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점 · 강민 — 균열·낙인 단계

류센(柳辰)과 토비마루(飛丸)

第1部 · 話 48 · 검령성 · published

海東曆: 201년 12월 6일 · 시점: 류센

붉은 섬의 새벽 항구는 피와 생선 비늘과 젖은 숯 냄새가 함께 썩는 곳이었다.

류센(柳辰)은 갯바위에 앉아 그 냄새를 들이마셨다. 남들에게는 악취였으나 그에게는 바다가 밤새 뒤척인 얼굴을 알려 주는 기록이었다. 돌틈의 물을 혀끝에 대자 짠맛 뒤에 금속 맛이 따라왔다.

“또 바닷물 맛보냐.” 등 뒤에서 졸린 목소리가 들렸다.

“피가 섞였다. 크게 베인 건 아니고, 입술이나 잇몸이다. 겁먹은 사람이 이를 악물고 말을 오래 삼킬 때 나는 피.”

“코로 그걸 다 안다니, 개도 울고 가겠군.”

“썩은 해초가 심하면 남동쪽 여울이 뒤집힌 거고, 숯 냄새가 늦게 오면 절벽 훈제막 연기가 바람을 거슬렀다는 뜻이다. 바다는 냄새로 말한다.”

“말 많은 바다로군. 그래서 이 피 냄새는 뭐라는데.”

“누군가 오래 말을 삼켰다고.”

“누구.”

“조용히 해라.”

선착장 쪽에서 늙은 여인의 울음이 짧게 끊겼다. 계단식 부두에는 겐조의 세금배 대신 낯선 짐더미가 놓여 있었다.

“물동이 열두 개, 곡식 자루, 약초 묶음, 황동 압력 램프 넷.” 류센이 셌다. “공물로 뺏기기 전에 숨길 물건이 아니군. 굶은 집부터 가져가라고 펼쳐 놓았어.”

“겐조 법도 아래서 보기 드문 광경이지. 저쪽인가.”

토비마루(飛丸)가 하품했다. 대충 묶은 머리에 낡은 검집. 그러나 그의 눈은 이미 항구 전체를 한 번 훑은 뒤였다.

“소형선 네 척, 갈고리 창 든 감시꾼 둘, 약초 곁의 의공사, 부두 끝의 장창 사내. 그리고 가운데서 애한테 물통 건네는 흉터 난 애. 저 애가 백민(白民)인가?”

“그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이 섬에서 함부로 부를 수 없는 이름이 한둘인가. 겐조, 아야네, 백민. 이름이 무거운 사람들은 대체로 오래 못 웃더군.”

류센은 품속의 항법 일지를 눌렀다. 겉으로는 조류와 어장을 적은 장부였지만, 안쪽 몇 장의 점과 비뚤어진 숫자를 모으면 겐조가 불태운 포구와 사라진 어부들의 지도가 되었다.

“또 장부 만지는군. 네 손은 장부 위에 있을 때만 솔직해진다.”

“입 닫아라.”

“걱정 마. 나는 입을 닫을 줄 안다. 다만 네가 오늘은 입을 열 것 같아서 미리 놀라는 중이지.”

“그래서 겐조 영감이 뭐라고 했더라.” 토비마루가 물었다. “보이지 않는 배?”

“아야네 류하(綾音流霞)가 겪은 접전 보고다. 안개 속에서 사라졌다 나타난 선체, 바닷빛을 휘어 삼킨 황동 장갑판, 물 위에 번진 청염(靑炎) 같은 푸른 열.”

“영감은 웃었다면서.”

“헛것을 봤다고 웃고는, 그날 밤 바로 나를 불렀다. 무라사메 겐조(村雨玄三)는 헛소문을 비웃는 척할 때 가장 빨리 움직인다.”

류센은 만 바깥 수면을 보았다. 바람도 달도 만들지 않은 미세한 골이 있었다. 은신한 큰 선체의 배수선 가장자리에만 생기는 잔물결이었다.

“이상한 얼굴을 하는군.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뭔가 본 얼굴이야.”

“만 바깥에 큰 선체가 있다.”

“보이지 않는데?”

“물은 보고 있다. 크다. 그런데 항구를 누르지 않는다. 물결을 방해하지 않을 만큼만 버티고 있어. 덩치 큰 짐승이 아이들 곁에 누워 숨소리를 낮추는 것처럼.”

