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점 · 강민 — 균열·낙인 단계

겐조(村雨玄三)의 망령

第1部 · 話 49 · 검령성 · published

海東曆: 201년 12월 9일 · 시점: 백민

바다는 아직 어둠의 색을 벗지 못했다. 젖은 밧줄에서 소금물과 오래된 피가 구별되지 않는 냄새가 났다.

백민은 말없이 그 냄새를 들이마셨다. 검령성의 잿더미와는 달랐지만, 가장 깊은 자리에는 같은 것이 있었다. 명령 한 줄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장소의 냄새.

“저 길입니다.”

앞서 걷는 아야네 류하(綾音流霞)의 손은 검자루를 잡지 않았는데도 굳어 있었다. 장무겸(張武謙), 단비호(段飛虎), 유서란(柳瑞蘭), 청우(淸雨)가 뒤따랐고, 류센(柳辰)은 조금 떨어져 걸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비호가 속삭였다.

“이 섬이 외지인에게 잘 안 보여 주는 곳입니다.” 아야네가 돌아보지 않고 답했다.

“발밑 조심해라. 이끼가 미끄럽다.” 무겸이 낮게 말했다.

“무겸 형 말 안 들어도 넘어져요. 아까 올라올 때도 두 번 넘어졌거든요.”

“그래서 하는 말이다.”

“둘 다 조용히 해.” 서란이 뒤처진 노인의 팔을 부축하며 말했다.

벼랑 중턱의 작은 묘지였다. 바다를 향해 기울어진 바위 위에 검은 현무암 비석들이 낮게 늘어서 있었다.

“스물아홉 기.” 무겸이 셌다. “방향이 전부 같다. 날짜도. 해동력 196년 11월 3일.”

“다섯 해 전이네요.” 서란이 낮게 말했다.

“글씨가 비뚤어요. 석공 솜씨가 아니에요.” 비호가 비석을 손끝으로 쓸었다. “배를 잘 고치던 사람…… 노래가 컸던 사람…….”

“살아남은 사람이 손 떨면서 한 자씩 판 거겠지.”

백민의 손끝이 차갑게 굳었다.

“여기 묻힌 이들이 전부…….”

“그날 죽은 사람들의 일부일 뿐입니다.”

대답한 것은 아야네가 아니었다. 묘지 안쪽 난간 옆에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다. 왼쪽 소매가 팔꿈치 아래로 비어 있었고, 한쪽 눈에는 흰 막이 내려앉아 있었다.

“사에몬 어르신.” 아야네가 고개를 숙였다.

“검희께서 외지인을 여기까지 데려오셨구려.” 노인이 백민의 흉터와 본국검, 가슴께를 차례로 훑었다. “보여 줄 만한 곳은 아니오. 그러나 외지인에게라도 보여 주지 않으면, 이 섬 아이들은 언젠가 이 비석들이 원래부터 여기 있던 줄 알겠지.”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비석 사이에 꽂힌 천 조각들이 바람에 일제히 떨렸다.

“저 매듭은 뭡니까?” 청우가 물었다.

“그물매듭, 배 묶던 매듭, 아이 머리 묶던 매듭이오. 이름을 기억할 사람이 줄어드니, 물건이 대신 이름을 붙들고 있는 게지.” 사에몬이 말했다. “그날도 안개가 이렇게 낮았소. 해 뜨기 전, 북쪽 해협에서 검은 깃발 배 다섯 척이 들어왔지.”

“적선입니까?”

“표류선인 줄 알았소. 바다에서 길 잃은 자를 외면하지 않는 게 우리 법도였으니, 불을 켜고 죽을 끓여 나갔지. 그런데 놈들이 닿자마자 한 일은 닻 내리기가 아니었소. 우리 배에 불을 붙이는 거였지.”

비호가 숨을 삼켰다. 서란의 손이 그의 어깨에 닿았다.

“마을의 배를 전부요?” 무겸이 낮게 물었다.

“전부. 도망칠 길부터 끊은 게요. 노를 숨긴 배, 수리하던 배, 아이들이 타던 조각배까지. 불붙은 배들이 서로 부딪히며 부두를 막았소.”

“그다음에는…….”

“칼에, 쇠갈고리에, 증기 작살에 사람이 쓰러졌지. 하지만 다 죽이진 않았소. 바다로 뛰어든 젊고 팔 힘 좋은 놈들은 건져 올렸지. 자비가 아니었소.” 노인이 빈 소매를 들어 보였다. “노 저을 손이 필요했던 거요.”

