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점 · 강민 — 균열·낙인 단계

붉은 밤의 학살(虐殺), 흉터의 낙인(烙印)

第1部 · 話 8 · 검령성 · published

海東曆: 201년 5월 2일

절벽 그늘 아래 멈춘 기갑호(機甲號)는 동체를 낮춘 채 관절 틈으로 흰 김을 뿜고 있었다. 뒤쪽 산마루 위에서는 설무진(雪武陳)의 도장이 타고 있었다.

강민(剛民)은 해치에서 내려서자마자 비틀거렸다. 발은 땅을 밟았지만 머릿속에는 무너지는 안마당뿐이었다.

“돌아가야 해.”

생각보다 먼저 말이 튀어나왔다. 목이 그을음에 긁혀 쉰소리가 났다.

“무겸 형, 돌아가야 해요. 사부님이 아직 안에 계세요.”

“안 돼, 민이 형.”

조종석에서 단비호(段飛虎)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과 매연과 코피가 뒤섞인 얼굴이었다.

“다시 못 가. 보일러가 한 번 더 은신을 버티면 터져. 진짜 터져. 나도 지금은 못 잡아. 손이 말을 안 들어.”

“비호야, 가만있어. 손가락부터 보자.”

다친 문하생의 팔을 묶던 유서란(柳瑞蘭)이 손을 멈췄다. 늘 누구를 살릴지 먼저 계산하는 의공사였지만, 이 밤만은 계산이 늦었다.

“민아, 방금 나온 길은 이미 적이 메웠다.”

장무겸(張武謙)이 입을 열었다. 왼팔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고 장창을 쥔 오른손 등에는 금속 파편이 박혀 있었다.

“사부님은 우리를 살리려고 남으셨다. 그 뜻을—”

“그럼 다른 길로 가면 되잖아요!”

“다른 길이 있었다면 사부님이 먼저 알려 주셨겠지. 그 뜻을—”

“뜻이라고 하지 마요.”

강민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사람을 두고 나온 걸 뜻이라고 부르지 마요, 형. 사부님은 아직 살아 계세요. 제가 그걸 알아요. 제 가슴이…… 계속 저쪽을 향해 뛰고 있어요.”

그는 왼쪽 가슴을 눌렀다. 푸른 박동이 보이지 않는 사슬처럼 그를 불길 쪽으로 끌고 있었다. 무겸은 그 손을 보고 창대를 땅에 찍었다.

“무겸 오라버니, 그 어깨로는 창도 못 드십니다.”

서란이 낮게 말했다.

“못 드는 어깨로 가는 거다. 비호.”

“나도 갈래요! 기갑호는 못 움직여도 내 손은 있어요!”

“네 손은 기갑호 곁에 있어야 한다. 돌아올 길을 누가 지키지?”

“……네.”

“서란 누나와 부상자들을 절벽 안쪽으로 더 들여보내라. 기갑호는 움직이지 마. 출력이 돌아와도 기다려. 우리가 돌아오지 못하면, 새벽 전에 남쪽 계곡으로 빠져나가.”

“형!”

“명령이다.”

비호의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 서란은 말없이 강민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녀의 손이 차가웠다.

“강민아.”

그녀가 손바닥에 작은 약낭을 쥐여 주었다. 지혈산과 청폐환, 그리고 늘 품고 다니던 침 세 자루가 들어 있었다.

“네가 돌아가겠다면, 살아서 돌아와. 구하러 가는 사람이 쓰러지면 구할 사람만 하나 더 늘어. 그리고 침은 혈에 놓는 거야, 쇠에 꽂는 게 아니라.”

“쇠에 꽂아야 할 때가 오면?”

“……그럼 그때는 어디든.”

“……다녀올게, 누나.”

“형들! 진짜 돌아와야 해요! 진짜로!”

“비호야, 부상자들 물 먹여. 입술이 다 갈라졌어.”

“네, 누나! ……형들 오면 바로 시동 걸 수 있게 해 놓을게요!”

비호가 뒤에서 더 외쳤지만 폭발음과 바람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강민은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다시는 발을 뗄 수 없을 것 같았다.

◆

“불씨 조심해라. 숲이 통째로 타고 있다.”

