2일 · 시점: 아야네

새벽의 붉은 섬(赤島)은 전투의 흔적을 아직 씻어 내지 못하고 있었다. 모래밭에는 마을 사람들이 뿌린 소금이 흰 상처처럼 남아 있었다.

아야네 류하(綾音流霞)는 신사 처마 그늘에서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갑주 안쪽으로 스며든 모래알이 피부를 긁었다.

“무겸 형, 그 기둥 혼자 세우면 허리 나가요!”

“그럼 넌 등잔이나 마저 고쳐라. 애들이 기다린다.”

“오라버니, 이것도요! 이것도 불 안 들어와요!”

“알았다, 알았어! 한 명씩! 줄 서라, 줄!”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단비호 너머로, 유서란이 노인의 찢어진 손바닥을 감아 주고 있었다.

“아파요?”

“안 아프다. 아가씨 손이 좋아서.”

“거짓말은 어르신이 더 크게 하시네요. 참지 말고 말씀하세요.”

해안 바위 위에서는 청우가 불경을 낮게 외며 죽은 해적들의 넋까지 함께 떠나보내고 있었다. 그 아래, 백민이 마을 청년들과 쇳조각을 모았다.

“백민 형님, 이건 어디다 쌓을까요?”

“저쪽 수레에. 날 선 건 헝겊으로 감아서.”

벼랑길에서 등은 맡길 테니까, 라고 말했을 때의 짧은 침묵. 대답보다 무거웠던 그 신뢰가 오늘은 짐이었다.

“아씨.”

늙은 무녀 나나에가 작은 천 주머니를 내밀었다. 유황 냄새 밴 부적 세 장과 말린 쑥잎, 그리고 흰 조개 하나. 조개 안쪽에 서툰 글씨가 긁혀 있었다. 돌아오세요.

“누가 준 것이냐.”

“모두가 준 것입니다. 정확히는 모두가 주고 싶어 했고, 글자는 사키가 새겼습니다. 손이 작아 글자가 흔들렸습니다.”

“사키라면, 해동 사람 흉터 보겠다고 제일 먼저 달려들던 아이 아니냐.”

“예. 아씨가 쫓아내셔서 입이 이만큼 나와 도망쳤지요.”

아야네는 주머니를 소매에 넣었다. 그 작은 온기가 오히려 살을 베듯 느껴졌다.

“겐조의 부름은 언제 도착했습니까.”

“해 뜨기 전입니다. 검은 돛 하나가 서쪽 안개를 타고 들어와, 말 없이 이것만 두고 갔습니다.”

나나에가 손바닥을 펼쳤다. 금속선과 푸른 코테르(機核) 가루가 박힌 검은 조개. 무라사메 겐조(村雨玄三)의 소환 표식이었다. 받아 든 조개가 손바닥에서 차갑게 떨렸다.

“거부한 섬은 없었지요.” 아야네가 말했다. “있었더라도 동해열도(東海列島) 어느 지도에도 이름이 남아 있지 않을 테고요.”

“저 해동 분들 말입니다, 아씨.” 나나에가 마을 쪽으로 턱짓했다. “값을 받겠다는 말씀 한마디 없이 검부터 드셨지요. 이 섬에서는 보기 드문 일입니다.”

“그는 외지인입니다, 나나에. 이 섬에 빚진 적도, 법도에 묶인 적도 없지요. 그런데 아무 대가 없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겐조가 궁금해하는 거겠지요.”

“은혜를 받으면 값을 치르고, 못 치르면 이름을 빼앗기는 섬입니다. 아이는 신사보다 공물 장부에 먼저 오르고, 배가 돌아오면 생선보다 세금을 먼저 세지요.” 아야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런 섬에 값을 받지 않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그게 더 위험한 겁니다. 배를 준비하세요.”

“해동 분들께는 뭐라 전할까요?”

“아무것도. 섬 일로 잠시 나갔다고만.”

“혼자 가실 겁니까.”

“겐조는 내가 혼자 오는 걸 좋아합니다. 겁먹은 얼굴을 오래 보는 취미가 있으니까요.”

“아씨께서 겁먹은 얼굴을 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더 오래 보려는 겁니다.”

선착장으로 내려가는 길에 백민이 고개를 들었다. 녹슨 철편을 든 채, 무언가 묻고 싶은 얼굴이었다. 어디로 가느냐고, 도움이 필요하느냐고.