“배한테 마음을 붙이는 건 네 나쁜 버릇이지.”

“약탈하는 배는 물을 밀어붙이고, 달아나는 배는 물을 찢고, 사냥하는 배는 물소리를 죽인다. 저 배는 지키고 있다.”

“나는 물하고 친하지 않아서 모르겠다. 대신 저쪽 검은 보인다.”

토비마루의 시선은 백민에게 가 있었다. 남색 무복에 회색 외투, 허리에는 본국검(本國劍). 선착장 한가운데서 그는 아이들에게 물통을 건넬 때마다 몸을 낮추었다.

“손잡이 이쪽으로 잡아. 두 손으로.”

“네, 오라버니!”

“흘리지 말고. 한 방울도 아껴야 한다.”

“네에!”

겐조의 부하들은 아이에게 물 한 모금을 줄 때도 손목을 던지듯 내민다. 그 곁에서 유서란(柳瑞蘭)이 노인의 맥을 짚었고, 단비호(段飛虎)는 못을 문 채 어선 펌프를 뜯었다. 장무겸(張武謙)은 부두 끝을 지켰고, 청우(淸雨) 대사는 어부들의 밧줄을 거들었다.

“명령도 없는데 빈자리를 알아서 메우는군.” 토비마루가 중얼거렸다. “겐조 놈들은 명령이 끊기면 서로 등을 물어뜯는데.”

“훈련된 군율이 아니다. 마음의 방향이 같은 거다.”

“그게 더 불편한 얼굴이군.”

류센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부였던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바다는 네가 이기려고 드는 상대가 아니다, 들어 달라고 말해야 겨우 길을 내준다. 겐조가 온 뒤 그 바다는 숫자가 되었고, 류센은 살아남으려 항법사가 되었다.

“가자.”

“이번에는 네가 말문을 열 차례인가?”

“필요한 말만 한다.”

“그게 네 가장 큰 거짓말이지.”

선착장에 내려서자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급히 낮아졌다.

“항법사다.” 누군가 속삭였다. “장부에 오르면 다음 달엔 배가 없어진다.”

“쉿, 들린다.”

사람들은 칼날보다 장부를 더 무서워했다. 익숙해서 더 견디기 어려운 시선이었다.

물동이를 받던 아이가 류센을 보고 움찔했다. 손잡이를 놓친 물통이 기울었다. 백민이 한 걸음 옆으로 미끄러져 그것을 받아냈다. 한 방울도 쏟아지지 않았다.

“괜찮다. 꼭 쥐어.”

아이에게 물통을 다시 쥐여 준 뒤에야 그가 류센을 보았다. 흉터 아래로 눌린 어둠이 있었으나 그것은 밖으로 쏟아져 남을 찌르지 않았다. 힘을 가진 자가 힘을 쓰지 않으려 애쓰는 눈이었다.

“류센인가.”

“겐조 님의 명으로 물길을 살피러 왔다.”

‘겐조 님’은 혀끝에 녹을 삼키는 맛이었다. 그래도 항구에는 겐조의 눈이 많았다. 누가 진짜 감시꾼이고 누가 겁에 질려 흉내 내는지 구분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겐조의 지배였다.

백민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물길을 아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이 계절에는 어느 물고기가 가장 먼저 사라지나.”

류센의 눈썹이 조금 움직였다.

“병력 수도, 흑조선 약점도 아니고, 물고기?”

“마을에 나눌 식량을 정해야 한다. 우리 곡식은 오래 못 간다. 섬에서 다시 얻을 먹을거리를 알아야 해. 바다를 모르면 도울 수도 없지 않은가.”

뒤에서 토비마루가 조용히 휘파람을 불었다.

“부수러 온 놈은 수심을 묻고, 점령하러 온 놈은 불만을 묻고, 도망칠 놈은 조류를 묻지. 굶주림을 묻는 놈은 처음 보네.”

류센은 잠시 말을 잃었다가 입을 열었다.

“겨울 초입이면 은빛 정어리 떼가 먼저 남쪽으로 빠진다. 지금 남은 건 바위틈 쏨뱅이와 여울의 작은 조개뿐이다.”

“조개는 먹어도 됩니까?” 서란이 약초 꾸러미에 받아 적으며 물었다.