“길이 이렇게 길었나요? 올 때는 금방이었는데.”

“그때는 기갑호가 달렸다. 지금은 우리 다리다.”

“형, 사부님은 왜 우리를 먼저 내보냈을까요. 저만 내보내려던 거 아니에요?”

“아니다. 사부님은 우리 전부를 내보내셨다. 이유 없이 사람을 내보내는 분이 아니야.”

“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서 더 싫어요.”

“사부님이 늘 그러셨지. 검은 사람을 베는 물건이 아니라 길을 여는 물건이라고.”

“오늘 그 길을 연 건 사부님이잖아요. 그러니까 이번엔 우리가 열 차례예요.”

나무들은 한쪽으로 기울어 검게 그을려 있었다. 잎에 붙은 불씨가 날릴 때마다 길 위로 붉은 불똥이 흩어졌다.

“석등 뒤다!”

“봤어요!”

첫 번째 목인(木人)이 무너진 석등 뒤에서 튀어나왔다. 왼팔의 곡괭이 같은 절단기가 무겸의 옆구리를 노렸다.

“창이 노심에 안 닿는다! 팔을 눌러라!”

“제가 눌러요!”

강민이 몸을 던져 증기검으로 팔 이음쇠를 찍었다. 그 틈으로 무겸의 창끝이 노심에 박혔다. 자동병이 무릎을 꿇으며 흰 증기를 토했다.

“윽, 뜨거워!”

“형, 팔은 괜찮아요?”

“괜찮냐고 묻지 마. 괜찮지 않아도 걷는다. 놓지 마! 둘 더 온다, 하나는 난간 위, 하나는 마차 밑!”

“마차 밑은 제가 맡을게요!”

“왼팔이 안 움직여서 창으로 원을 못 그린다. 네가 파고들어라!”

무겸이 불타는 목재를 발로 차올려 시야를 가렸다. 강민은 낮게 숙여 허벅지 축을 베고, 돌아서며 약낭 속 침 하나를 두 번째 목인의 등판 잠금쇠에 꽂았다.

“누나가 준 침이다. 압력관 틈에 들어가라, 제발!”

“들어갔다! 터진다, 물러나!”

작은 폭발이 일었고 무겸의 창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무겸이 한쪽 무릎을 짚었다. 어깨 상처에서 검붉은 피가 갑주 안쪽으로 흘렀다.

“형, 돌아가도 돼요. 저 혼자—”

“그 말 다시 하면, 사부님보다 먼저 네 뒤통수를 칠 거다.”

무겸이 거칠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피를 삼키는 숨소리였다.

“네가 앞을 보면 나는 옆을 본다. 네가 달리면 나는 뒤를 막는다. 그게 형 노릇이다. 이제 뛰어.”

“……네, 형.”

바람이 바뀌어 젖은 나무와 배관이 타는 냄새, 그리고 그 사이에 섞이면 안 되는 비릿한 냄새가 났다.

“산문이 반쯤 내려앉았어요. 저 기둥의 검은 그을음은 뭐죠?”

“흑영(黑影)의 표식이다. 누굴 찾아왔는지 알리는 조롱이지.”

마당 안쪽에서 아이 울음이 짧게 들렸다. 이어 무거운 것이 떨어지는 소리, 자객들의 낮은 웃음, 설무진의 검이 금속을 긁는 소리.

“애가 울어요! 가야 해요!”

“소리 쪽으로 바로 뛰지 마. 덫이다.”

“하지만—”

“덫인 줄 알면서도 뛰어들려면, 적어도 살아 나올 길은 보고 뛰어라.”

무겸의 말이 맞았다. 강민은 이를 악물고 마당을 살폈다.

“왼쪽 회랑은 무너졌어요. 의공원 쪽은 연기가 낮게 깔렸고요.”

“몇이나 있죠?”

“자객 열둘에 목인 일곱쯤. 이하겸이라는 놈이 따로 움직이면 더 있을 거다. 곡물 창고 앞을 봐라.”

“저건…… 문하생들이잖아요. 피난 온 사람들도 같이 무릎 꿇려 있어요. 저 장치는 뭐죠? 설마……”

“작두다. 날을 달궈 놨어.”