아야네가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 거짓말은 말로 시작되지 않는다. 때로는 눈을 피하는 순간 이미 시작된다.

공물을 바칠 때만 쓰는 쾌속정이었다. 선미에 박힌 겐조의 검은 비늘 표식은 보호가 아니라 소유의 낙인이었다.

배가 섬을 떠났다. 동해의 겨울바다는 낮에도 어두웠다.

“서쪽은 검은 물살, 남쪽 암초 쪽은 은빛 역류.” 아야네는 뱃머리에서 중얼거렸다. “그리고 흑풍도 쪽에서 오는 기름 섞인 흐름.”

해류검(海流劍)을 낳은 바다였다. 기름 섞인 그 흐름은 겐조의 손가락처럼 모든 섬의 목덜미를 더듬었다. 그녀는 소매 속 조개를 만졌다.

“돌아오세요……. 너무 쉬운 말이라, 견디기 어렵구나.”

돌아오려면 누군가를 속여야 했다.

◆

흑풍도(黑風島)는 바다 위에 엎드린 검은 짐승 같았다. 함대 선체마다 회전 톱날이 번뜩였다. 부두 기중기에는 오늘 빈 갈고리만 흔들렸다.

“붉은 섬, 진주 한 상자! 개수 맞춰서 적어!”

“장부에 먹 마르기 전에 다음 배 받아라!”

말라붙은 잉크 냄새를 풍기며 서리들이 오갔다. 수하 둘이 부두에 내려선 아야네의 양옆에 붙었다. 웃는 얼굴이었지만 손은 칼자루에 얹혀 있었다.

“검희님. 두목께서 기다리십니다.”

“검은 맡길까요.”

“그대로 들고 가셔도 됩니다. 두목께서 검희님은 믿으시니까요.”

“믿음이라니, 오랜만에 듣는 말이군요. 저 갈고리, 오늘은 비어 있어서 다행이지요?”

“비어 있다는 건 채울 수 있다는 뜻이지요. 앞장서세요.”

검희. 존칭처럼 들리지만 목줄의 다른 이름이었다.

선실 문이 닫히자 파도 소리가 양탄자에 먹혀 멀어졌다. 벽마다 빼앗은 검과 부서진 가문의 문패가 박혀 있었다. 지도 위 눕혀진 붉은 핀은 더는 공물을 내지 못하는 섬이었다.

탁자 끝, 오른쪽 어깨만 높은 사내가 앉아 있었다. 턱에는 상어 이빨 같은 황동 보철이 박혀 있었고, 인장 반지가 부딪혀 죽은 집안들이 이를 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류하.”

성 대신 이름이었다. 가문이 사라졌음을 상기시키는 방식이었다. 아야네는 무릎을 꿇지 않았고, 겐조는 그것을 허락했다.

“여전히 서 있구나.”

“무릎은 섬사람들 앞에서만 꿇습니다.”

“좋다. 꺾이지 않은 것이 천천히 금 가는 걸 보는 재미가 있으니.”

“부르셨습니까.”

“붉은 섬에 손님이 있었다지.” 그가 주인 잃은 검 한 자루를 손톱으로 튕겼다. 맑고 얇은 소리가 났다.

“외부 해적단이 들어와, 섬사람을 지키려 싸웠습니다.”

“내가 묻는 건 그 해적들이 아니다.” 다시 튕긴 검날의 소리가 조금 갈라졌다. “푸른 불을 쓰는 해동의 소년. 그리고 안개 속에서 사라졌다 나타났다는 배. 보고가 재미있더군. 붉은 섬 늙은이들은 거짓말을 못 해. 겁먹으면 눈동자가 먼저 배의 방향을 말하거든.”

아야네의 손가락이 아주 조금 굳었다. 겐조는 놓치지 않았다.

“이름은.”

“백민(白民)이라 했습니다.”

“백.” 겐조가 짧게 웃고, 지도 위 핀 하나를 손가락으로 밀었다. “모래곶이 이번 달에는 생선 대신 사과문을 보냈더군.”

“모래곶은 지난달 태풍에 배를 세 척 잃었습니다.”

“알지. 그래서 사과문이 왔겠지.”

날씨 이야기를 하는 듯한 말투가 협박보다 나빴다. 아야네의 목이 말라붙었다.