묘지 위의 안개가 더 차가워졌다. 검령성의 죽음은 불과 매연이었고 이곳의 죽음은 물 위에 떠 있었다.

“그자가 겐조입니까.”

“무라사메 겐조(村雨玄三). 그땐 아직 동해의 왕이라 불리지 않았지만, 이미 그렇게 되기로 마음먹은 눈이었소. 불타는 부두 위에서 그자가 말했지. 흩어진 섬은 살 수 없다, 내가 너희를 하나로 묶겠다고. 그 말 뒤에 남은 건 묶인 사람과 불탄 집뿐이었소.”

아야네의 손이 짧게 떨렸다. 백민도 류센도 보았고, 둘 다 모른 척했다.

묘지 끝의 작은 비석에는 이름 대신 한 줄만 새겨져 있었다. ‘마지막까지 등불을 든 사람.’

“이름을 모릅니까.”

“알지. 알지만 새기지 않았소. 그 아이가 끌려간 사람들을 따라가겠다고 등불을 들고 뛰어 나갔거든.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무도 모르오. 새기면 죽었다고 인정하는 꼴이라, 다섯 해가 지나도 못 새겼소.” 노인이 지팡이를 고쳐 쥐었다. “사람은 때때로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무덤을 비워 둔다오.”

멀리서 뿔나팔이 울렸다. 길게 한 번, 짧게 두 번.

“공물 징수선입니다.” 류센이 고개를 들었다. “오늘 들어올 날이 아닌데.”

“묘지로 누가 올라왔다는 소문을 들었겠지.” 무겸이 창대를 쥐었다. “부두마다 겐조의 눈이 달렸다더니, 과장이 아니군.”

“검희께서는 내려가지 마시오. 오늘은 내가—”

두 번째 나팔이 울렸다. 이번에는 더 가까웠다. 부두 쪽에서 나무 상자 넘어지는 소리와 비명이 안개를 뚫고 올라왔다.

“갑니다.”

백민도 함께 움직였다. 이끼 낀 돌계단을 내달리는 동안 청염기관은 이상할 만큼 차분히 뛰었다.

◆

부두에는 톱니검을 찬 검은 외투의 감독들이 서 있었다. 선창에 쌓인 궤짝의 낙인 곡선이 백민의 눈에 걸렸다. 용진도에서 본 밀수선 낙인과 같았다.

저울 앞에 젊은 어부가 무릎 꿇고 있었다. 키 큰 감독이 저울추를 툭 건드려 균형을 무너뜨렸다.

“모자라군.”

“지난번의 두 배를 가져오라 하셨습니다. 이 이상은 마을에 남은 게 없습니다.”

“없으면 만들면 되지.” 감독이 입술만 움직여 웃었다. “팔 둘인 놈은 하나만 있어도 그물을 던지고, 다리 둘인 놈은 하나만 있어도 노를 민다. 겐조 님께 바치는 공물은 늘 방법을 찾는다.”

서란의 눈빛이 차갑게 굳었다. 감독이 어부의 머리채를 잡는 순간 사에몬이 부두로 내려섰다.

“그 손 놓게.”

“아직도 살아 있었나, 늙은 노.” 감독이 빈 소매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반쪽짜리 손이라도 남았으면 조용히 숨이나 쉬어야지. 묘지에 외지인을 들였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네가 입을 놀렸느냐?”

“말할 때가 되었을 뿐이다.”

감독의 장화가 노인의 무릎을 걷어찼다.

“할아버지!”

아이들이 비명을 질렀다. 어부들이 나서려다 칼이 뽑히는 걸 보고 멈췄다. 다섯 해 동안 멈추는 법을 배운 몸들이었다.

쿵. 백민의 발이 부두를 밟았다. 공기가 달라졌다.

“넌 뭐냐.”

백민은 대답 없이 사에몬을 일으켜 지팡이를 쥐여 주고 나서야 감독을 보았다.

“사람에게 사과하는 법을 모르면, 바다에라도 배워야겠군.”

감독의 웃음이 사라졌다. 톱니검이 눈을 속이는 사이 쇠갈고리가 백민의 발목을 노렸다.

“발밑이다!” 비호가 외쳤다.

“압니다.”

백민은 물러나지 않고 안쪽으로 발을 밀어 넣어 갈고리의 회전축을 밟았다. 장치가 헛돌았고, 왼손이 감독의 손목을 잡았다.