강민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졌다. 끝까지 보지 못했는데도 알았다. 아이들의 울음이 왜 끊어졌는지.

“무겸 형, 저 아이들 이름을 다 알아요. 같이 밥 먹던……”

“안다. 그래서 더 숨을 쉬어라, 민아. 지금 달려가면 저들까지 죽는다.”

“조심해라. 불길 너머에서 뭔가 걸어온다.”

불길 너머에서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발소리가 없었다. 양손의 흑철 장갑은 손가락마다 톱니 칼날이 달려 있어 서로 스칠 때마다 쇠 긁는 소리가 났다.

흑조기인(黑爪奇人) 이하겸(李河謙)이었다.

발치에는 도장을 지키던 늙은 문지기가 성문 쇠고리를 손에 감은 채 쓰러져 있었다. 이하겸의 눈은 노인을 지나 곧장 강민의 왼쪽 가슴으로 갔다.

“돌아왔군.”

“스승을 버리고 도망친 줄 알았더니, 아직 그 정도의 수치는 남아 있었나. 저 문지기는 끝까지 문을 놓지 않더군. 너희 도장은 고집 센 놈들뿐이야.”

“……입 닥쳐. 사부님은 어디 계셔.”

“저기서 아직 버티고 계신다. 곧 끝나겠지만.”

“민아, 대꾸하지 마. 저놈은 네 반응을 보려고 일부러 건드리는 거다.”

“호오, 군인이 눈치가 빠르군.”

강민은 검을 들었다. 손이 떨렸다. 박동은 불길과 비명과 이하겸의 증기까지 흡수해 한꺼번에 울리고 있었다.

“꼬마야.”

이하겸이 한 걸음 다가왔다. 눈은 움직임을 보는데 귀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무음보(無音步)였다.

“네 진짜 이름이 무엇이냐.”

“내 이름은 강민이다.”

“그건 남이 붙여 준 이름이지. 내가 묻는 건 진짜 이름이다.”

“그런 이름은 몰라.”

“모르는 건 괜찮다. 다만 모르는 채로 죽는 건 아깝지.”

그 말이 가슴속을 긁었다. 박동이 튀었고 검자루의 실린더가 딱딱 소리를 내며 멎었다. 무겸이 앞을 막았다.

“네놈이 묻는 이름은 여기 없다.”

“군인의 입으로 숨길 수 있는 이름이면, 애초에 찾으러 오지도 않았다.”

흑조갑이 움직였다. 무겸의 창이 먼저 나갔지만 이하겸의 몸은 창끝이 닿기 직전 비어졌다.

“허공을 찔렀다는 걸 알아차리는 데 한 박이 걸리는군.”

“입이 가볍구나! 민아를 노리려면 나부터 지나가라!”

“지나갈 필요 없다. 네 창은 이미 한 번 허공을 찔렀어.”

창대가 흑조갑과 부딪혀 불꽃이 튀었다. 둘째 칼날이 갑주 어깨를 열고, 셋째가 강민의 눈앞에서 멈췄다. 일부러 멈춘 것이었다.

“보아라.”

이하겸이 속삭였다.

“너를 지키려는 사람은 언제나 먼저 망가진다.”

강민의 몸이 굳었다. 그 한순간을 노리고 칼날이 움직였다.

“하나.”

옷깃이 갈라졌다.

“둘.”

어깨가 얕고 정확하게 그어졌다.

“셋.”

허벅지였다. 무릎을 꿇게 하되 움직이지 못할 만큼 깊지는 않게 조절한 상처였다.

“윽……! 이게 무슨 짓이야!”

“아파하는 방식을 보는 중이다. 비명도 박동의 일부니까.”

“민아, 시험하고 있다! 반응을 보는 거다, 휘둘리지 마!”

“그래, 반응. 상처가 하나 늘 때마다 박동이 어떻게 변하는지, 피가 어떤 색으로 맺히는지.”

“아니군.”

이하겸이 중얼거렸다.

“아직 열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문을 두드려야지.”

“강민아, 피해라!”

“몸이…… 안 움직여요!”

네 번째 칼날이 왔다. 보였는데 피하지 못했다. 단전은 찢어진 풀무처럼 헛바람만 뱉었다.