겐조가 서랍에서 손바닥만 한 청동 패를 꺼내 탁자 위로 밀었다. 검은 파도 문양 아래 태엽 소리가 났고, 푸른 점 하나가 깜빡였다.

“그 소년에게 접근해라. 무엇을 찾는지, 누구를 쫓는지, 푸른 불을 어떻게 다루는지. 더 중요한 건 그 배다. 보이지 않는 배는 신화가 아니야. 신화라면 내 사람들이 겁먹었을 리 없지. 어디 숨겼는지, 몇이 타는지, 동력로가 어디인지, 무엇을 하면 은신이 풀리는지. 전부.”

“그들은 섬을 도왔습니다.”

“그래서 살려 두는 거다.” 황동 턱이 딱 맞물렸다. “도와준 자를 죽이는 건 낭비다. 도와준 자를 쓰는 것이 법도지. 해적섬의 법도. 잊었을까 봐 다시 가르쳐 주는구나.”

“이건…….”

“감응패다. 가까이 두면 기계의 박동을 기억하고, 사람 내공의 흐름까지 흐릿하게 남기지. 그 배 심장 곁에 놓아 두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내가 이 방에 앉아서 그 박자를 읽을 수 있어.”

“거부하면요.”

묻지 말아야 할 말이었다. 겐조는 기뻐했다.

“거부할 수 있는 사람에게나 거부라는 말이 허락된다.”

그가 모래곶의 핀을 뽑아 옆으로 눕혔다. 대답은 그것으로 끝났다.

아야네를 움켜쥔 것은 분노도 절망도 아닌 계산이었다. 누구를 속이면 누구를 지킬 수 있는가.

“류하.”

“예.”

“너는 복수자가 되고 싶겠지. 네 아비의 검, 네 어미의 댕기, 그런 낡은 걸 아직 품고 있을 테니. 하지만 기억해라. 복수는 살아남은 자의 놀이가 아니다. 허락받은 자만 하는 사치다. 난 아직 네게 그 사치를 허락하지 않았다.”

아야네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하가 연 상자 안, 조개 진주 위에 찢어진 노끈 팔찌 하나가 놓여 있었다. 사키가 차던 것과 같은 모양이었다.

“아이들은 손목이 가늘어 팔찌가 잘 빠진다더군. 조심시키거라.”

“…….”

“지금 검을 뽑고 싶겠지.” 겐조가 반지를 굴렸다. “뽑아라. 날 베기 전에 포대가 붉은 섬으로 돌 테니. 아이들은 지금쯤 아침밥을 먹고 있겠군.”

그녀가 사랑하는 것들이 그의 가장 단단한 방패였다. 아야네는 천천히 청동 패를 집었다. 태엽이 벌레처럼 손바닥에서 떨었다.

“명은 받겠습니다.”

“좋다. 나흘 뒤까지 첫 보고를 보내라. 그 전에 내가 직접 확인할 사람을 보낼 수도 있다. 반갑게 맞아라. 네가 반갑지 않아도.”

누구를 보낼지는 말하지 않았다. 겐조는 늘 핵심을 조금 남겨 두었다.

항구 한쪽에서 젊은 선원이 서리에게 손등을 맞고 있었다.

“공물 상자 개수 하나 틀렸다고 이러십니까!”

“한 번에 부수진 않는다. 같은 자리를 오래 아프게 하지.”

아야네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그 선원이 더 맞는다. 흑풍도에서는 동정도 증거가 된다.

돌아오는 뱃전에서 그녀는 청동 패를 꺼냈다. 아래는 유황 역류였다.

“여기 던지면 순식간에 녹겠지. 파도에 잃었다고 하면 된다.” 그녀가 낮게 말했다. “믿지 않아도, 증거가 없으면 시간은 번다.”

혼잣말과 달리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소매 속에서 흰 조개와 검은 패가 부딪혔다. 하나는 돌아오라 했고, 하나는 배신하라 했다.

“어머니.”

바람에 흩어진 목소리는 누구에게도 닿지 않았다. 무녀였던 어머니가 어린 그녀에게 말했었다.

“무녀의 검은 악한 사람을 베기 전에 먼저 거짓된 마음을 벤단다. 그래서 무녀는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게 잔인해야 해.”

어릴 땐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은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

해가 기울 무렵 붉은 섬에 닿았다. 마을은 낮보다 조용했다. 노인들은 죽은 이들의 이름을 돌판에 적고 있었다.