“노인들에게는 탈이 난다. 반드시 두 번 삶아라. 첫물은 버리고, 둘째 물에 말린 생강을 조금.”

“동쪽 벼랑 밑 검은 미역은요?” 비호가 못을 빼 들었다.

“보름 전부터 해류가 틀어져 독성 해파리가 붙었다. 아이들에게는 먹이지 마라. 대신 북쪽 모래턱에 낮물이 빠지면 작은 게가 드러난다. 껍질을 볶아 가루 내면 죽에 넣을 수 있다.”

“게 껍질 가루면 칼슘이겠네.” 비호가 중얼거렸다.

“비호야, 지금 그 얘기 할 때야?”

“아니, 좋은 정보라서요.”

청우 대사가 류센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내가 이렇게 길게 말했나.”

“겐조 앞에서도 이만큼은 안 했지.” 토비마루가 속삭였다.

“더 말해도 되나.”

“물어라.”

“네가 그렇게 순순히 허락하는 건 처음 보는군.” 토비마루가 헛기침했다.

암초의 높이, 배를 숨길 안개 시간, 그물 칠 거리. 질문이 이어지다 마지막에 이르렀다.

“겐조의 배가 오지 않는 물때는 언제인가.”

항구 위 공기가 얇게 굳었다.

“그건 감시망의 틈을 묻는 거다. 알고 묻는 건가.”

“안다. 마을 사람들이 언제 숨을 쉴 수 있는지 알고 싶을 뿐이다.”

시험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는 정말로 알고 싶어 했다.

“보름달 사흘 뒤 새벽.” 류센이 낮게 말했다. “흑풍도 쪽 물살이 서쪽으로 끌려서 큰 배는 이 포구에 붙기 어렵다. 작은 감시선은 와도 바깥 만에서 오래 못 버틴다. 그물 손볼 시간을 벌려면 그때다.”

부두 기둥 뒤 감시꾼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백민의 오른손이 본국검 손잡이 가까이 놓였다. 뽑을 뜻은 없다는 신호였다.

화상 자국이 있는 감시꾼이 사람들을 밀치며 다가왔다. 손목에 겐조의 세금 표식이 새겨진 검은 팔찌가 보였다.

“비켜라, 길 막고 있지 마!”

감시꾼이 물동이를 발로 차려는 순간 토비마루의 검집 끝이 바닥을 툭 건드렸다. 밧줄이 사내의 발목에 감겼고, 코가 젖은 화산암에 박혔다.

선착장 전체가 얼어붙었다. 토비마루가 아주 천천히 하품했다.

“바닥이 미끄럽군.”

“누가 했지?”

“내가 바닥을 밀었겠나, 바닥이 네 얼굴을 불렀겠나. 어려운 문제군.”

사내가 톱니칼을 뽑았다. 무겸이 움직이려 하자 백민이 눈짓과 낮은 목소리로 막았다.

“안 돼요, 형. 저자 하나 베면 공물 징수가 보복으로 돌아와요. 먼저 맞는 건 마을이에요.”

“알겠습니다…….”

칼을 뽑지 않는 쪽의 용기를 아는 소년이었다. 류센은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나섰다.

“그만해라.”

“류센 님, 이놈들이—”

“물길 조사 중이다. 겐조 님께 보고할 내용에 네 이름도 넣어 줄까. 새벽 항구에서 공물 대신 싸움을 벌였다고.”

사내의 눈이 흔들렸다. 장부에 이름이 오른다는 말은 칼보다 무서운 협박이었다.

“……알겠습니다, 류센 님.”

사내가 코피를 훔치고 백민을 노려본 뒤 물러났다. 류센은 속이 쓰렸다. 썩은 곳에서 배운 방법은 이길 때마다 손에 냄새를 남겼다.

“고맙다.”

“고마워할 일이 아니다. 내 보고가 복잡해지는 걸 막았을 뿐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다치지 않았다.”

비난도 칭찬도 아닌, 사실을 놓는 말이었다. 그래서 더 불편했다.

“들었나.” 토비마루가 류센의 어깨를 쳤다. “다치지 않은 게 공로가 되는 세상도 있군.”

“너는 입을 닫으라고 했다.”

“방금은 닫아 두면 아까운 순간이었다.”