“이놈이……!”

소매 안에서 증기침 세 발이 튀어나왔다. 몸을 돌리자 침이 어깨를 스치고 빈 궤짝에 박혔다. 퍽, 퍽, 퍽. 나무가 검게 탔다.

“비겁하군!” 무겸이 창을 들고 나서려 했다.

“제가 할게요.”

백민의 목소리는 낮았다. 감독이 제 손목을 탈구시키며 빠져나오려 했지만, 백민은 힘의 흐름을 따라 그를 잔교 바깥으로 밀며 손바닥의 얇은 열로 금속 어깨 보호대를 달궜다.

“뜨, 뜨거워!”

수하 둘이 달려들었다. 하나는 사슬낫, 하나는 비호를 노렸다.

“내 쪽으로 오면 후회할 텐데!”

비호가 튕긴 황동 나사가 바닥에서 증기를 뿜으며 돌았다. 사슬낫이 궤도를 틀어 빈 말뚝에 감겼고, 무겸의 창대가 다른 놈의 무릎 뒤를 쳤다.

“뼈 말고 균형만 끊었다. 엎어져 있어라.”

백민이 감독을 잔교 끝까지 밀어붙였다. 감독이 허리 뒤의 코테르 화약통을 더듬었다.

“아야네 님!”

“봤습니다.”

물결처럼 흘러든 검끝이 화약통의 고정끈만 잘랐다. 류센이 떨어진 통을 발끝으로 바다에 차냈다. 푸른 불꽃이 잠깐 피었다 꺼졌다.

백민은 감독의 등판 증기압 밸브를 손끝으로 틀어 잠갔다. 의체 관절이 굳어 버린 감독을 허리 높이의 얕은 물에 처박았다.

“죽지는 않는다. 바다가 네 오만을 천천히 식혀 줄 거다.”

“검도 안 뽑았어……?” 수하 하나가 중얼거리며 물러섰다.

“감독님이 물에……. 이, 이건 보고해야 해!”

“보고해라. 이 섬에서 본 걸 그대로.” 무겸이 창끝으로 바닥을 쳤다. “다만 칼은 내려놓고.”

그러나 백민의 시선은 그들에게 있지 않았다. 선창 안의 궤짝이었다.

“비호.”

“네, 형…… 아니, 백민 형.” 비호가 달려가 잠금쇠를 살폈다. “이거 그냥 해적 물건 아니에요. 겉은 동해식으로 위장했는데 속은 중원식 이중 걸쇠예요. 이 낙인도 용진도 밀수선 화인하고 같은 계열이고요. 일부러 긁었는데, 숨길 생각이 없었던 것처럼 어설퍼요.”

“열 수 있겠느냐.”

“잠깐만요. 부수면 안에 든 게 반응할 수도 있어요.”

탐침 두 개가 걸쇠를 더듬었다. 딸깍. 딸깍.

“됐습니다.”

뚜껑이 열렸다. 푸른 결정판과 척추뼈를 닮은 황동 연결대, 기맥 그림 위에 회로를 덧그린 설계 조각이 줄지어 있었다. 서란이 조각을 집어 들었다.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의공 도식이에요.”

“치료용이야?”

“아니야. 맥을 안정시키는 그림이 아니라, 강제로 일정한 간격에 묶는 그림이야. 몸의 호흡을 기계에 맞추게 하는 방식이고…….” 서란이 말을 잇지 못했다. “이런 건, 이런 건…….”

백민은 알아들었다. 인류 강제 진화 계획. 200년 전의 금단이 어촌의 공물선 선창에 놓여 있었다.

“이것도 봐라.” 무겸이 궤짝 안쪽에서 작은 금속패를 꺼냈다.

반쯤 지워진 문양이 남아 있었다. 백룡의 비늘을 단순화한 낡은 인장. 백민은 그 곡선을 알고 있었다.

“황궁 서고의 봉인 기록, 천부항에서 고륜 선배가 짚어 주던 양식……. 백씨가 코테르 연구를 처음 체계화하던 때의 문양이에요.”

“백씨의 문장입니까?”

“완전한 건 아닙니다. 하지만 같은 뿌리입니다.”

겐조는 칼을 들었을 뿐, 그 칼을 벼려 준 손의 뿌리에 백씨의 옛 죄가 있었다. 청염이 치솟으려는 찰나, 청우의 염주가 딸각 울렸다.