서걱.

소리는 작았다. 얼굴에 평생 남을 상처가 생겼는데도 들린 것은 살갗이 얇게 베이는 소리뿐이었다. 콧등이 뜨겁게 갈라지고 눈앞이 하얘졌다.

“아아악……!”

“민아!”

피 한 방울이 돌바닥에 떨어졌다. 붉어야 할 피가 그을음 위에서 푸른빛으로 한 번, 두 번 깜빡였다. 이하겸의 회색 눈동자에 환희가 떠올랐다.

“찾았다.”

“안 돼!”

무겸이 몸을 던졌지만 무음보를 따라잡지 못했다. 다섯 칼날이 한꺼번에 펴졌다. 강민의 흐린 시야에는 그 칼날들이 자신의 가슴을 열려고 벌어지는 모습만 보였다.

그 순간 마당 반대편에서 푸른 불이 솟았다.

설무진이 서 있었다. 도복은 절반 넘게 불탔고 옆구리에서 피가 끊임없이 흘렀다. 본국검(本國劍)을 양손으로 쥐자 생명을 땔감 삼은 청염(靑炎)이 올라왔다.

“그 아이의 심장에 손대지 마.”

조용한 목소리였는데도 불길 소리 사이로 또렷이 들렸다.

“사부님! 오른쪽 옆구리가—”

“알고 있다. 눈을 돌리지 마.”

이하겸이 웃었다.

“호오, 이제야 나서는군. 오래 숨겼군, 설무진. 도장 안의 낡은 검객이 아니라, 봉인의 파수꾼이었나.”

“네가 알 이름이 아니다.”

“피를 보면 이름은 알 수 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움직였다. 청염과 검은 증기가 맞부딪히자 불타던 목재가 한 방향으로 쓸려 나갔다.

“엎드려! 머리 들지 마!”

무겸이 강민을 끌어안고 엎드렸다. 굉음 속에서 흑조갑 두 갈래가 부러져 허공으로 튀었다. 이하겸이 처음으로 물러났다.

“이 노구로 얼마나 버틸 것 같냐. 청염이 네 몸부터 태우겠군.”

“타 버리기 전에 네 칼부터 꺾겠다. 네 팔이 다 부러질 때까지.”

“사부님 몸에서…… 푸른 빛줄기가 번지고 있어요.”

“힘이 아니라 손상이다. 스스로를 태워서 우리를 막고 계신 거다.”

“무겸아.”

설무진이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민이를 데리고 지하로 내려가라.”

“사부님!”

“명령이다.”

물러설 틈이 없는 목소리였다. 무겸이 이를 악물고 강민을 끌어올렸다.

“사부님, 같이 가요. 제발.”

설무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주 짧게 강민을 향해 눈을 내렸다. 꾸짖음도 후회도 없이 이상할 만큼 따뜻한 슬픔만 있었다.

“살아라.”

그 한마디에 강민은 더는 버티지 못했다. 무겸이 강민의 팔을 어깨에 걸고 물러났다. 이하겸은 바로 쫓지 않고 설무진의 가슴께를 보았다.

“심장을 옮기려는 거냐.”

설무진의 검끝이 조금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그것만으로도 이하겸은 충분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열어 보아라. 주인이 깨어나는 순간, 더 많은 자들이 이곳을 지켜볼 테니.”

“심장을 옮겨요? 사부님이요? 무슨 말이에요, 형!”

“지금은 걸어라. 뜻은 나중이다.”

회랑 뒤에서 목인 잔당 둘이 튀어나왔다.

“왼쪽!”

“알아요!”

한 놈은 무겸의 창에 목이 꺾였고, 다른 놈은 강민이 주운 쇠못에 감응부를 꿰뚫렸다. 못에 묻은 강민의 피가 푸르게 달아올랐다가 식었다.

◆

지하 통로는 의공원 뒤쪽 약재 창고에 있었다. 찢긴 벽지 아래로 황동 관과 청동 이음쇠가 드러나 있었다.

통로 입구에서 강민의 몸이 멈췄다. 무너진 흙벽 사이에 어린 피난민 소녀가 쓰러져 있었다. 낮에 서란이 나눠 준 말린 살구 한 알이 작은 손에 아직 쥐여 있었다.