백민의 입가에 작은 웃음이 스쳤다.

“두 사람은 늘 이런가.”

“이놈이 늘 이렇다.” 류센이 짧게 답했다.

열여덟. 겐조와 백유강, 오래된 가문들의 죄 사이에 이름을 들고 서기엔 너무 젊은 나이였다.

그때 바깥 만에서 금속이 숨을 고르는 낮은 진동이 밀려왔다. 청룡 一號 유룡(幼龍). 류센은 그 이름을 몰랐지만 물은 이미 그 배를 말하고 있었다.

“장갑판이 물에 닿는 저항, 은신막 아래 온도 차, 노심이 출력을 낮출 때 일그러지는 파문 간격.” 그가 혼잣말처럼 읊었다. “흑조선(黑潮船)은 겁주려고 몸을 부풀리는데, 저건 반대로 제 크기를 숨긴다.”

“또 배 얘기냐.”

“네 배인가.”

류센이 백민에게 물었다. 백민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항구에는 귀가 많았다.

“우리와 함께 움직이는 배다.”

내 배도, 함선도 아니었다. 사람처럼 부르는 말이었다.

“숨기는 솜씨가 좋다.”

“숨지 못하면 이 섬 사람들에게 먼저 피해가 간다.”

“그런 계산을 하는 사람은 보통 남의 항구에 물과 식량을 풀지 않는다.”

“그런 계산을 하지 않는 사람은 보통 남의 항구에 물과 식량을 풀 자격도 없다.”

류센은 대답하지 못했다. 조류는 늘 양쪽에서 온다. 한쪽만 보면 배가 뒤집힌다. 내륙에서 온 소년의 말에 그런 균형이 있었다.

그때 아야네가 선착장 위쪽 계단에서 내려왔다. 붉은 무복에 검은 외투, 허리에 낮게 맨 두 자루 검. 얼굴은 차분했지만 걸음에는 잠 못 이룬 피로가 묻어 있었다.

“류센. 흑풍도에서 온 명인가.”

“물길을 보라는 명이다.”

“겐조는 물길만 보라고 사람을 보내지 않는다.”

“그래서 눈도 뜨고 왔다.”

그녀의 시선이 아주 잠깐 백민에게 갔다 돌아왔다. 이용해야 할 외지인이 섬을 부수러 온 자가 아님을 알아 버린 눈이었다.

토비마루가 두 손을 머리 뒤에 깍지 꼈다.

“나는 겐조에게 고용된 것도, 아야네에게 묶인 것도, 류센에게 빚진 것도 아니니 그냥 배고프다는 사실만 분명히 해도 되겠나?”

“주먹밥은 있어. 좀 짜지만.” 비호가 경계하며 하나를 던졌다.

토비마루가 검집 끝으로 받아 한입 베어 물었다.

“이건 주먹밥이 아니라 소금 덩어리다.”

“그럼 먹지 마.”

“아니, 먹을 거다. 누가 처음 만든 음식은 대체로 미래가 있다. 현재는 없지만.”

서란이 소리 없이 웃었다. 아이들도 따라 웃었다. 조롱도 겁도 아닌, 그저 주먹밥이 너무 짜서 나는 웃음이었다.

“류센, 흑풍도엔 언제 돌아가나.”

“해가 기울기 전.”

“보고는?”

“해야 한다.”

“무엇을 보았다고 할 건가.”

류센은 바깥 만을 보았다.

“사실대로 쓰면 세금배가 아니라 전투선이 온다.” 그가 낮게 말했다. “겨울 조류 탓이라고 쓰면 시간은 벌지만, 겐조는 다른 눈을 보내 내 장부까지 뒤질 거다.”

“재촉하지 않겠다.” 아야네가 말했다.

백민도 끼어들지 않았다. 선택할 시간을 받으면 마음의 밑바닥이 보인다. 류센이 닳은 일지를 꺼내자 백민의 시선이 닿았다.

“항법 일지인가. 바다를 적는 일은 어렵겠군.”

“바다는 적히지 않는다. 적는 건 사람이 틀린 자리뿐이다.”

“틀린 자리를 고치기 위해 적는 건가.”

“잊지 않기 위해 적는다. 고치는 일은 대개 늦는다.”