백민이 선착장 끝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갑옷도 없이, 칼자루에서 손을 뗀 채, 쇠갈고리를 든 모습이 마을 일을 돕는 평범한 청년 같았다.

“다녀왔습니까.”

“예.”

“어디 가셨는지 아무도 모르더군요.”

“섬 일입니다.”

“바다가 거칠었습니다.”

“늘 그렇습니다.”

대화는 짧았다. 짧아서 더 위험했다. 그는 감응패가 든 소매를 보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만 보았다.

“손에 든 건 무엇입니까.”

“어망 갈고리입니다. 쓸모는 없습니다.” 그가 쑥스러운 듯 쥔 손을 펴 보였다. “일손이 모자라 보여서 거들다 보니 들고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다친 곳은 없습니까.”

이 사람이 가장 먼저 묻는 것은 다친 곳이었다. 아야네는 웃고 싶었고, 울고 싶기도 했다.

“……없습니다.”

거짓말이었다. 상처는 몸에만 나는 게 아니었다.

“당신이 맡긴 등은 아직 무사합니다.” 백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오늘은 당신 등도 좀 쉬게 하십시오.”

검보다 조용하고 겐조의 협박보다 잔인한 말이었다. 소매 속 태엽 소리가 차라리 그에게 들리기를 바랐다.

“……의심하셔도 됩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아닙니다. 바람이 찹니다.”

“그럼 들어가십시오. 누나께 따뜻한 차를 부탁해 두었습니다.”

그러나 백민은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 믿음이 첫 배신의 문을 열었다.

그날 저녁 신사에서 위령 의식이 열렸다. 죽은 이들의 이름이 하나씩 불렸고, 외부 해적의 이름도 몇 섞였다.

“그들도 이 바다로 돌아가는 넋이니까요.” 청우가 조용히 염불을 더했다.

“비호야, 고개 숙여.” 서란이 속삭였다.

“숙이고 있어요, 누나. 오늘은 안 떠들잖아요.”

백민은 제단 앞에 서지 않고 한 걸음 물러나 있었다. 이 섬의 슬픔을 자신이 차지할 수 없음을 아는 사람 같았다.

“형은 왜 안 가세요?”

“여긴 이 사람들의 자리다. 나는 여기서 충분하다.”

남의 슬픔 한가운데를 밟고 들어와 장부를 펼치는 겐조의 수하들과는 달랐다. 아야네의 죄책감은 더 커졌다.

의식 뒤, 나나에와 젊은 무녀 둘이 그녀를 목패가 빼곡한 안쪽 방으로 불렀다.

“흑풍도에서 무엇을 요구했습니까.”

물음 안에 이미 답이 있었다. 여기서까지 거짓말하면 정말 겐조의 사람이 된다.

“외지인들을 정탐하라 했습니다.”

젊은 무녀가 숨을 들이켰다. 나나에는 눈을 감았다.

“그 배도요?”

“예.”

벽의 목패들이 바람에 작게 부딪혔다.

“아씨. 저희는 결정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이 섬에서 아씨만큼 많이 잃고 오래 버틴 사람은 없으니까요. 다만 이것만은 말씀드립니다. 겐조에게 바치는 거짓말은 언젠가 더 큰 거짓말을 요구합니다. 그 끝에서 사람은 자기 이름까지 거짓으로 부르게 됩니다.”

아야네의 시선이 벽 가장 안쪽, 낡은 천 쪽으로 갔다.

“류하 가문의 목패는 아직 거기 있습니까.”

“겐조의 수하들이 뒤질 때 빼앗기지 않도록 옮겨 두었지요. 아버님, 어머님, 형제분들. 그리고…….”

“제 이름을 새길 빈 목패.” 아야네가 말을 받았다. “살아 있어도, 가끔은 제 이름이 그 빈 목패 같습니다.”

젊은 무녀가 고개를 들었다. 나나에도 눈을 떴다.

“정탐하겠습니다. 하지만 겐조가 원하는 방식으로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의 손에 칼을 쥐여 주지 않겠습니다. 백민이 우리 섬을 이용할 사람인지, 함께 겐조를 베어 낼 사람인지 확인하겠습니다. 보고해야 한다면 섬을 살리는 말만 고르겠습니다.”

“그것도 거짓입니다.”

“압니다.”

“그 거짓이 백민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압니다.”