“숨을 아래로, 시주.”

백민은 호흡을 내렸다. 분노가 먼저 움직이면 이 손은 적을 베는 손밖에 되지 못한다.

“겐조가 이 부품들을 어디에 쓰려는지 압니까?”

류센의 시선이 궤짝 안쪽에서 흔들렸다.

“말해.” 토비마루(飛丸)가 팔짱을 낀 채 그를 보았다. “네 입으로 말하지 않으면, 네 침묵도 겐조의 말이 된다.”

“내가 아는 건 일부뿐입니다.”

“일부면 충분합니다.”

“겐조는 일곱 섬을 하나의 배처럼 묶으려 합니다. 항구는 노심, 신사는 조타실, 어촌은 노 젓는 팔.” 류센이 낮게 말했다. “그 과정에서 사람의 호흡을 섬의 장치에 맞추려 하지요. 저 부품은 사람을 섬의 톱니로 묶는 데 쓰일 겁니다.”

“너는 그걸 알고도 겐조 곁에 있었느냐.” 아야네가 물었다.

“몰랐다고 하면 거짓이고, 전부 알았다고 해도 거짓입니다. 항법사로 살려면 모른 척할 게 많았습니다. 모른 척한 것들이 모여 오늘 이 궤짝이 됐습니다.”

“그럼 이제는?”

“…….”

류센은 대답하지 못했다. 백민은 몰아붙이지 않았다. 마음이 돌아서는 문은 칼로 열 수 없다. 오늘 류센은 처음으로 그 문손잡이를 바라보았다.

말뚝 사이에 숨어 있던 아이들이 기어 나왔다. 백민이 몸을 낮췄다.

“다친 곳은 없느냐.”

“없어요……. 아저씨 발소리가 쿵 했어요.”

“그래, 쿵 했지.”

가장 큰 아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저씨는 겐조보다 세요?”

“형이 벌써 아저씨라니.” 비호가 뒤에서 중얼거렸다.

백민은 웃지 않았다. 그 질문은 우리가 내일도 맞아야 하느냐는 뜻이었다.

“오늘은 그자의 부하를 물에 빠뜨렸을 뿐이다.”

“그럼 겐조는요?”

“겐조는 아직 여기 없다.”

“오면요?”

백민은 잠깐 침묵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은 아이에게 또 하나의 상처가 된다. 그는 아이의 눈높이에 앉았다.

“오면, 그때는 너희가 숨어서 보지 않아도 되는 싸움을 만들겠다.”

아이들은 다 이해하지 못했다.

“싸움을 없애겠다는 말이 아니구려.” 사에몬이 지팡이를 짚었다. “약한 사람들 눈앞에서, 약한 사람들을 방패 삼아 벌이는 싸움을 끝내겠다는 말이지.”

아야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피해인 척하지 마.” 서란이 백민의 어깨를 잡았다. 증기침이 옷깃을 찢고 살을 얕게 태운 자리였다. “네 몸도 사람 몸이야.”

“알고 있어.”

“알고 있는 사람 대답이 아니야.”

탕약 냄새가 밴 천이 상처를 눌렀다. 통증이 뒤늦게 올라왔다. 손길은 부드러웠으나 꾸짖음이 들어 있었다.

부두가 정리되었다. 무겸이 남은 수하들을 묶어 창고에 넣었다.

“아이들은 따뜻한 물부터 먹일게.” 서란이 말했다. “넌 올라가 봐. 다녀와서 다시 상처 보자.”

“다녀올게.”

◆

해가 올라 안개가 옅어졌을 때, 백민은 아야네, 류센과 함께 다시 묘지에 올랐다.

백민은 첫 비석부터 이름을 소리 내어 읽었다. 이름마다 숨을 한 번 두었다.

“……배를 잘 고치던 사람.”

“노래가 컸던 사람.” 아야네가 낮게 이었다.

스물아홉 기를 모두 읽는 데 향 하나가 다 탔다. 도망치는 침묵이 아니라 함께 서 있는 침묵이었다.

마지막 비석 앞에서 백민이 무릎을 꿇었다.

“복수는 빠르게 타오르고, 책임은 오래 남습니다. 나는 검령성에서 복수로 살아남았습니다. 하지만 복수는 적의 이름을 기억하게 할 뿐, 죽은 사람의 이름을 끝까지 들고 가게 하진 못합니다.”

“왜 나에게 그 말을 합니까.”