“늦어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말로는 쉽지. 늦은 사람 손엔 이미 너무 많은 이름이 묻어 있다. 직접 칼을 안 들었다고 손이 깨끗해지는 것도 아니고.”

그가 잡아 준 항로 끝에 불탄 마을이 있었다. 그래서 화가 났다. 저 소년이 아직 고칠 수 있다고 믿는 얼굴을 해서.

해가 높아지자 사람들이 더 모였다. 감시꾼들은 멀찍이서 이를 갈았지만 류센이 서 있는 동안엔 움직이지 못했다.

“네 이름이 방패가 됐군.” 토비마루가 속삭였다. “겐조 이름으로 얻은 권위가 겐조 놈들을 막고 있어.”

“썩은 칼집도 때로는 칼날을 가린다.”

◆

정오 무렵 부두 끝에서 비명이 터졌다. 낡은 펌프가 역류하며 떨어진 철제 지지대에 젊은 어부의 손이 끼였다.

“으아악! 손이, 내 손이!”

“들어 올려! 하나, 둘—”

무겸이 지지대를 들어 보려 했지만 밑에서 뒤엉킨 쇠사슬이 버텼다. 류센은 물때를 읽었다.

“두 번째 파도 전에 못 빼면 잔교 밑으로 물이 찬다!”

“비켜라.”

백민이 잔교 아래로 내려갔다.

“검은 못 씁니다! 사슬이 얽혀서 베면 지지대가 통째로 내려앉아요!” 비호가 외쳤다.

“안 벤다.”

“비호, 압력!”

“빼고 있어요!”

“손목 위 묶었어. 서둘러.” 서란이 말했다.

“무겸 형, 창으로 받쳐요!”

“밀어 넣었다. 오래는 못 버틴다!”

백민은 검을 뽑지 않고 뒤틀린 철 고리를 맨손으로 잡았다. 손등에 푸른 열이 희미하게 번졌다. 쇠는 달아오르지 않았다. 굳은 고리의 긴장만 풀렸다.

병기를 녹이고 선체를 찢는 금단의 불이라던 청염이, 한 어부의 손목을 위해 쇠사슬의 힘만 골라 풀고 있었다.

“지금!”

“밧줄 간다!” 토비마루가 잔교 위에서 던졌다. 류센은 생각보다 먼저 바닷물에 뛰어들어 밧줄 끝을 지지대 아래에 감았다. 차가운 물이 허리까지 밀려왔다.

“파도 온다!”

“당겨! 지금 아니면 못 당긴다!”

“하나 둘 셋, 갑니다!”

백민이 고리를 비틀고, 무겸과 토비마루가 동시에 밧줄을 당겼다. 지지대가 들렸다. 어부가 끌려 나왔다.

“살았다! 살았어!”

“고비는 넘겼다! 물 비켜, 길 터라!”

선착장에 짧은 환호가 터졌다. 류센이 젖은 채 잔교 아래에서 올라오자, 토비마루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가 바다에 뛰어들다니. 오늘 일지는 길어지겠군.”

“조류가 빨랐다.”

“아, 그렇지. 사람 구하려고 뛰어든 게 아니라 조류가 빨랐던 거지.”

“입 닫아라.”

백민이 젖은 소매를 짜며 다가왔다.

“덕분에 살았다.”

“네가 먼저 고리를 풀었다.”

“네가 밧줄을 감지 않았으면 놓쳤다.”

말이 쓸모없어지는 짧은 공백이 내려앉았다. 아버지와 그물을 끌어올리던 때의 숨과 닮아 있었다.

“뼈는 부러지지 않았어요.” 서란이 어부의 손을 살피며 말했다. “손가락 두 개가 며칠 붓겠지만, 다시 그물을 쥘 수 있습니다.”

“다시…… 그물을 쥘 수 있다고요?” 어부가 울었다. 이 섬에서 손은 목숨이었다.

류센은 품속 방수 주머니를 확인했다. 일지는 젖지 않았다. 다행이라 여긴 것은 거기 적힌 지워진 이름들이 아직 살아 있어서였다.

해가 기울자 류센은 작은 배에 오르기 전 백민에게 다가갔다. 감시꾼들의 눈이 멀리서 따라왔다.

“만 바깥으로 나갈 때 동남쪽을 피하라.”

“암초인가.”