아는 것만으로 죄가 가벼워지지는 않는다. 그래도 모르는 척하는 것보다는 덜 비겁했다.

“아씨.” 나나에가 문을 나서는 그녀의 소매를 잡았다. “지키려는 마음이 죄가 되지 않게만 하십시오.”

“노력하겠습니다.”

◆

밤이 깊자 아야네는 신사 뒤 검실(劍室)에서 어머니의 의식검 두 자루를 닦았다. 액을 베는 검과 길을 여는 검. 그녀는 칼끝을 제 목 앞에 세웠다. 평생 적을 향하던 검이 처음으로 자신을 향했다.

“등은 맡길 테니까.”

너무 빨랐고, 너무 진심이었다. 그래서 되돌릴 수 없었다.

문이 열리고 사키가 얼굴을 내밀었다. 손목에 노끈 팔찌가 없었다. 아야네의 심장이 짧게 멎었다.

“왜 아직 안 자니.”

“검희님이 돌아왔는지 보려고요. 아까 해동 오라버니가 부서진 등잔 고쳐 줬어요. 불이 다시 들어와서, 엄마가 오늘 밤은 덜 무섭대요.”

“그래서?”

“그래서 검희님도 그 오라버니랑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사키, 네 팔찌는 어디 있니?”

“어? 몰라요. 어디 갔지? 왜요?”

“……아니다.”

아이들은 공물도 협박도 모른다. 하지만 누가 등잔에 불을 켜 주었는지는 안다.

“싸우지 않게 노력하마.”

“약속?”

아야네는 대답하지 못했다. 약속은 깨질 때 나는 소리가 검보다 오래 남았다.

“검희님, 왜 대답 안 해요……. 으아, 졸려.”

“내일 아침에 말해 주마. 자, 가거라.”

“정말요? 약속 맞죠?”

“……자라.”

졸음에 진 아이를 안아 문밖으로 데려다주었다. 그 팔찌가 진짜 사키의 것이었는지, 겐조가 비슷한 걸 구해 흔든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검실로 돌아와 첫 보고를 쓰기 위해 종이를 펼쳤다. 겐조가 원하는 말은 쉬웠다.

“청염을 쓴다. 분노가 불씨. 배는 보이지 않는다. 일행은 여섯 안팎, 의공사와 도공, 창술가, 승려. 약점은 사람을 먼저 구하려는 마음.” 그녀는 낮게 읊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것만 써도 겐조는 웃겠지. 가장 값비싼 약점이니까.”

그녀는 붓끝을 갈고, 한 줄씩 소리 내어 다시 썼다.

“해동의 소년은 섬을 빼앗으러 온 자가 아니다. 그의 청염은 분노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무고한 자가 가까이 있을 때 오히려 약해지고, 적의 숨이 끊어진 뒤에는 더 타오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배의 위치는 확인하지 못했다. 접근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진실이었으나 전부는 아니었다. 그녀는 보고서를 접지 못하고 불 가까이에 두었다.

“태우면 아무 일도 시작되지 않을까. 아니지, 겐조는 다음 것을 보낼 테니.” 그녀가 중얼거렸다. “침묵하면 그 값은 섬이 치른다.”

그때 선착장 쪽에서 낮은 증기음이 들렸다.

“이 시각에 배라고?”

붉은 섬 어부들은 밤바다를 피한다. 겐조의 수하가 아니라면 더더욱. 그녀는 검을 집고 밖으로 나갔다.

달빛에 젖은 선착장에 흑풍도의 검은 등불 하나가 떠 있었다. 기둥에 박힌 화살 끝에 금속 편지가 묶여 있었다. 아야네는 그것을 뽑아 읽었다.

“첫 보고는 필요 없다. 확인자는 이미 출항했다. 내일 해가 기울기 전, 낯선 자들과 보이지 않는 배의 그림자를 선착장 가까이 끌어내라. 실패하면 모래곶부터 지운다.”

편지가 손끝에서 구겨졌다. 그 아래 작은 글자가 더 있었다.

“확인자는 둘이다. 하나는 바다를 읽고, 하나는 검을 읽는다.”

“나흘 뒤라더니. 기다릴 생각도 없었군.”

동쪽 수평선, 안개 사이로 등불 두 점이 흔들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겐조는 그녀에게 배신을 명령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배신이 시작된 자리로, 증인을 보내고 있었다.

— 話 47 終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