“민아, 지금은—”

“잠깐만요. 이 애…… 이름이 뭐였죠?”

“……모른다.”

“저도 몰라요. 맨날 ‘강민 오라버니, 오늘도 밥 안 먹었어요?’ 하고 물었는데, 저는 한 번도 이름을 안 물었어요. 늘 바빴으니까.”

“……우리가 다시 올 수 있다면, 그때 묻자. 이름을.”

“그때는 이미 늦어요. 이 애도 저를 찾아서 온 자들 때문에…… 제 탓이잖아요.”

“네 탓이 아니다.”

강민은 무릎을 꿇었다. 식은 손가락이 살구를 놓지 않으려 굳어 있어서 억지로 당기지 않았다. 양손으로 감싸 오래 기다리자 작은 손이 아주 조금 풀렸다.

“미안해.”

스스로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였다.

“그걸 가져가는 거냐.”

“전리품이 아니에요. 이름을 제때 묻지 못한 빚이에요. 얼굴 상처는 남들이 보는 낙인이고, 이건…… 아무도 못 보는 낙인이 될 거예요.”

그는 살구를 약낭 옆에 넣었다. 멀리서 설무진의 검성과 흑조갑이 다시 부딪쳤다.

“가야 한다. 스승의 호흡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어.”

“네.”

강민은 소녀에게 고개를 숙이고 일어섰다. 상처가 벌어지는 듯 아팠지만 비명은 내지 않았다. 강민은 이제 고통을 참는 대신 기억해 두기로 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차가웠다. 위쪽은 불길로 뜨거웠지만 아래는 금속과 습기로 서늘했다. 청동 벽의 압력계는 모두 멎어 있었다.

“민아.”

무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네가 한 걸음 내려갈 때마다 바늘이 하나씩 움직인다. 첫째, 둘째, 셋째…… 다섯째까지.”

“제가 뭘 한 게 아니에요.”

“그럼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냐.”

“나도 몰라요, 형.”

정말 몰랐다. 콧등의 피가 청동 난간에 묻자 안쪽의 관이 푸르게 빛났고, 그 빛이 벽을 타고 내려가 격벽에 닿았다. 한가운데에 손바닥만 한 오목한 판이 있었다.

“저게 뭐죠?”

“모른다. 나도 처음 본다. 네 피에 반응하는 문이라는 것밖에는.”

위에서 피가 섞인 기침 소리가 들렸다. 노스승이 비틀거리며 내려오고 있었다. 검 끝의 청염이 심지 끝의 마지막 불처럼 떨렸다.

“사부님! 피가……”

“내 피가 문제가 아니다.”

강민이 달려가려 하자 설무진이 손을 들었다. 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손끝에서도 푸른 빛이 새고 있었다.

“격벽을 열어야 한다. 민아, 네 피를 거기에 대라.”

“제 피요? 왜 제 피가……”

“묻지 마. 지금은. 나중에 말하마. 말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사부님, 위에서 소리가 가까워져요!”

“그래서 서두르는 거다.”

강민은 손을 올렸다. 콧등의 피가 판 위에 떨어지자 청동이 푸른 빛을 띠었고, 지하 전체가 크게 울렸다. 사람의 심장과 기계의 심장이 같은 박자로 처음 부딪히는 소리였다.

“손이 안 떨어져요, 사부님!”

“놓지 마. 문이 네 피를 확인하는 중이다.”

“사부님, 이 문 안에는 뭐가 있어요?”

“네가 지켜야 할 것이 있다. 그리고 너를 지켜 줄 것도 있다.”

“사부님, 아프진 않아요. 근데…… 안쪽에서 누가 저를 불러요.”

“들리냐?”

“들려요. 제 심장이랑 같은 박자로요.”

“그럼 맞게 왔다. 놓지 마.”

격벽은 손바닥을 놓아주지 않았다. 상처의 고통, 소녀의 차가운 손, 스승의 피 냄새, 이하겸의 질문이 한꺼번에 밀려와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리고 닫힌 청동 문 안쪽에서, 아주 오래 잠들어 있던 또 하나의 박동이 말했다.

— 話 8 終 —