“아니다. 겐조의 해도에 없는 얕은 여울이다. 큰 배는 걸리고 작은 배는 지나간다. 밀물 직전엔 거울처럼 잔잔해 보이지만 바닥 모래가 움직여 키를 물어뜯는다.”

“왜 알려 주는가.”

류센은 대답을 준비하지 못했다. 어부가 살아서. 군사 정보를 먼저 묻지 않아서. 저 배가 지키려고 숨어서. 이유가 너무 많아 하나도 말할 수 없었다. 그는 가장 작은 대답을 골랐다.

“물길이 잘못 읽히는 걸 싫어한다.”

“기억하겠다.”

겐조는 기록하라 하고, 아야네는 견디라 하고, 토비마루는 웃어넘기라 한다. 이 소년은 기억하겠다고 했다. 빚도 속셈도 없는 말이었다.

“류센, 배 떠난다. 주먹밥 두 개 더 챙겼어.” 토비마루가 먼저 올라타며 불렀다.

“그건 비호 몫이었을 텐데.”

“다음에 만나면 덜 짠 주먹밥을 부탁하지.” 토비마루가 백민에게 손을 흔들었다.

“싫으면 굶어!” 비호가 멀리서 외쳤다.

“굶는 것보다는 짠 게 낫지. 인생도 대체로 그렇더군.”

배가 부두를 떠났다. 토비마루가 느긋하게 노를 저었다. 저 배가 언젠가 이 바다의 길을 바꿀지도 모른다. 겐조의 항법사가 품어서는 안 되는 생각이었다.

“그 여울, 정말 겐조의 해도에도 없나?”

“없다.”

“그럼 지금부터는 있겠군. 네가 입으로 그렸으니까. 걱정되나?”

“무엇이.”

“네가 어느 쪽으로 흘러가는지.”

석양빛이 물결 위에 길게 찢겨 있었다. 류센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바다는 갈라져 보여도 결국 한곳으로 이어진다.”

“어느 쪽으로든 도망칠 구멍이 없다는 뜻인가, 언젠가 다시 만난다는 뜻인가.”

“둘 다일 수 있다.”

“좋군. 너답지 않게 시 같았다.”

“잊어라.”

“안타깝게도 나는 쓸데없는 말만 잘 기억한다.”

류센은 흔들리는 배 위에서 일지의 새 장을 펼쳐 오늘의 물때를 적었다. 그리고 붓끝을 멈췄다. 한 줄을 더했다.

‘오늘, 지키기 위해 바다를 가르는 배를 보았다.’

손이 한 줄을 더 썼다.

‘그 배 앞에서, 내 항로가 부끄러웠다.’

겐조의 검보다 위험한 문장이었다. 찢으려 종이 모서리를 잡았지만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어린 손등을 두드리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잘못 잡은 길도 다시 잡을 수 있다.”

그는 일지를 방수 주머니 깊이 밀어 넣었다.

그때 배 밑에 무언가가 툭 부딪혔다. 검은 옻칠에 붉은 이빨 무늬, 흑조선의 통신통이었다.

“이 물살에 저게 여기까지 올 리가 없어. 누가 일부러 흘렸군. 열어 볼까?”

“뚜껑에 강철침이 있다. 서두르는 놈이 열면 손바닥을 찔리지. 겐조의 방식이다.”

침을 빼고 뚜껑을 돌리자 종이 한 장과 그을린 묘표 조각이 나왔다. 묘표에는 두 글자가 남아 있었다.

나루.

“나루?” 토비마루가 들여다보았다. “뭐야, 그게.”

“나루메.” 류센의 목소리가 말랐다. “지도에서 지워진 어촌이다. 내 일지 속 암호 지도에만 남아 있어야 할 이름이지.”

“종이엔 뭐라고 적혔나.”

“외지인에게 바다를 묻는 법을 가르쳤으니, 다음에는 땅 아래 묻힌 이름도 보여 주어라.”

토비마루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류센.”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누군가 그의 일지를 알고 있었다. 지워진 마을의 이름을 꺼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름은 이제 백민에게 닿으려 하고 있었다.

품 안의 일지가 뜨거웠다. 겐조의 명령은 그를 흑풍도로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지워진 이름들은 그를 다시 붉은 섬의 묘지로 돌려세우고 있었다.

— 話 48 終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