“당신이 누구보다 겐조의 이름을 오래 붙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야네의 손이 검자루에 닿았다 떨어졌다. 검을 뽑는 손이 아니라 검을 참는 손이었다.

“겐조를 베고 싶습니다. 그 마음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부정할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그자를 베면, 이 섬이 바로 살아날까요?”

“아니요. 그다음이 더 오래 걸릴 겁니다. 겐조의 밧줄은 사람 목에만 감겨 있지 않으니까요. 공물 장부, 부두의 겁, 항로의 빚, 아이들의 눈. 그리고 당신의 검에도.”

“내 검에도?”

“당신은 섬을 지키려고 겐조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그걸 죄라고만 부르진 않겠습니다. 그러나 지키려고 숙인 칼끝도 오래 숙이면 자기 손을 베기 시작합니다.”

아야네의 입술이 작게 떨렸다. 정탐하라던 겐조의 목소리가 그 침묵 속에 있었다. 백민은 그것을 알지 못했지만, 그녀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당신은 너무 많이 봅니다.”

“보지 못해서 잃은 것이 많았습니다.”

류센이 징수선 선창에서 꺼낸 항법판을 내밀었다. 겐조의 보급 항로 일부가 새겨져 있었지만 중요한 선들은 긁혀 있었다.

“이건 완전한 해도가 아닙니다.”

“그래도 일부는 보입니다.”

“일부를 보여 주는 자는, 전부를 숨기고 있는 자일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그렇습니까?”

“……그렇다고 봐야겠지요.”

백민은 항법판을 받지 않고 류센의 손 위에 그대로 두었다.

“그럼 오늘은 숨긴 채로 들고 계십시오.”

“……숨긴 채로요?”

“묻지 않겠습니다. 그게 오늘의 제 대답입니다.”

“왜 나를 믿습니까.”

“믿는다는 말은 아직 이릅니다. 다만 도망칠 길을 모두 끊어 버린 자와는 다른 방식을 택하고 싶습니다. 어느 쪽으로 걸어갈지, 당신 발로 정할 시간을 주겠습니다.”

“시간은 많지 않을 겁니다. 겐조는 오늘 부두 일을 그냥 넘기지 않습니다.”

“그자도 알게 되겠지요. 이 섬에 더는 조용히 맞는 사람들만 있지 않다는 것을.”

그때 아래 항구에서 세 번째 나팔이 울렸다. 제국식 금속 호각이었다. 무겸이 날개 부러진 황동 기계새를 들고 뛰어 올라왔다. 눈에 해동 황실의 봉인 문양이 희미했다.

“백민. 동쪽 암초에서 이놈이 떨어졌다. 배 속에 전언이 있어.”

“봉인 문양이라면, 황실 쪽 물건이군요.”

“그래. 네가 읽어 봐야 한다.”

“봉인이 반쯤 타서 겨우 열었어요.” 비호가 숨을 몰아쉬며 뒤따라왔다. “근데 형, 이거 그냥 전언이 아니에요. 봉쇄 신호예요.”

새의 가슴판에서 흘러나온 황동 띠에 태사령부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백민이 한 글자씩 읽었다.

“태사령 백유강(白裕剛)의 추격 함대, 동해 입구 봉쇄 완료. 붉은 섬으로 접근 중. 남은 시간, 하루.”

“하루…….” 아야네가 되뇌었다.

바람이 멎었다. 타다 남은 향 끝이 툭 부러졌다. 류센의 손 안에서 항법판이 딸깍 울더니, 긁혀 지워졌던 줄 하나가 떠올랐다.

“이 해협은…… 백유강의 봉쇄선과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길목입니다.” 류센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겐조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어디서 보입니까.”

“저기, 안개 너머입니다.”

검은 연기 세 줄이 솟아 있었다. 겐조의 깃발 쪽, 제국 함대 쪽, 그리고 붉은 섬의 가장 좁은 해협, 도망칠 길목의 한가운데.

“양쪽에서 옵니다.” 아야네가 검자루를 움켜쥐었다.

백민은 황동 띠를 쥐었다. 모서리가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났다. 그는 그 통증을 놓지 않았다.

“그럼 먼저, 섬이 숨 쉴 길부터 엽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다 쪽에서 첫 포성이 울렸다. 쿵. 비석들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리고 스물아홉 번째, 이름이 비어 있던 작은 비석 아래에서, 누군가 오래전에 숨겨 둔 황동 함 하나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 話 49 終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